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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호연' 전문 현대어풀이

New-Mountain(새뫼) 2018. 1. 1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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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호연(玉珠好緣)

 

 

화설 오대(五代) 시절에 절강부((浙江府) 상게(上揭) 상림촌(上林村)의 일위(一位) 명공(名公)이 있되, ()은 최(), ()은 문경(文慶)이니, 동한광 무시공신 정로장군 최춘의 후예요, 옹식의 아들이라.

위인이 인효(仁孝) 공검(恭儉)하고, 그 부인 서씨와 더불어 화락(和樂)한지 여러 해로되, 농장지경(弄璋之慶)이 없음으로 부부가 서로 슬퍼하며,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정성이 미치지 아니한 곳이 없고, 적선(積善)하기를 숭상하는지라.

 

차시(此時) 공이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어 명망이 진동(振動)하되, 다만 임금이 어리고 조정에 소인(小人)이 농권(弄權)하매, 공이 공명(功名)의 뜻이 없어 드디어 상표(上表) 사직(辭職)하고, 고향의 돌아와 가산(家産)을 감찰(監察)하며 학업에 힘쓰더니, 이때는 모춘(暮春) 화시(花時). 화류(花柳)는 난만(爛漫)하여 경개(景槪) 절승(絶勝)하여 사람의 호흥(好興)을 돋우는지라.

공이 청여(靑輿)를 몰아 두로 구경하며 주가를 찾아 술을 사 먹더니, 어언간(於焉間) 일락서산(日落西山)하매, 공이 청여(靑轝)를 돌이켜 집으로 돌아올새, 길가에 큰 집이 있거늘, 공이 들어 가 본즉 금자(金字)로 대우지묘(大禹之墓)라 하였거늘, 공이 황공하여 즉시 묘지기를 불러 향촉(香燭)을 갖추어 앞에 나아가 도축(禱祝)하여 아뢰기를,

성인(聖人)이 천명(天命)을 받아 홍수를 다스리사, 천하 만민을 건지시매, 그 천지 같은 성덕을 만대(萬代)엔들 어찌 뉘 모르잇고. 이 최문경이 차생(此生)의 적선(積善)함을 일삼되, 지금 공회(空懷) 없사오니, 그 천도(天道)를 알 길이 없는지라. 바라건대 일점혈육(一點血肉)을 얻어, 후사(後嗣)를 끊지 말고자 하나이다.”

하고 빌기를 마치고, 문득 몸이 곤뇌(困惱)하여 난간을 의지해 잠깐 졸더니, 홀연 등촉(燈燭)이 휘황하고, 금관(金冠) 옥패(玉佩)한 관원(官員) 수백 인이 일위(一位) 왕자를 호위하여 들어와 전상(殿上)에 좌()한 후, 왕자가 좌우에 명하여 최문경을 부르라 하거늘, 홍포(紅袍) 관원이 나와 공을 불러 전하(殿下)에 이르러 전상에서 이르기를,

너는 유명한 대장의 후예라. 어찌 네게 이르러 향화(香火)를 끊게 하리오. 네 소원을 살펴 보옥(寶玉) 세 홀()을 주나니, 삼가 간수하면 너의 문호(門戶)가 흥기(興起)하여 만년 영화가 규지(窺知)하리라.”

하거늘 공이 그 옥을 받아 본즉, 옥빛이 심히 황홀한지라. 일어나 사배(謝拜)하다가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거늘, 공이 대희(大喜)하여 밝기를 기다려 정문(旌門)을 열어 행려장(行旅杖)을 들고 첨망(瞻望)한즉, 대우(大禹)의 의복과 외형(外形)이 꿈과 같거늘, 공이 더욱 감격하여 사배 하례(賀禮)하고 돌아와 부인더러 몽사(夢事)를 이르며 서로 즐기더니, 과연 그달부터 태기(胎氣) 있어 십 삭()이 차매, 부인 기운이 점점 쇠진(衰盡)하고 복부(腹部)가 유()다르게 부른지라.

일일(一日)은 한 도사(道士)가 표연(飄然)히 들어와 공을 보고 이르되,

내 거야(去夜)에 천문(天文)을 본즉, 장성(張星) 셋이 공의 집에 비취었으니, 필연 기이한 사람이 나리로다.”

하거늘 공이 이르기를,

내 집은 본디 포의지가(布衣之家), 다만 노처(老妻)가 잉태(孕胎) 만삭(滿朔)이나, 복부가 이상하게 부르기로 이 일로 근심하노라.”

도사가 웃으며 이르기를,

공의 집에 비상(非常)한 일이 있을 것이니, 빈도(貧道)가 머물며 순산(順産)함을 기다려, 남자가 나거든 사주(四柱)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공이 대희하여 도사를 외당(外堂)의 머물러 관대(款待)하더니, 과연 익일(翌日) 묘시(卯時)에 부인이 연()하여 삼자(三子)를 생()한지라. 공이 대희 과망(過望)하여 바삐 외당에 나와 도사더러 이 사연을 이르니, 도사가 아뢰기를,

이 아이들의 사주가 신묘(辛卯)년 신묘(辛卯)월 신묘(辛卯)시니 극히 비상한지라. 장내 귀복(貴福)이 무량(無量)하리니 십 세 넘거든, 광련산 진원도사 제식이라 하는 사람을 찾아, 그 술법을 가르치게 하라.”

하고 표연히 나가매 그 가는 바를 모를러라. 공이 기이 여겨 내당(內堂)에 들어가 도사의 말을 전하고, 아이 이름을 짓되, 장자(長子)의 명은 완()이요, 차자(次子)의 명은 진()이요, 삼자(三子)의 명은 경()이라 하다.

삼아(三兒)가 점점 자라 십 세의 미치니, 용모가 준아(俊雅)하여 용호(龍虎)의 기상이요, 재질(才質)이 영오(英悟)하여 문일지십(聞一知十)하는지라. 공이 도사의 말을 생각하고 삼자를 불러 이르기를,

남아(男兒)가 십오 세 되면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하나니, 여등(汝等)은 장차 어찌하고자 하느냐?”

삼자가 일시의 고()하기를,

대장부가 입신하여 출장입상(出將入相)하여 부모께 영효(榮孝)하고, 조선(祖先)을 빛냄이 떳떳한 일이거늘, 어찌 무성(無聲) 무훤(無喧)히 초목(草木)과 같이 슬퍼지리잇고.”

하니 공이 웃으며 이르기를,

너희의 뜻이 여차(如此)하니 또한 아름답도다.”

하고 즉시 행장을 차려 광련산(光連山) 진원도사를 찾아 보내더라.

 

각설(却說), 태주 강진촌(康津村)에 한 사람이 있되, 성명은 유원경(柳元敬)이라. 그 처 왕씨와 더불어 재산이 유여(有餘)하되, 다만 사속(嗣續)이 없어 주야 한탄하더니, 마침 유생이 만금(萬金) 재산(財産)을 가지고 무창 땅에 가 흥리(興利)하여, 강을 건너 금산사 동구 아래에 다다라 배를 매고 밤을 지낼새, 문득 일몽(一夢)을 얻은즉 한 부처가 제자를 데리고 유생을 불러 이르기를,

나는 극락세계(極樂世界) 아미타불(阿彌陀佛)이요, 좌우(左右) 제자(弟子)는 관음(觀音) 대세(大勢)이러니, 금산사 건원이란 중이 우리 불상을 이루다가 물역(物役)이 부족하여, 중도이폐(中道而廢) 하였으매, 그대가 가진 재보(財寶)를 주어 성사케 하면 큰 덕이 되리라.”

하거늘 유생이 절하여 아뢰기를,

()대로 하리이다.”

하고 깨달아 괴이 여겨 금산사의 나아가, 건원을 찾아 사연을 탐지(探知)한 후, 만금(萬金) 재물(財物)을 다 주어 성사(成事)함을 당부하니, 제승(諸僧)이 복복(伏伏) 사례(謝禮)하더라. 이때 유생이 집에 돌아와 몸이 피곤하여 잠깐 졸더니, 그 부처가 현성(顯聖)하여 이르기를,

네 전생(前生)에 죄 중()하므로, 금세(今世)의 무자(無子)하게 점지하였더니, 이번 대시주(大施主)한 공덕으로, 귀녀(貴女) 셋을 점지하나니, 비록 여자이나 가문을 빛내고 부모께 영양(榮養)하리라.”

하고 품에서 세 낱 구슬을 내여 왕씨를 주거늘, 유생 꿇어 바라본즉, 그 구슬이 명광(明光)이 찬란하여 하나는 붉고, 하나는 푸르고, 하나는 흰지라. 품에 품고 여러 차례 사례(謝禮)하다가 깨달으니, 침변(枕邊) 일몽(一夢)이라. 왕씨더러 몽사(夢事)를 이른즉, 왕씨 몽사가 일반(一般)이거늘 부부가 만심(滿心) 환희(歡喜)하더니, 과연 그달부터 태기 있어 십 삭이 차매, 여아 셋을 생()하매, 또한 신묘년 신묘월 신묘일 신묘시라. 부모가 환희(歡喜)하여 이름을 짓되, 장녀는 자주(紫珠), 차녀는 벽주(碧珠), 삼녀는 명주(明珠)라 하여, 각각 유모를 맡겨 보호하더라.

삼아가 점점 자라 십 세에 미치매, 절세(絶世)한 용색(容色)과 선연(嬋娟)한 품질(稟質)이 비상(非常) 특이(特異)하고, 문견(聞見)이 통민(通敏)하여 시서백가(詩書百家)에 모를 것이 없고, 매양 후원(後園)에서 조약돌로 진()을 벌리며 칼 쓰기와 말달리기를 익히거늘, 왕씨 알고 가장 민망히 여겨 삼녀를 계책(戒責)하기를,

여자지도(女子之道)는 내행(內行)을 닦으며 방적(紡績)에 힘써, 규문(閨門)을 나가지 아니함이 마땅하거늘, 너희는 어찌 외도(外道)를 행하여 고인(古人)에게 득죄(得罪)함을 감심(甘心)하고자 하느냐. 우리 팔자가 무상(無常)하여 너의 셋을 얻으매, 비록 여자이나 어진 배필을 얻어 우리 신후(身後)를 의탁할까 하였더니, 이제 너희 조금도 규녀(閨女)의 행실을 생각하지 아니하니, 이는 불가사문어타인(不可使聞於他人)이라. 만일 네 부친이 아시면 별단(別段) 거죄(巨罪) 있을 것이매, 내 차라리 죽어 모르고자 하나니, 너희 소견은 어떠하뇨?”

