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심쩍하게 쓰는 미심적 이야기
교내 백일장에 올라온 글을 읽고 나서-
인천영종고등학교 국어교사 신영산
(글을 읽기 전에)
# 이 글에 쓴 학생들의 알파벳 머리글자는 학생들의 이름이나 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냥 붙였습니다.
# 학생들의 글(시)에 대한 순서는 이번 백일장의 순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내용을 흐름에 따라 늘어놓았습니다.
# 학생들의 글(시) 전부를 들어야 하겠지만, 분량상의 어려움이 있어, 일부만 들었습니다. 따로 읽을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글입니다.
# ‘······’는 생략한 부분입니다. ‘ / ’는 행 구분을, ‘//’는 연 구분을 나타낸 것입니다. 맨 뒤의 ‘-○○’는 제목입니다.
다른 이들이 쓴 글을 읽는 것은 낯섦과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 안고 가는 일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글이란 그 글을 쓴 이들의 삶과 생각과 꿈이 담겨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대개 사람들이란 자기 안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기에 익숙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들을 읽게 되는 것은 언제나 낯선 일일 터입니다. 그리고 나를 벗어나 다른 이들을 읽으면서 그들과는 다른 내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기에 부족한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글로부터 나의 울타리를 벗어나 또 다른 세상을 그려보고 또 다른 생각들을 새겨보면서 여기에서 내 걸음의 시작을 찾아간다는 것은 설레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학교 교내 백일장 대회 시 부분에 몇 명의 학생들이 관심을 가졌고, 몇 명의 학생들이 글을 올렸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나, 이 신아무개의 손에 들린 글은 모두 31명이 쓴 글이었습니다. 이 글들을 한 줄로 세워 달라는 난감한 부탁을 받고 잠시 고민하다가 심사평이 아닌 신아무개의 느낌을 아래처럼 적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낯섦과 두려움과 설렘으로.
다만 모든 글들이 다 심혈을 기울인 결과물인데도 열 명의 학생 글만 소개하는 것이 아쉽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처음으로 소개하는 글은 B학생의 ‘비겁’과 '늪'이라는 시입니다. 이 두 편의 시를 참 많이 당혹해하면서 읽었습니다. B학생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니까, 이 시에 담겨 있는 내용들이 픽션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들 시에서 어디까지 메타포로 치장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진솔한 마음의 울림인지도 역시 신아무개는 구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보통의 시들은 다른 일반적인 글들과는 달리 글을 쓰는 이들의 삶이 투영되는 것이니까, 이들 시에서도 B학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난 비겁한 놈 맞아 / 선생님이 무서웠으니까 / 학폭 가기 싫어서 / 부모님 뒤에 숨었어 ··· – 비겁”
이 시의 시어들은 흔히 보게 되는 고운 시어들은 아니었습니다. 거칠면서도 우리가 학교에서 꺼리던 단어들이 서슴지 않게 노출되고 있었습니다. 또,
“ ··· 나는 늪에 있어 나는 늪에 있어 / 모두가 내려다 보는 늪에 있어 ··· - 늪”
이러면서 스스로를 자학하는 듯 거칠게 던져두는 단어들이 파편이 되어 신아무개의 가슴에 박히는 듯하여 많이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글에 실어 내보이는 B학생의 용기를 보며, B학생이 ‘늪’에 빠졌다는 느낌이나 ‘비겁’함을 자책했던 일들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기를 기대해 봅니다. 또 시를 쓰며 극복이 되었다면, 이들 시는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고, ‘미심적’이라는 백일장은 제 역할 이상을 해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어둡게 시작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심각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친구와의 농담처럼 유쾌하기도 하고,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Y학생의 ‘무한리필’은 즐겁게 읽은 시입니다.
“친구와 고기집에 / 한 점 두 점 // 익어가는 덩어리마다 / 점점 빨라지는 젓가락질 // 마지막 고기 불 위에 얹으며 / 시작되는 눈치싸움 // 포기하는 아쉽고 / 먹기에는 미덕없는 / 마지막 고기 한 점 // 물 마시며 눈치 보고 / 에먼 밥공기에 화풀이 해보지만 / 결국 놓친 고기 한 점 // '내가 무한리필 가자니까' – 무한리필”
길지만 시 전체를 옮겨 보았습니다. 한 부분만으로는 이 시에 닮겨 있는 유머를 읽어내기가 어려워 그랬습니다. 지금 고기 불판 앞에서 눈치싸움을 하고 있는 Y학생과 친구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비록 고기 한 점을 얻기 위해 현재는 치열한 투쟁을 하고 있지만, 이 친구들의 우정은 꽤나 오래 갈 것 같습니다. 흔히 시란 고상하거나, 아름답거나, 감상적이라는 고정관념들을 과감하게 깨고 우리들의 삶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 모두가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쓰는 신아무개는 교사이고, 읽고 있는 글들은 학생들이 쓴 글입니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학생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학생들의 삶과 생각과 꿈을 읽어내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 글에서 읽게 되는 우리 학생들의 삶은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K학생의 글이지만, 다른 학생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 학교도 꾸준히 잘 다녀야 하고 / 시험도 잘 봐야 하고 / 책도 많이 읽어야 한다 / 한마디로 학생부를 가득 채워야 한다 // 추가적으로 수능도 잘 봐야 한다 / 아, 물론 대학 면접도 잘 봐야 한다 ··· - 학생의 길”
이것이 우리 학생들이 지금 겪고 있는 또는 겪어야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런 글을 쓸 때 아름다운 수사법을 동원하여 곱게 꾸며내기에는 여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업과 입시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 학생들의 생각은 건조해지면서 거칠어질 테니까요. 아니 오히려 그렇게 쓸 때 더 우리 마음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래도 이런 시간의 아픔은 금방 극복될 것으로 기대해 봅니다. K학생의 다음 시처럼 말입니다.
