최척전(崔陟傳)
조위환(趙緯韓)
전라도 남원(南原) 땅에 한 소년이 있었으니, 이름은 최척(崔陟)이요 자는 백승(伯昇)이며 남원사람이다. 최척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서문 밖 만복사(萬福寺) 동쪽에서 아버지와 외로이 살고 있었다. 최척은 나이가 어렸지만 생각이 깊고 마음이 한없이 착하였으며 벗과 사귀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이런 충고를 하였다.
“네가 공부를 즐겨 하지 않는다면 커서 무뢰한밖에 더 되겠느냐. 도대체 너는 어떤 인물을 본받고자 하느냐. 지금 한창 난리가 일어나 고을마다 장정을 널리 뽑고 있다는 걸 너도 들어 알 게다. 그런데 너는 오직 놀기에만 힘쓰니 늙은 애비에게 근심만 끼치고 있구나. 머리를 숙이고 글을 하여 거자(擧子)의 업을 따른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할지라도 등에 화살을 지고 종군하는 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에 사는 정 상사(鄭 上舍)는 소싯적부터 친구란다. 그는 면학에 힘써 문장이 뛰어나 초학자를 가르쳐 잘 인도하니, 네가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도록 해라.”
최척은 당일로 정 상사를 찾아갔다. 그는 간곡히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래서 정 상사는 끝내 거절을 못하고 문하로 받아들였다. 그가 공부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나자 시문의 문채(文彩)나 말의 꾸밈이 날로 발전하여 물이 불어 강을 넘치는 듯하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총명하고 민첩함에 감복했다. 최척이 공부할 때마다 한 소녀가 보이곤 하였는데, 나이는 17, 8세쯤 됐을까. 눈썹은 그린 듯하고, 머릿결은 칠흑 같은데, 창가의 벽에 은밀하게 숨어서 몰래 엿듣곤 하였다. 어느 날이었다. 정 상사가 식사를 하기 위해 글방을 비워 최척 혼자서 글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창틈으로 조그만 쪽지가 들어와 최척은 이상히 여겨 그것을 주워서 펴 보았다. 그 쪽지에는 ≪시경≫에 있는 <표유매>의 마지막 장이 씌어 있었다.
떨어지는 매실 대바구니에 주워 담았네.
나를 찾는 낭군이여, 지금 말만 하세요.
그는 이 글을 읽자 마음이 마냥 들떴다.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언제 밤이 오려나 몹시 기다려졌다. 그러다가 곧 김태현의 일을 생각하면서 후회했다. 스스로 경계하였지만, 곰곰이 생각하고 있으니 적극적으로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이윽고 스승이 글방으로 나오는 기미를 알고 그는 쪽지를 소매 속에 숨겼다. 최척이 공부를 마치고 글방을 나섰는데, 문밖에 지켜 서 있던 계집종이 뒤를 따라오며,
“저,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하였다. 최척은 이미 쪽지에 적인 시를 보고 지은 사람의 마음을 읽고는 정신이 기울어지고 있던 차였다. 곧 계집종의 말을 듣고는 자못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갯짓으로 오라고 하여 집으로 데리고 가 자세하게 물으니 계집아이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 낭자(李娘子)의 시녀인 춘생(春生)이라 하옵니다. 낭자께서 저를 보내시며 낭군님께서 청하여 화답의 시를 받아 가지고 오라 하셨습니다.”
최척은 이 계집아이가 의심쩍어 물었다.
“너는 정가(鄭家)의 사람이 아니냐, 어째서 이 낭자라고 하느냐?”
춘생이 말했다.
“저의 낭자께서는 원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동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이신 이경신(李景新) 어른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 심씨(沈氏) 홀로 딸을 데리고 살고 있답니다. 이름은 옥영(玉英)이라 하옵는데, 오늘 낮 창문 너머로 시를 던져준 사람이 바로 저의 낭자이옵니다. 지난해, 난리를 피해 강화(江華)에서 배를 타고 나주 땅 화진에 머물러 있다가 올가을에 거기서 다시 여기 정 씨 댁으로 옮겨왔답니다. 이 집의 주인은 우리 마님과 친척이라 매우 잘 대해 주시지요. 낭자를 위해 혼사를 구하려고 하는데 아직 좋은 사윗감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최척이 말했다.
“너의 낭자는 과부의 딸로서 어떻게 한문을 알게 되었느냐?”
춘생이 대답했다.
“낭자에게 득영(得英)이라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문장에 능했으나,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시집도 못가고 일찍 죽었습니다. 우리 낭자는 항상 언니 곁에서 입과 귀로 글을 주워들어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척은 춘생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이어서 공경하는 말을 비유하여 답서를 썼으니 이렇다.
아침에 받은 훌륭한 글은 실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이어 청조(靑鳥)를 만나게 되어 제 기쁨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늘 창 속의 그림자에만 의지하고 그림 속의 참모습으로 바꾸기는 어려웠습니다. 금심(琴心)으로 북돋우고 상자 속의 향기는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봉산(鳳山)은 몇 겹이며, 약수(弱水)는 몇 리나 되는지 모두 잴 수 없는 것입니다. 궁리하여 일을 마련해 나가고 서로 견주어 살펴보는 사이에 이미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목덜미는 말라 버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양대(陽臺)의 비가 홀연히 꿈속에 들어오고 서왕모(西王母)의 편지가 문득 전해져, 갑자기 진진(津津)의 즐거움을 이루고 월하노인(月下老人)의 끈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제 삼생(三生)의 소원이 거의 다 이루어졌으니, 동혈지맹(同穴之盟)을 번복하지 마십시오. 글로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데, 말인들 어떻게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옥영은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 그래서 다음날 또 답장을 써서 춘생에게 주었는데, 그 글은 이렇다.
저는 깊은 규방에서 생장하였기에 거칠게나마 깨끗한 행실을 알고 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부친을 여의고, 정유년 난리에 지금껏 형제도 없이 혼자서 홀어머니를 모셨습니다. 이리저리 떠돌다 남쪽 땅까지 이르러 임시로 친척집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나이는 이미 시집갈 때가 되었으나 아직 받들어 공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 것이 늘 한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전쟁 속에 던져졌으니 도적이 횡횡하여 주옥같은 마음이 깨트러지기 쉽고, 강포(强暴)한 무리에게 더럽혀지지 않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또 이 때문에 늙으신 어머님께는 근심을 끼치고, 제 스스로도 몸을 보전하기가 어려워 슬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라(絲蘿)가 반드시 교목(喬木)에 의탁하듯이 여자의 백년고락(百年苦樂)은 실로 남자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교목처럼 훌륭한 남자가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바라서 끝내 몸을 맡기겠습니까?
가까운 곳에서 낭군을 뵈오니, 말씀이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며, 성실하고 진솔한 빛이 있으며 호탕한 기품이 얼굴에 넘쳐흘렀습니다. 만약 제가 어진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면 낭군 외에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용렬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부자의 첩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운수가 박하고, 기구하기에 마땅한 신랑감에게 시집을 가지 못할까 두렵기만 합니다.
어제 제가 시를 던진 것은 실로 저의 음란함을 깨우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낭군을 굽어보고 우러러 보는 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비록 용모는 없으나 원래 사족(士族)으로서 애초에 저자에서 노니는 무리가 아닌데, 어떻게 담벼락에 구멍을 뚫고 몰래 만날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부모님께 아뢰어 마침내 예에 따라 혼례를 치른다면, 정절을 믿고 행동이나 말을 스스로 조심하고 지키어 부부의 도를 다하여 낭군님을 공경하고자 합니다. 이미 먼저 시를 던져 스스로 중매하는 추태를 범했고 사사로이 편지를 주고받아 그윽하고 바른 덕을 크게 잃어버리긴 했으나 이제 간담상조하듯 서로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으니, 다시는 함부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제 부터는 반드시 매파를 두어 제가 행로(行路)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주신다면 천만 다행입니다.
최척은 편지를 읽고 매우 기뻐하면서 아버지에게 청하였다.
“들어보니, 과부 심씨가 서울에서 내려와 정가의 집에 산다고 합니다. 딸이 한명 있는데, 나이가 스무 살 안팎이랍니다. 대인께서 진심으로 못난 저를 위하여 상사에게 구혼을 해주십시오. 서두르지 않으시면 발 빠른 자가 얻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말하였다.
“그들은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화족(華族)으로 천리 타향 떠돌아 몸을 의탁하고 있기에 반드시 부유한 자를 구하려는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은 본디 가난하니 저들이 들어주지 않을 것 같구나.”
최척은 거듭 아버지께 말씀을 올렸다.
“먼저 가서 말씀해 보십시오, 성사 여부야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가 가서 물어보니 정 상사가 말했다.
“나에게 표매(表妹)가 와 있긴 하다네. 서울에서 난을 피해 내 집에 와 있네. 그 딸은 재색과 행실이 아주 뛰어나 내가 신랑감을 널리 구하고 있는 중일세, 자네 아들의 재주가 뛰어나고 또한 준수하니 동생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으나 집안이 가난한 것이 한일세 그려. 그러나 한번 누이와 상의해 다음에 알려 줌세.”
최공이 돌아와 아들에게 말했다.
최척은 초초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정 상사는 최공을 보낸 다음 안으로 들어가 심 씨와 상의하였다. 그녀는 어려워하며 말하였다.
“제가 집을 버리고 피난을 나와 외롭고 위태로워도 의탁할 곳이 없어요. 다만 딸 하나밖에 없으니 부잣집으로 출가시키기를 원해요. 가난한 집의 아들은 비록 그 마음이 어질다 하더라고 원치 않아요.”
그날 밤 옥영이 어머니에게 가서 궁싯거리면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달싹거리니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나에게 숨기지 마라.”
옥영은 이 말을 듣고 얼굴을 붉혔으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머님이 사윗감을 고르시는 데 부잣집만 바라고 있으니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님의 그 뜻을 저인들 어찌 모르겠어요. 부잣집인 데다 사윗감이 어질다면 다행이지만 생활은 부유하더라도 남편이 변변치 못하다면 그 넉넉한 살림을 관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한데 제가 그를 남편으로 섬긴다면, 비록 양식이 있다고 한들 그가 우리는 평생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집안이 부자라 하더라도 남편 될 사람이 어질지 못하다 하오면 그런 집으로는 시집을 가지 않겠어요.”
“너 그게 무슨 당돌한 소리냐?”
“당돌한 말이 아니옵고 제 의견을 말했을 뿐이어요. 제가 최랑을 은밀히 엿보니, 아저씨 댁의 와 공부를 하는 것이 충직, 순후(淳厚)하고 튼실합니다. 결코 경박한 탕자는 아닌가 합니다. 그런 분을 남편으로 섬긴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어요. 더구나 가난한 것은 선비로서 떳떳한 길이 아니옵니까? 저는 불의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은 원치 아니합니다. 부디 그 댁으로 혼사를 정해 주시어요. 이런 말은 처녀로서 드릴 말씀이 아닌 줄 아옵니다만 혼사는 일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일이옵니다. 어떻게 처자의 부끄러움 때문에 용렬한 사내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그르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깨어진 시루는 다시 완전하게 되기 어려우며, 물을 들인 실은 다시 희게 할 수 없습니다. 훌쩍이면서 운들 서제막급(噬臍莫及)일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이 몸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집에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왜적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진실로 충성과 신의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모두 두 모녀의 몸을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안씨가 혼인을 청한 것을 좇고서 매가 낭군을 스스로 선택한 것을 꺼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의 속마음을 숨긴 채 단지 중매를 서 주기만을 바라며 서로 잊어야만 하는 곳에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겠습니까?
옥영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정공에게 말했다.
“제가 지난밤 동안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최랑은 비록 가난하지만 훌륭한 선비인 것 같습니다. 부귀는 하늘에 달린 것,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출가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잘 아는 처지인 이 사람을 사위를 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누이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 반드시 성사시켜 줌세. 최랑은 가난하다고 사람됨이 옥과 같네. 비록 성루 넓은 바닥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그만한 사람은 드물지, 앞으로 학업에 뜻을 둔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는 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게.”