삼 소저가 이 말을 듣고 대경(大驚) 사죄(謝罪)하기를,

소녀(小女) 등이 어찌 부모의 은덕을 모르고 뜻을 거역하리오마는, 소녀 등이 규방의 소소(小小)한 예절을 지키다가는 부모께 영화를 보일 길이 없사온지라. ()의 당() 태종의 누이 장원공주도 평생 무예를 배워 천하의 횡행(橫行)하여 빛난 이름이 지금 유전(流傳)하오니, 소녀 등도 이 일을 효칙(效則)하여 공명을 세워 부모께 현양(顯揚)하고자 하옵고, 하물며 방금 천하(天下)가 대란(大亂)하매, 소녀 등이 득시지추(得時之推)이거늘, 어찌 한갓 여도(女道)를 지키어 세월을 허비(虛費)하리잇고.”

하니, 왕씨 청파(聽罷)에 삼녀가 의사(意思)가 상활(爽闊)하고 정심(定心)이 비속(卑俗)함을 보고 어이없어 다만 탄식뿐이러니, 그 후에 삼 소저가 또 후원에서 무예를 익힐 새, 유생이 다다라 보고 대경하여, 궁시(弓矢)와 병서(兵書)를 다 불지르고, 왕씨를 대책(大責)하기를,

여자는 그 어미 행사를 본받나니, 여아의 행사(行事)를 잡아 죔이 없음이 이 어쩐 일이뇨. 일후(日後)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부부지간이라도 결단코 용서치 아니하리라.”

하거늘 삼소저가 체읍(涕泣)하여 고하기를,

소녀 등의 불초(不肖)하므로 모친께 견책(譴責)이 미치오니, 소녀의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라. 복원(伏願) 대인(大人)은 소녀 등을 다스리시고 모친을 책()하지 마소서.”

하니 유생이 노질(怒叱)하기를,

내 팔자가 기구(崎嶇)하여 한낱 아들이 없고, 다만 믿는 바, 너의 뿐이러니 이제 너희 이렇듯 패도(悖道)를 행하매 뉘를 원()하리오. 오늘로부터 부녀지의(父女之義)를 끊어 다시 대면(對面)치 아니하리라.”

하고 소매를 떨쳐 외당으로 나가거늘, 삼 소저 물러나 장탄(長歎)하기를,

하늘이 어찌 우리를 여자로 내어, 행세의 구차함이 이 같으뇨.”

하여 수월(數月)이 지나매 삼인이 다시 후원에 들어가 무예(武藝)를 위업(爲業)하니, 왕씨 울며 금지하되, 종시(終是) 듣지 아니하매, 행여 공이 알까하여 크게 근심하더라.

 

이때 남촌 땅에서 사는 이업이란 사람의 아들 형제 동반(同伴) 급제함을 유생이 듣고, 이업을 보고 치하(致賀)한 후 돌아와 왕씨를 대하여 이업을 일컬어 이르기를,

남은 팔자가 희귀(稀貴)하여 양자(兩子)가 일방(一方)으로 고등(高等)하여 명망(名望)이 진동하고, 우리는 어찌하여 쓸데없는 삼녀를 두어 주야(晝夜) 근심하는고.”

하며 슬퍼할새, 시녀 춘앵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이르기를,

우리 삼 소저는 타일(他日) 원융대장이 되려 하여, 매양 무예를 숭상하오니 불구(不久)의 대화(大禍)가 미칠까 근심하나이다.”

하거늘 유생이 대경하여 이르기를,

내 전일(前日)에 차사(此事)를 엄금하였더니, 종시 듣지 아니함은 일정(一定) 부모를 죽이고 문호(門戶)를 망할 자식이매, 차라리 하나를 죽여 둘을 징계하리라.”

하고 취중(醉中) 노기(怒氣)를 걷잡지 못하여, 칼을 들고 후정(後庭)으로 들어가려 하거늘, 왕씨 울며 이르기를,

어린 아이들 상() 없는 놀음놀이로 대사(大事)를 삼아, 부녀의 천륜(天倫)을 끊고자 하니 어찌 사람의 참아 할 바이리오. 명일(明日)에 친척을 모아 의논하여, 처치함이 마땅하여이다.”

하며 만단(萬端) 애걸(哀乞)하니, 생이 잠깐 노()를 낮추고 상하(上下)에 엄히 분부하여 이 일을 누설치 말라 하고 날 새기를 기다리더라.

차시 삼 소저가 저녁 문안을 들어오다가 이 기미를 알고 대경실색하여 도로 침소의 돌아와 서로 붙들고 체읍(涕泣)하기를,

우리 대인 성도(性度)가 급하시거늘, 우리 두 번 범죄(犯罪)하였으매, 반드시 용서치 아니하실지라. 만일 우리 형제 중 하나를 죽이시면 인륜(人倫)이 산란(散亂)하고, 부모의 관인(寬仁) 대덕(大德)이 그림의 떡이 될 것이요, 또 아등(我等) 삼인이 일시의 강세(降世)함은 정녕코 하늘이 유의(有意)하심이니, 어찌 녹녹히 규방을 지키어 그저 늙으리오. 잠깐 부모 슬하를 떠나 신명(信明)한 임금을 도아 공명을 이룬 후, 금의환향(錦衣還鄕)하여 부모께 뵈오면 쾌()할까 하노라.”

벽주가 이르기를,

저저(姐姐)의 말씀이 가장 쾌하나, 만일 공명을 이루면 다시 부모를 뵈오려니와, 불연(不然)즉 세상에 버린 사람이 되리니, 기세양난(其勢兩難)이매 저저(姐姐)는 깊이 생각하소서.”

자주가 묵언(默言) 부답(不答)이거늘, 명주 이르기를,

고인(古人)이 운()하되, 대사(大事)를 경영하매, 소소(小小)한 호의(狐疑)를 아니한다 하나니, 우리 무단(無斷)이 사화(事禍)를 당하여 부모에게 누덕(累德)을 끼침이 또한 불효라. 우리 비록 여자이나 또한 하류(下流)가 아니니 십년 기약하면 일정 소원을 이룰 것이매, 저저는 유예(猶豫)치 말고 일언(一言)에 결단(決斷)하소서.”

자주가 이르기를,

사세(事勢) 여차(如此)하매 나가기로 정하려니와, 부모께 하직을 어찌 하리오?”

명주가 이르기를,

남자라도 출입(出入)에 방소(方所)를 고하나니, 하물며 우리는 여자의 몸이라. 거취를 명백히 하사이다.”

하고 삼인이 일봉서(一封書)를 닦아, 동산(東山) 화정(花亭)에 걸고 남복(男服)을 개착(開鑿)한 후, 여간(如干) 노수(路需)를 수습(收拾)하여 사경(四更)에 담을 넘어 달아 나니라.

 

차설(且說) 명조(明朝)에 유생이 친척을 모으고 후원의 들어가니, 삼녀의 종적이 없고 다만 화정 난간의 일봉서가 걸렸는지라. 유생이 대노하여 그 봉서를 가져다가 친척과 한가지로 떼어보니 대강 하였으되,

소녀 등이 쓸 데 없는 여자이라. 부모의 생육지은(生育之恩)을 갚을 길이 없음을 각골(刻骨) 통심(痛心)하여 천지(天地) 일월(日月)께 축원(祝願)하옵고, 남자 사업(事業)을 숭상하옵더니, 대인이 기노(起怒)하사 부녀지간 천륜을 끊고자 하시매, 소녀 등이 소당(所當) 잠수(潛水)할 것이로되, 다시 생각건대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영양(榮養)하고자 하다가, 도리어 부모께 골육(骨肉)잔해(殘害)하는 누명을 취()하게 함이 천지간 죄인인 고로, 이제 마지 못하여 십년을 위한(爲限)하옵고 슬하를 떠나 그음 없이 가오니 부모는 만수무강하소서.”

하였거늘 유생이 간파(看破)에 정신을 정치 못하여 다만 통곡하는지라. 유생의 종형(從兄) 유도경은 사람의 선악 길흉을 짐작하는 고로, 매양 질녀(姪女) 삼인을 칭찬하더니, 이날 질녀의 글월 보고 유생에게 이르기를,

차아(此兒) 등이 반드시 문호를 빛내리니, 현재는 과려(過慮)하지 말라. 내 전일 선영(仙塋)에 제향(祭享)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한 기승(奇僧)을 만난즉, 기승이 이르되, 이미 내룡(來龍)을 보매 백호(白虎)로부터 사명산 삼봉(三峯)이 되었으니, 자손에 삼개(三皆) 영웅의 여자가 나리라 하는 것이매, 이제 보건대 이 아이들에게 응하였으니 현재는 급거(急遽)이 굴지 말고 나중을 보라.”

하거늘 유생이 비로소 울며 이르기를,

형장(兄丈) 말씀 같을진대 설마 어찌 하리오마는, 이제 저희를 거연(居然)히 이별하고 십 년을 어찌 기다리리오.”

하고 실성(失性) 체읍(涕泣)하더라.

 

차설 삼 소저가 문을 나서며 표연(飄然)히 행하여, 단양지경의 다다라서는 대강(大江)이 앞에 있고, 강변에 한 주점(酒店)이 있거늘, 주과(酒果)를 사 요기하고자 하여 들어가니라.

차시 최생 삼인이 광련산으로 향하다가 그 주점의 이르러 주식(酒食)을 요기하고 쉬더니, 삼 소저가 들어옴을 본즉, 삼 미소년(美少年)이 용모와 품질(稟質)이 참치(參差)함이 없이 비상(非常)특이(特異)한지라. 최생 등이 흔연히 청하여 함께 당()에 좌정하매, 유 소저 등이 눈을 들어 최생 등을 살핀즉,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기상이 일세(一世) 기남자(奇男子).

피차 공경함이 극진하더니, 최유(崔柳) 등이 서로 성명을 통한 후, 최생 이르기를,

삼위(三位) 형이 동복(同腹) 형제신가?”

자주가 이르기를,

동복일 뿐 아니요, 또한 동태(同胎)로라.”

하고 드디어 연월일시를 이르니, 최생 등이 대경 대희하여 이르기를,

아등(我等) 삼인도 동태 형제요, 사주가 또한 그대와 같으니 이는 천고(千古)에 희한지새(稀罕之勢)로다. 우리 비록 성명이 다르나, 필연 전생 형제니 어찌 무심한 바이리오. 우리 육인이 이렇듯 만남이 또한 기이하매, 천지께 고하여 형제 됨이 어떠하뇨.”

