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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의 '유연전' 전문

New-Mountain(새뫼) 2018. 6. 6.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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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전(柳淵傳)

이항복(李恒福)

 

 

유연(柳淵)의 자()는 진보(震甫)로 대구(大丘) 사람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 유예원(柳禮源)이며 3남을 두었으니 유치(柳治)ㆍ유유(柳游)ㆍ유연이다. 유유는 글을 잘 지었고 유연은 예법(禮法)을 좋아하여 모두 시골에서 일컬었다. 유유의 아내는 같은 고을 무인(武人) 백거추(白巨鰍)의 딸이고, 유연의 아내는 참봉(參奉) 이관(李寬)의 딸이다. 유연의 누나는 종실(宗室) 달성령(達城令) 이제(李禔)에게 출가하였다가 일찍 죽었고, 다음 누나는 같은 고을 사인(士人) 최수인(崔守寅)에게 출가하였으며, 다음은 진주(晉州) 사인 하항(河沆)에게 출가하였다. 또 종매부(從妹夫)가 있으니 전 현감 심융(沈嶐)이다.

유유가 일찍이 산에 들어가 글을 읽다가 갑자기 돌아오지 않으니 유예원과 백씨는 미쳐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말이 문밖으로 나가자 아비와 아내가 그렇다 하니 시골 사람들은 믿고 의심치 않았으나 오직 유연만은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하였다. 그 후 5년 뒤에 유예원이 죽자 유연은 집상(執喪)을 하며 여막(廬幕)을 지켰다.

이듬해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에 이제가 유연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들으니 해주(海州)에 채응규(蔡應珪)란 자가 있는데 실은 너의 형이다. 네가 데리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유연은 편지를 접수하고 종을 보내어 맞이하려 하였으나 종은 빈손으로 돌아와 유유가 아니라고 하였다. 여름에 이제가 또 편지로 의심이 없다고 증거를 대기에 유연은 두 번째 사람을 보냈으나 다시 빈손으로 돌아와 그전처럼 말하였다.

다음 해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 겨울에 이제가 종 삼이(三伊)를 보내 말하기를,

앞서 말한 바 채 상사(蔡上舍, 진사(進士))가 첩을 데리고 우리집에 왔는데 과연 유유였다. 너는 와서 보라.”

하였다. 유연은 서둘러 먼저 종을 보내고 자신도 이어서 출발하였다.

종이 이제의 집에 도착하여 뵈니 채응규는 이제와 더불어 같이 앉아 종을 뜰에 꿇어앉히고 매를 가져 오라 독촉하며 말하기를,

놀랍게도 네놈은 유연과 더불어 음모를 꾸며 전에 해주에 도착하여 주인인 나를 배반하려 하였다. 종으로서 주인을 잊었으니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

하였다. 종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제발 제 주인이 곧 당도할 것이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니 이제는 짐짓 중지하는 체 하였다. 채응규가 말하기를,

아우가 오기를 기다려서 단연 너를 용서치 않겠다.”

하였다.

며칠 뒤 유연이 도착하여 곧바로 채응규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니 옷을 끌어 당겨 얼굴을 덮으며 병이 심하다고 핑계를 댔는데 누워 있는 자가 정말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천천히 유연의 자()를 부르며 말하기를,

진보(震甫)는 가까이 오라.”

하고, 갑자기 유연의 손을 잡으며 말하기를,

너를 보니 놀라워 눈물이 쏟아진다. 앓던 병이 깨끗이 낫는 것 같다. 그런데 너만은 얼굴에 변화가 없으니 동기간의 정이 어찌 이와 같이 걱정이 없을 수 있느냐?”

하였다. 유연은 머뭇거리다 물러났으나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여러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이제(李禔)와 심융(沈嶐)은 입을 맞추듯이

진짜 유유(柳游)임이 틀림없다.”

하였으며, 혹은

관정(官庭)에 고하여 가려야 한다.”

하였고, 혹은

같이 고향으로 돌아가 향족(鄕族)을 모아놓고 다 같이 증험해야 한다.”

하였다. 유연(柳淵)은 그 서족(庶族) 김백천(金百千)의 뜻에 따라 눈여겨보고 같이 대구로 돌아와 팔거(八莒)에 도착하니 백씨가 그가 도착하였다는 말을 듣고 한 집안 종들을 모두 데리고 나와 경계에서 맞이하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처럼 서서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백씨가 시집올 때에 새로이 데리고 온 눌질비(訥叱非)가 여러 사람 가운데에서 채응규(蔡應珪)가 오는 것을 바라보다가 맞이해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우리 주인으로 가장해서 감히 이런단 말인가?”

하니, 여러 사람들은 크게 놀라워하였고 채응규는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며 행동이 이상하였다. 그러나 유연은 종을 꾸짖으며 도리어 접대하니 채응규가 유연의 아명(兒名)을 부르며 말하기를,

무양(無恙)아 어찌 이다지도 괴롭게 한단 말이냐?”

하였다.

()에 도착해서 향인(鄕人)을 모았는데 우희적(禹希績)ㆍ서형(徐泂)ㆍ조상규(趙祥珪) 및 유연의 매부 최수인(崔守寅)과 서속(庶屬) 홍명(洪明)이 둘러앉아 묻기를,

너는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나는 바로 유유(柳游)이다.”

