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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몽유록

New-Mountain(새뫼) 2015. 5. 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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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

 

적멸사(寂滅寺)에는 청허((淸虛)라 하는 한 이름 높은 선사가 살고 있었다. 그는 천성이 어질었고 마음 또한 착했다. 추운 사람을 만나면 입었던 옷을 벗어 주었다.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던 밥도 몽땅 주어버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추운 겨울의 봄바람이라거나 어두운 밤의 태양이라거나 하고 우러러 받들었다.

그런데 국운은 나날이 쇠퇴하였고, 호적(胡狄)이 침입하여 팔도강산을 짓밟았다. 상감은 난을 피하여 고성에 갇혔고, 불쌍한 백성들은 태반이 적의 칼에 원혼(冤魂)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저 강도(江都)의 침상은 더욱 처절했다. 시신의 피는 냇물처럼 흘렀고, 백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까마귀가 사정없이 달려들어 시신을 파먹었으나 장사 지낼 사람이 없었다. 오직 청허선사만이 이를 슬프게 여겼다. 선사는 몸소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려고 했다. 그는 손으로 버들가지를 잡아 도술을 부렸다. 넓은 강물을 날아 건넜다. 강 건너 인가가 황폐하여 어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에 선사는 연미정(燕尾亭) 남쪽 기슭에다 풀을 베어 움막을 엮었다. 그는 움막에서 침식하며 법사(法事)를 베풀었다.

어느 날이었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그는 어렴풋이 한 꿈을 꾸었다. 티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물빛같이 푸르렀고, 음산한 밤공기가 주위를 휩쌌다. 이따금 찬바람이 엄습했고, 처량한 밤기운이 감돌아 심상치 않았다. 청허선사는 손에 석장(錫杖)을 들고 달밤을 소요하고 있었다. 밤중이 되어 바람에 소리가 들려오는데, 노래 소리 같기도 하고,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그 노래와 웃음소리, 울음소리는 다 부녀들의 것으로서 한곳에서 들려왔다. 선사는 매우 이상히 여기고 가만가만 다가가 엿보았다. 그 곳에 수많은 부녀자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쭈글쭈글했고 백발이 성성했다. 또 젊은 여인도 있었는데 삼단 같은 머리하며 황홀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들은 한데 있었는데, 비통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청허선사는 더욱 이상하게 생각했다. 좀 더 나아가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은 두어 발이 넘는 노끈으로 머리를 묶기도 했고, 또 다른 이는 자가 넘는 시퍼런 칼날이, 시뻘건 선지피가 엉긴 채 뼈에 박혀 있었다. 또 머리통이 박살났는가 하면, 물을 잔뜩 들이키어 배가 불룩한 사람도 숱했다. 이 끔찍스런 참상은 두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었고, 날카로운 붓으로도 낱낱이 기록할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한 여자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전란을 입어 그 참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슬프외다. 하늘이 무심탄 말인가요. 아니면 요괴의 장난인가요. 구태여 그 이유를 따지고 든다면 바로 우리 낭군의 죄이겠지요. 태보(台輔)의 높은 지위며 체부(體府)의 중책을 진 사람이 공론(公論)을 무시한 소치입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편벽되게도 강도의 중책을 제 자식에게 맡겼지요. 자식놈은 중책을 잊고 밤낮 술과 계집 속에 파묻혀 마음껏 향락에 빠졌습니다. 장차 닥쳐올 외적의 침입을 까맣게 잊어버렸으니 어찌 군무(軍務)에 힘쓸 일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깊은 강, 높은 성, 험한 요새를 갖고도 이처럼 대사를 그르쳤으니, 죽어 마땅하지요. 슬프외다. 이 내 죽음이여! 나는 떳떳이 자결했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제 자식놈이 살아 나라를 구하지 못했고 죽어 또한 큰 죄를 지었으니, 하늘에 더러워진 이름을 어떻게 다 씻어 버리겠어요. 쌓이고 쌓인 원한이 가슴 속속들이 박혀 한 때라도 잊을 날이 없군요.”

이 말을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부인이 몸을 끌어당겨 단정히 앉으며 말을 가로챘다.