자주 등이 또한 행심(幸甚)하여 허락하고, 즉시 양주(良酒)와 향촉(香燭)을 갖추어 도원산에 올라 고하기를,

아등 육인이 이제 결의형제(結義兄弟)하여 사생(死生)화복(禍福)을 한가지로 하려 하옵나니, 만일 마음을 변역(變易)하는 자가 있거든, 명천(明天)은 살피사 앙화(殃禍)를 내리소서.”

하고 일시의 일어나 사배(四拜)할새, 최완과 자주는 동향하고, 최진과 벽주는 서향하고 최경은 명주와 남향하여 도축(禱祝)하기를 마친 후, 서로 술을 권하여 진취(盡醉)한지라.

최진이 벽주의 손을 잡고 웃으며 이르기를,

금일 형의 용모를 본즉, 실로 소제(小弟)의 마음이 흠모함이 심하매, 타일(他日) 현달(顯達)한 후, 형 같은 부인을 얻어 일생(一生) 동락(同樂)하고자 하노라.”

벽주가 답하며 웃기를,

장부가 공명을 이룬 후 숙녀 얻기를 어찌 근심하리오.”

하며 서로 담소하더니, 최완이 소저더러 이르기를,

형등은 공명의 뜻이 어디에 주()하였나뇨?”

자주 답하기를,

어진 사부를 구하여 무예를 배워 공명을 성취하고자 하되, 마땅한 사부를 만나지 못하매 갈 바를 알지 못하노라.”

최완이 대희하여 이르기를,

우리도 또한 형의 소원과 일반이라. 광련산에 어진 스승이 있다 하니, 한가지로 가리라.”

하고 의복 양찬(糧饌)을 판비(辦備)하여, 육인이 즉일(卽日) 발행(發行)하여 여러 날 만에 광련산의 다다라서는 층암절벽 화림(花林) 중에 일좌(一座) 초옥(草屋)이 은은히 뵈거늘, 최유 등이 나아가 명첩(名帖)을 드리니, 도사가 청()하여 볼새 육인이 계하(階下)에서 재배(再拜)하니, 도사가 묻기를,

그대 등은 무슨 일로 이 심산(深山)궁곡(窮谷)에 들어와 나를 찾느뇨.”

육인이 다시 재배하여 아뢰기를,

소자 등이 선생 고명(高名)을 우뢰 같이 듣고, 좌하(座下)에 모셔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여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왔나이다.”

도사가 미소하며 이르기를,

내 비록 아는 것이 없으나 너의 소원을 좇으리라.”

하거늘 육인이 이에 당()에 올라 모심에 도사가 사랑하여 비밀한 병서와 신기한 무예를 가르치니, 육인이 주야 불태(不怠)하여 힘써 배우매 반년이 못되어 정숙(精熟) 관통(貫通)하여 무불지각(無不知覺)이러라.

 

이때 도사의 제자 중 왕정빈이 또한 육도삼략(六韜三略)과 천문지리(天文地理)를 모를 것이 없거늘, 선생이 명하기를,

너는 배운 것이 정통하였으매 바삐 나가되, 몸을 경()히 던지지 말고, 어진 천도(天道)를 섬겨 유방백세(流芳百世)하게 하고 돌아와 다시 만남을 바라노라.”

하니 정빈이 누수(漏水)를 뿌려 수명(受命)하여 이르기를,

소자가 용우(庸愚)하므로 인유(仁柔)가 충수(充數)함이 다 선생의 교훈(敎訓)하신 공덕이라. 입신(立身)하온 후, 선생께 뵈올 기약(旣約)을 어찌 더디하리잇고.”

하며 인()하여 하직하고 문밖에 나오니 최유 등이 멀리 나와 전송할새, 정빈더러 이르기를,

()은 당시(當時) 호걸(豪傑)이라. 세상의 나가매 명주(名主)를 만나 이름이 빛나리니, 우리 육인이 공부가 진취(進取)한 후, 형을 찾을 것이니, 형은 금일(今日) 정의(情義)를 잊지 말고 힘써 제도(提導)하라.”

하거늘 정빈이 응낙하고 가니라.

 

차설(且說) 최유 등이 공부한 지 이미 삼년이라. 일일은 선생이 이르되,

여등(汝等)이 학술(學術)이 장진(長進)하였고, 길운(吉運)이 다다랐으매 바삐 나가 진주(眞主)를 섬겨, 이름을 현달(顯達)하게 하라.”

하니 최유 등이 아뢰기를,

방금 천하가 요란하여 이름 없는 도적이 무수한지라. 이제 한 번 몸을 던져 진주를 만나지 못하면 몸을 속절없이 마치리니, 바라건대 선생은 제자 등의 사정을 통촉(洞燭)하사 신명(神明)한 천자(天子)를 가르치소서.”

선생이 잠소(潛笑)하며 이르기를,

내 세상을 도망한지 칠십여 년이라. 세간(世間) 인사(人事)를 모르거니와, 근간 천문을 본즉, 제성(諸星)이 번주지경(幡州之境)에 비추었으니, 필연 천자(天子)가 이 땅에 있으리니, 너희 굳이 알고자 하거든 황하산 귀곡선생 황혜란 사람을 찾아가 길을 묻고 가라.”

하거늘 최유 등이 답하기를,

우리 부모가 비록 낳았으나, 사람됨은 사부의 공덕이니 어찌 일시나 잊으리잇고. 만일 길시(吉時)를 만나 공명(功名)이 여의(如意)하거든,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다시 뵈옵기를 바라나이다.”

선생이 미소하며 이르기를,

내 이 곳을 떠나, 낮이면 동해에 가 놀고 저녁이면 서산의 머물지니, 어찌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리오. 너희는 다만 몸을 삼가 노부(老父)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하거늘 최유 등이 재배(再拜) 수명(受命)하고 인하여 하직하고 발행(發行)하니라.

 

차설 최유 등이 황하산을 찾아가니, 산천이 수려(秀麗)한 곳에 수간(數間) 석실(石室)이 운간(雲間)의 비끼었는지라. 육인이 나아가 시비(柴扉)를 두드리니, 이윽고 청의(靑衣) 동자(童子)가 나와 묻기를,

시객(時客)은 어디 있으며 무슨 일로 이 심산의 들어왔느뇨?”

하고 들어감을 청()하거늘, 육인이 동자를 따라 들어가니, 선생이 머리에 화양건(華陽巾)을 쓰고 몸에 학창의(鶴氅衣)를 입으며 손에 백우선(白羽扇)을 쥐었으매, 표연(飄然)한 선골(仙骨)이라. 육인이 계하(階下)에서 재배(再拜)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귀인(貴人) 등은 어찌하여 침폐(沈閉)한 노인을 찾느뇨?”

육인이 답하기를,

소자 등은 광련산 진원도인의 제자이러니, 사부의 명을 받아 화복(禍福) 길흉(吉凶)을 묻잡고자 하여 왔나이다.”

하고 생년 월 일 시를 고하니, 도사가 대경하여 이르기를,

육인의 사주가 이같이 한가지니 고금의 희한하도다. 상모(相貌)가 더욱 비범하매, 이는 명수죽백(名垂竹帛)하고 위진사해(威振四海)할 사주라.”

하거늘 육인이 다시 절하여 아뢰기를,

범증(范增)은 항우(項羽)를 섬김으로 능히 입신치 못하고, 진평(陳平)은 한()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는 그 임금을 만나고 못 만남에 있는지라. 이러하므로 우리도 성주(聖主)를 기다리나니, 선생은 자세히 가르치소서.”

선생이 잠소하여 이르기를,

내 들은즉 절강(浙江) 호주(湖州) 땅에 한 대주(大主)가 있되, 절도사(節度使) 조흥의 아들 조광윤(趙匡胤)이니, 차인(此人)이 수명(受命)한 임금이요 그 막하에 영웅호걸이 많으매, 여등은 부디 이 사람을 찾아 섬기도록 하라.”

최완이 아뢰기를,

이같이 지교(指敎)하시매 불승(不勝) 황감(惶感)하옵거니와 감히 묻잡나니, 소생 등의 길흉을 점복(占卜)하여 주소서.”

선생이 다시 주점(主占)하고 웃으며, 지필(紙筆)을 내어 일수시(一首詩)를 써 주되, 최완 등의 글은,

진명(眞明)한 사람을 붙들어 사방을 진정(鎭靜)하니, 일조(一朝)에 이름이 웅장하도다.’

하였고, 자주 등의 글은,

수레 맨 말을 타고 고향의 돌아오는 날, 전포(戰袍)로써 붉은 치마를 바꾸리로다.’

하였거늘 최완 등이 재삼 보니 그 뜻을 깨닫지 못하여 이에 고하니,

사부의 글 뜻이 그윽한지라. 전포로써 홍상(紅裳)을 바꾸오리라 하신 말씀은 어떤 뜻이니잇고?”

선생이 함소(含笑)하며 이르기를,

천기(天機) 비밀하매 경설(輕說)치 못하나니, 타일 자연 알지니 때를 잃지 말고 빨리 나가라.”

하니 육인이 사례하직하고 번성(幡城)으로 향하니라.

 

각설 이때 북한(北漢)이 자주 변방을 침노(侵擄)하거늘, 천자가 조광윤으로 정적거기 병마대원수를 삼고, 조보로 참모사를 내리고, 조빈과 석수신과 왕정빈에게 대임을 맡겨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나가니라.

차시 최유(崔柳) 등이 번성의 이르러 조원수의 위엄이 진동함을 듣고 대희하여 나아가 왕정빈에게 성명(姓名)을 통하니, 정빈이 급히 청하여 예필(禮畢) 좌정한 후, 서로 별회(別懷)를 이르며 주배(酒杯)를 날려 단란(團欒)할새, 명주가 묻기를,

장군이 이제 안민지재(安民之材)로 몸을 굽혀 남의 막하(幕下)가 되었으니, 조원수의 위덕(威德)을 가히 짐작하려니와 천명(天命)이 원수에게 돌아간 줄 어찌 아느뇨?”