하였다. 부사(府使) 박응천(朴應川)이 온 자리에 두루 물으니 모두들 아니라고 말하였다. 인하여 한 사람 한 사람 가리키며 힐문하기를

이곳에 앉은 사람은 모두가 너의 친척과 향인이다. 너는 대답하도록 하라. 이는 누구요 저는 누구인가?”

하니, 그 사람은 머리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하였다.

곧 뜰 아래로 끌어내려 삼목(三木, 형틀)에 묶으며 말하기를,

옷이 바뀌고 얼굴이 변하여 그 벗은 비록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네가 진짜 유유라고 한다면 어찌 벗을 몰라본단 말이냐? 지금 네가 사실을 밝힌다면 혹 용서를 받을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관형(官刑)을 행할 것이다.”

하였다. 그 사람은 계책이 궁하게 되자 혹 유유라고 했다가 혹 채응규라고 하여 미치광이 말처럼 종잡을 수 없이 짐짓 혼란스럽게 하였다.

조금 뒤 채응규의 첩 춘수(春守)란 자가 듣고 달려와 호소하기를,

첩의 지아비는 불행히 병이 깊습니다. 옥에서 벗어나 사삿집에 보치(保置, 보호 유치시킴)해 주시길 빕니다.”

하니, 부사는 관노(官奴) 박석(朴石)의 집에 보치하도록 허가하였다. 그런데 5일 만에 채응규는 춘수와 같이 밤에 도망쳤다. 박석이 알고 뒤쫓아 춘수를 붙들었으나 채응규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알 수 없었다.

백씨는 야윈 모습에다 상복(喪服)을 입고 밤낮으로 감사(監司)에게 읍소(泣訴)하기를,

남편에게 재물을 한없이 탐하는 불량한 아우 유연이 있어 진실을 거짓이라 하여 형을 묶어 관에 가두고 지나친 화를 씌우려 합니다. 남편은 본래 미치광이 병을 앓았는데 갇히자 더욱 위중해졌습니다. 다행히 태수 대감(太守台監)의 힘을 입어 병을 치료하게 되었는데 유연이 지키는 자에게 뇌물을 주어 죽이고 종적을 없앴습니다. 유연의 죄를 다스려 지어미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하였다. 감사는 본 고을로 하여금 유연 및 춘수ㆍ박석을 가두게 하였다. 유연의 아내 이씨가 호소하니 감사는 말하기를,

도망친 자는 유유가 아니라, 바로 채응규이다. 또 도망친 분명한 증거가 있고 나 역시 유연이 억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백씨가 계속 호소하고 있으니 일의 체통으로 보아 그렇게 아니할 수 없었다. 물러나 기다리라. 국문(鞫問)이 끝나면 바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백씨가 이웃 고을로 이송되기를 청하여 현풍(玄風)으로 옮겨 갇히었다. 그런데 미처 심리(審理)를 하기 전에 간관(諫官)이 이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유유(柳游)가 옮겨 다니느라 고달팠던 나머지 외모는 비록 변하였으나 언어와 행동에 있어서는 실은 곧 유유입니다. 그 아우가 형의 자리를 빼앗아 재물을 독차지하려고 협박해 묶어 관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사란 자가 유유와 유연을 다같이 가둬야 함에도 아우의 호소만을 듣고 그 형을 가두었으니 이미 옥사를 처리하는 체통을 잃었고 또 유연을 옥으로 맞아들여 형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윤상(倫常)을 어지럽힌 죄를 지금까지 덮어두었으니 한 도의 사람들이 모두 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유연을 나문(拿問)하여 법에 처하고 아울러 박응천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때 유연이 옥에 갇히게 되자 이제(李禔)와 심융(沈嶐)이 은밀히 김백천(金百千)에게 묻기를,

유연이 도착하면 우리도 국문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하니, 김백천은 말하기를,

내가 본 바로는 유유가 아니다.”

하였다. 이제 등이 말하기를,

너는 유연과 같이 죽게 될 것이다.”

하니, 김백천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하자, 이제 등이 종용하기를

우리와 같은 말을 한다면 다른 걱정이 없을 것을 보장한다.”

하였다.

 

이해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 311일에 유연 등이 나치(拿致)되어 오자 삼성교좌1)(三省交坐)를 명하였다. 심통원(沈通源)이 위관(委官)으로서 사건을 다루었는데 유연의 공사(供辭)에 대략 이르기를,

하루는 신()의 자부(姊夫) 달성령(達城令) 이제가 신에게 글을 보내 이르기를 집의 종 삼이(三伊)가 무슨 일 때문에 해주에 갔다가 본 고을에 채응규란 자가 있음을 듣고 유유(柳游)일 것이라고 의심하여 가서 보았더니 정말 유유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백씨와 상의하고 곧 종을 차출하여 백씨의 글 및 의복을 싸 가지고 해주에 가 보게 하였으나 신의 형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바로 채응규이다. 너희들이 삼이가 잘못 전하는 말을 듣고 멀리 와서 고생되겠다.’ 하고, 인하여 백씨의 편지에 답을 써서 돌려보냈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또 그해 겨울에 이제가 종 삼이를 신에게 보내어 들으니 형의 편지가 있다고 한다.’ 하였고, 삼이는 말하기를, ‘백씨에게 편지가 있었다.’ 하였습니다.

신이 백씨에게 형의 편지를 보자고 하니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었습니다. 신이 서울에 들어와 이른바 신의 형이란 자를 찾아보았는데 같지 않은 세 가지를 증험하였습니다. 신의 형은 본래 몸이 허약하고 작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키가 크고 체구도 큽니다.