“ ··· 마치고 나오는 길 제대로 망친 시험 탓에 / 앞 길이 캄캄했는데 // 갑자가 눈이 잘 보인다 / 아, 꿈이네, 다행이다 - 꿈”
그래도 이렇게 아무리 위로한다 해도 우리 학생들을 둘러싸고 있는 마음의 갈등들은 쉬이 극복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삶으로 정해져 있을까요? 환한 것과 막막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많을까요? 보일 듯하지만 제대로 보이지는 않고, 예상은 해 보지만, 정말 예상이 되지 않는 삶. 이렇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이라고 어른들은 말하지만 그게 정말 맞는지 알 수 없는 것. 바람에 날려가는 민들레 홀씨를 보며 앞으로 어디로 날려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러한 마음을 A학생은 ‘민들레 홀씨’에 담아냈습니다.
“ ··· 세 번째 홀씨 바람을 타고 날아가 / 작은 화단에 앉았다 / 고운 흙 위에 앉아 뿌리를 내렸지만 / 비가 내리지 않아 피우지 못했다 // 약한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어와 / 마지막 홀씨 어디로 날아갈까··· - 민들레 홀씨”
하지만 너무 걱정은 하지 마세요. 홀씨가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건 여러분만의 일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하는 어른들도 역시 민들레 홀씨 같은 삶을 살고 있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옆에는 누가 있고 그 누구 옆에 내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보다 저 사람처럼 저렇게 사는 것이 더 나았을까를 고민하게 되고, 내가 사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꿋꿋하게 살아가려고 해도 옆 사람이 들고 있는 떡이 커 보이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M학생은 이것을 ‘물고기와 인어’라는 시로 잘 표현했습니다.
“물고기는 인어를 부러워했다 / 인어는 하반신이 물고기고 / 상반신이 인간이기에 / 물고기의 눈에는 마치 인어가 / 물속의 자유도 / 지상에서의 자유도 /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그러나 인어는 물고기를 부러워했다 // ··· // 인어의 눈에는 마치 물고기 서로가 가진 자유를 부러워했다 - 물고기와 인어”
그렇다고 우리가 물고기를 버리고 인어가 될 수 있을까요?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을 이루고 있는 내 삶이란 모든 추억을 다 담은 것이기에, 나를 버린다면 현재까지의 내 존재를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미련을 두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입니다. 다음처럼 말입니다.
“ ··· 시간이 지나면 거품처럼 사그라들기를 바라면서도 / 새처럼 훨훨 날아가 버리는 것은 두려워 눈을 감는다 // 오늘도 나는 손에 잡은 것을 / 잡지도 놓아주지도 못한다 – 미련”
다만, 신아무개처럼 나이 든 사람이 곱씹을 만한 구절을 아직 어린 M학생의 글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어떤 게 젊은이의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신아무개는 젊은 시절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 수도 있지만, 세상의 힘듦과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살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하지만 P학생은 다릅니다.
“힘들어 / 하기 싫어 / 버틸 수 없어 / 포기하고 싶어 / 사라지고 싶어 / 이러며 속삭여 // ··· // 그러니 힘들어 하지 말고 / 열심히 노력하고 / 버티고 / 포기하지 말고 / 사라지지마 / 그리고 기억해 // 지금은 비가 내리지만 / 이 비가 그치면 / 꽃들은 피어나 - 지금은 비가 내리지만 그 비가 그치면 꽃들은 피어나”
비록 힘들지만 P학생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젊음입니다. 비록 표현은 거칠었지만 P학생의 글은, 꽃들이 다시는 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신아무개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P군의 시 한 편 더.