정빈이 미소하며 이르기를,

현제(賢弟) 등은 우리 주공(主公)을 보지 못하였으매, 이 말이 기이(奇異)치 아니하거니와, 우리 주공 은덕이 사해(四海)에 미치고, 위엄이 천하에 덮였으며, 현인(賢人)을 예()로 대접하고, 제장(諸將)을 의()로 무애(撫愛)하매, 사방 현사(賢士)가 구름 모이듯 하여, 이른바 망지여운(望之如雲)이요 취지여일(就之如日)이니, 어찌 현재의 재조로 주공께 쓰임을 근심하리오. 방금 북국이 침범하매, 주공이 병마를 발하여 태원으로 가고자 하나, 천자를 세우지 못하였기로 아직 지류(遲留)하더니, 적세(敵勢) 급하매 명일 제장을 모아 문무(文武)를 의논할 것이니, 이때를 타 현제(賢弟) 등을 천거(薦擧)하리라.”

하니 육인이 치사(致謝)하고 물러 나니라.

 

익일(翌日)에 조원수가 대소 무사를 모아 출사(出師)하기를 의논할새, 왕정빈이 진전(陣前)에서 고하기를,

소장(小將)이 처음 스승을 찾아 병법을 배울 때에 동학(同學) , 최완 삼 형제와 유자주 삼 형제는 비록 연소(年少)하나, 한신(韓信)의 지용(智勇)과 진평(陳平)의 모계(謀計)를 겸득(兼得)하여 짐짓 일세 영웅이라. 주공의 성덕이 조야(朝野)의 덮였음을 듣고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왔사오니, 차인(此人) 등을 휘하(麾下)의 두시면 한() 고조(高祖)의 삼걸(三傑)를 부러워 아니 하시리이다.”

하거늘 원수가 크게 기뻐하여 즉시 육인을 부르라 하니, 최유 등이 차례로 들어와 장하(帳下)에서 재배하니 원수가 일견(一見)에 대희하여 이르기를,

이는 짐짓 지모지새(智謀地勢). 나의 복이 중하여 이런 사람을 얻도다.”

하고 자주 등을 더욱 칭찬하기를,

차인(此人)은 가위(可謂) 곤산(崑山) 백옥(白玉)이오 창해(蒼海) 명주(明珠).”

하고, 최유 등이 또한 원수의 기상(氣像)을 살핀즉 짐짓 용봉지자(龍鳳之姿), 천일지표(天日之表). 최유 등이 가장 심복(心服)하여 자기 등이 입시(立身)함을 응망(凝望)하더라.

원수가 육인의 위인(爲人)을 사랑하여 최완 등 삼인을 봉하여 좌교위 표장군을 삼고, 자주 등 삼인은 후교위 영장군을 삼아, 각각 금포(錦袍)와 전마(戰馬)와 보검(寶劍)을 사급(賜給)하여 시위(侍衛)케 하니라. 오제장(五諸將)이 또한 육인의 풍채를 흠애(欽愛)하여 별호를 육봉(六峰)이라 하더라.

 

이때 원수가 조서(詔書)를 받자와 대군 칠십만과 명장 이백여 명을 거느려 태원의 이르러 진세(陣勢)를 벌리고, 제장을 불러 북한 파()함을 의논할새, 조빈이 가로되,

이제 우리 군사가 멀리 오매 인곤(人困) 마핍(馬乏)하고 양초(糧草)가 부족하매, 가히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 북한 양초와 병기가 다 원양성 중에 있으니, 먼저 원양성을 앗아 근본을 끊으면, 북한 파()함이 여반장(如反掌)이라.”

하니 원수가 대희하여 이르기를,

그대 말이 마땅하나, 뉘 능히 이 소임을 감당하리오.”

하더니 문득 최완과 자주 등이 응성(應聲) ()하여 이르기를,

소장(小將) 등이 비록 무재(無才)하오나, 원컨대 일지병(一枝兵)을 빌리시면 원양성을 파하리이다.”

원수가 대희하여 즉시 육천 군을 조발하여, 육인에게 각각 일천 군을 거느려 원양성으로 보내고, 왕정빈에게 삼천 철기(鐵騎)를 거느려 호풍성을 지키어 북한 군마(軍馬)가 통()하지 못하게 하니라.

 

차설 육인이 원양성 십 리에 하채(下寨)하고 계교를 의논할새, 명주 이르기를,

여차여차 하면 어떠하뇨?”

최완이 대희하여 이르기를,

그대 말이 정히 내 뜻과 일반이라.”

하고 명일 조조(早朝), 최완과 명주가 각각 변복(變服)하고 원양성 아래로 나아가 크게 불러 외치기를,

아등(我等)이 태수께 고할 말씀이 있노라.”

하니 수성장 장림이 친히 문루(門樓)의 올라 바라본즉, 이인(二人)이 손에 병기(兵器) 없이 황망한 낯빛으로 성하(城下)의 이르렀거늘, 장림이 이르되,

여등(汝等)은 하인(何人)이기에 성에 들고자 하느뇨?”

양인이 이르기를,

아등은 절강의 사는 백성이러니 장군께 고할 말씀이 있으매, 문을 열어주소서.”

하거늘 장림이 그 용모(容貌) 동지(動止)를 보고, 신지무의(信之無疑)하여, 즉시 영을 내려 문을 열어 들이니, 양인이 천연(天然)히 들어와 장하(帳下)에서 울며 이르기를,

아등은 원래 물화(物貨)를 가지고 태원성에 와 화매(貨賣)하여 생()하더니, 대원수 조광윤이 물화를 다 앗고, 우리로 하여금 호풍령을 지키어 우리 만일 성공치 못하거든 인하여 죽이라 하니, 우리 본디 창검(槍劍)과 궁시(弓矢)를 모르거늘, 어찌 이 소임을 당하리오. 천사만탁(千思萬度)에 마지못하여 장군께 항복하고 고향에 돌아가 부모나 만나 보고자 하여 왔나니 장군은 어여삐 여겨 잔명(殘命)을 구하심을 바라나이다.”

하거늘 장림이 청파(聽罷)에 의심치 아니하고, ()의 올리고 술을 내 와 관대(款待)하니, 부장 원견이 간()하기를,

양진(兩陣)이 상대하매 천만가지 계교로 진중의 허실(虛實)을 탐지하거늘, 장군의 어찌 차인 등을 이같이 믿어 그 진위(眞僞)를 살피지 아니 하나뇨. 익히 생각하여 타일 뉘우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명주가 읍()하며 이르기를,

우리 전혀 장군을 부모같이 바라고 투항하였더니, 이제 이렇듯 의심하매 가위(可謂)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차라리 장군 앞에서 죽어 넋이라도 장군을 의지하리라.”

하고 언파(言罷)에 요하(腰下)의 단검을 빼어 자결하고자 하거늘, 장님이 급히 만류(挽留)하며 이르기를,

원수의 말이 긍연(兢然)하거니와, 그러나 그대 실정이 이 같은즉 어찌 다시 의심하리오.”

하고 양인을 머물러 주육(酒肉)으로 관접(款接)하더니, 수일이 지난 후 최유 양인이 장림에게 이르기를,

우리 대장 석수신이 조광윤의 심복이라. 일이 전연(傳連)하면 후환이 되리니, 삼일 후 장군이 병을 거느려 진()을 여차여차 겁측하면, 아등이 합력(合力) 내응(內應)하리라.”

하고 돌아가려 하니 장림이 응낙하고 즉시 보내니라.

 

차설 양인이 본진(本陣)에 돌아와 사항(詐降)한 사유를 이르고, 지함(地陷)을 깊이 판 후, 최진과 벽주는 각각 일천 군마를 거느려 대진(對陣) 뒤에 매복하고, 최완은 이천 군을 거느려 북군의 의복과 기치(旗幟)를 같이하여 원양성 북문 밖에 매복하였다가 삼경 후 복병(伏兵)에게 패한 체하고 북문을 열라하며 급히 들어가 수성장(守城將)을 베고 나와 장림을 막으라 하고, 최경은 일천을 거느려 지함(地陷) 좌우에 매복하고,

차일 야심한 후에 대적(對敵)에서 불을 놓으니 화광(火光)이 충천(衝天)한지라. 장림이 불 일어남을 보고 최완 등의 내응이라 하여 부장 한양에게 성을 지키라 하고 스스로 군사를 재촉하여 크게 고함하고 짓쳐 들어가더니, 이윽고 장림의 전군(全軍)이 낱낱이 지함에 빠지며, 일성 포향(砲響)에 사면 복병(伏兵)이 일어나니, 북군이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만나 사산분궤(四散奔潰)하며, 죽는 자가 또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라. 장님과 원평이 겨우 도망하여 원양성으로 달아 나니라.

차시 최완이 본진(本陣)에 불 일어남을 바라보고 원양 북문에 나아가 대호(大呼)하기를,

우리는 북한 패군이니 빨리 문을 열라.”

하니 한양이 그 진가(眞假)를 살피지 못하고 문을 쾌히 열거늘, 최완이 급히 군을 몰아 짓쳐 들어가니, 한양이 대경하여 대적하다가 최완의 창을 맞아 죽는지라. 최완이 승세(勝勢)하여 성문으로 충돌하여 나오니, 장림이 자주를 맞아 십여 합을 싸울새 장림의 기운이 쇠진(衰盡)하여 달아나거늘, 문득 벽주가 고성(高聲)으로 이르기를,

장림 적자(敵者)는 달아나지 말라.”

하며 활을 한번 당기어 장님의 이마를 맞추니 장림이 몸을 번드쳐 말에서 떨어지매, 최경이 달려들어 장림을 생금(生擒)하여 돌아가거늘, 원평이 대노하여 말을 놓아 자주와 더불어 교전하여 십여 합의 이르러는 자주의 칼이 번듯하며, 원평이 탄 말이 거꾸러지니, 원평이 말에서 내려져 어쩔 수 없어 항복하는지라. 자주가 군마를 재촉하여 성중의 들어가 백성을 진무(賑撫)하고 군사를 호궤(犒饋)하니라.

 

이때 왕정빈이 호풍령의 매복하였다가, 성중(城中) 화광을 보고 최완 등이 행여 실수할까 저어하여 군을 몰아 원양성으로 향하다가, 중로(中路)에서 이 소식을 듣고 대희하여 말을 돌리어 본진으로 돌아와 원수께 이 사연을 고하니, 원수가 오백 군을 거느려 원양성의 이르러 최유 등을 칭찬하고, 금보(金寶)로 상사(賞賜)한 후, 호연찬에게 명하여,

정병(精兵) 일만으로 북국을 치되, 북군이 패하여 동으로 달아날 것이매, 깊은 곳에 매복하였다가 북군이 지나거든 사로잡으라.”

하고, 또 장사 운경을 불러 이르기를,

너는 거짓 항복하였다가, 유명이 나와 싸우는 틈을 승시(乘時)하여 성문을 열어 우리 군사를 들이면 성을 가히 얻으리라.”