신의 형은 얼굴이 작고 누렇고 검은 점이 있고 수염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은) 넓은 얼굴에 붉고 검으며 수염이 많습니다. 신의 형은 음성이 부인과 같은데 지금 (이 사람은) 곧 우렁우렁합니다. 세 가지 징험이 분명하여 사실이 의심스럽습니다.

팔거(八莒)에 도착하여 거짓임이 분명하므로 묶어 본 고을에 보내고 백씨를 보았으나 백씨는 화가 나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말하기를, ‘임술(壬戌) 이후 종이 두 번씩이나 다녀왔고 형수는 곧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 회답 내용을 살펴보면 진위(眞僞)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임에도 이제의 말만 믿고 늘 의혹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추위를 무릅쓰고 길에 올랐었고 돌아와서는 향족(鄕族)들과 더불어 대질(對質)을 하였던 것입니다. 감사를 만나게 되어서는 형수가 몸소 관정(官庭)에 나아가 얼굴을 보고 결정을 해야 옳음에도 이는 하지 아니하고 지금 어찌 갑자기 화를 내느냐고 하니, 백씨가 말하기를, ‘만약 거짓이라면 어찌 참으로 인정하여 속일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감사가 백씨에게 직접 가리게 하라 하였으나 거절하여 나아가지 않으며 말하기를, ‘집안사람과 일가붙이 모두가 유유(柳游)가 아니라 하는데 첩은 사족(士族)으로서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자를 어찌 대면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채응규가 도망친 뒤에는 백씨가 도리어 신이 형을 시해(弑害)했다고 얽는 깃발을 먼저 내세웠고 이제와 심융 두 사람은 멀리에서 돕고 호응하여 사건을 성사시키려고 하는 것은 역시 그 이유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제에게 신의 아비가 특별히 좋은 밭을 주었는데 신이 신임과 고임을 받는 것을 꺼리었고, 심융은 신의 백숙모(伯叔母) 유씨(柳氏)가 일찍이 집안의 재산을 그 아내에게 주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에 자식이 없게 되면 유예원(柳禮源)의 아들에게 전하라.’ 하였습니다. 심융은 늘 재산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신을 미워하였기에 지금 이제와 심융 두 사람이 번갈아 호응하며 세를 이루어 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추관(推官)이 유유가 무슨 연유로 가출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유연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발광을 하였다고 하나 실은 발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안에 사소한 변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나간 것입니다.”

하였다. 이어 달성령(達城令) 이제를 국문하니 이르기를,

처음에 신이 유유를 찾은 것이 아니고, 유유가 신의 집에 이른 것이며 형색이 변하여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앉아 한참 말을 하며 한 집안 일을 증험하는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말이나 행동이 정말 유유임에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유연이 도착함에 이르러 서로 붙들고 통곡을 하였고 병으로 인하여 옮기게 되자 마침 벽에 붙여진 그 아비의 글씨를 보고 역시 서로 마주 보며 곡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심융은 이르기를,

이제가 그 아들 이경억(李慶億)을 시켜 유유가 집에 왔다고 말하므로 신이 곧 가서 보니 용모가 변하여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집안의 일을 빼놓지 않고 갖춰 말하였고 또 이제 등이 말하는 것을 신도 믿었습니다.”

하였다. 그리고 김백천은 이미 같은 말을 하기로 하였으므로 다른 말이 없었다.

춘수가 이르기를,

신이 지아비 유유를 따라 일찍이 태복천(太僕川) 가에 머물렀습니다. 이제 및 그의 아들 이경억이 찾아와 보고 과연 유유라 하였고, 심융과 김백천도 진짜 유유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유연이 오게 되어서는 유유 및 아들 정백(貞白)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신 홀로 붙이어 사는 곳에 있었는데 유유가 갇혔다는 말을 듣고 곧 가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옥에서 나와 병을 치료하였습니다. 신이 마침 밤중에 부엌에 갔다가 들어와 보니 불은 꺼졌고 유유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연이 살해한 것으로 의심하였습니다.”

하였다.

형구(刑具)를 갖추고 추관(推官)이 상비2)(上備)하기를,

이제와 심융 및 김백천 모두가 진짜 유유라 하니 유유가 분명한데도 유연 홀로 진짜가 아니라 하며 길에서 포박하여 관에 고발하였으니 살해하여 증거를 인멸하려던 것이 분명합니다. 곤장을 쳐야겠습니다.”

하였다. 곤장을 치는데 42대에 이르렀을 때에 무복(誣服, 허위 자백)하였으므로 조사 내용이 상부에 보고되었다.

장차 형()을 집행하려 할 때에, 유연(柳淵)은 문안을 내려다보며 부르짖기를,

신은 이미 형을 시해했다는 죄명이 이루어졌으니 사실 죽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국가의 상형3)(祥刑)에 끝내 누()가 될까 걱정입니다. 달성령(達城令)은 국가를 기망하고 신에게 죽음을 내리게 하였습니다. 신에게 1년의 유예(猶豫)를 주어 채응규 및 신의 형을 찾게 한 뒤에 그 죄를 확정시켜 주신다면 신에게 원통함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이 죽은 뒤에 진짜 유유가 나타난다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니 국가는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추관은 신과 본래 사사로이 척이 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니, 심통원(沈通源)은 화를 내어 나졸(羅卒)을 시켜 머리채를 잡고 그 입을 치게 하면서 말하기를,

지독함이 이와 같으니 형을 시해했음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였다. 이때 기대항(奇大恒)이 자리에 있다가 말하기를,

법이 엄연히 있는데 어찌 입을 때린단 말인가?”