제 낭군은 자기 재주가 감당하지도 못할 중책을 맡아 오직 험한 지리만 굳게 믿어 군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이에 밀어닥친 적군을 막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강을 휩쓰는 비바람에 사직(社稷)이 무너졌고 삼군(三軍)이 박살났습니다. 상감마마가 성에서 내려오시어 무릎 꿇고 항복을 했으니, 슬프외다. 만사를 다 그르쳤습니다. 이것이 모두 강도를 지키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낭군은 군부(軍部)에 회부되어 도끼로 목이 잘려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민구(李敏求)는 저의 낭군과 같은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무슨 충의가 있었다고 의젓이 성명을 보전하여 제 명대로 살았습니까? 또한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은 해내(海內)에 웅거하였는데다 병권을 장악하였으면서도 한 번도 나아가 싸우지 않았습니다. 적에게 지레 겁을 집어먹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도망쳐 바위틈에 숨어 구차한 목숨을 보전했고요. 더욱이 어두운 밤에 상감마마를 만나서는 행인처럼 대했답니다. 그래도 법에 의해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은총이 더했으니, 정말 가소로운 노릇이지요. 심기원(沈器遠)은 그 기량이 보잘것없고 생각이 깊지 못한데도 도성을 지킬 중임을 맡았지만, 군신의 의리를 망각하고 몰래 제 몸만 빠져나와 환난을 피했습니다. 이처럼 나라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군율(軍律)을 몸소 행하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은총이 깊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낭군님만이 홀로 죽임을 당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까? 슬프도다. 내 이 한 목숨도 애석하지 않사오나, 불쌍한 늙은 시아버님이 백발인생에 아들을 잃어 대가 끊어지게 되었으니, 이 원통하고 가엾은 상태야 산 자나 죽은 자나 어찌 다르오리까?”

이 말이 끝나자마자 또 부인이 나섰다. 그 부인은 나이가 새파란 젊은 나이였다. 날렵한 몸매에 초승달 같은 눈썹을 하고 있었다. 앵두알 같은 붉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그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자태는 서왕모(西王母)가 요지연(瑤池宴)에 내려선 모습이었고, 삼원 봄바람에 방긋 웃는 복사꽃이었다. 월궁항아(月宮姮娥)가 이슬을 가득 머금은 그대로 옥안(玉顔)을 나직이 숙이고 슬픈 회포를 하소연했다.

나는 본래 왕후의 조카딸로 비단 속에서 곱게 자랐습니다. 나이 들어 김씨의 아내가 되었지요. 원앙금침에 파묻혀 향락인들 오죽했겠어요. 부귀영화를 영원토록 누리려고 했더니 뜻밖의 전란을 당하여 참혹한 가화(家禍)를 입었느니, 나와 같이 박복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 몸 한번 죽어지면 인간세상과는 영원히 이별이니, 하늘이여! 어찌하오리까? 더구나 낭군은 풍진(風塵) 속에 홀로 남아있고 눈마저 멀었다오. 부모 잃은 망극한 슬픔과 간고한 그 형상은 죽은 넋인들 차마 못 잊을 거예요.”

그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부인이 앉은자리에서 뛰쳐나왔다. 그 부인도 품은 뜻을 토하는데, 그 얼굴은 이미 철 지난 꽃처럼 시들었고 바싹 말라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도록 탄식을 하며 말을 했다.

나는 왕비의 언니이며 또한 대신의 아내가 되어 부귀영화가 극에 달해, 내 평생에 오늘과 같은 참혹한 일이 있을까 생각이나 했겠어요. 그러나 사람의 일이 한 번 이같이 되니, 내 슬픔 이 죽음도 남과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정렬(貞烈)로 표창하여 죽은 넋을 빛내 줄뿐이니, 이것은 불량한 내 자식의 그릇된 처사입니다. 적군이 아직 밀려오기도 전이었지요. 강권에 못 이겨 칼을 들어 죽였으니 어찌 여론(輿論)이 없었겠습니까. 억지 정절을 만들어 정문(旌門)을 세웠으니 모두가 더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오.”

또 한 부인이 내달아 양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얼굴을 다소곳이 숙여 개연히 탄식하며 말했다.