하고 약속을 정한 후 진문(陣門)에서 여러 싸움을 돋우니, 유명이 내달아 두어 합을 교봉(交鋒)하더니, 문득 원수가 패하여 동을 바라고 삼십여 리를 달아나다가 홀연 간 데 없거늘, 유명이 급히 따르다가 의혹(疑惑)하여 말을 돌이켜 진을 버리고 가더니, 성이 이미 함몰함을 듣고 대경하여 진세(陣勢)를 버리고 크게 외치기를,

너의 간사한 꾀로 우리 성지(城址)를 앗으니 한 번 싸워 한을 씻으리라.”

하거늘 원수가 대소(大笑)하며 이르기를,

너의 등이 천시(天時)를 모르고 나와 더불어 대적하고자 하느냐. 이제라도 항복하면 봉후(封侯)를 잃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명이 대노하여, 장창(長槍)을 빗겨 들고 달려들어 원수를 취()하거늘, 왕정빈이 급히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유명을 대적(對敵)할새, 적진 중에서 장원과 이현과 오예와 육경 등이 일시에 짓쳐 나오니, 함성이 대진(大振)하고 살기(殺氣) 충천하는지라.

이에 최유 등 육인이 갑주를 갖추고 장창을 휘두르며 말을 내모니, 가위 사람은 천신(天神) 같고 말을 비룡(飛龍) 같은지라. 자주가 적진에 충돌하여 두어 합에 유경을 베어 마하(馬下)에 내리치고, 명주는 한칼로 오예와 이현을 쳐 죽이고, 벽주는 유명을 질러 내리치며 삼인이 좌우로 충살(衝殺)하니, 그 날램이 비록 나는 제비라도 따르지 못할지라.

북군이 여러 장수가 죽음을 보고 넋이 없어 사면으로 흩어지거늘 최완이 승승(勝乘)하여 장원을 마자 싸워 수십여 합의 이르러는 자주가 분노하여 가만히 조궁(雕弓)에 금비전(金鈚箭)을 먹여 쏘니, 장원이 가슴을 맞아 죽는지라. 또 원수가 대군을 몰아 엄살(掩殺)하니 북한이 대패하여 죽은 자가 뫼 같고, 유진이 홀로 도망하다가 호연찬을 만나, 할 길이 없으매 말에서 내려 항복하니라.

 

각설 원수가 장졸을 거두어 승전고를 울리며 번성의 이르러, 대연(大宴)을 배설(排設)하여 즐길새, 제장 등이 진전(陣前)에 고하기를,

소장 등이 원친척(遠親戚) 이분묘(離墳墓)하고 여러 해 주공을 좇아 동서분주(東西奔走)함은 장차 용린(龍鱗)을 더위잡고, 봉익(鳳翼)을 붙잡고자 함이라. 이제 후주(後周)가 암약(暗躍)하고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지매, 천하가 어진 임금을 기다린 지 오래고, 주공의 성덕이 사해에 덮여 인심이 자연 귀순(歸順)하오니, 이 천명(天命)이 주공께 돌아옴이거늘, 이제 주공이 작은 절의(節義)를 위하여 소장 등의 말을 쓰지 아니하시매, 소장 등이 바랄 것이 없사와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나니, 주공은 장차 뉘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시려 하나잇고? 고언(古言)에 하였으되, 천여불취(天與不取)면 반수기앙(反受其殃)이라 하니, 주공은 깊이 생각하여 때를 잃지 마소서.”

하고 일시의 나아가 황포(黃袍)를 받들어 입히고, 만세를 부르는지라.

이에 원수가 인심이 이 같음을 보고 마지못하여 제위(帝位)에 오르며 탄식하기를,

차역(此亦) 천명(天命)이라.”

하시고, 제신(諸臣)을 경계(警戒)하여 이르기를,

경등이 짐을 핍박(逼迫)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거니와, 태후(太后)와 소제(小帝)는 나의 옛 임금이니 생심(生心)도 요동(搖動)치 말며, 조정 대신은 나의 동반(同伴)이니 능욕(凌辱)치 말며, 백성은 나의 적자(嫡子)이니 추호(秋毫)를 불범(不犯)하라.”

하시니, 제신이 돈수(敦壽)하여 아뢰기를,

이는 다 폐하의 일월(日月) 같은 성덕이오니, 신등이 어찌 감히 역명(逆命)하리잇고.”

하고 드디어 위의를 갖추어 병마를 휘동하여 동화문으로 들어올새, 백성이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맞으며 시정(市井)이 저자를 옮기지 아니하는지라.

 

이때 후주(後周)가 태조가 들어오심을 듣고, 한림학사로 조서(詔書)를 지어 옥새와 절월(節鉞)을 보내거늘 태조가 옥새를 받으사 중현전에서 즉위하시니, 이는 송태조 무덕황제라. 모친 호시로 황태후를 봉하고, 처 두시로 황후를 봉하신 후 공신을 봉작(封爵)할새, 조보로 승상을 삼고, 석수신으로 대장군 안두호를 봉하고, 왕정빈으로 표기장군을 삼고, 조빈으로 거기장군을 삼고, 최완으로 평무장군을 삼고, 최진으로 용양장군을 삼고, 최경으로 평양장군을 삼고, 자주 등 삼인을 불러 이르기를,

남자의 용모가 비록 수려하나 어찌 경등 같은 이 있으리오.”

하시고 벼슬 이름을 지으사, 자주로 화수장군 완사후-꽃이 부끄러워 범려(范蠡)의 첩 서시(西施)의 슬하에서 깁을 꿰다는 말이라-에 봉하시고, 벽주로 매향장군 채상후-매화 향기롭고 주옥의 처 교시 천하일색(天下一色)으로 뽕으로 누에를 쳐 부모를 흠양(欽養)한다는 말이라-에 봉하시고, 명주로 옥투장군 거안후-()이 투기(妬忌)하고 양홍(梁鴻)의 처 맹광(孟光)이 지아비 밥상을 눈 위에 두었단 말이라-를 봉하시고, 태조가 웃으며 이르기를,

짐이 금일 삼경(三卿)의 벼슬 봉하는 바는 별회(別懷). 일후(日後) 반드시 기담(奇談) 묘사(妙思)가 되리라.”

하시니 이는 태조가 총명 예지(叡智)하시매, 그 음양(陰陽) 변체(變體)함을 이미 아심이라. 제신은 상이 유의(有意)하심을 깨닫지 못하되, 자주 등은 황공 불안함을 마지아니하더라.

 

차설 자주 형제, 고향을 떠난 지 이미 칠년이라. 사친(思親)하는 회포(懷抱)가 간절하매, 이에 상소하여 말미를 청하니, 상이 비답(批答)하기를,

짐이 생각함이 있으매 아직 참으라.”

하시니 삼인이 유유(悠悠)히 퇴(退)하다. 일일은 벽주 형제 후원 춘각에 와서 주배(酒杯)를 날려 시사(詩詞)를 창화(唱和)하여 이회(離懷)를 위로할새, 시를 지어 심사(心事)를 부치니, 그 시에서 이르기를,

삼년을 임금을 좇았으니, 더욱 쇠함을 알고 돌아가는 꿈이 깁 장()에 이르도다. 분면(粉面)이 족하고 능히 화경(花鏡)을 잡아 때로 사창(紗窓)을 의지하여 눈썹 그리기를 게을리 하는 도다.”

하였더라. 읊기를 마치고 서로 탄식하더니, 최완 형제 또한 여기에 있었던지라. 최진이 깨어다가 벽주의 글을 듣고 대경하여, 익일에 형제와 더불어 이 말을 일러 말하기를,

우리 눈이 있되, 사람을 알지 못함이 이 같으리오.”

최완이 머리를 흔들어 이르기를,

내 본디 의심이 있되, 그 여력(膂力)과 학식(學識)이 특이하고, 언어(言語) 등이 쾌활하기로 오히려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더니, 전일 황하산 도사의 말이 금일에 이름이오. 우리 주상이 자주 형제에 특별히 이름을 지어 봉작하심이 또한 짐작이 계신지라. 우리는 오래 동처(同處)하였으되 전연(靦然)히 알지 못하였으니, 가히 우습도다. 그러나 그런 여자는 용렬(庸劣)한 장부를 무수히 주어도 바꾸지 아니하리니 어떤 사람의 자식으로 이같이 작용(作用)하여 사람을 속이는고.”

하며 못내 칭찬할새, 최진 이르기를,

이제 저의 근본을 안 연후에는 그저 있기 갑갑하니 무슨 계교로서 저들의 근본을 쾌히 적발(摘發)할꼬?”

최경이 웃으며 이르기를,

소제에게 한 계교(計較) 있으니 여차여차 함이 어떠하니잇고?”

최완이 기뻐하며 답하기를,

그 계교 가장 묘하도다.”

하고 약속을 정할새, 차시는 계춘(季春) 망간(望間)이라. 사람을 부려 자주 등 삼인을 청한 후, 원절루 우에 주찬(酒饌)을 벌리고 누() 사면(四面)을 다 막으며, 최완 형제 다 숨고, 하리(下吏)에 분부하여 이리이리 하라 하다.

 

익일에 자주 형제 최가의 이른즉, 주인이 없거늘 하리를 불러 묻되, 하리 아뢰기를,

우리 장군이 오늘 장군을 모셔 춘경(春景)을 유완(遊玩)하고자 하시더니, 의외 에 고향에서 급한 소식이 있기로, 지완(遲緩)치 못하여 가시며 서찰(書札)을 드리라 하시더이다.”

하며 드디어 봉서(封書)를 드리니, 기서(其書)에서 이르기를,

소제 등이 금일 삼형(三兄)과 더불어 주배(酒杯)를 놀려 춘경을 헛되이 보내지 말자 하였더니, 마침 고향에서 부모 소식이 왔으매, 칠팔 년 이측(離側)하였던 회포로, 일시도 머물지 못하고 급히 떠나매, 형에게 배약(背約)한 죄는 타일 스스로 청하리니, 주인 없음을 혐의(嫌疑)치 말고 후원에서 완유(玩遊)함이 또한 무방하도다.”

하였거늘, 자주가 남필(覽畢)에 서중(書中) 사의(事意)가 자기 심사 같음을 보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양제(兩弟)를 돌아보아 이르기를,

우리도 이친(離親)한 지 벌써 칠년이라. 어찌 마음에 매친 정이 같지 아니하리오.”

