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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의 한문소설, '만덕전'

New-Mountain(새뫼) 2022. 4. 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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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전(萬德傳)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신영산 풀이

 

 

萬德者, 姓金. 耽羅良家女也, 幼失母無所歸依, 托妓女爲生.

稍長, 官府籍萬德名妓案, 萬德雖屈首妓於役. 其自待不以妓也.

만덕자 성김 탐라양가녀야 유실모무소귀의 탁기녀위생

초장 관부적만덕명기안 만덕수굴수기어역 기자대부이기야.

 

만덕의 성은 김이다. 탐라의 양갓집 딸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어 기녀에게 의탁하여 살았다.

조금 자라서는 관아에서 만덕의 이름을 기생의 명부에 올렸기에, 만덕은 비록 머리를 숙여 기생으로 일했지만, 스스로 기생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年二十餘, 以其情泣訴於官, 官矜之除妓案, 復歸之良.

萬德雖家居乎庸奴 耽羅丈夫不迎夫.

其才長於殖貨, 能時物之貴賤, 以廢以居. 至數十年, 頗以積著名

년이십여 이기정읍소어관 관긍지제기안 복귀지랑

만덕수가거호용노 탐라장부불영부

기재장어식화 능시물지귀천 이폐이거 지수십년 파이적저명

 

나이가 스무 살 남짓 되었을 때, 사정을 관아에 호소하였더니, 관아에서 만덕을 불쌍히 여겨 기생의 명부에서 지워주었기에, 다시 양민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만덕은 비록 어느 집에서 노비처럼 지냈으나, 탐라의 장부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는 않았다.

만덕은 재화를 불리는 데 재주가 있었기에, 물건들이 귀하거나 천한 때를 맞추어 팔거나 사곤 하였다. 그렇게 수십여 년이 흐르자 많은 재산을 쌓을 수 있었고, 만덕은 그 이름이 널리 알릴 수 있었다,

 

聖上十九年乙卯, 耽羅大饑, 民相枕死.

上命船粟往哺, 鯨海八百里, 風檣來往如梭, 猶有未及時者.

성상십구년을묘 탐라대기 민상침사

상명선속왕포 경해팔백리 풍장래왕여사 유유미급시자

 

성상(정조) 19년인 을묘년(1795)에 탐라에 큰 흉년이 들게 되니, 백성들이 서로를 베고 누워 죽어갔다.

주상께서는 배에 곡식을 싣고 가서 먹이라 명하셨으나, 큰 바닷길이 팔백여 리라, 돛에 바람을 안고 베틀 위의 북처럼 오갔으나, 오히려 제때 미치지 못하였다.

 

於是萬德捐千金貿米, 陸地諸郡縣棹夫以時至.

萬德取十之一, 以活親族, 其餘盡輸之官.

浮黃者聞之, 集官庭如雲. 官劑其緩急, 分與之有差.

어시만덕연천금무미 육지제군현도부이시지

만덕취십지일 이활친족 기여진수지관

부황자문지 집관정여운 관제기완급 분여지유차

 

이에 만덕은 천금을 내어 쌀을 사오게 하니, 육지의 여러 군현에 있는 사공들이 때에 맞추어 곡식을 실어 왔다.

만덕은 그중에 열 중의 하나를 취하여 친척을 살렸고, 나머지는 모두 관아로 보냈다.

굶주려 살가죽이 누렇게 뜬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관아로 모여드니 마치 구름 같았다. 관아에서는 급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차등을 두어 나누어 주었다.

 

男若女出而頌萬德之恩, 咸以爲活我者萬德.

賑訖, 牧臣上其事于朝.

上大奇之, 回諭曰 : “萬德如有願, 無問難與易, 特施之.”

남약녀출이송만덕지은 함이위활아자만덕

진흘 목신상기사우조

상대기지 회유왈 만덕여유원 무문난여역 특시지

 

그러자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만덕의 은혜를 칭송하였다. 모두 이르기를 우리를 살린 사람은 만덕이라 하였다. 백성들을 돕는 일이 끝나자 탐라 목사는 그 일을 조정에 알렸다.