그날로 매파(媒婆)를 보냈다. 사주(四柱)를 써 약혼하였다. 9월 보름날로 혼인날까지 받아 두었다. 최척은 너무 기뻐 혼인날이 어서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마음 태우고 있었다
얼마 동안의 세월이 흘러 남원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은 참봉(參奉)을 지냈던 변사정(邊士貞)이 의병을 모집하여 영남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최척은 활을 잘 쏠 뿐만 아니라 말 타는 재주가 비상하다 하여 의병으로 뽑혔다. 최척은 진중에서 옥영에 대한 근심걱정으로 병이 들었다. 결혼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자, 의병장에게 글을 올려 휴가를 청하니 의병장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이 때가 어느 때라고 감히 혼사를 치르려 하는가? 상감께서도 난리를 당하셔서 풀밭, 진흙 속에서 갖은 고생을 다하고 계신데,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총칼을 들어 적을 무찔러 창을 베고 잘 겨를도 없어야 함이 옳은 일이 아닌가? 결혼할 나이지만, 왜적을 격파하고 난 연후에 장가들어도 늦지 않을 것이니, 앞으로는 내색도 하지 말라.”
이렇듯 엄하게 책망하며 끝내 허락해주지 않았다.
최척이 종군하여 돌아오지 않자, 옥영은 혼인날을 하릴없이 보냈다. 그녀는 하루하루 수심속에서 밥을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며 지내고 있었다.
옥영의 이수에 양성(梁姓)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 자는 옥영의 아름다운 미모에 착한 마음시를 알고 있었고 최척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약혼자인 최척이 출정하여 돌아오지 않음을 틈타 구혼을 하였다. 몰래 보화를 정가로 들여보내니 정가의 아내는 마침내 날마다 혼인을 성사시키라고 말했다.
“최랑이라는 자는 빈곤하기 그지없나이다. 날이면 날마다 끼니를 걱정하니 부친 봉양하기에도 어렵습니다. 그런 처지에 아내를 얻는다면, 어떻게 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어그러짐이 없도록 하겠소? 더구나 최랑이란 자는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그 생사를 알 수 없지 않은가요. 그러나 양씨는 원래부터 재물이 많기로 소문이 났으며, 그의 아들 또한 어질어 최랑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정공 부부가 말을 합하여 번갈아 가며 권하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격으로,심 씨는 유혹에 넘어가 끝내 승낙을 하고 말았다. 10월로 날짜를 잡아 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하니, 견고하여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옥영은 이를 알고 그날 밤 어머니에게 울면서 호소하였다.
“최랑이 오지 못한 것은 그 몸이 의병장에게 매인 때문입니다. 고의로 약속을 저버린 것이 아니온데, 최랑을 기다리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언약을 저버리시니 이치에 어긋남이 너무 심합니다. 만약 저의 뜻을 꺾고자 하신 다면 저는 죽어서라도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늘이시거든 이처럼 사람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어찌 제 고집만 부리느냐, 응당 부모 있는 자식이라면 부모의 처분만 기다려야 할 뿐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무엇을 안다는 것이냐, 어서 잠이나 자거라.”
밤이 깊었다 심씨는 잠결에 이상한 숨소리를 들었다. 놀라 깨어나 딸이 자던 자리를 어루만져 보니 옆에 누워 자던 딸이 없었다. 당황하여 급히 찾아보니 옥영이 비단수건으로 목을 매고 창바람벽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이미 손발은 모두 차게 식었고 가느다란 숨소리만 가쁘게 들렸다 이것마저 점점 희미해지더니 뚝 끊어지고 말았다. 심 씨는 통곡하며 목에 맨 수건을 풀었다. 춘생이 깨어나서 불을 밝히고는 주저앉아 부둥켜 앉고 통곡하며 입을 벌리고 물 몇 모금을 흐려 넣어 주었다. 이윽고 가느다란 숨결이 되살아났다. 온 집안이 놀라 달려와 병구완을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양가와의 혼사문제는 입에 담지도 않았다. 발 없는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다. 최숙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 모든 사실을 아들에게 알렸다. 그 무렵, 최척은 병으로 몸져누워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서신을 읽고 충격을 받아 병세가 심해졌다.
의병장은 이를 듣고 명을 내려 집에 보내 주었다. 최척이 집으로 돌아온 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그렇게 위독하던 병세도 씻은 듯이 나았다. 마침내 11월1일 정 상사의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두 사람의 기쁨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최척은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들어서기도 전에 종들이 기쁘게 맞이하였고 대청에 오르자 친척들이 몰려와 칭찬하고 축하하여 집안에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이들을 기리는 소리가 사방의 이웃으로 퍼져나갔다.
옥영은 시집온 지 3일도 채 안되어 시집 일을 열심히 했다. 옥영은 소매를 걷어 붙이고 몸소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였으며 지성으로 시아버지를 봉양했고 남편을 정성스레 섬겼다. 윗사람들을 공손히 받들었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극히 자상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고는 양홍(梁鴻)의 아내며 포선(鮑宣)의 부인도 이보다는 못했을 것이라고들 하였다.
최척은 옥영을 아내로 맞이한 후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사람과 혼인을 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살림도 나날이 넉넉해져갔다. 그러나 최척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 자식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매달 초하루가 되면 부부동반해서 만복사로 올라가 기도를 드렸다.
이듬해는 갑오년이었다. 이 해도 정월 초하루에 만복사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그날 밤이었다. 부인의 꿈속에 장육금신(丈六金身)이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내가 그대들의 지극한 정성에 크게 감동되었도다. 그래서 기남자(奇男子)를 점지해 줄 것이니 이후 부인의 몸에는 태기가 있을 것이로다.”
과연 그날부터 태기가 있었다. 만삭이 되어 순산하니 아들이었다. 등에는 손바닥만한 붉은 점이 있었다. 이름을 몽석(夢釋)이라 지었다. 최척은 피리를 잘 불었다. 그는 달밝은 밤이나 꽃피는 아침나절에 피리를 불었다.
어느 늦은 봄 맑은 밤이 거의 반이나 지나갈 무렵이었다. 미풍이 살랑거리고 밝은 달은 빛을 더해 현란하게 비쳤다. 바람에 나는 꽃잎은 옷에 나 앉았고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다. 최척과 옥영은 술독을 열고 빚어 놓은 술을 퍼 잔 가득히 퍼 마신 후 상에 기댄 채 피리를 불었다. 그 피리 소리는 간드러지게 울려 퍼져 멀리까지 번졌다.
옥영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윽고
“첩은 오래전부터 아녀자들이 시를 읊은 것을 못마땅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정경에 이르러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척이 말했다
“어디 부인이 한 수 읊어보오.”
옥영은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왕자진(王子晉)이 피리를 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 하네.
푸른 하늘은 바다와 같고 이슬은 차기만 한데
푸른 난조함께 타고 날아올랐지만
봉래산 가는 길을 안개와 놀에 싸여 찾을 수가 없네.
최척은 아내가 이렇게 시문에 재주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가 부인이 읊은 시를 듣고 크게 놀랐다. 시문을 한 번 읽고 여러 번 감탄하고는 즉시 화답의 시를 읊었다.
요대(瑤臺)는 멀고도 아득한데, 새벽 구름은 붉게 물들어
난소를 부니 굽이치는 곡조 아직 끊이지 않네
남은 피리 소리 공산을 채우니 달이 떨어지고
뜰에 가득한 꽃 그림자 향기로운 바람에 흔들리네
읊기를 마치자 옥영은 몹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생기는 것을 알기에 남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초연히 말하였다.
“세상살이에는 불의의 변고가 많사옵니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마가 끼어들게 마련이고 헤어지고 만남이 무상할 것이오니, 마음이 슬러집니다.”
최척은 부인의 눈물을 소매로 닦아주며 위로하였다.
“굴신(屈伸)과 영허(盈虛)는 천도(天道)의 상리(常理)요. 길흉과 회린(悔吝)은 사람이 사는 동안 당연히 겪게 되는 일이요, 설혹 불행히 타고 난 우명을 맞이하더라도 어찌 슬픔에 빠져야만 하겠소, 그러니 너무 슬퍼하고 근심하지 마오, 옛사람이 말하되 ‘길한 말만 하고 흉한 말은 하지 말라.’ 는 속담이 있듯이 부질없는 마음을 써 이 즐거운 마음을 상하지 마오.”
이로부터 부부의 사랑은 나날이 깊어 갔다. 이들 부부는 지음(知音)이라고 부르면서 하루도 떨어져 있는 일이 없었다.
정유년(1597) 8월이었다. 왜적이 남원 고을로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켰다. 사람들은 뿔불히 흩어져 산 속으로 피난하였다. 최척의 가솔은 지리산(智異山) 연곡(燕谷) 깊숙이 피란하였다. 최척은 옥영에게 남장을 하라고 일렀다. 남복을 입으니 아무도 여자인 줄 짐작 못하였다.
산속으로 피란 온지 여러 날이 지나자 이미 가져온 양식이 떨어져 식솔이 굶주렸다. 최척은 장정 서너 명과 함께 양식을 구하고 왜적의 형세 살펴볼 겸 산속을 내려왔다. 양식을 구하는 길에 적세(敵勢)를 살피면서 구례(求禮)까지 갔었다. 가다가 갑자기 적병을 만나게 되어 바위틈에 숨었다.
이날, 왜적들은 곧장 지리산 연곡으로 쳐들어가 아무것도 계곡에 남기지 않고 약탈해 갔다. 최척은 길이 막혀 거동을 할 수 없었다. 사흘이 지나고 나서야 적병이 물러간 다음에 연곡으로 급히 달려갔다. 시체가 쌓여 길에 가로 놓여 있었고 피가 내를 이루었다. 혈안이 되어 식솔을 찾는 그때였다. 숲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곳으로 찾아갔다. 그곳에는 노약한 몇 사람이 온몸에 상처를 입고서 최척을 보고 통곡하며 말하였다.
“적병이 이곳으로 쳐들어 왔네. 재화를 약탈하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였지, 젊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끌고 어제 겨우 섬강(蟾江)으로 물러나서 진을 쳤어, 가족들을 찾고 싶으면 물가에 가서 물어보게.”
최척은 하늘을 우러러 대성통곡하고 땅을 치며 피를 토하였다. 이윽고 그는 섬강으로 달려갔다. 얼마 못 가서 흩어진 시체 속에서 신음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가서 보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뻘건 피가 온 얼굴을 감싸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을 살펴보니 춘생이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해 크게 소리쳐 불렀다.
“네가 혹 춘생이 아니냐?”
춘생은 젖먹던 힘까지 내어 눈을 뜨고는 기어드는 소리로 간신히 말하였다. 그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오 서방님! 가족들이 모두 적병에 잡혀갔어요, 저는 몽석이를 업었는데 빨리 달릴 수 없어 적병이 칼로 찌르고는 갔답니다. 칼맞은 지 한나절 만에 겨우 사,살아났으나 드,등에 업힌 아기의 생사를 아, 알....”
말을 다하지 못하고, 숨이 넘어갔다. 최척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발로는 땅을 차면서 통곡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얼마가 지나 정신이 들었다. 또 기운을 차려 섬강으로 달려갔다. 섬강으로 가보니, 강둑에는 칼 맞은 시체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자세히 살려보니, 연곡으로 피난 왔던 사람들이었다. 물어보니, 노인들이 말했다.
“우리들은 산속에 숨어 있다가 왜적에게 여기까지 끌려왔다네, 왜적들은 배가 있는곳까지 오자 남정네만 가려 싣고 칼에 병이 들거나 늙어서 쇠약한 사람들은 이렇게 버렸네.”
최척은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었다. 그는 실성하여 통곡하며 시체 속을 누볐다. 그는 마침내 자살하려고 강가로 갔다.
막 물로 뛰어들려는 찰나. 어떤 사람이 옷을 잡으며 말리는 것이었다.
“이 난리 통에 당신 같은 이가 한 사람뿐인가? 그럴수록 용기백배해야지.”