하고 후원에 들어가 누의 올라 술을 먹고 춘경을 구경할새, 화간(花間) 호접(胡蝶)은 왕래(往來)하고 유상(柳上) 황앵(黃鶯)은 힐항(詰抗)하여 사람의 심회를 돕는지라.

이에 하리를 물리고 원문(園門)을 닫고, 난간의 의지해 회포를 펼새, 문득 벽주가 유체(流涕)하며 이르기를,

우리 천은을 입어 몸이 영귀(榮貴)하였으매 또한 무엇을 바라며, 하물며 위로 임금을 기망(欺罔)하고 아래로 만조(滿朝)를 속이니, 천지(天地) 귀신(鬼神)과 일정 무이(無異) 여길지라. 이 일이 만일 탄로(綻露)한즉 가장 난처하리니, 일찍 고향으로 돌아감이 어떠하뇨.”

자주가 탄식하여 이르기를,

우리 규중 여자로서 부모께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백만(百萬) 군중(軍中)에 왕래하여 몸이 영귀하였으니, 또한 희한한 일이거니와, 부모가 우리 생사를 몰라 천만가지로 사념(思念)하심을 생각할진대, 우리 불효를 면치 못할지라. 어찌 일시나 지체(遲滯)하리오마는, 성상(聖上)이 불윤(不允)하시므로 천연(遷延) 세월 함이니 어찌 나의 뜻이리오.”

명주가 양형(兩兄)의 말을 들으매 행여 종적이 현로(現露)할까 하여 정색(情色)하여 이르기를,

우리 부모께 하직을 고하지 못하고 나와, 대사를 도모하여 다행히 소원이 여의(如意)하였으매 이만 기쁨이 없는지라. 이제 금의(錦衣)로 돌아가 부모를 뵈올 때에 부모가 우리를 잃고 슬퍼하시던 일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리니, 어찌 부질없이 슬퍼하리오. 우리 종적(蹤迹)이 현탈(現頉)하기 전에 아직 남자로 행세하여 천하의 지기(志氣)를 쾌히 하리니, 두 형장(兄丈)은 공연히 번뇌치 마소서.”

하며 이렇듯 담화할 즈음의 최완 형제 누하(樓下)로 내다르며 손뼉 치고 웃으며 이르기를,

심자(深者)이라. 삼 부인이여. 사람 속이기를 이토록 하느뇨?”

하거늘 자주와 벽주는 실색(失色)하여 대답하지 못하되, 명주가 홀로 변색(變色)하여 이르기를,

우리 형() 등으로 더불어 사생(死生)을 한가지로 하여 정이 골육 같거늘, 일시 간인(奸人)의 말을 들어 의심을 내어 우리를 이같이 속이려 하기로, 우리도 그 일을 짐작하고 짐짓 거짓말로 형 등을 취맥(取脈)함이라.”

하고 분연히 소매를 떨쳐 가려 하거늘, 최생 형제 헤아리되,

저의 본적(本迹)이 탄로나매 우리를 거절하려 함이라.’

하고 즉시 웃으며 이르기를,

우리 일시 희롱이니 형 등은 노하지 말라.”

하고 이에 술을 내와 서로 진취(盡醉) 한담(閑談)하고 파()하니라.

 

차설 최완 형제 승상 조복(朝服)을 보고, 자주 등의 소이연(所以然)을 개개(箇箇)이 전하니, 승상이 듣고 또한 기이 여겨 즉시 입궐하여 천자께 자주 등의 설화(說話)를 주()하니, 상이 웃으며 이르기를,

전일 짐이 유씨 삼인을 봉작할 제, 각별 유의하여 작호(爵號)를 줌을 경이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도다. 세상에 어찌 그리 민첩한 남자가 있으리오. 짐이 삼녀의 종적(蹤迹)을 나타내리니, 경은 아직 누설치 말라.”

하시고 내전(內殿)의 들르사, 태후께 자주 등의 수말(首末)을 고하니, 태후가 칭찬하여 이르기를,

여차 기이한 일이 있으니 실로 귀한지라. 삼녀가 비록 여자이나 국가의 공덕이 호대(浩大)하매, 그 인륜(人倫)을 정하여 줌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리오.”

하시니 상이 인하여 최완 등의 전후사연을 고하여 이르기를,

신이 장차 중매하여 저들의 인륜을 정하려 하나이다.”

태후가 웃으며 이르기를,

정합(整合) 오의(吾意)로다. 저들의 부모가 경사(京師)에 없으매, 삼녀는 내 주혼(主婚)하고 삼랑은 황상(皇上)이 주혼하심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이 기뻐하사 마땅함을 일컬으시고 외전(外殿)의 나오사, 즉시 예관(禮官)을 명하사 비밀하게 택일하시니 길일(吉日)이 칠월 망간이라.

이때 자주 등이 간절한 사의(辭意)로 상소하여 말미를 청하니, 상이 자주 등을 인견(引見)하사 이르기를,

경의 청을 어찌 시행치 아니 하리오마는, 짐이 이제 경하연(慶賀宴)을 배설(排設)하려 하나니, 잔치에 참여(參預)한 후 돌아감이 늦지 않으리라.”

하시니 자주 등이 이런 기미를 돈연(頓然)히 모르고 유유히 퇴하니라.

 

이러구러 추 칠월 망간이 되었는지라. 상이 태액지(太液池)에서 잔치를 배설하여 문무제신을 모으시고 태후와 황후는 내전에 어좌(御座)하사 육궁(六宮)비빈(妃嬪)과 대신(大臣) 명부(命婦)를 청하여 즐기시는지라. 상이 태액지(太液池) 연화(蓮花)를 구경하실새, 문득 최완 등과 자주 등에 명하여 이르기를,

짐이 전일 뇌담해에서 연화가 만발할 제, 소년 아이들이 물에 들어 헤엄쳐 희롱함을 좋게 여기던 바이라. 경등은 절강 사람이라. 반드시 어룡희(魚龍戱)를 잘 할 것이니, 이제 물로 고기를 잡아 짐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하시니 최완 등은 술이 반취(半醉)하여 흥이 높아지매 흔연히 옷을 벗고 물의 들고자 하되, 자주 등은 망연하여 황공(惶恐) 복지(伏地)하거늘, 상이 연()하여 재촉하시니, 이에 명주가 부복하여 주하기를,

이제 폐하가 대위에 오르사 마땅히 요순지치(堯舜之治)를 효칙(效則)하사, 백성을 애휼(愛恤)하시고 정사(政事)를 부지런히 하실 것이거늘, 어찌 유희(遊戲)무도(無道)함을 일삼으사, 국사를 돈연(頓然)히 생각지 아니 하시니, 신은 그윽이 불취(不就)하나이다.”

하며 언사(言辭)가 씩씩한지라. 상이 아름다이 여기시나 사색(思索)하지 아니하시고, 삼녀의 본적을 만조 중의 나타내고자 하사, 이에 엄지(嚴旨)를 내리오되,

신자(臣子)가 되여 군전(君前)에서 말을 만홀(漫忽)히 하여 짐을 촉훼(促毁)함이 감히 옳다 하랴.”

자수가 면관(免冠) 돈수(敦壽)하여 아뢰기를, 용납

폐하가 이제 천하의 부모가 되사 충간(忠諫)을 불납(不納)하시니 장차 천하를 어찌 다스리려 하시나잇고.”

하며 읍체여우(泣涕如雨)하거늘 상이 거짓 노하사, 무사로 하여금 삼인의 옷을 벗겨 물에 넣어라 하시니, 무사가 전교(傳敎)를 받자와 십여 인이 달려들어 삼인의 옷을 벗기려 하는지라. 이에 이르러는 삼인이 피()치 못할 줄 알고 경황하다가 빨리 사모(紗帽)와 조복(朝服)을 벗고 부복 청죄(請罪)하니, 상이 거짓 놀라사 물으시되,

경이 청죄하는 바 실사(實事)를 진주(進奏)하라.”

삼인이 체읍하며 주하기를,

신첩(臣妾) 등이 천지(天地)를 속여 음양(陰陽)을 변체(變體)하온 죄 있사오매, 이제를 당하여 어찌 종시 기망(欺罔)하리잇고.”

하고 전후사연을 낱낱이 아뢰니, 상이 청파(聽罷)에 놀라시며 또한 웃으며 이르기를,

금일 경등의 소회(所懷)를 들은즉 진실로 기이한 일이로다. 짐이 이왕 알음이 있기로 봉작할 때 작명을 다르게 함이요, 오늘 이 거조(擧措)는 경의 본적을 만조 문무로 명백히 안 연후의 대사를 행하고자 함이니, 경등이 비록 지혜 원대(遠大)하나 어찌 짐을 속이리오.”

하시고 근시(近侍)로 하여금 태후께 고하니, 태후가 즉시 명초하시니 삼인이 금포(錦袍) 옥대(玉帶)로 궁녀를 따라 장춘전의 이르러 사배(謝拜)하거늘, 태후와 황후가 용안(容顔)을 들어 보신즉, 삼인의 아름다운 용모와 민첩한 기질이 진선진미(盡善盡美)한지라. 황후가 흔연히 사좌(私座)하시고 칭찬하시기를,

경이 규중 약녀로 만군 중의 횡행(橫行)하여 공훈(功勳)이 호대(浩大)하매, 그윽이 아름다이 여기노라.”

하시니 삼인이 부복 사은하더라.

태후가 이르기를,

경의 부모가 멀리 있고 인륜(人倫)을 주장(主掌)할 이 없으매, 군신은 부자일체(父子一體). 상과 짐이 경의 대사를 정할지니, 먼저 의복을 개착하라.”

하시고, 궁녀로 하여금 채복(綵服)을 가져와 입기를 이르시니, 삼인이 싫어도 마지못하여 조복을 벗고 여복을 개착(改着)할새 악연(愕然)하물 이기지 못하여, 추파(秋波)에 물결이 동하는지라.

 

상이 이미 예부의 전지(傳旨)하사 혼구(婚具)를 준비하시고, 최완 등 삼인에게 명하기를,

경등이 유가(柳家) 삼녀와 결의형제하였더라 하니, 여자의 염치(廉恥) 타문(他門)의 못할 것이오. 또 더욱 기특(奇特)한 바는 경등 삼형제나 유녀(柳女) 삼형제 다 동태(動胎)라 하니, 이는 천정연분(天定緣分)이 분명한지라. 경등 부모가 머니 이으매 짐이 우선 주혼(主婚)하여 재미를 보고자 하나니, 경등은 사양 말고 금일 성례(成禮)하여 짐의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시니 최완 등이 자주 등의 본적이 탄로됨을 보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거든, () 성교(聖敎) 여차(如此)하심을 들으매 가위 고소원(固所願)이라. 이에 부복(仆伏)사은(謝恩)하여 이르기를,

성교 여차하시매 어찌 거역하리잇고마는 불고이취(不告而娶)한 허물을 면치 못할까 하나이다.”