타고난 운명이 정해 있으니 박명함은 피하지 못할 것인가 봅니다. 저는 남의 후처가 되어 청운(靑雲)을 헛되이 보냈지요. 살아생전에 무슨 낙인들 보았겠어요. 성이 무너져 어지러운 풍우 속에 꽃잎이 흩어지고 옥이 부서진 것은 조금도 애석하지 않습니다. 단지 낭군이 상감마마를 가까이 모셔 천은(天恩)을 입었으니, 당대의 충신을 말한다면 제 낭군이 아니고 그 누가 알겠어요. 상감마마께옵서 굳게 믿으시고 원손(元孫)과 비빈(妃嬪)을 부탁하셨지요. 낭군은 한 번 크게 충성을 발하여 큰일을 하려고 나가긴 했습니다. 다만 한이 된 것은 낭군이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문을 활짝 열어놓아 되놈들을 받아들여 무릎을 꿇고 항복하여 구차한 죽음을 면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슬픈 노릇입니다. 저승의 염라대왕은 인간의 선과 악을 두루 살피신 답니다. 지옥에 들어올 때 사자(使者)에게 이렇게 명령을 전했답니다. ‘너는 큰 화를 입기 전에 칼을 들어 자결했으니 고왕금래(古往今來)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너의 남편이 임금의 은혜를 잊고 성을 버리고 구차히 생명을 도모했으니 그 죄는 진실로 중하도다. 그래도 지옥에 던져 버려 영영 인세(人世)에는 태어나지 못할 것이다.’하였으니, 내 이 슬픈 회포가 어떻겠어요.”

한 부인은 앞섶이 붉은 피로 낭자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부인은 뜨거운 눈물을 한없이 쏟으며 머리를 살며시 숙여 조용조용히 말했다.

시아버님의 죄과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이 슬픔을 어찌 억제할 수 있겠어요. 특별한 천은을 입어 강도 유수(留守)가 되었습니다. 강도는 중한 땅이라 마땅히 굳게 지킬 것이거늘, 천험(天險)만 허황하게 믿는 데다 호병(胡兵)의 날카로운 찬 검을 우습게 여겼답니다. 그래서 해가 중천에 오르도록 단잠에서 헤어나질 못했지요. 또한 매일 크게 취해 강루에 누워 수욕(獸慾)만 채웠답니다. 이러니 국가의 전망을 꿈엔들 생각했겠어요. 그는 원래 제수(除水)하는 법을 알지 못했고 또한 험한 풍랑에 키를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주사(舟師)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적막한 강성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어요. 전선(戰船)만이 잔물결에 흔들릴 뿐이었습니다. 날랜 군사며 험한 지리를 가지고서도 인사를 그르쳤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강개(慷慨) 남아라고는 오직 강진흔(姜晉昕) 한 사람에 그쳐 그 만이 일전을 했을 따름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시아버지시여,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겠어요. 제 비록 한낱 아녀자일망정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또 한 부인은 옷깃을 여미면서 나섰다. 귀밑털이 희끗희끗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홍안은 이미 간 곳이 없었다. 훌쩍거리며 말했다.

낭군님 살아생전에 이 몸 먼저 죽지를 못하고 모짐 목숨이 살아 이 난을 당했지요. 아들이 처사를 크게 그르친 까닭으로 하여 백발이 남은 목숨을 눈 깜짝 사이에 끊어버리고, 꽃다운 아이들이 적의 칼에 죽었습니다. 인사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감히 목숨을 논할 수 있겠어요. 육지에서의 피난도 면할 수 있었거든, 뒤늦게 강도에 들어온 것은 수비하는 군사들의 훈련을 알지 못하고 그러했던가요? 군무를 잘못 검찰(檢察)해서 그랬던가요? 군사를 훈련시키는 사람은 장신(張紳)이었고 군무를 검찰하는 사람은 김경징(金慶徵)이었지요. 그렇다면 국가를 호위하는 충심이 없고 호사한 생활에만 정신을 팔다 천하의 요새를 잃었으니 말입니다. 무슨 관계있어 이 강도에 들어왔다가 내 몸으로 하여금 천명을 누리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오호 낭군이여! 다행히 죽음을 지켜 주지 않는다면 늙은 이 몸의 목숨은 온전할 것입니다.”