그래서 죽지도 못하고 식솔을 찾아 강둑을 사흘이나 밤낮으로 찾아 헤맸으나 허사였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옛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적화(賊火)에 다 타버렸다. 무너진 담장과 깨진 기왓장만이 흩어져 있었다. 한 곳엔 피난가지 못하고 적병에게 붙들려 죽은 사람의 뼈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발을 옮겨 놓을 만한 틈새가 없었다. 최척은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금교(金橋) 밑을 헤매고 다녔다. 마침내는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어느 날이었다 홀연히 명나라 장수가 수십 기를 이끌고 성에서 나와 금교 밑에 와서 말을 씻기고 있었다. 최척은 의병으로 출전했을 때 명나라 병사를 응접하여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명나라 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명장에게 온 집안이 해침을 당한 이야기와 자기 몸을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는 명나라로 들어가 오래도록 살고 싶다고 계획을 말했다. 당나라 장수는 그의 말을 듣자 측은히 여겼고, 그 뜻을 동정하여 말하였다.
“나는 오나라의 총병(摠兵)의 우두머리인 여유문(余有文)이오, 내 집은 절강(浙江) 요흥부(姚興府)에 있는데 비록 가난하지만 먹고 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 마음껏 즐기면 멀고 가까운 것을 논할 것은 못된다오, 당신은 이미 집안 생활에 관한 걱정도 없을 것인데, 왜 꼭 한 가지 방책만 고집하여 두려워하며 갈 곳을 몰라 하는 거요?”
그리고는 말 한 필을 내주어 함께 명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 최척은 용모가 준수하였다. 헤아리고 생각함이 또한 깊었다. 그리고 궁마(弓馬)에 능숙할 뿐만 아니라 틈틈이 학문도 익혔다. 그래서 여공이 지극히 생각해 주었다. 막사에서 식사도 같이 하였고 잠자리에도 함께 들었다. 얼마 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최척도 전사자들이 관한 장부를 담당하는 임무를 맡아 국경의 관문을 통과하여 요흥부로 가서 살게 되었다.
처음에 최척의 마을에 왜적이 습격하였을 때였다. 최척의 가족들은 포로가 되어 강까지 끌려왔는데 최공과 심 씨가 늙고 병이 들었기에 적병들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하였다. 두 사람은 적들이 방심한 기회를 노려 몰래 갈대숲으로 달아나 숨었다. 적병이 물러가자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로 걸식하며 다니다가 연곡사(燕谷寺)에 발길이 닿았다. 그 때 승방에서 아기의 울음 소리가 났다. 심씨가 최공을 보면서 말하였다.
“누구의 아이인지는 모르나 꼭 손자의 울음소리와 같군요,”
그래서 최공이 문을 열고 살펴보니 바로 몽석이었다. 달려 들어가 어루만지며 통곡하였다. 얼마쯤 아기를 돌보다가 옆에 있는 스님에게 물었다.
“이 아이를 어디서 어떻게 데려왔습니까?”
혜정이란 스님이 대답하였다
“길을 가다가 길옆에 쌓여 있는 시체 속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겨 데려왔습니다. 지금 아기의 부모를 기다리고 있는 중인데 지금 보니 과연 옳았습니다. 어떻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습니까?”
최공은 손자를 번갈아 가면서 데리고 불타 버린 집으로 돌아와 흩어졌던 비복들을 불러들이고 집안일을 돌보면서 살았다.
이때, 옥영은 선주(船主) 돈우((頓于)에게 붙잡혔다. 돈우라는 늙은 사내는 본래 살생을 좋아하지 않고 부처님을 섬겨 자비로웠으며 장사를 생업으로 하였는데, 노를 잘 저었기 때문에 그래서 왜장 소서행장이 뱃사공의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돈우는 옥영이 재빠르고 재치있는 것을 아껴주었다. 오직 달아날까 걱정하여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을 주어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안정시켰다. 그렇게 하면 도망치지 않으려니 여겼다. 옥영은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려는 직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배를 내어 도망치려 했으나 감시가 심해 들키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옥영은 웅크리고 있다가 선잠이 들었다. 꿈결에 장육금불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몸가짐을 조심히 하여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옥영은 깨어나 그 꿈을 곰곰이 헤아려보고 만분의 일이라도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처님을 굳게 믿어 후일이 있을 것을 기약하고는 자살하려는 뜻을 굽혔다. 돈우의 집은 나고야에 있었는데 늙은 아내와 어린 딸이 하나 있을 뿐 아들이 없었다. 돈우는 옥영을 집에만 있게 했고 출입을 못하게 하였다. 옥영은 속이며 말하였다.
“저는 본래 남자다운 점이 조금도 없고 몸이 작은데다 약골이라 병이 잦습니다. 본국에 있을 때도 장정으로 안 뽑혀 출전도 못했습니다. 단지 바느질과 밥짓는 것만 배워 다른 일은 전혀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돈우는 더욱 가련히 여기고 이름을 사우라고 불렀다. 배를 타고 다님 장사를 할 때마다 옥영을 배에 두고는 밥을 짓게 하여 민절(閩浙)의 사이를 왕래하게 되었다.
이때, 최척은 요흥부에 살면서 여공과 함께 형제의 의를 맺고 있었다. 여공은 매부를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척은 완고하게 사양하였다.
“나는 집을 적화에 잃고 또한 늙으신 아버지와 허약한 아내, 자식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껏 발상(發喪)이나 복상(服喪)도 끝내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어찌 마음을 놓고 아내를 얻어 평안한 생활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뚝 잘라 거절했다. 이후 여공은 두 번 다시 권유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이었다. 여공은 마침내 병들어 죽고 말았다. 최척은 더 이상 의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처없이 방랑의 길로 들어서 각지의 명승고적을 찾아다녔다. 소상강(瀟湘江), 동정호(洞庭湖),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 등을 돌아보며 시를 지어 읊었다. 그는 어느새 이렇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한세상을 보내겠다는 뜻을 굳혔다. 그러다가 해섬도사(海蟾道士), 왕용(王用)이라는 사람이 청성산(靑城山)에 은거하며 황금연단(黃金煉丹)을 복용하여 백일만에 승천하는 도술을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장차 촉땅으로 들어가 도사를 찾아서 배우기를 청하리라 마음먹었다.
때마침 송우(宋佑)란 사람을 만났는데 호는 학천(鶴川)이라고 했다. 그 집은 항주 용금문 밖에 있었고, 경전과 사서에 두루 통했으나 공명에는 뜻을 두기 않았다. 그의 저서(著書)로 생업을 삼았으며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의로운 기운이 있었다. 최척은 이 사람과 사귀어 지기(知己)가 되었다. 송공은 최척이 촉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술을 마련해서 찾아왔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얼근히 취한 후였다. 송공이 최척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승, 이 사람아!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누군들 오래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이치는 고금을 통하여 없을 뿐만 아니라, 여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단약을 먹기 위하여 굶주림을 참는가 그래 자신을 괴롭혀 귀신과 더불어 벗하려고 그러는가? 자네는 그러지 말고 나를 따라 배를 타세, 오땅과 월땅을 다니면서 비단이나 팔고 차나 팔면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며, 이 또한 달인(達人)의 일이 아니겠는가?”
최척은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송우를 따라 항주로 갔다. 그해는 경자년(1600) 봄이었다. 최척은 송우와 함께 상선을 타고 안남(安南)을 왕래하였다. 이 항구에는 왜선 10여척이 열흘전부터 정박하고 있었다. 때는 4월이라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개었다. 물빛은 비단같이 아름다웠고, 배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잠이 들어 코고는 소리만 높은데 이따금 물새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이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최척은 홀로 선창에 기댄 채 신세타령을 하였다. 모든 것을 잊으려는 듯 품속에서 퉁소를 꺼내어 계면조(界面調) 한 곡을 불면서 가슴 속에 맺힌 애원(哀怨)한 정을 품고 있었다. 이 피리 소리에 하늘마저 근심스런 빛을 띤 듯하였고, 구름과 연기조차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배 안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도 놀라 깨어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슬픈 낯빛을 지었다.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왜선에서 염불하는 소리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염불소리 대신에 조선어로 절구를 한 수 읊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진이 피리를 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 하네.
푸른 하늘은 바다와 같고 이슬은 차기만 한데,
푸른 난조 함께 타고 날아올랐지만
봉래산 가는 길은 안개와 놀에 사여 찾을 수가 없네.
읊기를 다하자 한숨을 휴 내쉬는 것이었다. 최척은 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너무도 뜻밖이어서 들었던 퉁소마저 떨어뜨렸다. 넋을 잃은 듯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송공이 이상히 여겨 큰소리로 물었다.
“자네 왜 그러는가? 왜 그래?”하고 거듭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연해 큰소리로 묻자, 최척은 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목이 막혔다. 퉁소를 주어들다가는 다시 떨어뜨렸다. 얼마가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앉으며 말하였다.
“저 시는 내 아내가 지은 시요, 둘만이 알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오, 더욱이 시 읊는 소리가 아내와 흡사하니 어찌 놀라지 않겠소, 그러니 어찌 내 아내가 여기까지 와서 저 배를 타고 있을 수 있겠는가? 도저히 그럴 리 없지.”
그리고는 왜적의 습격을 당하여 가족들이 흩어진 내력을 들려주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그 속에 두홍(杜洪)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가 젊고 용맹한 사내였다. 그는 최척의 말을 듣자 의기를 나타내 주먹으로 뱃전을 쳤다. 분연(奮然)히 일어서며,
“내가 당장 가서 찾아보겠소.”
하며 급히 서둘렀다. 그러나 송공이 만류하며,
“깊은 밤에 일을 꾸몄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두렵네, 내일 아침에 정중히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네.” 하니 모두들 찬성하였다.
그날 밤 최척은 잠 한숨 자지 못하였다. 아침을 기다리며 뜬 눈으로 날을 밝혔다. 이윽고 동쪽하늘이 밝아왔다. 그는 조금도 지체할 수 없어 조선에로 크게 외쳤다.
“어젯밤 시를 읊은 사람은 틀림없이 조선인일거요, 나도 조선인이오, 이머나먼 안남까지 와서 고국사람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이 또한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옥영도 어젯밤 배안에서 퉁소소리를 들었었다. 그것은 조선의 곡조요, 또한 옛날에 귀에 익었던 소리였다. 그래서 남편이 그 배에 와 있지 않나 해서 시를 시험 삼아 읊었던 것이었다.
이때 남편이 자기를 찾는 말을 듣자, 옥영은 황망하여 엎어지고 넘어질듯 급히 난간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고, 소리치면서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너무나 감격해 가슴이 막히고 심정이 격하여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다.
이 극적인 광경을 보느라고 양국의 뱃사람들이 담장처럼 늘어섰다. 그들은 처음에 친척이나 친구인 줄로만 알다가 급기야 부부 사이라는 것을 듣고는 서로 쳐다보며 큰 소리로
“이상하고도 기이하도다. 이것은 하늘이 돕고 귀신이 도왔도다. 일찍이 이런 일은 보지 못했는데 정말 기쁜 일이로다.”
하며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최척은 집안 소식을 물었다. 옥영은,
“그때 저희들은 산중에서 도망하여 강가로 나왔어요, 시아버님과 어머님은 그때까지 무사했어요, 날은 저물고 창황(?怳) 중에 배를 타느라고 그만 서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두 사람은 또 한 번 통곡하니, 이 정경을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학천이 돈우에게 청하여 백금 세 덩이를 주며 옥영을 사겠다고 나니 돈우가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내가 이 사람을 얻은 지 4년이나 흘렸습니다. 그 단정한 거동을 사랑하여 친자식같이 사랑했고, 침식도 함께 하며 잠시도 서로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부인인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이제 이런 해후를 보고 하늘과 귀신마저 감동하거늘, 내 비록 완고하고 미련하나 어찌 목석과 같으리오. 어찌 값을 받아 팔 수 있겠소이까.”
그리고 주머니에서 은자 열 냥을 꺼내어 옥영에게 주며 말하였다.