상이 이르기를,

짐이 주혼(主婚)하매 무슨 허물이 있스리오,”

하시고 위의(威儀) 갖춤을 재촉하시니 삼인이 길복(吉服)을 입고 외전(外殿)에서서 전안(奠雁)한 후 내전 근처 별당으로 들어가니, 자주 등 삼인이 어쩔 수 없어 성례할새, 수십 시녀가 화촉을 잡아 삼인을 인도하여 배석의 임()하니, 그 남풍여모(男風女貌)가 일호(一毫) 참치(參差)함이 없으니, 짐짓 일대 미사(美事)이러라.

 

육인이 차례로 각각 성례한 후, 상과 황후를 인견하사 이르시기를,

경등의 일은 천고(千古)의 없는 바이라.”

하시며 칭찬불이하시고 유씨 등에게 부인 직첩(職牒)을 주실새, 자주로 평국부인을 봉하고, 벽주로 동국부인을 봉하고, 명주로 위국부인을 봉하시고, 보화(寶貨)채단(綵緞)을 무수히 상사(賞賜)하시니, 삼 부인 이 천은이 망극함을 사은한 후 태후께 하직하고 금거(金車) 옥륜(玉輪)에 올라 부중으로 돌아왔더니, 명조(明朝)에 삼인이 표()를 올려 성은을 사례하고 죄를 청하였는지라. 가로되,

신첩이 미천한 여자로 당돌(唐突)하여 음양(陰陽)을 변체(變體)하여 외람한 의사(意思)를 내어 위로 성상을 기망하고 버금으로 아비와 세상을 속이오니, 그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거늘, 폐하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들이오실 뿐 아니오라 도리어 봉작과 상사를 나리오시니, 성덕을 갚사올 곳을 알지 못하옵거니와, 이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고자 하오니, 복원 성상은 신첩 등 정세(情勢)를 살피옵서.”

하였거늘 상이 남필(覽畢) 후에 비답(批答)하시기를,

여자의 몸으로 갑옷을 입고 창을 둘러 만군 중의 횡행하여 국가의 일등공신이 되고, 이제 부모를 보고자 하니 이는 천고의 희한한 일이라. 황금 삼백 냥과 채단 삼백 필를 상사하매, 경의 친전(親前)을 봉양하라.”

하시니 삼인이 성은이 갈수록 망극하심을 보고 도리어 감읍함을 마지 아니하더라.

 

차시 장군 왕정빈이 유씨 삼인이 여자임을 보고 크게 기하게 여겨 즉시 비단과 서찰을 보내었거늘, 자주 등이 봉서를 떼어 보니 기서(其書)에 이르기를,

우리 칠 인이 광련산에서 동학하여 세상의 나와 오륙 년 군중(軍中)에 한가지로 출입하매, 그 정이 골육과 다름이 없더니 어찌 일조(一朝)에 원융대장이 화()하여 최가(崔家)의 녹녹한 부인이 될 줄 뜻하였으리오. 이제 규방에 몸을 감추시매 외간 남자로서 사()를 통()함을 불감(不感)하나, 학생(學生)은 고의(古意)를 잊지 못하여 감히 글월을 올리나니, 바라건대 나의 당돌함을 노책(怒責)지 마소서.”

하였거늘 삼인이 간필(簡筆)에 서로 이로되, 지위

왕장군은 사형지(師兄地)에 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천거하여 이같이 영귀하였으니, 그 은혜를 어찌 잊으리오. 한 번 청하여 후의(厚意)를 사례하리라.”

하더니 이날 최완 등이 어주(御酒)에 취하고 바로 유부로 돌아오니, 삼 부인이 일어나 맞아 좌정 후, 삼인이 웃으며 이르기를

석일(昔日) 저자에서 강학(講學)하던 붕우(朋友)가 오늘날 임석(衽席)간에 부부가 될 줄 어찌 뜻하였으리오.”

삼 부인이 또한 미소하여 이르기를,

첩 등이 비록 여자이나 이미 공명을 이루었으매, 부모께 영효(榮孝)하고 쾌히 행신(行身)하여 다시 규중(閨中)의 수졸(守拙)할 뜻이 없거늘, 상공의 휼계(譎計)로 만인(萬人) 소시(所視)에 본적이 탄로되어, 금일 이 거조(擧朝)가 있으니 어이 한이 없스리오.”

하며 서로 담소할새, 이미 야심하매 최생 이르기를,

여름밤이 괴로이 짧으니 각각 침소를 정함이 엇더하뇨.”

자주가 이르기를,

황명을 거역하지 못하여 비록 예를 이루었으나, 양가(兩家) 친전의 고하지 못함이 예가 아니매, 고향의 돌아가 부부지도(夫婦之道)를 행하여도 오히려 늦지 아니할까 하나이다.”

최완이 웃으며 이르기를,

이제 고향에 돌아가 부모의 명이 없으면 우리를 버리고자 하느뇨.”

명주가 미소하며 이르기를,

우리 형제 이미 삼군(三君)의 가실(家室)이 되었으매, 이후에 어찌 괴기(怪奇)를 부리리오.”

하니 최완 등이 유씨의 쾌활한 말을 들으매 불승(不勝)탄복(歎服)하고, 외헌(外軒)의 나와 쉬니라.

 

명일에 대연(大宴)을 배설하고 왕정빈을 청하여 종일 담소하여 즐기고 헤어진 후, 최완과 자주 등이 상소하여 하직을 고하니, 상이 수이 돌아옴을 당부하시고, 태후가 유씨 삼인을 인견하여 금백(金帛)채단(綵緞)을 상사하시니, 삼인이 사은이퇴(謝恩而退)하여 행장을 차릴새, 삼 부인이 최 장군께 청하여 이르기를,

첩 등이 먼저 구고(舅姑)께 뵈옴이 당연한 도리오나, 우리 황명으로 성례한지라. 첩의 집으로 돌아가 다시 혼례를 이루고, 신부지례(新婦之禮)를 갖추어 구고께 나아감이 옳을까 하나이다.”

하거늘 최완 등이 옳게 여겨 바로 태주로 향하니라.

 

차설 선시(先時)에 유공 부부가 일조에 삼녀를 잃고 주야로 슬퍼하며 당초(當初)의 거조(擧措)하던 일을 도리어 한탄하여 세월을 보낸 지 이미 칠년이라. 사생존망(死生存亡)을 몰라 화조(花朝)월석(月夕)에 눈물이 마를 때 없더니, 이때 최 장군 등이 삼 부인을 배행(輩行)하여 태주로 향할새, 각도(各道) 군현(郡縣)이 지영(祗迎)지송(祗送)하여 공궤(供饋) 극진하니, 노상(路上) 관자(冠者)가 고금의 희한한 일로 책책칭선(嘖嘖稱善)하더라.

이렇듯 여러 날 만에 관진촌의 다다르매, 삼 부인은 상사(賞賜)하신 물종(物種) 수레를 앞세우고 녹의홍상(綠衣紅裳)한 시녀 채거(彩車)를 옹위(擁衛)하였고, 삼 장군은 직첩(職牒)을 앞세우며 허다(許多) 위의(威儀)를 거느려 나아오니, 그 거마(車馬) 추종(追從)이 왕자의 비길지라.

유부(柳府) 동구(洞口)의 이르러는, 일촌(一村)이 진동하여 남녀노소 없이 관광(觀光)칭선(稱善)하며, 선성(先聲)이 전하여 유부의 미치니, 유공 부부가 대경(大驚) 대괴(大怪)하여 이르기를,

내 집에 이런 손이 올 리 없거늘 어쩐 일인고.”

의아하더니 이윽고 무수한 시녀가 화촉을 잡아 앞을 인도하고, 금수채(錦繡綵) 덩 셋이 나아오고, 그 뒤에 삼위(三位) 대관(大官)이 공후(公侯) 복색(服色)으로 들어오는지라. 유공은 다른 데로 피하고 왕씨는 점주(點奏)히 서서 그 시종(侍從)을 보더니, 문득 덩을 청상(靑裳)이 놓고, 그 대관 삼인이 나아와 각각 덩문을 연 후, 삼 부인이 봉관(鳳冠)화리(花履)와 홍군(紅裙)채삼(綵衫)으로 표연히 나아 와 왕부인께 뵈오니, 왕부인이 황망히 답례하기를,

삼위 부인은 뉘시며 무슨 일로 누지(陋地)의 왕굴(枉屈)하시뇨.”

하거늘 삼 부인이 추연(惆然) 함루(含淚)하며 이르기를,

모친이 어찌 소녀 자주 등을 몰라 보시나니잇고.”

하며 청죄(請罪)하니 왕부인이 그제야 정신을 차려 그 성음(聲音)을 듣고, 그 용모를 살핀즉 분명한 칠팔 년 전의 잃었던 삼녀이라. 부지(不知)불각(不覺)에 들입다 안고 실성 통곡할새, 유공이 시비 전어(傳語)를 듯고 여취여광(如醉如狂)하여 전지도지顚之倒之히 들어와 본즉, 과연 자주 등 삼인이거늘, 황망이 여아를 붙들고 통곡하기를,

이것이 참이냐 꿈이냐. 너희 죽은 혼백이 우리를 놀램이냐. 너희 나간 지 칠팔 년에 사생존몰을 몰라 주야 슬퍼하더니, 오늘날 산 낯으로 만나 보매 어찌 반갑지 아니하리오. 그러나 어찌하여 이리 더디 되었으며 저 삼위 대관은 뉘인고?”

삼인이 눈물을 거두고 집을 나간 후의 전후사연을 낱낱이 고할새, 최 장군 삼인이 나와 차례로 유공 부부께 뵈오니, 유공 부부가 불승(不勝)환희(歡喜)하여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은 후, 여서(女壻)가 성례하는 재미를 보고자 하여, 택일 성례할새 원근 친척과 노소 향당(鄕黨)을 청하여 경하연(慶賀宴)을 배설하고, 육인이 쌍쌍이 교배(交拜)하니 그 부부의 용모 기질이 서로 사양(辭讓)할 바가 없으매, 유공 부부가 희출망외(喜出望外)하여 웃는 입을 주리지 못하고, 좌우 친척 빈객이 칭찬하는 소리가 원근에 낭자(狼藉)하더라.