슬픈 회포를 미처 다 말하기도 전에 또 한사람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빼어난 풍채는 여자중의 장부(丈夫)였다. 강개(慷慨)하여 말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나서 몇 번이고 살겠다고 그 야단인지요, 조만 간에 어차피 한 번은 죽을 것이어늘, 조용히 죽어 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오리까. 슬프외다. 자결만이 부인의 정절로서 길이 청사에 빛날 것입니다. 혼은 천당에 들어갈 것이며, 또 속의 인간만이 오직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상감마마가 내리신 옷을 입고 삼감 마마의 녹을 먹으며 살아생전에 국은(國恩) 막중했지요. 그러나 몸이 창황한 즈음에 처해서 인사(人事)를 생각지 않고 오직 살기만을 좋아하고 죽기를 두려워해서 기꺼이 적의 종이 되었지요, 이러하니 풍채는 매몰이 되었고 체신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상투를 잘라내 버렸으니, 그 꼬락서니가 오죽했겠습니까. 살려고 한 짓이 이토록 추잡해졌을 뿐이옵니다. 정묘년의 호란 때, 강화를 주장하여 고국으로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에는 진실로 까닭이 있었습니다. 선인(先人)의 유골을 팔아 사함을 받고서 집으로 돌아왔으니, 일세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살아도 산 보람이 없습니다. 슬프외다. 구차하게 살아남는 것이 어찌 비명(非命)에 죽어 버린 나와 같으리오.”

꽃같은 얼굴, 삼단 같은 마리의 또 한 부인이 다음을 받았다. 앵두같은 붉은 입술로 조용히 발을 이어 갔다.

원래 우리나라는 산천이 아주 험합니다. 적병을 맞아 싸우기에 유리한 지역이 어찌 한두 군데뿐이겠습니까. 낭군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을 적입니다. 서울에서 큰 난리를 맞으니 주인 없는 아녀자로서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갈 바를 몰라 허둥거리다가 군중을 따라 성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천생의 약질이라서 걷자니 엎어지고 넘어지고 했지요. 그 고생스러움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겠어요. 홀몸으로 울며불며 사정을 해서 배에 간신히 올라 강도에 들어왔습니다. 와서 보니 푸른 바다와 높은 산이며, 성첩(城堞)이 구름에 닿아 나는 새도 못 지나갈 것만 같았습니다. 어찌 호병들인들 별수 있으랴 하였지요. 그래서 적을 안심했는데 뜻밖에도 흉도(凶徒)들이 여기까지 밀어닥쳤습니다. 드디어 대낮인데도 강도 성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위나라 산천이 견고치 않음이 아니었고, 진나라 군신의 지략이 모자랐습니다. 그 시운(時運)에 있어서 그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사납고 약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가 하면, 착한 사람 악한 사람 할 것 없이 함께 망하는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래, 정절의 마음은 이미 드러났고, 흉적의 창탈(搶奪)은 무수히 박혔으니, 해외의 외로운 넋은 그 누굴 의지하겠습니까. 수국(水國)에 풍진이 자욱히 일어나니 망극한 슬픈 회포가 바다처럼 굽었습니다. 비단 저고리를 입고 푸른 띠를 두른, 머리털이 서리처럼 하얀 늙은이가 좌우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두 여자를 가리키는데 한 여자는 며느리요, 또 한 여자는 딸입니다. 살아서는 혼백이 외롭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할까요. 어찌 원망인들 없겠습니까. 며느리와 딸은 꽃같이 젊은 나이였습니다. 비록 내 나이 늙었으나 이제 겨우 쉰입니다. 만약 병화가 없었다면 어찌 이처럼 인간 세계를 하직하겠습니까.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낭군이 지휘관의 몸으로 강도에 들어왔습니다. 강도란 땅은 능히 적을 막을 만한데 죽게 된 것은 낭군이 처사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우거진 풀잎을 붉은 피로 물들였고, 혼백은 구천에 들어갔으니 인세의 가는 곳마다 비단 장막이 쓸쓸하고, 천년을 묵은 화표주(華表柱)에는 외로운 학이 돌아오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직 우리 세 사람은 다 같이 정절을 지켜 죽었으니,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본들 하나도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인간세계에 살아남아 영영 빛을 앓은 자는 가엾은 내 동생이옵니다. 명관(名官)의 아내가 되어 정절을 지켜 죽지 못했으니 참으로 한이 되옵니다. 늘그막에 무슨 추문인지 비단옷을 차려 입고 나귀등에 높이 앉아 채찍을 휘두르며 봄바람 살랑거리는 낙조(落照) 비낀 언덕을 질주하니, 사람마다 쑥덕쑥덕 온 세상이 들썩였지요. 이러니 살았어도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나 또한 무안하여 몸둘 바가 없습니다.”