“4년 동안이나 함께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슬픈 심정을 참을 수 없구려 잃었던 남편을 만 리 바다 밖에서 다시 만난 것은 이 세상에 일찍이 없었던 일이오, 내가 만일 그대를 막는다면 하늘이 나를 벌할 것이오, 부인은 남편에게 돌아가 부디 몸조심하고 행복하게 사시오, 몸조심하게! 몸조심해.”
옥영은 왜인의 손을 잡고, 감사를 드리며 말했다.
“주인 영감님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서 남편을 만났으니, 그 베푼 은혜가 이미 깊사옵니다. 더욱이 이렇게 많은 돈까지 주시니 어떻게 보답할 길을 모르겠사옵니다.”
최척도 두 번 세 번 고마움을 표하고는 옥영의 손을 잡고 배로 돌아왔다. 이웃 배에서 모두들 찾아와 채단(綵緞)과 금은을 주며 축하하였다. 최척은 모두 받고서 깊이 사례했다. 송공은 최척의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집 한 칸을 마련해 주며 평안하게 살게 하였다.
최척은 난 중에 잃었던 아내를 찾아 한시름 놓았다. 그러나 만 리 타국이라 의탁할 곳이 없었으며, 사방을 돌아봐도 친척하나 없었다. 더욱이 늙은 아버지와 어린 자식의 생사를 생각하여 밤낮으로 상심하였다. 근심 걱정이 끊어질 날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만 기원하였다
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옥영은 또 아들을 낳았다. 해산을 하던 날 장육금불이 꿈에 나타사서
“아기를 낳으면 이번에도 등에 붉은 점이 있으리라.”
하고 계시하였다. 과연 아기의 등에는 큼직한 붉은 점이 있었다. 부부는 몽석이가 다시 태어난 듯이 여겨 몽선(夢仙)이라 이름 지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염원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만 갔다. 몽선이도 점점 자랐다. 장성하여 현숙한 부인을 구할 만큼 세월이 흘렀다. 이웃에 진가(陣家)의 딸이 살고 있었다. 이름을 홍도(紅桃)라고 하였다. 돌이 되기도 전에 홍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진위경(陳偉慶)은 유총병(劉摠兵)을 따라 조선으로 출전한 뒤 소식이 없었다. 홍도가 다 자라기도 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이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이역에서 전사하였음을 알고 몹시 가슴 아파하였다, 얼굴도 모르는 채 아버지를 잃어 더욱 상심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한번이라도 부친이 돌아가신 나라에 가서 다시 넋을 불러 원한을 풀어 드리려는 것을 잊지 못해 오래도록 맺힌 한을 품고 가슴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아녀자의 몸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였다. 마침, 조선사람 몽선이 아내를 얻으려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모에게 중매를 부탁했다.
“저는 최가의 아내가 되어 한번 동국(東國)으로 가기를 원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모는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 난 터에 곧 최척을 찾아가 찾아온 내력을 이야기하였다. 최척 부부는
“여자로서 그 뜻이 그와 같으니 매우 가상한 일입니다.”
하며 마침내 홍도를 며느리로 맞이하였다.
며느리를 맞이한 이듬해, 기미년(1691)에 오랑캐 우두머리가 군사를 몰아 요양(療陽)으로 쳐들어왔다. 여러 진영이 함락되고 많은 장졸들이 죽었다. 요양이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는 대로하였다. 그래서 천하의 병마를 동원하여 이를 평정하려 하였다.
소주(蘇州)에 사는 오세영(吳世英)은 유격백총(遊擊百摠)이 되어 출전하였다. 그는 최척의 재용(材勇)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서기를 삼아 진중으로 뽑아 가려고 했다.
출전하는 날이었다. 떠나려고 하니 옥영이 떠나는 남편의 손목을 잡고 작별하며 말하였다.
“첩이 박명하여 일찍이 난리를 만나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하늘이 도와 낭군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래서 끊어진 거문고 줄을 잇고 깨진 거울을 원상태로 해 새로운 인연을 맺었사옵니다. 다행히 저를 의탁할 아들까지 얻어 즐겁게 함께 산 것이 24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이나 눈물짓다가 다시 말했다.
“옛일을 생각해보니, 이제 죽어도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제가 먼저 갑자기 죽어 낭군의 은혜에 보답하여 하였는데, 뜻하지 않게도 늙어 또 삼상(參商)의 이별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제 요양과 거리가 수만 리가 되고, 살아 돌아오기 어려우니 훗날 다시 만날 기약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죄를 대신할 수없는 이 몸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자결하여 한 편으로는 낭군께서 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고, 한편으로는 밤낮으로 괴로워할 제 근심을 면하려고 합니다. 낭군과 천만번 영원히 이별합니다.”
말을 마치자, 통곡하고는 칼을 꺼내어 목을 찌르려 하였다. 최척은 황급히 칼을 뺏으며 말하였다.
“하찮은 오랑캐 무리가 감히 매미가 팔을 걷어붙이고 항거하듯 하기에 왕의 군대가 쓸어버리려 가는 것이니 계란을 깨는 것과 똑같소,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갔다 오는 것은 다만 세월을 허비하고 근고를 겪는 일일뿐이오, 이와 같이 망령되게 번뇌만 하지 말고, 내가 성공하고 돌아와 술잔을 기울여 서로 축하할 날이나 기다리시오, 하물며 몽선이도 건장해서 얼마든지 의탁할 수 있지 않소, 노력하면 넉넉히 밥 먹을 만하니 길 떠나는데 근심을 주지 마오.”
드디어 행장을 수습하여 요양으로 떠나갔다.
요양에 이르러 오랑캐 땅 수백 리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명군은 조선군마와 함께 중모채(中毛寨)에 진을 쳤다. 하지만 장수가 적을 가볍게 보고 싸우다가 전군이 대패하였다. 오랑캐들은 명군을 닥치는 대로 죽였지만 조선병사들은 유혹하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한 명도 살상하지 않았다. 오유격은 패졸(敗卒) 10여명을 이끌고 조선 군영으로 들어가 의복을 구걸하였다. 조선의 원수(元帥) 강홍립(姜弘立)은 그들에게 옷을 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려 하였으나 종사관 이민환이 적을 몹시 두려워하여 의복을 빼앗고 잡아서 적진으로 보냈다. 그러나 최척은 본래 조선인이었기에 어지러운 틈을 타 몰래 행렬을 빠져나와 죽음을 면했다.
종사관 이민연(李民宴)은 적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래서 오랑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강원수의 진지를 염탐해서 적에게 고자질했다. 오랑캐가 일시에 쳐들어왔다. 강홍립의 군사는 적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다. 이때 살아남은 명군은 오랑캐에게 사로잡혔고, 최척도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조선인의 포로 중에는 몽석이도 끼여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무술을 익히다 종군했다. 바로 강원수의 진중에 있었다. 오랑캐들이 장졸을 나눌 때 최척은 몽석과 함께 한 곳에 갇히게 되었다. 부자가 상봉하였으나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몽석은 최척이 말을 더듬거리는 것을 보고 중국 군사중에 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인 행세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향을 물어 보았다. 그러나 최척은 오랑캐의 밀정이 아닌가 해서 속여서 말을 이리저리 돌려 혹은 전라도라 하고 혹은 충청도라 하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몽석은 이에 더욱 의심이 들었으나 그 심중을 헤아릴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난 후, 서로 친숙해지고 정이 깊어갔다. 침식도 같이 하고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처지가 되니, 서로 숨김없는 허심탄회한 사이가 되었다. 최척은 평생 겪은 사연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몽석은 얼굴빛이 여러 번 변했다. 마음이 마냥 떨렸다.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았고 한편으로는 너무 놀라 반신반의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잃었던 아들의 나이가 몇이며, 신체에는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 생각나십니까?”
최척은 웬일인가고 이상히 여기며 대답했다.
“갑오년(1594) 10월에 나서 정유년(1597) 8월에 잃었다오, 등에는 붉은 점이 있는데, 어린아이 손바닥만 하오,”
이 말을 들은 몽석은 넋을 잃고 쓰러졌다. 이윽고 일어나며 옷을 벗고 등을 돌려 보여주며 말하였다.
“저는 대인의 유체(遺體)이옵니다.”
최척도 이때에야 몽석이가 자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자의 기쁨은 하늘 끝에 닿는 줄을 몰랐다. 서로 얼싸안고 오랫동안 울었다. 더욱이 부모가 구존(俱存)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할 수 없이 기뻐했다.
포로를 감시하는 오랑캐 병사가 자주 드나들다가 이런 사정을 알고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완연하였다. 하루는 오랑캐들이 다 나간 뒤, 늙은 오랑캐가 몰래 들어와서 함께 앉아 조선어로 물었다.
“당신들이 울기에 처음부터 이상히 여겼는데, 어떤 내력이 있소, 내 듣기 원하니 들려주시오.”
그러나 최척은 어떤 변을 당할지 몰라 망설이니, 늙은 오랑캐는 말하였다.
“나를 두려워 마오, 나는 원래 삭주의 토병(土兵)이었소, 부사의 학정이 심해 견딜 수가 없어서 가족을 데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와 산지가 이미 10년이 지났소, 오랑캐들은 솔직하고 학정이 없소, 인생은 아침 이슬과 같을진대, 굳이 고초를 받으며 살 것까지야 어디 있겠소, 오랑캐의 추장이 80여명의 정병을 주어 나에게 포로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감시하게 하고 있다오, 내가 당신들의 사정 여하에 따라 비록 추장에게 문책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잔인하게 당신들을 보내주지 않을 수 있겠소? 숨김없이 사정을 이야기해 보오.”
그래서 최척은 마음놓고 지나온 사연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늙은 오랑캐는 무릎을 치며 몹시 딱하게 여겼다. 백방으로 탈출구를 모색해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 틈을 탔다. 그 늙은 오랑캐는 양식을 아련해주며 떠나가도록 주선해 주었다. 자식을 시켜 샛길을 가리켜 주기까지 해서 무사히 탈출시켰다.
이리하여 최척은 아들과 함께 20년 안에 고국 땅을 밟았다.
부친과 장모를 만날 생각으로 마음은 조급하여 남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등창까지 나서 치료를 하며 은진까지 왔다. 그러나 등창이 도져서 더 이상 길을 갈 수가 없었다. 급기야 여관을 찾아 들었으나 병이 더해 죽을 듯했다. 몽석은 어찌할 줄 몰랐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돌아다녔으나 침약(鍼藥)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때 숨어 다니던 중국 사람이 호서에서 영동으로 가는 길에 이 여관에 묵었다. 그는 최척의 병이 위독함을 보고
“굉장히 위독하오, 오늘을 넘기면 생명을 건질 수없을 것입니다.”하며 주머니에서 침을 뽑아 등창의 고름을 짜니 그날로 차도가 있었다.
이틀이 지나자 지팡이를 짚고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모두들 놀라, 마치 죽었던 사람이 살아온 것만 같이했다. 부자가 부둥켜안고 한바탕 흐느껴우니 마치 꿈인지 실상이 아닌 듯했다.
심씨는 딸을 잃은 후로 넋 나간 사람이 되어 다만 몽석이만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그마저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상심하다 못해 병석에 누운 지 여러 달이 지났다. 심씨는 사위와 외손자가 함께 돌아온 후 무엇보다도 궁금한 딸의 생사를 물었다. 살아있다는 말을 듣자 딸을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우니, 슬픔인지 기쁨인지 알 수 없었다. 몽석은 명인이 아버지의 죽은 목숨을 살려 준 중국사람의 은혜에 감사하여 후한 보답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와 함께 왔었다. 최척이 물었다.
“당신이 중국 사람이라면 집은 어디이며, 성명은 어떻게 되십니까?”
중국 사람이 말했다.
“제 성은 진이고, 이름으로 위경이며, 고향은 항주 용금문 안에 있습니다. 1597년 유 제독 휘하로 종군해서 조선으로 와서 전라도 순천에 와 진을 치고 있을때 하루는 적세를 염탐하러 나갔다가 주장의 뜻을 거스르고 군법을 어겼습니다. 주장이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기에 밤중에 도망하여 여기에 이르러 머물고 있소.”