그러자 주상께서 이를 크게 기특하게 회답하는 유지를 내리셨으니, 이르시기를,

“만덕이 원하는 바가 있거든, 쉽고 어려운 것을 묻지 말고, 특별히 베풀도록 하라.”

하셨다.

 

牧臣招萬德以, 上諭諭之曰 : “若有何願?”

萬德對曰 :

無所願. 願一入京都, 瞻望聖人在處, 仍入金剛山, 觀萬二千峯 死無恨矣.”

목신초만덕이 상유유지왈 야유하원

만덕대왈

무소원 원일입경도 첨망성인재처 잉입금강산 관만이천봉 사무한의

 

목사가 만덕을 불러 주상의 유지를 내리며 이르기를,

“그대에게는 어떤 바람이 있는가?”

하니, 만덕이 답하였다,

“달리 바라는 것은 없사옵니다. 다만 원하기는 한양에 한 번 가서 주상께서 계신 곳을 바라보는 것이옵니다. 그리고는 금강산에 들어가 일만 이천 봉을 보는 것이니, 그리하면 죽어도 남은 한이 없겠나이다.”

 

盖耽羅女人之禁不得越海而陸, 國法也.

牧臣又以其願上, 上命如其願, 官給舖馬遞供饋.

萬德一帆踔雲海萬頃.

개탐라녀인지금부득월해이륙 국법야

목신우이기원상 상명여기원 관급포마체공궤

만덕일범탁운해만경

 

대개 탐라의 여인은 바다를 건너 육지로 갈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다.

목사가 또한 만덕의 바람을 주상께 올리니, 주상께서는 그 바람대로 하라 하고 명을 내리시니, 관아에선 역마를 내어주었고, 번갈아 음식을 제공하였다.

만덕이 탄 돛단배는 구름 같은 넓은 바다를 건넜다.

 

以丙辰秋入京師, 一再見蔡相國. 相國以其狀白, 上命宣惠廳月給粮.

居數日, 命爲內醫院醫女, 俾居諸醫女班首.

萬德依例詣, 內閤門, 問安殿宮, 各以女侍.

이병진추입경사 일재견채상국 상국이기장백 상명선혜청월급량

거수일 명위내의원의녀 비거제의녀반수

만덕의례예 내합문 문안전궁 각이녀시

 

만덕은 병진년(1796) 가을에 한양에 들어와, 한두 번 정승인 채제공을 만나 뵈었다. 채정승이 만덕과 나눈 얘기들을 아뢰니, 주상께서 선혜청에 명하여 매달 곡식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며칠 후에는 내의원의 의녀가 되도록 명하셨고, 모든 의녀들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하셨다.

만덕은 전례에 따라 편전 앞에 나아가 문안을 올렸고, 의녀가 되어 시중을 들었다.

 

傳敎曰 : “爾以一女子, 出義氣救饑餓千百名, 奇哉!”

賞賜甚厚.

전교왈 이이일녀자 출의기구기아천백명 기재

상사심후

 

그러자 주상께서 전교를 내리시기를,

“네가 일개 아녀자로, 의로운 용기를 내어 굶주린 백성 천백 명을 구해냈으니, 기특하도다!”

하시고는, 하사하신 상이 매우 많았다.

 

居半載, 用丁巳暮春, 入金剛山. 歷探萬瀑 衆香奇勝.

遇金佛輒頂禮, 供養盡其誠.

盖佛法不入耽羅國, 萬德時年五十八, 始見有梵宇佛像也.

卒乃踰鴈門嶺, 由楡岾下高城, 泛舟三日浦, 登通川之叢石亭, 以盡天下瑰觀.