좌중에서 또 한 여자가 나섰다. 얼굴은 뭉개지고 해골을 깨어져 온 몸에 피가 낭자하였다. 그 참혹한 모습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이나 끔찍했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말했다.

나는 그때 마니산(摩尼山) 바위 속에 숨었었지요. 사람이 위를 버리고 살기에만 급급함은 차라리 한 번 죽느니만 못합니다. 절벽에 투신하여 백골이 진토(塵土)가 되었으니, 이것은 마음 이로나마 만족스런 처사였습니다. 조금도 한이 되는 바가 없습니다. 하오나 애닯도다. 어찌하여 낭군은 난세에 처하여 시세(時勢)를 살피지 못했을까? 헛되이 서울에만 머물다가 전쟁이 터지니 강도에 들어왔지요. 높은 자리에 앉은 분들과 함께 불에 뛰어든 부나비처럼 되었으니 이것이 슬프옵니다. 젊은 청운에 올라 오래도록 부귀를 누린 자는 사직이 망할 때 절사(節死)함이 마땅한 일이오나, 불쌍한 우리 낭군은 벼슬 하나 얻지 못해 아무런 국은도 입음이 없이 해외의 위경(危境)에서 그 귀중한 목숨을 잃었으니 슬프고 애닯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나왔다. 빼어난 자태는 천하의 일색이었다. 비단 옥은 함빡 적시고 뱃속 가득히 물을 머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창해에 빠져 죽은 시신이었다. 구슬 같은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향기로운 이슬이 흘러내렸고, 맑은 소리는 이어졌다 끊어졌다 했다.

저의 낭군은 선비였습니다. 달밝은 연못가에서 서로 만난 지 두어 달만에 큰 환란을 당했습니다. 의리로써 살 수가 없어 푸른 바다에 몸을 던져 지금 시체가 떠다니고 있습니다. 저의 이 애석한 정절은 그 증거가 없어서 하늘이나 알고, 해가 비칠 따름입니다. 이 한 조각 곧은 마음을 낭군이 몰라주시고, 혹 호지(胡地)에 끌려가 있는지. 혹은 길바닥에 죽어 누워 있는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외로운 혼으로 하여금 낭군의 꿈속에나 찾아들어 원통한 회포를 풀고 싶습니다. 그러나 구천이 아득하여 천 리나 되니 저와 낭군은 꿈속에서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니 설움이 북받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이런 중에 또한 부인이 끼어들었다. 비단 같은 고운 얼굴, 꽃다운 매무새, 송죽 같은 절개는 추상(抽象)처럼 싸늘했다. 세 치 혀끝으로 토해내는 말마다 의리에 사무쳐 지금까지 말 한 중에서 단연 으뜸이었다.