하였고, 문사랑(問事郞) 홍인경(洪仁慶)

형을 시해한 큰 사건에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서둘러 결정을 내리면 옥사를 처리하는 체통이 어찌되겠습니까?”

하였으나, 심통원은 말하기를,

대악(大惡)인 자에게 어찌 주저한단 말인가?”

하였다. 기대항은 홍인경에게 눈짓으로 그만두게 하고 두 사람은 침울한 마음으로 물러났다. 유연의 종 금석(今石)과 몽합(夢合)도 역시 무복으로 유연과 같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유연이 죽을 때의 나이는 27세였다.

유연이 대구옥(大丘獄)에 있을 때 글을 써 아내에게 주었는데 내용에

슬프다. 집사람 이씨는 나를 따라 멀리 와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다. 나는 천지간에 지극히 원통한 사람으로서 갇힌 지 여러 달이 되었으며 다시 살아나기는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대에게 이후의 말을 남기려 하오.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하다. 이제의 음모, 심융의 음모, 백씨의 음모, 채응규의 음모가 온 나라 사람의 마음과 눈을 가리움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나는 내 한 몸도 돌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의 돌아가신 부모의 영혼을 생각하면 오장을 깎아 내리는 것 같소.

저 이제 등의 간악한 행위를 생각해보면 그대도 분명히 알 것이오. 지금 내가 말하는 바는 털끝만큼도 거짓이 없으니 그대는 이를 들고 서울로 들어가 나의 지극한 원통을 호소하시오. 화의 근본을 찾아보면 곧 횡재(橫財)로 말미암은 것이오.

그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별급(別給)하신 것 및 백숙모 유씨(柳氏)의 문권(文券)을 관에 고하고 폐기할 것이며 그래도 풀리지 않을 경우에는 하늘과 땅 및 부모의 혼령이 아래위로 퍼져 있을 것이니 그대는 밤마다 기도하여 요행히 신령의 도움을 얻어 곧 채응규를 찾아내 나의 구천(九天)에 사무치는 원통함을 위로하도록 하시오. 정신은 가물가물하고 기운은 떨어져 다 쓰지 못하오.”

하였고, 끝에는 한 집안의 주인 죄 없는 사람 유연은 통곡하며 죽는다[家翁無辜人柳淵哭死]’9자가 있었는데 원근에서 듣고 슬퍼하였다.

유연이 죽자 여러 사람들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장령(掌令) 정엄(鄭淹)이 경연(經筵)에서 그 억울함을 논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홍섬(洪暹)이 말하기를,

지난날 신도 유연의 옥사(獄事)에 참국(參鞫)한 바 있습니다. 그 억울함에 의심이 갔으나 구제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심리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실행이 되지 않았다. 그 후 16년 기묘년(己卯年, 1579년 선조 12) 겨울에 수찬(修撰) 윤선각(尹先覺)이 경연에서 아뢰기를,

지난 경신년(庚申年, 1560년 명종 15)에 신이 순안현(順安縣)에서 한 거지를 만났는데 천유용(天裕勇)이라 이름하였습니다. 글을 잘하고 두루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입에 풀칠을 하였습니다. 신이 같은 절에서 수개월을 같이 지냈는데 자못 영남(嶺南)의 산천 및 사자(士子)의 성명을 말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기유년(己酉年, 1549년 명종 4)에 영천시(永川試)에 합격하였으나 빈공(賓貢)의 일로 하여 이름이 삭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인하여 묻기를 남쪽의 선비라면 무슨 연유로 해서 여기에 이르렀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 사람은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신이 고향사람을 보고 이 말을 하였더니 박장춘(朴長春)이 놀라며 말하기를, ‘이는 필시 유유(柳游)일 것이다. 그때 나도 같이 삭제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뒤 갑자년(甲子年, 1564년 명종 19)에 신이 또 개천군(价川郡)에 있었는데 산승(山僧)이 이때 천유용의 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들으니 유연이 대구에서 유유를 시해하고 사형을 당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의아스럽게 여기기를 내가 천유용의 글을 보았고 또 주의 깊게 들었는데 이 사람이 만약 진짜 유유라고 한다면 서쪽에서 남쪽으로 가서 아우에게 시해당하는 그간의 일자가 꽤 걸렸을 터인데 어찌 이와 같이 갑작스러울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로부터 신은 서쪽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천유용의 생존을 물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반드시 구문(究問)하게 하여 정말로 유유라고 한다면 유연의 원통함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법부(法府)에서 그를 붙들어 왔다.

유연이 죽은 뒤 이씨는 조용히 변두리 마을에 묻혀 매일 새벽에는 곧 향을 사르고 하늘에 빌어 남편의 원통함을 씻어주기를 염원하였다. 하루는 꿈에 유연이 갑자기 찾아와 고하기를,

나의 형이 왔다. 그대도 아는가?”

하였다. 이씨는 깨어 곡을 하며

! ()이여 예시해 주시는구려.”