최척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말했다.
“당신의 고향에는 부모와 처자가 있습니까?”
중국 사람이 말했다.
“고향에는 아내가 있는데 올 때 딸을 낳은 지 두세 달이 되었습니다.”
최척은 다시,
“그렇다면 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아이를 낳는 날, 이웃사람이 귀한 복숭아를 갖다 주어 이름을 홍도라 지었습니다.”
최척은 진위경의 손을 덥썩 잡고 말하였다.
“정녕 이상한 이년이외다. 제가 항주에 있을때 진공의 집과 이웃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당신 부인은 신해년(1611) 9월에 돌아가셨고, 홀로 남은 홍도는 이모부인 오봉림의 집에서 자랐습니다. 제 아들이 성장하여 며느리로 맞이하였습니다. 오늘 뜻밖에 오늘 이 자리에서 사돈지간이 만날 줄을 정녕 몰랐구려.”
이에 위경도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기구한 운명을 탄식하기도 했다.
“내가 대구에서 박성을 가진 사람의 집에 의탁하고 있을 때, 한 노파에게 침술을 배워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당신의 말을 들으니 고향에 있는 것과 같아 이곳에 와 같이 살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몽석이
“공께서는 아버님을 사려 주신 그 은혜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이 따님에게 의탁하고 계시니 이미 한 집안 사람이 되었는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하면서, 즉시 옮겨오도록 하였다.
몽석은 어머니의 생존을 알고 밤낮으로 마음을 태웠다. 중국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모셔 올 일을 계획하였으나 별 신통한 방법이 없어 한갓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당시 항주에 있는 옥영은 관군이 호병에게 전멸하였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남편이 전쟁터에서 횡사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밤낮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죽기를 기약하기라도 한 듯이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내가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물에 빠져 죽으려 하였는데 남원 만복사의 장육불이 꿈에 나타나 ‘죽지 않으면 훗날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후 4년 만에 네 아버지를 안남 바다 가운데서 만났는데 지금 내가 죽으려 하니, 또 같은 꿈을 꾸었구나 혹시 네 아버지가 죽음을 면하신 것이 아닌가 한다. 만약 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내 죽어도 오히려 산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무슨 한이 있겠느냐.”
몽선이 울면서 말하였다.
“요새 듣자니, 오랑캐들이 중국 병사는 죽였으나 조선 사람들은 모두 탈출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조선 사람이니 틀림없이 도망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는 금불의 꿈이 어찌 헛된 것이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어머님은 부디 살아계셔 아버님 돌아오시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러자 옥영이 번연히 알면서도 말하였다.
“오랑캐의 소굴은 조선과 겨우 4,5일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네 아버님이 살아계신다면, 반드시 조선 땅으로 도망하셨을 것이다. 어찌 만 리 길을 건너와 처자를 찾을 수 있겠느냐, 나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찾아봐야겠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창주의 살피에 가 떠도는 혼이라도 불러 선영의 곁에다 장사 지내어 사막의 밖에서 오랫동안 굶주리는 것을 면하게 된다면 내 책임은 다하는 것이다. 하물며 ‘월나라는 새는 남쪽에 집을 짓고 오랑캐 말은 북쪽을 향해 기댄다.’하니 이제 죽을 날을 앞두고 더욱 고향이 그리워지는구나, 외로운 시아버님과 혼자이신 어머님, 어린 아들을 왜란에 모두 잃고 그 생사조차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수없다. 요새 상인들의 말을 들으니 왜적이 잡아간 조선 사람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고 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어찌 한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않았겠느냐, 네 조부와 부친이 비록 이역에서 돌아가셨다면 선조의 무덤을 누가 돌보겠느냐, 안팎의 친척들이 난리에 다 죽었다 한들 어찌 한 사람도 살아있지 않겠느냐, 만일 만난다면 이 또한 다행이니, 너는 배를 사고 먹을 음식을 준비해라, 여기서 조선까지는 수로로 겨우 2,3쳔 리이니 하늘이 돌봐 주셔서 잠시라도 순풍을 만나면 열흘이 안 되어 바닷가에 닿을 것이다, 나는 계획대로 결행할 것이다.”
몽선이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하소연했다.
“어머님,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닿기만 한다면야 그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만리창파를 작은 배로는 건널 수 없습니다. 풍파와 교룡의 부르짖음은 예측할 수없는 화가 될것이고, 해적들이 도처에서 떼 지어 출몰하니 불화를 일으킬 것입니다. 모자가 보두 고기뱃속에 장사지낸다고 하여도 어떻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을 덮겠습니까? 제가 비록 어리석으나 이와 같은 큰일을 앞두고 다른 일을 핑계로 막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홍도가 옆에서 남편의 말을 막으며,
“막지 마십시오, 어머님의 마음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다른 것에 대한 걱정을 논할 틈이 없습니다. 비록 수화나 해적을 만난다 하더라도 능히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옥영은 며느리의 말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수로는 예측하기 어려우나 내 일찍이 많은 경험을 얻었다. 일본에 잡혀 있을 때, 배를 집으로 삼아 장사를 하고 하는 주인을 다라 봄이면 민경 지방에서, 가을에는 유구로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 거대하고 무서운 고래 같은 파도 속에서도 헤어났고 조수의 흐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이 풍부하다. 풍파, 험난함과 평탄함도 내가 맡을 것이요, 배의 노를 젓는 편안함과 위태로움도 내가 맡아서 하겠다. 아무리 불행한 일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어찌 벗어날 방편이 없겠느냐.”
이어서 옥영은 조선옷과 일본옷을 만들고 날마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두 나라의 언어를 배우도록 하고 자기가 가르쳤다. 그리고 몽선에게 주의하기를,
“배는 오로지 돛대와 노에 달려 있으니 견고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지남석은 없어서 안 되는 것이니 똑 마련하도록 해라, 떠날 날은 점을 쳐서 좋은 날을 가릴 것이니, 내 뜻을 어기지 않도록 해라.”
하였다. 몽선은 어머니 앞에서 물러나 아내를 책망했다.
“어머님은 만 번 죽을 것을 돌보지 않으시고 중대한 계획을 세우시어 위험을 무릅쓰고 가시려고 하시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소, 홀로 되니 어머니에게 무슨 좋은 땅이 있겠소? 그런데도 당신은 이 일을 찬성하니 어찌 생각이 그리도 깊지 못하오.”
홍도가 대답했다.
“어머님은 지성으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말로만 다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만 두라고 해서 멈출 분이 아니니 돌이키기 어려운 후회를 할까 염려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어머니의 계획대로 순순히 따라드려 일을 제대로 도모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저라고 해서 어찌 겁나지 않겠습니까. 태어난지 몇 달 만에 아버지께서는 전쟁터에 나가 돌아가시어 남의 나라 땅에 뼈를 드러내 놓은 채 혼백이 들풀에 얽혀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건대 어떻게 사람이라고 하겠습니까, 근래 길에서 소문을 들으니 싸움에서 패배한 군졸들 가운데 조선으로 달아나서 떠도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사람의 자식으로서 진심으로 요행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낭군의 힘에 의지해서 조선에 당도해서 전쟁터를 이리저리 거닐어 본다면 아비잃은 원통함이 조금은 없어질 겁니다. 아침에 가서 저녁에 죽더라도 정말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는 목메어 우니, 눈물이 가득히 흘러내렸다.
몽선은 어머니와 아내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떠날 준비를 단단히 하고 경신년(1620) 2월 1일에 출항키로 했다. 옥영이 아들에게 말했다.
“조선은 동북쪽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서남풍을 기다려야 한다. 너는 단단히 앉아서 노를 잡고 오직 내 지시를 잘 듣도록 해라.”
마침내 깃대에 깃발을 달고 지남석을 배 가운데에 설치하니 세 사람이 힘을 다해 돛을 올리자 배는 밤낮없이 바다를 가로질러 대단히 빠르게 달렸다. 쏜 화살같이 파도를 가르며 들어가는가 하더니 바른 번개가 길을 호위하는듯했다. 10일 만에 내주에 올랐다.
반나절쯤 가니, 망망대해에 크고 작은 여러 섬들이 푸르게 줄을 지어 잠겨있더니, 눈을 돌리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하루는 중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는데 다가와서는 물었다.
“어느 지방의 배이며, 어디로 가느냐?”
옥영이 대답하였다.
“항주 사람인데 차를 사기 위해 산동으로 가는 중이오.”
그들이 지나쳐 갔다. 이틀 뒤에는 일본인 배가 다가오니, 옥영은 즉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기다렸다. 일본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옥영이 일본어로 대답했다.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소, 배와 노가 모두 부서져 항주에서 배를 얻어 돌아가는 중입니다.”
일본사람이 말했다.
“정말 고생이 많소, 이 길로 가면 일본과 어긋나니 돌려서 남쪽을 향해 가시오.”
그러고서 또 헤어졌다. 이날 저녁 마파람이 심하게 불었다.
푸른 너울이 놀쳐 하늘을 진동시켰고, 구름과 안개는 사방에 자욱하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웠으며, 노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배 댈 곳을 알 수 없었다. 몽선과 홍도는 너무 놀라서 배 바닥에 엎드리더니 이내 배 멀미를 괴롭게 했다. 옥영은 홀로 앉아 하늘을 우러르며 염불을 욀 뿐이었다. 한밤이 되어 풍랑이 잦아들더니 배가 흘러서 조그만 섬에 정박하게 되었다. 배를 수선하기 위해 며칠을 떠나지 못하였는데, 바다 가운데서 배 한척이 다가왔다. 옥영은 몽선에게 배안에 장비를 자루에 담아서 바위 동굴에 숨기게 했다. 잠시 후에 뱃사람들이 보였는데 시끄럽게 떠들면서 내려왔다. 말소리며 옷차림새가 조선이나 일본이 아니었으며, 겉짐작으로 중국 사람과 흡사했다. 손에 병기는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흰 몽둥이로 마구 때리며 화물을 찾았다.
옥영이 나서서 중국말로
“우리는 중국 사람인제 바다로 고기잡이 나왔다가 풍파를 만나 이지경이 되었으니 본래부터 화물은 없습니다.”
하면서 살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해적들도 사정을 살피다가 다만 배만 빼앗아 저희 배 뒤에 달고 사라졌다.
옥영이 말하였다.
“필시 저놈들은 해랑적이 분명하다, 내가 알기로는 저놈들은 중국과 조선 사이를 출몰하면서 약탈만 할 뿐 죽이지를 않는다는구나, 내가 아들의 말을 듣지 않고 무모하게 나왔다가 하늘이 돕지 않아 끝내 이런 낭패를 당했구나, 배마저 잃었으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어두운 하늘고 저 넓은 바다를 날아갈 수도 없고 마른 소나무도 띄우기 어렵고, 대나무 잎사귀에 의지할 수도 없으니 다만 죽음만이 있구나, 내가 죽는 것은 아까울 게 없으나, 나 때문에 너희들이 죽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이로다.”
곧 아들 내외와 오롯이 둘러앉아 슬피우니, 그 울음이 어찌나 처절하였던지 그 소리가 바닷가에 울려 맺힌 한이 바다에 겹겹이 쌓였다. 거문고 소리가 오므라들고 산은 마치 귀신이 신음하는 것 같았다. 옥영은 절벽에 올라 바다로 몸을 던지려 하였다. 이때 아들과 며느리가 붙들어 자살할 수가 없어 몽선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나를 죽지 못하게 하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양식도 사나흘 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릴 것인데 죽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나.”
몽선이 말했다.
“양식이 떨어진 뒤에 죽어도 늦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살 길이 생긴다면 후회막급입니다.” 몽선은 어머님을 부축하여 바위산을 내려왔다. 바위틈에서 웅크리고 잤다. 날이 밝아 오는데 옥영이 아들과 며느리에게 말하였다.
“내가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없어 잠시 조는 사이였다. 장육불께서 또 나타나 전과 같이 일러주시니 정말 이상하구나.”
세 사람은 함께 염불을 외며,
“세존이시여!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하고 기원하였다.
이틀이 지났다.