나라에 어진 장수가 없는데다가 인심까지 험악했습니다. 그러고야 어찌 패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천이 험하기론 파촉(巴蜀)보다 더 합니다. 그러나 장수가 장수답지 못하고 병졸도 형편없으니, 등애(鄧艾)가 한 번 일어나매, 척의 후주 유선(劉禪)이 눈물을 뿌렸습니다. 성 높고 물 깊기로는 백제의 웅도(熊都)와 같았습니다. 지세는 이러했으나, 가무만 일삼고 군무를 살피지 않다가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백마강의 슬픈 역사 천 년토록 깊사옵니다. 이러니 망하는 건 천운이요, 빛나는 건 낭군이요, 패하는 건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변치 못하면 금성(金城)도 견고치 못하며 탕지(湯池)도 험할 것이 못 되는데, 하물며 저 강도는 해외의 조그만 땅입니다. 파촉에 비한다면 산도 산이라 할 것이 없고, 강도 강이라 할 것이 못됩니다. 이 산과 강을 험하다고 믿고 적의 무서운 군사를 하찮게 여겼으니 환난이 닥쳐와도 그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루아침의 비바람에 모든 꽃이 산산이 흩어지니 이 연약한 몸으로 어찌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미련 없이 자결하여 혼백을 구천에 들었으나, 그 향기로운 이름은 세상에 떨쳤습니다. 이 때 염라대왕이 나를 불러 말했습니다.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청풍처럼 쇄락하고, 추상처럼 늠름하도다. 뇌성벽력을 하지 않았으며, 도기(盜起)도 두려워하지 않았도다. 갑자년의 변고에는 원훈(元勳)들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고, 정묘년의 난리에는 화의(和議)를 배척하여 강도를 불태우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을 술책을 일렀고, 대의명분을 세워 형제의 맹약(盟約)을 헌신짝처럼 하니 지극히 충성이요, 선견지명이로다. 주운(朱雲) 같은 곧은 절개여 급암(汲黯) 같은 바른 말은 이 사람 이외에 그 누가 또 있단 말인고. 이는 바로 너의 아비로다. 너 또한 그 뜻 그 절개를 본받아 절의로 죽었으니 가히 포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극락세계에서 편안히 지내게 하겠노라.’ 했습니다. 이윽고 선동(仙童)이 명부(冥府)에 다다라 염왕께 아뢰기를, ‘전쟁의 사나운 풍파 속에서도 절의로 죽은 사람이 많사옵니다.’ 옥황상제께서 측은히 여기시어 전교(傳敎)하시기를, ‘절부(節婦)의 기록대장을 짐이 한 번 보고자 하니 너는 어김없이 명대로 하라.’ 하셨습니다. 하니, 염왕이 친히 옥첩(玉牒)을 봉하여 천부(天府)에 올리니 상제께서 다 보시고 명부에서 조서를 내리시기를, ‘짐이 가장 중하게 여기는 것은 의()이며, 또한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은 절개로다. 이의와 절개를 능히 지키고 행한 사람은 모두 천당에 들어오게 하여 그 여생을 편안하게 하리라. 더구나 그대와 시아버지의 덕망과 절의는 짐이 가장 아끼는 바로다. 장차 포상하리니 명부에 두지 말고 옥허청궁(玉虛淸宮) 소계전(宵桂殿)에 보내어 월궁항아(月宮姮娥)로 더불어 달밤을 즐기며, 직녀와 더불어 은하를 거닐게 하고, 떠한 염왕이 정절을 창명(彰明)하면 짐의 의열(義烈)을 존숭함이 나타나지 않겠는고?’ 하였습니다. 염왕은 그 명령에 절하여 사례하고 저를 학의 등에 태우니 구만리 창공을 지척같이 날아갔습니다. 정말 시아버지의 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천부에서 생활할 것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또 한 부인이 나섰다. 난초같은 그윽한 기품과 고요한 자태가 눈 속의 송죽 같았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붉은 입술을 열어 말했다.