하고, 향을 피워 하늘에 빌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다음 날 저녁에 천유용은 법부(法府)로 간 것이다. 이씨가 듣고 곧 법부에 호소하기를,

뜻밖의 재난으로 죽은 유연은 이제의 재산 다툼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극형에 처해졌습니다. 그 미망인(未亡人) 아무는 땅을 치고 하늘에 부르짖었으나 원통함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진짜 유유가 나타났다고 하니 삼가 유연이 죽음에 임해서 한 유언 한 통을 올립니다.”

하였다. 유유가 도착하여 말하기를,

신은 천유용이 아니라 실은 유유입니다.”

하고, 그 아비의 이력, 일가ㆍ노복(奴僕) 및 평소 사귀던 바를 의심 없이 자세히 말하였다. 인하여 집을 나가게 된 연유를 물으니 말하기를,

혼인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소박해서 그렇다며 당신에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인하여 서쪽으로 들어간 뒤에 전혀 아우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이에 달성령ㆍ심융 및 같은 마을에서 어려서부터 친한 정자(正字) 김건(金鍵)과 생원(生員) 한극심(韓克諶) 등에게 살펴보게 하니 모두 진짜 유유라고 하였다. 이에 의금부(義禁府)에서는 채응규ㆍ춘수(春守) 등의 추적을 청하여 채응규를 장련(長連)에서 붙들기는 하였으나 해주(海州) 5리를 채 못 와서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고 춘수는 해주에서 붙들어왔다. 이에 말하기를,

채응규에게 출가한 뒤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이때 유유란 이름을 전혀 듣지 못하였는데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 연간에 달성령이 종 삼이(三伊)를 시켜 채응규를 찾아와서 보게 하고는 바로 유유라고 하였고 백씨도 사람을 보내어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계해년(癸亥年, 1563년 명종 18) 봄에 채응규는 서울에 올라가 3개월을 머물다가 돌아와서는 곧 유유라고 스스로 일컬었습니다. 이해 겨울에 채응규는 첩과 서울에 올라가면서 말하기를, ‘달성령이 나를 초대하였다.’ 하였는데, 서울에 도착하니 달성령 부자가 과연 자주 와서 위로하여 음식 대접하기를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채응규는 인하여 삼이와 백씨 집 종을 은밀히 눈여겨보았고 달성령 부자 등과 나눈 말, 백씨 본가와 일문(一門)의 일을 매우 자세히 알고서 옷깃을 뜯어 갈무리해 두고 때때로 열어보기도 하였습니다. 달성령도 가만히 이르기를 그대 스스로 유유라 하고, 나도 유유라고 하면 그 누가 분변할 수 있겠는가? 만일 백씨에게 의심을 받을 경우 곧 도망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가운데 가끔 물가 보리밭을 유연이 감히 독점할 수 있느냐?’ 하고, 또 말하기를, ‘내 아내의 재산을 유연이 혼자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가?’라고도 하였습니다. 하루는 이경억이 와서 말하기를, ‘심융ㆍ김백천이 의신(疑信)을 정하지 못하였다. 내일 심융과 김백천이 우리 집에 올 것이니 그대도 오도록 하라. 식사 때에 종 흔개(欣介)를 시켜 상을 들게 할 것이니 그대는 보고 곧 가리키며 이 아이는 흔개로서 지난날 나에게 주기로 하였는데 형은 잊었소 하면서 심융 등에게 듣게 하면 앞서의 의심이 얼음 풀리듯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대구에 돌아와 얼마 아니 되어 달성령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승상(丞相) 심통원(沈通源)의 글을 청하여 첩에게 주며 본부사(本府使) 박응천(朴應川)에게 전하게 하고, 또 그 종과 말을 심융에게 주고 역시 그 일가 형으로 장악원(掌樂院)의 관원이 된 자에게 부탁하여 영인(伶人) 한 사람을 얻어 첩에게 딸려 대구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채응규가 박석(朴石)의 집에 갇힌 지 3일만에 갑자기 밤에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어 채응규가 일어나 나가보고 인하여 편지를 들고 들어와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을 돌아보며 나도 계획을 이와 같이 짰으니 너는 서둘러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첩이 누구냐고 물으니 달성령 집 종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인하여 그 내용에 무어라 하였느냐?’고 물으니 그 내용에 일이 이미 드러났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서둘러 도망치라.’ 하였습니다. 첩이 울면서 당신이 도망친다면 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니, 채응규는 잠자코 있으라고 소리치며 어리석은 여편네야 겁먹지 마라. 뜻하지 않은 일이 있더라도 너는 모른다고만 하라.’ 하였습니다.

그 무렵 첩이 용인현(龍仁縣)에 도착하니 점주(店主)인 늙은 할미가 이경억의 편지를 전해 주었는데 이르기를, ‘지금 유연은 형을 시해한 죄로 심리되고 있고 아버지 역시 사건에 대항해야 하니 너는 같은 말을 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라.’ 하였습니다.

사건이 마무리되자 첩은 해서(海西)로 떠났습니다. 하루는 이경억이 사람을 보내어 알리기를, ‘내가 지금 너의 지아비를 보납(保納)하고 있는데 지아비도 마음속으로 너를 보고싶어 하니 너는 와서 보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첩이 숙부에게 물으니 숙부는 그 사람을 꾸짖어 물리쳤습니다.