거반재 용정사모춘 입금강산 역탐만폭 중향기승

우금불첩정례 공양진기성

개불법불입탐라국 만덕시년오십팔 시견유범우불상야

졸내유안문령 유유점하고성 범주삼일포 등통천지총석정 이진천하괴관

 

만덕은 반년을 더 머문 후에, 정사년(1797) 늦은 봄에 금강산에 들어갔고, 만폭동과 중향성 등 기이한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녔다.

그러다 금부처를 만나면 문득 머리를 땅에 대고 공양하기를 정성을 다하였다.

대개 불법이 탐라에는 들어가지 않았기에, 만덕은 나이 쉰여덟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사찰과 불상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안문령을 넘어, 유점사를 거쳐 고성에서 내려가, 삼일포에서 배를 타고 통천의 총석정에 올랐으니, 천하의 아름다운 경관을 모두 보게 되었다.

 

然後還入京, 留若干日.

將歸故國, 詣內院告以歸, 殿宮皆賞賜如前.

當是時, 萬德名滿王城, 公卿大夫士無不願一見萬德面.

萬德臨行, 辭蔡相國哽咽曰 : “此生不可復瞻相公顔貌,” 仍潸然泣下.

연후환입경 유약간일

장귀고국 예내원고이귀 전궁개상사여전

당시시 만덕명만왕성 공경대부사무불원일견만덕면

만덕임행 사채상국경연왈 차생불가복첨상공안모 잉산연읍하

 

그런 후에 다시 한양으로 들어와 며칠 동안 머물렀다.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할 때 내원에 이르러 돌아갈 뜻을 알리니, 대궐에서 모두들 상을 내리시기를, 한양에 처음 왔을 때처럼 하였다.

이때 만덕의 이름이 한양성에 자자하여, 공경과 대부와 선비들이 한 번이라도 만덕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만덕이 떠나려 할 때, 채정승에게 목이 메어 이르기를,

“이승에서 다시 상공의 얼굴을 뵐 수 없겠나이다.”

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相國曰 : “秦皇漢武皆稱海外有三神山.

世言 我國之漢挐, 卽所謂瀛洲, 金剛, 卽所謂蓬萊.

若生長耽羅登漢挐, 㪺白鹿潭水, 今又踏遍金剛, 三神之中, 其二皆爲若所包攬.

天下之億兆男子, 有能是者否. 今臨別, 乃反有兒女子刺刺態何也?”

상국왈 진황한무개칭해외유삼신산.

세언 아국지한나 즉소위영주 금강 즉소위봉래

약생장탐라등한나 구백록담수 금우답편금강 삼신지중 기이개위약소포람

천하지억조남자 유능시자부 금림별 내반유아녀자자자태하야

 

이에 채정승이 이르기를.

“진시황이나 한무제 모두 해외에 삼신산이 있다고 말해 왔네. 세상에서는 우리나라의 한라산은 곧 영주산이요, 금강산이 곧 봉래산이라 한다네. 자네는 탐라에서 태어나고 자라 한라산에 올라갔고, 백록담 물을 떠서 마셨으며, 이번에는 또한 금강산을 두루 다녔으니, 삼신산 중에 두 산을 두루 관람한 것이네.

천하의 뭇 사내들 중에도, 이렇게 했던 사람이 없었네. 그런데 지금 이별한다고 하여. 도리어 아녀자의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이니 도대체 어쩐 일이런가?”

하였다.

 

於是敍其事, 爲萬德傳, 笑而與之.

聖上二十一年丁巳夏至日, 樊巖蔡相國七十八, 書于忠肝義膽軒.

어시서기사 위만덕전 소이여지

성상이십일년정사하지일 번암채상국칠십팔 서우충간의담헌

 

그리고는 그 일을 서술하여, 만덕전을 지었고, 웃으며 만덕에게 주었다.

성상 21년 정사년 하짓날에, 번암 채정승이 나이 일흔여덟 살에, 서재인 충간의담헌에서 쓰다.

- 樊巖先生集(번암선생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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