저는 본래 선비의 아내로 낭군을 섬겨온 지 겨우 반년이나 될까요. 강도로 피난을 나왔다가 낭군이 덜컥 역질에 걸렸습니다. 아무리 위험이 닥쳐온들 잠시도 병상 옆을 떠날 수 없어 곁에서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수같은 되놈들이 어찌 가만둘 리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혼백이 구천에 떨어졌습니다. 이 때 염왕이 말하기를, ‘광해군의 말년에는 조정이 혼탁하여 임금과 신하가 제 신분을 망각하고 광분하였도다. 또한 강도의 풍우 속에서 모두들 절개를 버리고 삶을 도모하였거늘, 너는 여자의 몸으로 그 욕봄을 부끄럽게 여겨 죽음을 달게 받았도다. 전후 할아비와 손녀의 절개가 어찌 다르리요. 그 할아비에 그 손녀로다. 참으로 아름답고 아름답도다. 이러므로 너는 천당에 들어가서 만세토록 길이 행복을 누리라.’ 했습니다. 그러니 비록 젊을 나이에 죽었다고 한들 어찌 한이 되겠습니까. 다만 한스러운 것은 백발의 양친과 나이 어린 낭군이 풍진 속에 간신히 살아남은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슬프게 우는소리며 꽃 지는 봄바람 오동나무에 내리는 이슬에 애타게 흐느끼며 눈물 마를 날이 없으니, 이별의 슬픔을 더욱 북돋는군요. 그러니 부모를 여의고 죽은 것은 이른바 불효요, 남편보다 먼저 죽은 것은 현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의 지은 죄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흐느낀다.

모든 부인들은 제각기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깊이 탄식하기도 했고,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으며, 대성통곡하기도 했다. 글로는 그것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조금 시간이 흘렀다. 한 여자가 일어나 사람 속을 왔다갔다 했다. 그녀는 두 눈동자가 샛별같이 유난히 빛나고 초승달 같은 눈썹이며 삼단 같은 머리는 가히 선녀라 할 만했다. 선사는 매우 이상히 여기며 속으로 생각했다.

직녀가 은하에서 내려왔나, 월궁에서 항아가 내려왔나. 만일 직녀라 한다면 견우 낭군을 이별한 뒤에 만나지 못했으니 당연히 슬픔에 싸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 또한 월궁의 항아라면 긴긴 밤 독수공방에서 애타게 그리워한다고 홍안은 늙어 가고 백발이 성성할 터인데, 도무지 이 여자는 복사꽃 아롱진 뺨에 근심어린 빛이 전혀 없으니 알지 못할 일이로다. 이 또한 괴이한 일이구나.’

혼자 온갖 궁리를 했으니 알 수 없었다.

이 때 그 여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첩은 기생이라. 노래와 춤이 널리 아름답습니다. 못 사내들의 경쟁 속에 밤마다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즐겨 인생 환락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정절입니다. 그래서 하루아침에 마음을 가다듬고, 깊은 규중에 들어가 오래도록 한 남편을 섬겨 다시는 두 마음을 먹지 않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난리가 일어나 꽃 같은 청춘이 그만 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오늘밤 이 높은 회합에 제가 낀다는 것은 너무나 과분합니다. 외람되게 숭렬(崇烈)하신 여러분들의 곁에 끼어 다행히도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 절의의 높으심과 정렬의 아름다움은 하늘도 감동하고 사람마다 탄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겠습니다. 몸은 비록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강도가 함락되고 남한성이 위태로워 상감마마의 욕되됨과 국치가 임박하였지만, 충신 절사는 만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부녀자만의 정절이 늠름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영광스런 죽음이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설워하십니까?”

이 말이 끝나자마자, 좌중의 여러 부인들이 일시에 통곡했다. 그 소리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차마 들을 수 없었다. 선사는 혹시나 알아차릴까 두려워 숲 속에 숨어서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날 새기를 기다려 물러나오다 별안간 깨어 보니 한 꿈이었다.


1) 청나라

2) 강화도

3) 임금을 돕고 백관을 다스리는 대신. 재상(宰相)

4) 체찰사. 지방에 군란(軍亂)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그곳에 가서 일반 군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로 보통 재상이 겸임함.

5) 나라 또는 조정을 이르는 말.

6) 군 전체를 이르던 말.

7) (15891670) 1626년 대사간이 되고, 이듬 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가 되어 세자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그 해 승지가 되었다가 외직인 임천군수로 나갔다. 1636년 이조참판·동지경연사를 역임하였다.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부사가 되어 왕을 강화에 모시기 위해 배편을 준비했으나, 적군의 진격이 빨라 왕이 부득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임을 완수할 수 없었다. 난이 끝난 뒤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로 아산에 유배되었다가 영변으로 옮겨졌다. 유배지에서 책임을 통감하면서 날마다 눈물로 자책을 하다가 1649년에 풀려났다.