그해에 백씨가 말을 보내어 채정백(蔡貞白)에게 와서 봉양(奉養)하게 하였으나 첩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이제(李禔)를 보고 물으니 이제가 말하기를, ‘길에서 들으니 유연의 옥사(獄事)가 의심스럽다고 대부분 말하고 혹은 전하기를 채응규가 도망쳐 아직도 살아있으니 일이 장차 예측할 수 없다. 네가 만약 채정백을 돌아가도록 허락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의혹만 돋을 뿐이다.’하면서 첩에게 보내도록 하라고 권하였습니다. 공술(供述)한 바는 곧 사실입니다.”

하였다. 이에 이씨는 글을 올려 이제ㆍ심융 및 백씨의 죄를 모두 설명하고 법대로 논죄(論罪)하기를 청하였다. 대관(臺官)이 또 유연을 국문할 때의 추관(推官) 및 낭관(郎官)을 논죄해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유사(有司)는 유유가 아비의 상()에 달려오지 않았다고 논죄하여 용강(龍岡)에 유배시켰고 이제(李禔)는 옥중에서 장()을 맞다가 죽었으며 춘수(春守)는 교형(絞刑)으로 죽었다.

이에 앞서 유유가 옥에 있을 때 조정의 논의는

백씨는 시골에 있으며 그 옥사(獄事)를 무심히 보게 해서는 옳지 않다.”

하였는데. 백씨가 듣고 서울에 올라왔다. 그러나 유유가 옥에서 나오게 됨에 이르러 곧바로 백씨가 머무는 곳으로 가 서서 침을 뱉으며 말하기를,

너는 전에 채가(蔡家) 놈을 나라고 해서 내 아우를 해쳤는데 뒷날 오늘의 나를 유유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을 마치자 옷을 떨치고 가며 돌아보지 않으니 백씨가 말하기를,

이 사내야 지난날 늘 나에게 불측한 말을 하더니 지금 또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다. 유유는 용강으로 유배되었다가 연한이 차 대구로 돌아와 2년 만에 죽었는데 이때 백씨는 오히려 병이 없었으나 유유는 끝까지 서신을 교환하지 않았다. 백씨가 데려다 기른 춘수의 아들 채정백은 채응규를 따라 대구에 갔었고 백씨집에 있은 지 10년이었다. 유유의 옥사가 일어나자 백씨가 묶어 관에 고발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참 유유가 나타났고 채응규가 자살하였다는 말을 듣고 채정백의 국문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접어두고 묻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이씨는 평소에 유연의 원통을 풀어줄 방법을 백방으로 깊이 생각하고 있던 중 기축년(己丑年, 1589년 선조 22) 연간에 춘수의 형 영수(永守) 및 그 지아비 김헌(金憲)이 찾아와 말하기를,

가짜 유유가 죽지 않고 춘수와 여전히 살고 있으니 나에게 많은 뇌물을 준다면 내가 그대를 위하여 그들을 추적할 수 있소.”

하였다. 이씨는 이를 믿고 시집올 때의 재물을 모두 털어 값 수십금(數十金)을 주었다. 이로부터 김헌 등은 은밀히 편지를 통하며 해서(海西)에 연락해서 그가 가는 곳을 엿보며 붙들려고 감시하느라 왕래가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정엄(鄭淹)이 유연의 의옥(疑獄)을 논하는데 이르자 영수가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쳤으나 이씨가 은밀히 그 가족 두어 사람을 붙들어 사삿집에 가두어 놓았고 영수는 이에 옥으로 나아갔지만 끝내 법을 가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이씨가 다시 형조(刑曹)에 호소하여 영수(永守) 및 김헌을 체포하여 앞서의 뇌물을 회수하였다. 왜란(倭亂)이 있은 뒤 정승 이원익(李元翼)이 금호문(金虎門) 밖에 집을 지었는데 이씨와 문을 연잇게 되었다. 사건의 시말(始末)을 자세히 듣고 그 원통함을 안타깝게 여겼는데 마침 임금의 병이 깊었다.

그러므로 나와 더불어 날마다 입궐(入闕)해서 기거하였는데 나를 위하여 말을 하여 주었고 또 지식(知識) 있는 이에게 부탁하여 이 사실을 후세에 전했으면 한다 하고, 궁에서 물러 나오면서 그 집 가승(家乘)을 모두 가져 오라 해서 서둘러 지으라며 말하기를,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지극한 원통이 풀릴 것이요, 관훈(官訓)이 설 수 있을 것이니 그대는 어찌 생각해보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나는 그윽이 유연의 원통함을 슬퍼하였고 백씨를 먼저 조사를 하여 일찌감치 관에 나아오게 하지 못한 점을 애석하게 여기고 이제(李禔)가 끝내 정형(正刑)에 처해지지 않은 채 벗어날 수 있었다는 점을 거듭 한스럽게 여겼으나 전인(甸人, 전야(田野)를 맡은 관인)이 경()을 울리게4) 하였음은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 법망(法網)이 성글어 심융만이 법에서 벗어났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일이란 불행하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 있게 마련인데 윤ㆍ이(尹李) 제공(諸公)이 앞뒤에서 도와 유연으로 하여금 날개를 붙여주는 다행스러운 일이 없었다면 또 어찌 당시에 드러날 수 있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서는 혹 유유가 불량(不良)하여 도망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식으로서 아비를 피하여 도망쳤으니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도망쳐 어디로 갈 것이며 세상에 어찌 아비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그 옛날 현자(賢者)가 아비의 명에 죽었다. 주 부자(朱夫子)가 논하여 이르기를,

의리로는 마땅히 도망하여 피해야만 예의에 맞는다.”