빈주(賓主)가 주배(酒杯)를 날려 즐길새, 위국부인 명주가 화엽(花葉)의 웃음을 머금고 부모께 고하기를,

석일(昔日) 대인이 이업의 양자(兩子)를 부러워 하시더니, 금일 소녀 등의 영화가 이생만 못하니잇가?”

하거늘 좌상(座上)의 유도경이 함소(含笑)하여 이르기를,

우숙(愚叔)은 너희 금일이 있을 줄 알았노라.”

하니 삼 부인이 낭연(琅然) 함소할새, 평국부인 자주가 춘앵을 불러 꾸짖기를,

석일에 네 감히 공교(工巧)한 혀를 놀려 노야(老爺)의 노()를 돋우었으니 그 죄 엇더하뇨?”

하니 춘앵이 황공하여 묵묵무언이거늘, 위국부인이 웃으며 이르기를,

형장(兄丈)은 춘앵을 책하지 마소서. 춘앵이 만일 대인께 고하지 아니하였다면 우리 족히 대사를 일우지 못하였으리니, 어찌 춘앵의 공이 아니리오.”

동국부인 벽주가 이르기를,

춘앵이 진실로 죄 없고 공이 크매 중상(重賞)함즉 하도다.”

하고 금은채단을 상사하니라.

 

이러구러 십여 일이 되매, 최 장군이 사친지회(思親之懷) 날로 증가하니, 가위 일각(一角)이 여삼추(如三秋)이라. 삼 부인더러 이 소회(所懷)를 성화(成火)하고 급히 택일하여 위의를 차려 절강으로 향할새, 육인이 유공 부부께 하직하며 아뢰기를,

소녀 등이 다시 슬하를 떠나옴이 심히 창연(悵然)하오나, 구고께 뵈옵는 예를 폐하지 못하여, 이제 구가(舅家)로 가오니 우리 경사(京師)로 올라가올 때 또한 부모를 모셔갈 것이매, 조금도 사념(思念)치 마소서.”

하며 서로 연연(戀戀)한 마음을 어찌 다 측량하리오.

 

화설(話說) 최한림 부부가 삼자를 지수(指授)없이 이별하고 이미 팔년의 소식이 묘연하매, 주야 간장을 사르더니, 일일은 문득 동구 밖에 들리며 위의(威儀) 부성(富盛)한 곳에 삼위 대관이 청관(靑冠) 홍포(紅袍)와 옥대(玉帶) 아홀(牙笏)로 백설(白雪) 대완마(大宛馬)를 탔으니, 언연(偃然)한 장상(將相)의 기상이오. 또 그 뒤에 홍상 시녀가 폐백(幣帛)과 화촉을 받들어 채()덩 셋을 옹위하여 나아오니, 구경하는 사람이 구름 모이듯하여 책책(嘖嘖) 칭찬하기를,

이 반드시 동촌 최태공의 삼상(三相)이로다

하며 모든 노복(奴僕) 등이 급히 들어가 고하기를,

우리 삼 상공의 뒤에 금교(錦轎) 셋이 오시나이다.”

하거늘 공의 부부가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전지도지하여, 중문에 나와 아자(兒子)의 손을 잡고 내당에 들어가 별회(別懷)를 일러 불승대희할새, 삼인이 부모께 재배하여 반긴 후, 유씨 삼인을 만나 광련산에 들어가 동학하던 사연과, 한가지로 황상을 섬겨 성공하여 봉후(封侯)하던 곡절(曲折), 천자가 주혼(主婚)하여 유씨와 더불어 인연을 맺은 설화를 일일이 고하니, 공의 부부가 더욱 기특히 여겨 삼 부인을 별당에 쉬게 하고, 명일에 대연을 베풀어 친척향당을 청하고, 신부의 예를 받들새, 삼 부인이 단장(丹粧)을 잠깐 수식(修飾)하고 폐백을 받들어 구고께 드린 후, 물러나와 사배하니, 공 부부가 불승환희하여 눈을 들어 살펴본즉 짐짓 여중호걸이요, 규내(閨內)장군(將軍)이라.

수려한 용모와 쇄락(灑落)한 기질은 이로 형용치 못하매 그 사랑하는 마음이 비할 데 없더라.

 

차설 이때 태조가 조서를 내리어 최생 등을 바삐 솔가(率家)하여 상경하라 하시니, 최 장군 등이 부모를 뫼시고 삼 부인을 거느려 길을 나설새, 광진촌의 이르러 빙부모(聘父母)를 보고 한가지로 행리(行李)를 수습하여 경성으로 올라와 유공 부부는 유부에 머무니라.

장군 등이 궐하의 나아가 조현(朝見)하니, 상이 인견하사 반기시고 유씨 등이 조현치 아니함을 물으시니, 최완 등이 부복 주하기를,

자주 등이 비록 석일 작은 공이 있사오나, 이제는 전과 달라 번거로이 지존(至尊)에 조회(朝會)치 못함이로소이다.”

상이 함소하여 이르기를,

그 말도 당연하거니와 금일만 조현하여 군신이 서로 반기게 하고, 또한 태후께 조알(朝謁)하여 전일 은총을 잊지 말라.”

하시니 장군이 승명(承命)하고 물러나 부중의 돌아와 삼 부인더러 이 사연을 전하니, 이에 평국부인 등 삼인이 채거(彩車)를 밀어 궐내의 들어가 탑전(榻前)의 조현하니. 상이 반기사 이르기를,

너희는 국가의 제일 공신이라. 주야 상대하여도 오히려 부족함이 있을 것이로되, 불행이 너의 등이 여자인 고로 뜻과 같지 못하여 결연(缺然)함이 많으매, 이후로는 삭망(朔望)으로 조현하여 군신이 서로 낯이나 잊지 말게 하라.”

하시거늘 삼인이 고두 수명하고, 인하여 태후기 조알하고 물러나와 이후로 감군은(感君恩)이란 노래를 지어 항상 부르더라.

 

이때 상이 최문경과 유원경을 패초(牌招)하사 기자(奇子) 기녀(奇女) 둠을 칭찬하시고, 봉작하고자 하시니 양인이 굳이 사양하니, 상이 그 뜻이 굳음을 보시고, 이에 최문경을 청계선생이라 하시고 유원경을 운계선생이라 하시고, 각별 상사하시니 최유 양인이 사은하고 물러나와 천자의 성은이 갈수록 망극함을 축원하더라.

이때 양가(兩家)가 집을 연()하여 화락(和樂)한 지 이십여 년이라. 삼 부인이 각각 유자(有子) 생녀(生女)하여, 평국부인은 이자 일녀를 두었으되, 장자의 명은 희룡이니 십육에 등과(登科)하여 벼슬이 한림편수를 하였고, 차자의 명은 희봉이니 아직 연유(年幼)하고, 여아는 조보의 며느리 되고, 동국부인은 삼자 일녀를 두었으되, 장자의 명은 희준이니 십오에 등과하여 한림수찬을 하였고, 차자 명은 희학이요, 삼자의 명은 희린이니 연유하고, 여아는 조빈의 며느리 되고, 위국부인은 사자 이녀를 두었으되, 장자의 명은 희령이니 평생에 공명의 뜻이 없어 다만 성현지학(聖賢之學)을 숭상하며 산림에 벽()해 있어 세상에 나지 아니하고, 차자 명은 희명이니 십오의 진사(進士)하고, 삼자의 명은 희성이오 사자의 명은 희경이니 연유하고, 장녀는 석수신의 아들 광현의 부인이 되고, 차녀는 연유한지라. 이렇듯 자손이 번성하고 복록(福祿)이 무궁하며, 삼 형제 집을 연()하여 조석으로 모여 부모를 효봉(孝奉)하고 자녀를 교훈하여 그 화락함이 일세의 유명하더라.

 

흥진비래(興盡悲來)는 고금(古今) 상사(常事). 최공 부부가 연하여 졸서(卒逝)하매, 최 장군 등의 애훼(哀毁) 과례(過禮)하여 선산에 안장하고 슬픔으로 세월을 보내더니, 어언간(於焉間) 삼상(三喪)을 마친 후, 천자가 사(使)를 보내사 조현(朝見)함을 재촉하시매, 삼인이 마지못하여 경사(京師)의 이르러 직임(職任)을 다스리며 영화부귀를 누리는지라. 또 유공 부부가 연하여 세상을 버리매, 삼인이 벽용(擗踊) 과례하여 상례(喪禮)를 갖추어 선산에 장사(葬事)하고, 위국부인이 차자 희명으로 유공 부부의 향화를 받들게 하니라.

 

차설 세월이 여류하여 최 장군 부부의 나이 칠십이요, 자손이 벌열(閥閱)하매, 그 오복이 가히 곽분양(郭汾陽)을 따를지라. 태극비래(泰極否來)는 천도(天道) 순환(循環)이매, 장군 부부 육인이 문득 일조의 천궁(天宮) 요지(瑤池)로 돌아가니, 그 자손 등이 불의(不意)에 부모를 상실하매, 천지를 부르짖어 애통하니, 그 경상(景狀)을 차마 보지 못할러라.

그후 최완의 증손 방현이 문과 장원하여 자정전(資政殿) 학사를 하였는지라. 위인이 출류(出類)하고, 문학을 겸비하매 선종황제 총애하시더니, 선종이 붕하신 후 철종이 즉위하시고, 전 인종황후가 친정(親政)하실새, 방현의 위인과 문재(文才)를 사랑하사, 한림 편수 겸 추밀부사를 내리시고 이르기를,

경의 증조(曾祖) 최완이 동태(同胎) 삼형제로, 유씨 삼녀와 한가지로 태조 황제를 도와 공후한 사적(史籍)이 있을 것이니, 짐이 한번 보고자 하노라.”

하시니 방현이 수명하고, 전후사적을 모아 닦아 드리거늘, 태후가 보시고 기이 여기사 사관(史官)에 명하사 행적을 기록하고, 삼옥삼주기연(三玉三珠奇緣)이라 이름하여 전()을 짓고, 육인을 추증(追贈)하여 봉작을 더하시고, 제문(祭文)을 지어 중사(中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시니, 최가의 복록과 은총이 대대로 끊기지 아니하고 자손이 면면(綿綿) 부절(不絶)하여, 황명(皇明) 시절까지 창성(昌盛)하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사적(史籍)이 민멸(泯滅)하기 아까운 고로 대강 기록하여 후세의 전하노라.

신해(辛亥) 원월(元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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