저 먼 수평선에서 한 돛단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몽선이 놀라 경계하며 말하였다.
“저런 배는 아직 본적이 없으니 걱정이 됩니다.”하니, 옥영이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였다.
“어디, 우리는 이제 살았구나, 저 배는 조선 배가 틀림없다.”
모두 한복으로 급히 갈아입고 몽선을 시켜 언덕으로 올라가 옷을 흔들라고 했다. 뱃사람이 배를 멈추고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인데 이 외딴 섬에 살고 있소?”
옥영이 조선말로 대답하였다.
“우리는 본래 한양의 사족인데, 나주로 내려가다가 졸지에 풍파를 만나 배가 전복되어 사람들은 모두 죽고 우리만 돛대 자루를 타고 여기까지 표류해 왔습니다.”
뱃사람은 듣고 불쌍히 여겨 배에 다 태워주며,
“이 배는 통제사의 무역선이오, 갈 길이 정해져 가는 길을 늦출 수 없소.”
하였다. 마침내 순천에 이르러 정박하고 세 사람을 뭍으로 내려주니 때는 경신년(1620) 4월이었다.
옥영은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울퉁불퉁하여 걷기 힘든 길을 걸어 산 넘고 물 건너 대엿새 만에 남원에 이르렀다. 옥영은 속으로 집안이 모두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옛 집터만 찾아보고 만복사를 찾아가려했다. 금교에 이르러 성곽을 바라보니 완연하였으며 집들도 이전과 다름이 없었다. 옥영은 몽선을 돌아보며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키며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저 집이 바로 너의 아버님의 옛집이란다. 지금은 누가 들어가 살고 있는지는 모르나, 찾아가 하룻밤 신세지면서 뒷일을 생각해 보자.”
옥영 일해이 문밖에 당도하였다.
최척은 버드나무 밑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영이 그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로 남편이었다. 모자와 며느리가 일시에 달려들며 통곡하니 최척도 곧 알아보고 대성통곡하며 말하였다.
“몽석 어멈이 왔소,”
몽석은 이 말을 듣고 맨발로 달려 나와 서로 붙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심씨는 병이 깊어 정신이 없다가 딸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는 너무 놀라 기절하니 이미 사람의 얼굴빛이 아니었다. 옥영이 끌어안고 갖은 정성을 다하니 얼마 후에 깨어났다. 최척은 위경을 불러 말했다.
“지금 따님도 왔습니다.”
홍도를 시켜 그동안의 일을 말하게 하니 온 집안사람들이 각자 자식을 안고는 눈물이 마르도록 우니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이웃 마을에서 와 본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옥영과 홍도가 처음부터 끝가지 이야기를 하자 모두가 무릎을 치며 찬탄하고는 다투어 가며 서로 전하는 것이었다. 옥영이 최척에게 말하였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장육금불의 은덕이옵니다. 이제 와서 보니, 만복사가 황폐해지고 금불상도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의지하고 불공을 드릴 곳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신령함이 하늘에 계시어서 딱하고 가엾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보답해야 할 것을 알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곧 예물을 갖추어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껏 제를 올렸다. 최척과 옥영은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녀를 돌보면서 남원부 서쪽에 있는 옛집에서 살았다.
아! 아비와 아들, 남편과 아내, 시부모 형제가 네 나라로 흩어져 시름없이 바라본 것이 세 번이었다. 적지에서도 궁리하여 일을 마련했고 사지를 나고 들었는데 마침내 모두 모여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것이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인가?
하늘의 신과 땅의 신께서 반드시 지극한 정서에 감동하셨기에 이러한 기이하고 특이한 일이 가능한 것이었다. 어염집 여인네들에게도 정성이 있다면 하늘도 어기지 아니하고 정성이라는 것은 이처럼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여러 곳을 떠돌다 남원의 주포에 머물렀었는데 최척이 가끔씩 나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어느 날은 자신이 그간에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주기를 청하더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르칠 수 없기에 그 대강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천계원년 1621년 윤 2월)
崔陟, 字伯昇, 南原人. 早喪母, 獨與其父淑, 居于府西門外萬福寺之東. 自少倜倘 喜交遊, 重然諾, 不拘齪齪小節. 其父嘗戒之曰: “汝不學, 無賴, 畢竟, 做何等人乎. 況今國家興戎州縣方徵武士, 無以射獵爲事, 以貽老父焉. 以屈首受書, 從事於儒子業, 雖未得策名登第, 亦可免負羽從軍. 城南有鄭上舍者, 余少時友也. 力學能文, 可以開導初學, 汝往師之.”
陟卽日挾冊及門, 請業不輟. 便數月, 詞藻日富, 沛然如決江河, 鄕人感服其聽敏. 每講學之時, 輒有丫鬟, 年可十七八. 眉眼如畵, 髮黑如漆, 隱伏于窓壁間, 潛聽焉. 一日上舍方食不出, 陟獨坐誦書, 忽然窓隙中, 投一小紙, 取而視之, 乃書摽有梅末章. 陟心魂飛越, 不能定情, 思欲昏夜, 唐突以竊而抱, 卽悔之, 以金介鉉之事自警, 沈吟思量, 義欲交戰, 俄見上舍出來, 遽藏其詩於袖中, 卒業而退. 門外有一靑衣, 尾陟而來曰: “願有所白.” 陟旣見詩心動之, 及聞靑衣之言, 甚怪之, 願首呼來, 引至其家, 詳聞之. 對曰: “兒是李娘子女奴春生也. 娘子使兒請郞君和詩而來.” 陟訝曰: “爾非鄭家兒耶? 何以曰李娘子也?” 對曰: “主家本在京城崇禮門外靑坡里 ,主父李景新, 早歿, 寡母沈氏, 獨與處子居. 處子名玉英氏, 投詩者是也. 上年避亂, 自江華乘船, 來泊于羅州會津, 及秋自會津于南原.”
“寡母自京城, 來寓鄭家者, 有一處子, 年貌俱妙, 誠爲不肖, 求於上舍, 必不爲疾足者之先得.” 父曰: “彼以華族, 千里浮萍, 其志必欲求富, 吾家素貧, 彼必不肯.” 陟反復申告曰: “第往言之. 其成與否, 天也.” 明日, 父往問之, 鄭曰: “吾有表妹, 自京潛亂, 窮來歸我. 其女姿行, 秀出閨闈, 我方求婚, 欲作門楣. 固知令子才俊, 不負東床之望, 而所患者, 寒儉耳. 吾當與妹商義, 更通.” 淑歸語其子, 陟惱燥數日, 苦待其秋. 上舍, 入言于沈, 沈亦難之, 曰: “我以盡室流離, 孤危無托, 只有一女, 欲嫁富人, 貧家者, 雖賢不願也.” 是夜, 玉英乃就其母, 口欲有言, 而囁濡不發, 母曰:“爾有所懷, 無隱乎我也.” 玉英赧然遲疑, 强而後, 言曰: “母親爲我擇婿, 必欲求富, 其情則憾矣. 第惟家富, 而婿賢則何幸, 而如或家雖足食, 婿甚不賢, 則難保其家業. 人之無食我以爲夫, 而雖有粟, 其得而食諸. 竊瞯崔生, 日日來學於阿叔, 忠厚誠信決非輕薄宕子, 得此爲配, 死無恨矣. 況貧者, 士之常, 不義而富, 吾甚不願, 請決嫁之. 此非處子所當, 自言之事, 而機關甚重, 豈嫌於處子羞澁之愁. 潛黙不言, 而竟致嫁得庸, 爲壞了一生, 則已破之甑, 難以再完. 旣染之絲, 不可復素, 啜泣何及, 噬臍莫追. 況今兒身, 異於他人, 家無嚴父, 賊在隣境, 苟非忠信之人, 何以仗母子之身乎? 寧從顔氏之請家, 不避徐妹之自擇, 豈可隱匿深房, 但望人口, 而置於相忘之地乎?” 其母不得已, 明日告諸鄭曰:“我夜者更思之, 崔郞雖貧, 我顧其人, 自是佳士. 貧富在天, 難可力致, 與其圖婚於所不知之何人, 寧欲得此爲婿.” 鄭曰: “阿妹欲之, 我必勸成. 崔雖寒士, 其人如玉, 求之京洛, 鮮有此輩. 若志遂業成, 終非池中物.” 卽日送媒, 定約以九月望, 爲行醮禮, 陟大喜, 屈指計日而待焉.
無何, 前叅奉邊士貞起義兵赴嶺南, 以陟有弓馬才, 遂興同行. 陟在陣中, 憂念成疾 及其約婚之日, 呈狀乞暇, 則義將怒曰: “此何等時, 而敢求婚聚乎? 君父蒙塵, 越 在草莽, 臣子當枕戈之不暇, 而汝未及有室之年, 滅賊而圖婚亦未晩也.“ 竟不許.
玉英亦以崔生從軍不返, 虛度約日, 減食不寐, 日漸愁惱. 隣有梁姓者, 家甚富. 聞其玉英之賢哲與其崔生之不來, 乘間求婚, 潛以貨賂啗諸鄭妻, 逐日重惑曰: “崔生貧困, 朝不謀夕, 一父難養, 常貨於人, 將何以畜家累以保無患? 況從軍未返, 生死難期. 而梁氏殷富, 所稱多財, 其子之賢, 不下於崔.” 夫妻合辭, 交口薦之. 沈意頗感, 約以十月涓吉, 實不可破. 玉英夜訪于母曰: “崔從義陣, 行止係於主將, 非故負約. 不俟其言, 而輕自破約, 不義孰正? 若奪兒志, 死而靡他, 母也天只, 不謀人只.” 母曰: “汝何執迷如此? 當從家長之處分爾, 兒女何知就歸乎?” 夜深夢間, 忽聞喘息汨汨之聲, 覺而撫其女, 不在焉. 驚起索之, 玉英於窓壁下, 以手巾結項而伏. 手足皆冷, 喉嚨間汨汨之聲, 漸微且絶. 驚呼解結, 蹴春生點火而來, 抱持痛哭. 以勺水入口, 小頃而甦. 主家亦驚動來救, 自後絶不言梁家之事.
崔淑以書抵其子, 道所以. 陟方患柄篤, 聞此驚感, 轉成危革, 義將聞之, 卽令出送. 還家數日, 沈痾忽痊, 遂以仲冬初吉, 合巹于鄭上舍之家, 兩美相合, 喜可知也. 陟載妻與沈氏歸于其家, 入門而僕隷懽悅, 上堂而親戚稱賀. 慶溢一家, 譽洽四隣. 攝衽抱機, 躬就井臼, 養舅事夫, 誠孝甚至, 奉上御下, 情禮俱稱, 遠近聞之, 皆以爲梁鴻之妻, 鮑宣之婦, 殆不能過也. 陟聚婦之後, 所求如意, 家業稍足, 而常患繼嗣之尙遲, 每以月朔, 夫妻往禱於萬福寺. 明年甲午元月, 又往禱之, 其夜, 丈六金身, 見於玉英之夢, 曰: “我萬福寺之佛也, 我嘉爾誠, 賜以奇男子, 生必有異相.” 及期, 而果生男子, 背有赤痣如小兒掌, 遂名曰: ‘夢釋’.
陟善吹簫, 每月夕花朝相對而吹, 時當暮春淸夜, 將聞微風乍動, 素月揚輝, 飛花撲衣, 暗香侵鼻. 開缸灑酒, 引滿而飮, 據案三弄, 餘音嫋嫋. 玉英沈吟良久曰: “妾素惡婦人之吟詩者, 而到此情境, 不能自已.” 遂詠一絶曰: “王子吹簫月欲低, 碧天如海露凄凄. 會須共御靑鸞去, 蓬島煙霞路不迷.” 陟初不知其藻詞之如此, 聞詩大驚, 一唱三歎, 卽以一絶和之, 曰: “瑤臺繚緲曉雲紅, 吹澈鸞簫曲未終. 餘響滿空山月落, 一庭花影動香風.” 吟罷, 玉英歡意未央, 興盡悲來, 涕泣悄然而謂曰: “人間多故, 好事有魔, 百年之內, 離合難常, 以此忽忽, 不能貿感.” 陟徽袖雪涕, 慰解而言曰: “屈伸盈虛, 天道之常理. 吉凶懷吝, 人事之當然. 設或不幸, 當付諸數, 豈可居易? 浪自爲然. 無憂而戚, 古人所戒, ‘言吉無言凶’, 諺亦有之. 不須憂惱, 以阻歡意.” 自此情愛尤禿, 夫婦自謂知音, 未嘗一日相離也.