8) 전쟁이 났을 때 군무를 통괄하던 임시 무관 벼슬.

9) (15881651)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했고, 순검사·임진수어사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1633년 도원수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그는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이후 공신 세력의 권력 추구와 패전에 대해 심한 공격을 하는 일반 사류들에 의해 계속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반청론자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10) 나라 안

11) (?∼1644) 1628년 강화부유수를 거쳐, 1634년 공조판서에 승진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으로 서울의 방어책임을 맡았고, 1642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으로 승진하었다. 1644년 에 좌의정과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임하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반란을 꾀하였는데 탄로되어 거사 전에 죽음을 당하였다.

12) 중국 신화에 나오는 신녀로 불사약을 가진 선녀라고 한다.

13) 서왕모가 산다는 연못

14) 전설에서 달 속에 있다는 궁전에서 사는 선녀.

15) 세자의 아들

16) 수도 이외의 요긴한 곳을 맡아 다스리던 정이품의 외관(外官) 벼슬.

17) 수군

18) (?1637) 병자호란 때 충청수사를 지냈고, 강화도의 수군을 지휘하였다. 강화검찰사 김경징은 물이 얼어 청군이 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청군과의 전투를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르곤 휘하의 청군은 선박을 징발하여 강화도를 공격해왔다. 이 때 강진흔은 주사대장 장신과 함께 200명의 수군과 7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갑곶 근처로 오는 청군의 전선을 침몰시켰다. 강진흔은 그 뒤에도 분전하여 청군의 전선 3척을 침몰시켰으나, 점점 청군의 수가 많아지자 장신은 싸우는 척 하다가 도주했다. 이에 격분한 강진흔은 장신을 질타했으나 장신은 그대로 도주했다. 결국 장신의 도주로 갑곶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청군들이 강화도에 상륙했다. 황선신이 100명의 군사로 맞서 싸웠으나 전사하고 강화도에 남은 김경징과 이민구는 겁에 질려 도주했다. 이에 청군은 손쉽게 강화성을 함락시켰고 봉림대군과 소현세자를 포함한 다수의 왕족과 사대부들을 인질로 잡았다. 이때 성에 남아있던 김상용은 자결하였다. 그 해 9, 조정에서는 강화도 방어에 임한 장수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진흔도 체포되어 국문을 받은 뒤 참수된 뒤 효수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19) (?∼1637) 1636년 강화유수로 전임되었다. 그 해 12월 병자호란을 당하여 강도(江都)방위를 맡게 되었는데, 전세가 불리하여지자 왕실과 노모를 버리고 먼저 도망하여 강도가 함락되었다. 사헌부에서 그를 참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전일의 공로를 생각하여 자진하게 하였다.

20) (15891637)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도검찰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서 섬 안의 모든 일을 지휘, 명령해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였고, 강화를 금성철벽으로만 믿고 청나라 군사가 건너오지는 못한다고 호언하며,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 매일 술만 마시는 무사안일에 빠졌다. 그리고 김포와 통진에 있는 곡식을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배로 실어 날라 정실이 있는 사람에게만 나누어주는 처사로 민심을 크게 잃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군사가 침입한다는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대비책을 세우지 않다가 적군이 눈앞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방어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군사가 부족해 해안의 방어를 포기하고 강화성 안으로 들어와 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런데 백성들마저 흩어져 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나룻배로 도망해 마침내 성이 함락되었다. 대간으로부터 강화 수비의 실책에 대한 탄핵을 받아 사사되었다

21) 무덤 앞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

22) 청나라 땅.

23) 중국 위나라의 장수. 촉을 멸망시킴.

24) 중국 촉한의 마지막 황제.

25) 웅진(공주)

26) 나주

27) 탐라(제주)

28) 이괄의 난.

29) 중국 전한 때 노나라 사람. 사람됨이 강직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조정 대신들을 비판했다가 죽임을 당할 뻔했다. 만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보냈다.

30) 중국 전한 때 복양 사람. 사람 됨됨이가 충간을 좋아하고 임금에게 충언을 거침없이 제기하였다. 무위(無爲)의 정치를 주장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회양태수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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