고 하였다. 설령 유유가 크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어 어버이 곁을 떠나 멀리 간다고 하더라도 진 공자(晉公子)가 진()나라에 있게 되자 천하가 모두 알았던 것처럼 했어야지 어찌 정말로 자취를 감추어 아우로 하여금 횡사하게 한단 말인가? 권 빙군(權聘君)은 일찍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 연석(姻席)에서 유연을 자주 만났는데 키는 작지만 날쌔고 용감하였으며 강개하고 명성을 좋아하였다. 화에 걸린 이후 아내가 능히 머리 빗질이나 얼굴을 다듬지 아니하고 정성을 다해 빌면서 흰머리가 되도록 변함이 없었으니 집안에서 참화(慘禍)에 잘 대처하였다.”

하였다.

각주

1) 삼성교좌(三省交坐) : 윤상(倫常)에 관계된 사건은 중대 범죄라 하여 의정부ㆍ사헌부ㆍ의금부 등 3()이 같이 앉아 심리하는 일의 일컬음임.

2) 상비(上備) : 옥사(獄事)를 판결(判決)한 문서(文書)를 상부에 보고하여 보존하는 문건(文件)으로 갖추어 놓음.

3) 상형(祥刑) : () 자체는 불상(不祥)이나 불선(不善)을 제거하여 선()을 보호하는 것이 지선(至善)이요 대상(大祥)이란 뜻에서의 일컬음임.

4) 전인(甸人)이 경()을 울리게 : 예기(禮記)의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에 보면 공족(公族)에게 사죄(死罪)가 있을 경우 전인에게 경()을 울리게 하였다고 하였음.




유연전(柳淵傳) 뒤에 적다

 

이 전()은 이 완평(李完平) 원익(元翼)이 이 오성(李鼇城) 항복(恒福)에게 부탁하여 지은 것이다. 전은 모두 8()이다.


석주(石洲) 권필(權韠)


한 번 펼쳐 읽고 한 번 슬퍼하노니 / 一回披讀一傷神

억울한 원한이 오랜 뒤에야 풀렸구나 / 冤屈從知久乃伸

청운에 붙은 것이 참으로 다행이니 / 得附靑雲眞幸耳

세간에 불평한 사람 어찌 한량 있으랴 / 世間何限不平人



유연전(柳淵傳) -성호 이익


완평 이재상[完平李相]이 백사 이재상[白沙李相]에게 부탁하여 유연전(柳淵傳)을 지어 그 전기가 세상에 간행(刊行)되었으니, ()은 대구(大丘) 사람이다. ()의 형인 유()가 일찍 산중에 들어가 글을 읽다가 그 길로 내내 돌아오지 않자, 그의 아버지인 현감(縣監) 예원(禮源)과 유의 아내 백씨(白氏)가 다 미쳐서 도망갔다고 하므로, 고을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믿었는데, 사실은 미친 것이 아니고 가변(家變)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5년 만에 예원(禮源)이 죽자 연이 여막을 지키고 상주노릇을 하는데, 그의 매부[姊夫]인 종반(宗班 임금과 성()이 같은 친족) 달성령(達城令) 이지(李禔)가 편지를 보내어,

듣건대, 해주(海州)에 채응규(蔡應珪)라는 자가 있으니 그가 사실 너의 형 유다. 맞아 와야 옳으리라.”

하기에 연이 종[]을 보내 모셔오게 했으나, 종은 돌아와서 유가 아니더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두 번이나 했는데, 그 이듬해 지()가 또 사람을 보내어,

응규(應珪)가 그 첩() 춘수(春守)를 데리고 내 집에 왔는데 과연 너의 형 유이더라.”

하기에 연이 가서 본즉 역시 유가 아니었다. 연이 머뭇거리다가 물러나서 여러 사람들에게 대책을 의논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서 친척과 친구들을 대면시켜 분변하는 것이 좋으리라.”

는 것이었다. 연이 그 묘책에 따라 데리고 고향에 돌아오자. 온 집안이 함께 나와 맞이하고 주위에 지켜보는 사람이 담을 치듯 하였는데, 백씨(白氏)가 시집올 때 따라온 계집종이 대중 속에서 꾸짖기를,

네가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의 상전[]이 되려 하는가?”

하니, 그 사람이 낯빛이 변하고 입이 막혀 대답을 못한다. 연이 드디어 계집종을 꾸짖고 그 사람을 묶어서 관()에 송치했다.

이리하여 부사(府使) 박응천(朴應天)이 역시 그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놓고 그에게 하나하나 힐문하기를,

저 이는 누구고 저 이는 누구냐?”

하는데 그 사람이 대답을 못하자, 그제야 삼목(三木 형틀의 한 도구)을 갖추어 굳게 수감하고, 백씨로 하여금 와서 분변하게 했으나 백씨가 따르지 않았고, 그 사람은 얼마 뒤에 병으로 풀려나와서 마을 집에 붙여 지내다가 드디어 도망가 버렸다.

그런데 백씨가 상복을 입은 채 감사(監司)에게 하소연하기를,

남편에게 불량한 아우가 있어 재물을 탐내는 것이 만족이 없고 참[]을 가리켜 거짓이라 하여 종가[]를 빼앗을 계획을 하며, 또 옥수(獄守)에게 뇌물을 주고 도적이 살해한 것으로 하여, 그 흔적을 덮어버렸다.”