至丁酉八月, 賊陷南原, 人皆逃竄. 陟之一家, 避于智異山燕谷. 陟令玉英着男服, 雜錯於廣原之中, 人之見之者, 皆不知其爲女子也. 入山累日, 糧盡將饑, 陟與丁壯數三出山求食且覘賊勢. 行到求禮, 猝遇賊兵, 潛身於巖藪而避之. 是日, 賊入燕谷, 彌山遍谷搶掠無遺, 而陟路梗不得進退. 過三日, 賊退後, 還入燕谷, 則但見積屍遍橫, 流血成川. 林叢間, 隱隱有號哃之聲, 陟就訪之, 老弱數輩癢痍遍身, 見陟而哭曰: “賊兵入山三日, 奪掠財貨, 芟刈人民, 盡驅子女, 昨已退屯蟾江. 欲求一家, 問諸水濱.” 陟號天痛哭, 攝地嘔血, 卽走蟾江. 未行數里, 得見於亂屍中, 呻吟斷續若存若無, 而流血被面, 不知其爲何人也. 察其衣裳, 甚似春生之所着. 大聲呼之曰: “爾無是春生乎?” 春生張目視之, 喉中作語曰: “郞君,郞君! 主家聞爲賊兵所掠而去, 吾負阿釋, 不能趨走, 賊引兵斫殺而去. 吾僵地卽死,半日而甦, 不知背上之兒生死去留.” 言訖而氣盡, 不復生矣. 陟扣胸頓足, 憫絶而仆. 旣已無可奈何, 起向蟾江, 則岸上有老弱,創殘數十, 相聚而哭. 往問之, 則曰: “俺等隱於山中, 爲賊所驅及賊船, 抽丁壯同載, 推下罹鋒, 老嬴者如此.” 陟大慟, 無念獨全, 將欲自裁, 被得人求止. 踐踐江頭, 而去無所之, 還尋僅達歸路, 三晝夜, 其住家頹垣破瓦, 餘燼未息, 積骸成丘, 無地着足.
遂憩于金橋之側, 不食累日, 奔走力盡, 昏倒不起, 忽有唐將率十餘騎, 自城中出來, 浴馬於金橋之下. 陟在義陣時, 與天兵應接酬酌之久, 稍解華語. 因道其全家之見敗, 且訴一身之無托, 欲與同入天朝, 以爲長住之計. 唐將聞之惕然, 且燐其志曰: “吾是吳總兵之千總余有文也. 家在浙江姚興府, 雖貧, 足以自食. 人生貴於知心, 遊息適意, 無論遠近, 爾旣無家累之戀, 何必塊守一方,蹴蹴靡所聘乎?“ 遂以一馬載歸于陣. 陟容貌俊爽, 計劃尋遠, 便於弓馬, 瞯於文字. 余公愛之, 共床而食, 同衾而寢. 未幾摠兵撤歸, 以陟隷戰亡軍簿, 而過關至姚興居焉.
初, 陟家被據至江, 賊以陟之父與姑老病, 不甚看護, 二人伺賊退, 潛逸于臺中. 賊去, 行乞村閻, 轉入燕谷寺, 聞僧房有孫兒啼哭之聲. 沈氏泣謂崔淑曰: “是何兒聲之一似吾兒也?” 淑遽推戶視之, 果夢釋也. 遂取置懷中, 撫哭移時, 因問, “此兒 何處得來?” 僧有慧正者, 對曰: “吾於路傍屍中聞啼聲, 愍然收來, 以待其父母. 今果是也, 豈非天耶?” 淑旣得孫兒, 與沈氏遞負而歸, 收集奴僕, 經紀家事.
時玉英則見執於倭奴頓于. 頓于老倭本不殺生, 慈悲念佛, 以商販爲業, 習御舟揖. 倭將行長, 以爲船主而來. 頓于愛玉英機驚, 惟恐見逋, 給以善衣美食, 慰安其心. 玉英欲投水溺死, 再三出船, 輒有所覺. 一夕, 丈六金佛夢玉英而告曰: “我萬福佛也. 愼無死, 後必有喜.” 玉英覺而諗其夢, 不能無萬一之冀, 遂强食不死. 頓于家 在浪, 時妻老女幼, 無他子男, 使玉英居家, 不得出入. 玉英謬曰: “我本貌少男子, 弱骨多病. 在本國不能服役丁壯之事, 只以裁縫炊飯爲業, 餘事固不能也.” 頓于尤憐之, 名之曰 ‘沙干’, 每乘舟行販, 以火長置舟中, 往來于閩浙之間.
是時, 陟在姚興, 與余公結爲兄弟, 欲以其妹妻之. 陟固辭曰: “我以全家陷賊, 老父弱妻至今未知生死, 縱不得發喪服衰, 豈晏然婚娶, 以爲自逸之計乎?” 余公遂以止之其圖. 余公病死, 陟尤無所歸, 落拓江淮, 周遊名勝窺就門.深岩穴.窮瀟湘.航洞庭.上岳陽.登姑蘇 吟咏於湖山至上, 婆姿於雲水之間, 有飄飄遺世之志. 聞海蟾道士王用隱居靑城山, 燒金煉丹, 有白日飛昇之術, 將欲入蜀而學焉. 適有宋佑者, 號鶴川, 家在杭州湧金門內, 博通經史, 不屑功名, 以著書爲業, 喜施與, 有義氣, 與陟許以知己. 聞其入蜀, 載酒而來, 飮至半酣, 字陟而謂曰: “白昇, 人生斯世, 孰不欲長生而久視? 古今天下寧有是理. 餘生幾何? 而何乃服食忍飢,自苦如此, 而與山鬼爲隣乎? 子須從我, 而歸浮扁舟, 適吳越販繒賣茶以終餘年, 不亦達人之事乎?” 陟洒然而悟, 遂與同歸.
歲庚子春, 陟隨佑與同里商船往來於安南. 時有日本十餘艘, 亦泊于浦口, 留十餘日. 固値四月, 旁死白鬼, 天無寸雲, 水光如練, 風息波恬, 聲沈影絶, 舟人寂睡, 渚禽時鳴, 但聞日本舟中念佛之聲, 聲甚凄惋. 陟獨倚蓬窓感念身世, 卽出裝中洞簫, 吹界面調一曲, 以舒胸中哀怨之氣. 時海天探色, 雲烟變態. 舟中驚起, 莫不愀然. 日本船念佛聲?然而止, 旋以朝鮮音詠七言絶句曰: “王子吹簫月欲低, 碧天如海露凄凄. 會須共御靑鸞去, 蓬島烟霞路不迷.” 吟罷, 有嘻噓喞喞之聲. 陟聞是聲驚動, 惝怳如失, 不覺擲簫, 嗒然如死人形. 鶴川曰: “何爲其然耶?” 再問, 再不答. 三問之, 陟欲語哽塞. 復籟, 籟下, 移時定氣而後言曰: “此詩乃吾荊布所自製也, 平日絶無他人聞之者, 且其聲音, 酷似吾妻, 豈其來在彼船耶? 此必無之事也.” 因述其陷賊事甚悉, 一舟人感驚怪之. 座有杜洪者, 年少勇敢士也. 聞陟之言, 義形於色, 以手擊楫, 奮然而起曰: “吾欲往探之.” 鶴川止之曰: “深夜作亂, 恐致生變, 不如朝日從容處之.” 左右皆曰: “然.” 陟坐而待朝. 東方乍明矣, 卽下岸, 至日本船, 陟以鮮語問之曰: “夜聞詠詩者, 必是朝鮮人也. 吾亦朝鮮人, 倘一得見, 則奚啻越之流入, 見之相似者, 而有喜者也.” 玉英夜於船中聞其簫聲, 乃是朝鮮之曲調, 而一似疇昔慣聆之調, 竊疑其夫之或來于其船, 試詠其詩而探之. 及聞此言, 惶忙失措, 顚倒下船, 二人相見, 驚呼抱持, 宛轉沙中, 聲絶氣塞, 口不能言, 復盡繼血, 目無所覩. 兩國船人聚觀如堵, 初不知其親戚歟, 交遊歟. 久之然後, 聞知其爲夫婦也. 人人咋咋, 相顧而言曰: “異哉! 異哉! 此其天祐而神助, 古未嘗有也.” 陟聞父母消息於玉英, 玉英曰 “自山驅至江上, 父母固無恙. 日暮上船, 蒼葟相失.” 二人相對痛哭, 聞者莫不酸鼻. 鶴川請於頓于, 欲以白金三錠買婦, 頓于怫然曰: “我得此人, 四年于玆, 愛其端懿, 視同己出, 寢食未嘗小離, 而終不知其是婦人也. 今而目覩此事, 天也. 鬼神猶且感動, 我雖頑蠢, 異於木石, 何忍貨此而爲食乎?” 探於橐中, 出十兩銀贐之曰: “同居四載, 一朝離別, 悵憫之懷, 雖切於中, 而重逢配耦於萬死之洋, 此人世所無之事. 我若隘之, 天必殛之. 好去沙干! 珍重! 珍重!” 玉英執手謝曰: “賴主翁, 獲得不死, 卒遇良人, 受惠多矣. 矧此賀貺, 何以報塞?” 陟再三稱謝, 携玉英歸于其船. 隣船之來觀者, 連日不絶, 或以金銀綵繪相遺, 以爲賀餞, 陟皆受而謝之. 鶴川還家, 別搆一室舘陟夫妻, 使之安頓.
陟旣得妻, 庶有安樂之心, 而遠托異國, 四顧無親, 係念老父稚子, 日夜傷心, 黙禱生還而已. 居一歲, 又生一子, 産兒之前夕, 丈六佛又見于夢曰: “兒生亦有背痣.” 夫妻或以爲夢釋再來, 遂名之曰 ‘夢仙’. 夢仙旣長, 父母欲求賢婦, 隣有陳家女, 名曰 ‘紅桃’, 生未晬, 其父偉慶隨劉摠兵東征. 不及長, 而其母繼歿. 紅桃養於其姨家, 常痛其父歿於異域, 而生不知其面目也. 願一至父死之國復哭而來, 耿耿寃恨, 銘于心腑, 身爲女子, 計不知所出. 及聞夢仙求婦, 議於其姨曰: “願得爲崔家婦, 而冀一至於東國也.” 其姨素知其志, 卽詣陟, 語其故, 陟與其妻歎曰: “女而如是, 其志嘉.” 遂取而爲婦.
明年己未, 奴酋入寇遼陽, 連陷數鎭, 多殺將卒. 天子震怒, 動天下之兵以討之. 蘇州人吳世英喬遊擊之百摠. 曾因有文, 素知崔陟才勇, 引而爲書記, 俱詣軍中. 將行, 玉英執手涕泣而訣曰: “妾身險釁, 早罹憫凶, 千辛萬苦, 十生九死, 賴天之靈, 邂逅郞君, 斷絃再續, 分鏡重圓. 旣結已絶之緣. 幸得托祀之兒, 合歡同居, 二紀于玆, 顧念疇昔, 死亦足矣. 常欲身先溘然, 以答郞君之恩, 不意垂老之年, 又作參商之別. 此去遼陽數萬里, 出還未易, 後會何期? 願以不貲之身, 自裁於離席之下, 一以斷君閨房之戀, 一以免妾夜朝之苦志矣, 郞君千萬永訣! 永訣!” 言詺痛哭, 抽刀擬頸. 陟奪刃慰諭曰: “蕞爾小酋, 敢拒螗臂, 王師濯征, 勢同壓卵, 從軍往來, 只費時日之勤苦, 無如是妄生煩惱, 待吾成功而還, 置酒相慶可也. 況仙兒壯健, 足以爲倚, 努力加飡, 勿貽行路之憂也.” 遂趣裝而行.