“···노래가 끝나지 않았으면 해 / 아직 전하지 못한 / 말하지 못한 / 그런 것들이 많은데 / 노래는 끝나가려 해 // 우리가 다시 만나면 / 너에게 노래를 부를게 / 노래방에서 전할게··· - 노래방에서 전할 게”
그래요. 노래합시다. 동전은 흔합니다. 노래가 끝나기 전에 동전은 더 넣으면 됩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중요한 것이지 동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좀 더 현재를 만족해하며 현재를 고마워하며 유쾌하게 사십시오. 아래 H학생처럼 말입니다.
“채소, 운동 // 다시 // 채소, 운동 // 그렇게 나름 이틀째까지 왔지만 / 맛있는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 차라리 / 지구에서 1kg 힘들게 뺄 바에 // 달 가서 6kg 그냥 빠질래 – 다이어트”
H학생과 같이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지금 겪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어려움이 아니라 커가면서 겪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상쯤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굳이 남을 의식하거나 세상의 수군거림을 의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를 만족하고 현재에 충실해가며 현재를 살아가면 됩니다. 남들은 다 여기가 달이라고 하여도, 스스로 지구라고 느끼면 됩니다. 굳이 다이어트가 아니더라도.
그럴 때 옆에서 함께 웃어주는 부모님은 참 다행한 존재입니다. 아침마다 아웅다웅 잔소리 폭풍 때문에 지겹기도 하지만, 시에서 읽게 되는 엄마라는 단어는 가슴을 뛰게 합니다. 신아무개도 부모인지라 D학생이 부모를 떠올리며 쓴 아래 시는 감동으로 읽힙니다.
“··· 엄마의 꿈이 싹 한번 틔워보지 못하고 몰아치는 폭풍에 날아가 버린 것 같아서 // 엄마, 다음 생엔 / 나 낳지 말고 // 엄마 꿈 열매까지 맺어봐 - 엄마의 커피나무”
D학생은 엄마가 자기 때문에 많은 삶을 포기하고 살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그리고 학교에 등교하기 전에 이 글을 식탁 위에 슬쩍 두고 나왔을 겁니다. 그리고 하교 후에 서로를 마주 보았겠지요. 이 두 모녀 또는 모자(아마도 모녀일겁니다)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떠올리면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데 D학생.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엄마에게 D학생보다 예쁘고 잘 익은 커피 열매는 없을 테니까요.
엄마가 나왔으니, C학생이 엄마 아빠에게 편지 쓰듯 편안하게 쓴 글을 읽어 봅니다.
“··· 원래 아빠와 나는 서로 무심한 사이이다 / 그런 줄 알았는데 // ··· // 아빠, 나도 사실은 아빠랑 잘 지내고 싶어요 - 아빠”
“엄마는 항상 나에게 / 세상에서 제일 이쁠 나이인 지금, 너 자신을 가꿔라/ 라고 말했다// ··· // 엄마. 나 잘 가꿀게 / 그리고 엄마는 지금이 제일 이쁜 것 같네 - 엄마”
아마 엄마 아빠 앞에서 이런 말 하기에는 많이 쑥스럽겠지요. 그래서 글이 좋은 겁니다. 핸드폰 문자로 무심코 던져둔 편지 같고 일기 같은 글. 거기에서 가족 간의 사랑을 발견하고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 글을 읽으며 신아무개도 지금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해 보았고, 키우고 있는 딸아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가족처럼 애틋하면서도 힘이 되는 존재는 없습니다. 또 우리가 살아가는 첫 번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당혹스러웠다는 말로 시작하였는데, 마지막 글에서도 당혹스럽다는 말로 끝을 맺어야겠습니다. S학생의 글 두 편입니다. 제목도 당혹스러운 ‘Marionette’와 ‘Marionnettste’입니다.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얼른 이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앞엣것은 '줄인형'이고, 뒤엣것은 '줄인형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서양 인형극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둘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하나는 조작(혹은 조정)하고 다른 하나는 조작하는 대로 제 몸을 맡기는 그 과정이 글이 되었습니다.
“··· 오직 당신을 위해 /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 오직 당신을 위해 춤춘다 – Marionette”
“··· 아아, 나의 하나뿐이 마리오네트야 / 춤춰라. 이 날이 밝을 때까지 / 붉은 태양이 세상을 물들일 때까지 - Marionnettste”
인형과 인형조작사가 무엇을 메타포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습니다만, 아니 굳이 그런 비유적인 의미를 알려고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통해 그림이 그려진다는 점에서 S학생의 글을 훌륭한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두 편의 시에서 S학생의 삶의 모습이라던가, S학생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는 것. 신아무개가 학생들의 글에서 읽고 싶었던 것. 바로 그것 말입니다.
이제 열 명의 글에 대한 신아무개의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무슨 거창한 말을 하지는 않으렵니다. 보통 여러분들은 자신의 삶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매일 수업시간에 시험에서 시를 문제로 풀게 되니까 시는 너무나도 어렵고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위의 시들을 보면서 앞뒤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려우면서도 고상한 것으로, 시는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