하니, 감사가 그 억울함을 알고 부득이 연을 수감하여 장차 심문하려 하는데, 그때 간관이 이 사실을 전해 듣고 논계하여 서울 옥으로 옮기자, ()가 심융(沈嶐)이란 자를 개입시켜 진실을 만들고 드디어 고문을 가하여 무복(誣服 실토를 하지 않고 거짓으로 공초하는 것)하였다.

이 사건의 내용인즉, 대개 예원이 앞서 좋은 토지를 지에게 대부해 준 일이 있었는데, 지가 연의 무리들로부터 말이 있을까 염려한 것이요, 심융은 연의 숙모의 사위인데, 그 숙모가 역시 집 재산을 융()에게 대부하면서,

네가 만약 자식이 없거든 이 재산을 예원의 아들에게 돌려주어라.”

한 때문이다. 융과 지가 이것 때문에 공모하여 유씨(柳氏)를 멸망시키고자, 응규(應珪)로 하여금 연의 집에 가서 그 집 사람들이 만약 인증하지 않거든 거짓으로 화를 내어 도망쳐서 화를 일으키도록 했던 것이다.

이때 연의 집 종 몇 사람도 도적이 죽였다는 거짓으로 공초했다 하여 결국 연과 함께 처형되었는데, 연이 죽을 때 그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고하기를

화의 원인을 생각해보니 모두가 재산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별급(別給)과 숙모의 문권(文券)을 관()에 알리고서 없애버려라. 그렇게 해도 밝혀지지 않거든 밤마다 기도를 하면, 혹시 신명의 도움[冥佑]을 받을는지 모르겠다.”

하니, 이 사실을 들은 이들까지 다 슬퍼했다.

그 뒤 16년 만에 수찬(修撰) 윤국형(尹國馨),

()이 지난번 순안현(順安縣)에서 걸인 천유용(天裕勇)이란 자를 만났는데, 함께 말을 해보니 아마도 유유(柳游)인 듯했고, 뒤에 그 고을 사람 박장춘(朴長春)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박()도 놀라면서 틀림없는 유().’ 하니, 매우 부합되는 점이 있습니다.”

고 아뢴 다음 드디어 체포하여 심문하기를 청한 결과, 잡혀오는 자가 과연 앞서 도망갔다던 유유(柳游)이었다. 그제야 응규(應珪)를 수색해 잡아오니 응규는 제 스스로 칼로 찔러 자살하고, 춘수(春守)를 국문하니, 서로 오가면서 교사(敎唆)한 상황을 갖춰 고백했는데, 결국 지는 곤장에 맞아 죽고, 춘수는 목매어 죽고, 유는 그 아버지 상()에 오지 않았던 죄로 용강(龍岡)에 귀양갔다.

()가 이미 풀려나오자, 백씨(白氏)가 부득이 서울에 들어갔는데, 유가 꾸짖기를,

네가 앞서는 채놈[蔡奴]을 나로 알았고, 또 나의 아우를 죽였구나.”

하고는 옷을 뿌리치고 일어나니, 백씨가 말하기를,

이 사나이가 전에도 불측한 말로써 나를 덮어씌웠다.”

하자, ()가 놓아보내고 끝내 백씨와 왕래하지 않았는데, 백씨는 마침내 아무 탈이 없었다 한다.

그리고, 뒤에 지의 아들 언관(彥寬)이 문자를 위조하여 그 아버지의 나쁨을 덮으려 했으나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이 냉정히 변론하여 밝혔고, 또 자세한 내용이 판서 윤국형(尹國馨)문소만록(聞韶漫錄)에 적혀 있다.

이것이 전조(前朝) 영흥군(永興君) ()의 일과 흡사하다. 공양왕(恭讓王) 원년에 영흥군 환이 무릉도(武陵島)에 귀양간 뒤 그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를 모른 지가 19년이었다. 부인 신씨(辛氏)가 그 풍파에 휩쓸려 일본에 갔다는 소문을 듣고 조정에 간청하여 집 종으로 하여금 사신을 따라가서 물색(物色)하여 찾아오게 한 것이 무려 네 번이나 되었다.

네 번째 걸음에 그 종이 이른바 환()이란 자를 데리고 함께 왔는데, 사람됨이 매우 어리석고 얼굴도 보잘것없고 언어를 모두 잊어버려 그 아버지ㆍ할아버지의 성명과 또는 전에 살았던 마을을 모르는지라, 신씨(辛氏)의 아우 전 판사(前判事) 윤공(允恭)과 또는 그의 인친(姻親)인 전 부사 박천상(朴天祥)과 밀직부사(密直副使) 박가흥(朴可興)과 지밀직(知密直) 이숭인(李崇仁)ㆍ하륜(河崙) 등이 다 증언하기를,

이 사람은 사실 환()이 아니다.”

했다. 그런데 신씨는 와서 보고 매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아는 것이 어찌 아내의 아는 것 만하랴?”

하고는, 드디어 헌부(憲府)에 소송했더니, 헌부에서 그 종실(宗室)과 천상(天祥) 등을 집합시키고 환()의 두 아들과 그 형인 중 선수(仙髓)를 상대시켜 변별하게 하자 모두 말하기를,

영흥군이 틀림없다.”

하므로, 이에 천상(天祥) 등을 규탄하여 무고죄[]에 처했다 한다. 세간에는 별 해괴한 일이 많으니 옥을 판단하는 자는 삼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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