至於遼陽, 涉胡地數萬里, 與朝鮮軍馬連營于中毛寨. 主將輕敵, 全師致衄. 奴酋殺天兵無遺類, 諭䝱朝鮮, 無數殺傷, 喬遊擊領敗卒十餘人, 投入鮮營, 乞着衣服. 元帥姜弘立, 給其餘衣, 將免死焉, 從事官李民宴懼其見於奴酋, 還奪其服, 執送賊陣. 而陟本鮮人, 遑亂之中, 匿編行間, 獨漏免殺, 及弘立輩納降, 陟與本國將士 就擒於虜庭.
是時, ,夢釋亦自南原以武學赴西役, 在元帥陣中, 奴酋分置將卒之時, 陟實與夢釋同囚於一處, 父子相對, 莫知其爲誰謀也. 夢釋疑其陟之言語硬澁, 意謂天兵之解鮮語者, 懼其見殺, 冒以爲鮮人也, 詰其居住, 陟亦疑其胡人之調得實狀也, 權辭詭設, 或稱全羅, 或稱忠淸, 夢釋心怪而不測. 已過數日, 情意甚親, 同病相憐, 少無疑訝. 陟吐實歷陳平生, 夢釋色動心驚, 且信且疑, 卒然問所亡之兒年歲多少, 身體貌樣. 陟曰: “生於甲午十月, 亡於丁酉八月, 背上有赤痣, 如小兒掌.” 夢釋失聲驚倒, 袒而示背曰: “兒實大人之遺體也.” 陟始認其爲己子也. 因各問其父母俱存, 相持而泣, 累日不止. 主家老胡頻頻來視, 若有解聽其言, 而有矜憫色者焉. 一日, 群胡皆出, 老胡潛來陟所同席, 而時作鮮語而問曰: “汝輩哭泣異於前初, 豈有別事耶? 願聞之.” 陟等恐生變, 不直說, 老胡曰: “無怖. 我亦朔州士兵也. 以府使侵虐無厭, 不勝其苦, 擧家入胡已經十年. 性直, 且無苛政, 人生如朝露, 何必苟趣於揷楚? 鄕吏奴酋使我領九十精兵, 管押本國人, 以備逃逋. 今聞爾輩之言, 大是異事, 我雖得責於奴酋, 安得忍心而不送乎?” 明日, 備給食糧, 使其子指送間路.
於是, 陟率其子生還故國於二十年之後. 急於省父, 兼程南下, 適患背疸, 不遑調治. 行到恩津, 腫勢轉劇, 委頓旅次, 喘喘將死, 夢釋奔遑憂悶, 鍼藥難求. 適有華人逃匿者, 自湖右向嶺左, 見陟而驚曰: “危哉! 若過今日, 不可救也.” 拔其囊中鍼, 決其癰, 卽日而愈. 纔經二日, 扶杖而還家, 渾舍驚痛, 如見死人, 父子相抱嗚咽, 似夢非眞. 沈氏一自失女之後, 喪心如癡, 只依夢釋, 而釋又戰歿, 沈綿床席, 不起者累月. 及見夢釋與父偕來, 且聞玉英之生存, 狂呼顚倒, 全不省其悲如喜也. 夢釋感華人之活其父死命, 與之偕來, 思有以重報之. 陟問, “爾是天朝人, 家在何處?” 答曰: “在於杭州湧金門內. 萬歷二十五年, 從軍于劉提督, 來陣于順天. 一日, 以偵探賊勢, 忤主將旨, 用軍法, 夜半潛逃, 乃留至此.” 陟聞言大驚曰: “爾家有父母妻子乎?” 曰: “家有一妻, 來時産得一女, 纔數月矣.” 陟又問, “女名云何?” 曰: “兒生之日, 適有隣人饋以桃實, 因名曰紅桃.” 陟遽執偉慶手曰: “怪也! 怪也! 吾在杭州與爾家作隣而住. 爾妻妾辛亥九月病死, 獨紅桃見養於其姨吳鳳林家. 我聚以爲兒子婦, 不圖今日値爾於此.” 偉慶驚痛嚄唶, 不冶者良久, 旣而曰: “唉! 吾托大邱地朴姓人家, 得一老婆, 以鍼術糊口, 今聞子言, 如在鄕里, 吾欲移來于此地.” 夢釋曰: “公非但有活父之恩, 吾母及弟托在於令女, 旣爲一家之人, 有何難事?” 卽合移來. 夢釋自聞其母之生存, 日夜腐心, 將有入天朝, 爲母之計而無以自達, 徒切號泣而已.
當是時, 玉英在杭州, 聞官軍陷沒, 以爲陟橫死戰場無疑也, 晝夜哭不絶聲, 期於必死, 水漿不入口. 忽於一夕, 夢見丈六佛撫頂而言曰: “愼無死, 後必有喜.” 覺而語夢仙曰: “吾於被擄之日投水欲死, 南原萬福寺丈六金佛夢余而言曰: ‘愼無死, 後必有喜.’ 後四年, 得見爾父於安南海中, 今吾欲死, 而又夢如是, 汝父豈或免於鋒鏑歟? 汝父若存, 吾死猶生, 顧何恨焉?” 夢仙哭曰: “近聞奴酉, 盡殺天兵, 而鮮人皆脫云. 父親本自鮮人, 獲生必矣, 金佛之夢, 豈虛應哉? 母親須臾無死, 以待父親之來也.” 玉英幡然曰: “奴酋窟穴距朝鮮地界纔四五日, 汝父雖生, 其勢必走本國, 安能冒涉萬里程來尋妻孥哉? 我當求於本國, 苟死矣, 親往昌州境上, 招得旅魂, 葬於先壟之側, 免使長餒於沙漠之外, 則吾責塞矣. 況越鳥巢南, 胡馬倚北, 今旦死日將迫, 尤不堪首丘之戀, 獨舅偏母及弱孩, 俱失於陷賊之日, 其生其死, 雖莫聞知, 頃因賈人聞之, 則鮮人被擄者連續出送, 斯言果信, 亦豈無一人之生還乎? 汝父汝祖雖皆暴骨於異域, 而先祖丘墓誰復看護, 內外親戚, 亦豈盡歿亂離? 苟得相見是亦一幸, 汝其雇船舂糧. 此去朝鮮, 水路僅二三千里, 天地顧佑, 倘得便風, 不滿旬朔當到彼岸, 吾計決矣.” 夢仙泣訴曰: “母親何爲出此言也? 若能得達, 豈非大善? 而萬里滄波, 非一葦可航之地, 風濤蛟鰐爲禱不測, 海寇邏船到處生梗, 母子俱葬魚腹, 何憂於死父乎? 子雖愚族, 當此大事非敢推托之說也.” 紅桃在傍, 謂夢仙曰: “無阻! 無阻! 親計自熱, 外患不취論也. 雖在水火盜賊, 其可免乎?” 玉英又曰: “水路艱難我多備嘗. 昔在日本, 以舟爲家, 春商閩廣, 秋販琉球, 出沒於驚波駭浪之中, 占星候潮, 涉歷已慣, 風濤險易, 我自當之, 舟楫安危, 我自御之, 脫有不幸之患, 豈無方便之道?” 卽裁縫鮮倭兩國服色, 日令子婦敎習兩國語音, 因戒夢仙曰: “船行專依於檣楫, 必須堅緻, 而尤不可無者, 指南鐵. 卜日開船, 無違我志.” 夢仙悶黙而退, 私責紅桃曰: “母親出萬死不顧一生之計, 冒危而行, 死父已矣. 置母於何地? 而汝且贊成, 何不思之甚也?” 紅桃答曰: “母親以至誠出此大計, 固不可以言語爭也. 今若止之, 以其所必不止, 廬有難追之悔, 不如順適之爲愈也. 妾之私情, 遑恤言乎?”
生纔數其貨物, 玉英以華語對曰: “我以天朝人, 漁採于海, 漂泊於此, 本無貨物” 涕泣求生, 卽不殺, 只取玉英所乘船, 繫其船尾而去. 玉英曰: “此必是海浪賊也. 吾聞海浪賊, 在華鮮之間, 出沒搶掠, 不喜殺人, 此必是也. 我不聽兒言而强作此行, 昊天不助, 終致狼狽, 旣失船楫, 夫何爲哉? 接天溟海, 不可飛越, 枯槎難信, 竹葉無憑, 但有一死, 吾死晩矣, 可憐吾兒因我而死.” 卽與子婦相扶哀號, 聲震岩岸, 恨結層波, 海若瑟縮, 山鬼嚬呻. 玉英登臨絶岸將欲投身, 子婦共挽, 顧謂夢仙曰: “爾止吾死, 將欲何俟. 櫜中餘糧, 僅支三日, 坐待食盡不死何爲?” 夢仙對曰: “糧盡而死, 亦未晩也. 其間萬一有可圖之路, 則悔無及矣.” 遂扶下來, 夜伏于岩穴. 天且曉, 玉英謂子婦曰: “我氣困神疲, 彷彿之間丈六佛又見, 其言云云: 極可異也.” 三人相對, 念佛而祝曰: “世尊! 世尊! 其念我哉! 我哉!” 過二日, 忽風帆自杳茫中出來. 夢仙驚告曰: “此船曾前未覩之船, 甚可憂也.” 玉英見而喜曰: “我生矣! 此是朝鮮船也.” 乃着朝鮮衣, 使夢仙登岸以衣揮之. 船人停帆而問曰: “汝是何人? 住此絶島” 玉英以朝鮮語應曰: “我本京城士族. 將下羅州, 猝遇風波, 舟覆人死, 獨吾三人, 攀抱風廗漂轉至此.” 船人聞而憐之, 下碇載去曰: “此乃統制使之貿販船也. 官程有限, 不可迤往.” 至順天, 到泊下船, 時庚子四月也.
玉英率子婦間關跋涉. 五六日方到南原, 意爲一家皆爲歿陷, 但欲求見夫家舊基, 尋萬福寺而去. 至今橋望見城郭宛然, 村閭依舊, 顧謂夢仙, 指點而泣曰: “此是汝父獘廬, 今不知誰人入居? 第往寄宿, 以圖後計.” 到其門外, 見陟方對客坐於柳樹之下, 近前熟視, 乃是其夫也, 母子一時號哭. 陟已知其妻與子, 一聲大號曰: “夢釋之母來矣, 此天耶? 人耶? 神耶? 夢耶?” 夢釋聞此, 跣足顚倒而出, 母子逢場, 景光可知. 相扶入室, 沈氏於病瘀之中, 聞其女來, 驚仆氣塞, 已無色人. 玉英抱救得蘇, 久而獲安. 陟呼偉慶曰: “今亦至矣.” 命紅桃, 語其事, 一家之人, 各抱子女, 生死重逢, 驚號相哭, 古今天下, 復豈有如此神異絶奇之事也. 聲動四隣, 觀者如堵, 且怪且異, 及聞玉英, 紅桃終是之事, 莫不擊絶歎嗟, 爭相傳說.
玉英爲陟曰: “吾等之得有今日, 寔賴丈六佛之陰隲, 而今聞金佛, 亦皆毁滅, 無所憑禱, 而神靈之在天, 容有不泯者存. 吾等豈不知所以報乎?” 乃供具詣廢寺, 潔齊飯豆. 陟與玉英, 上奉父母, 下育子女, 居于府西舊家.
噫! 父母夫妻兄弟舅姑, 分離四國, 悵望三紀, 經營賊所, 出沒死地, 畢竟圖會, 無一令落, 此豈人力之所致. 皇天后土, 必感於至誠, 而能致此奇異之事. 匹婦有誠, 天且不違, 誠之不可掩, 如是夫. 余流寓南原之周浦, 陟時來訪余, 道其事如此, 請記其願末, 無使湮沒, 不獲已, 略擧其槪. 天啓元年辛酉二月日素翁題.
?嘉藍文庫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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