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선전(白鶴扇傳)
화설(話說) 대명(大明) 시절에 남경 땅에 일위(一位) 명환(名宦)이 있으되, 성(姓)은 유(劉)요, 명(名)은 태종이요, 별호(別號)는 문성이니, 오대 충신 자손으로 공후작록(公侯爵祿)이 대대로 끊이지 아니하고, 유공(劉公)의 위인(爲人)이 인후(仁厚) 공검(恭儉)한지라.
일찍 용문(龍門)의 올라 천총(天寵)이 융성(隆盛)하여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이르되, 다만 슬하의 자식이 없음이 일로 인하여, 청운(靑雲)을 하직하고, 고향의 돌아와 밭 갈기와 고기 낚기를 일삼더니, 일일은 갈건(葛巾)도복(道服)으로 죽장(竹杖)을 짚고, 명산(名山)풍경(風景)을 심방(尋訪)하려 한가히 나아가니, 차시(此時)는 춘삼월 호시절이라.
백화(百花)는 만발하고 양류(楊柳)는 청사(靑絲)를 드리운 듯, 두견은 슬피 울고, 수성(水聲)은 잔잔하매, 자연 사람의 심회(心懷)를 돕는지라. 즉시 집으로 돌아와 부인 진씨를 대하여 탄식하며 이르기를,
“우리 적악(積惡)한 일이 없으되, 한낱 자식이 없어 조선(祖先)향화(香火)를 끊게 되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로 돌아가 조상을 뵈오리오. 유명지간(幽明之間)의 죄를 면하지 못할지라. 옛사람도 일월성신(日月星辰)께 빌어, 혹 자식을 보는 이 있음이 우리도 정성을 드려 보사이다.”
하고 후원(後園) 깊은 곳에 단(壇)을 모으고, 밤마다 부인과 더불어 단에 올라 자식을 기도하더니,
일일(一日)은 부인이 병풍에 의지하여 잠깐 졸새, 문득 서쪽으로부터 오운(五雲)이 일어나며, 옥동자 백학(白鶴)을 타고 내려와 재배(再拜)하고 아뢰기를,
“소자(小子)는 상계(上界) 동자(童子)이니, 죄를 얻어 갈 바를 몰라 자저(趑趄)하다가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인도하여 이곳으로 왔사오니, 바라건대 부인은 어여삐 여기소서.”
하고 부인의 품으로 들거늘, 부인이 대희(大喜)하여, 상서(尙書)를 보고자 하다가 문득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즉시 상서를 청(請)하여 몽사(夢事)를 이르니, 상서가 또한 기뻐하더니 그 달부터 태기(胎氣) 있어 십 삭(朔)이 차매, 부인이 혼미(昏迷)하여 침석(寢席)의 누웠더니, 문득 한 쌍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부인을 위로(慰勞)하여 이르기를,
“이 아이 배필(配匹)은 서남 땅에 사는 조씨이니 인연을 잃지 마소서.”
하고 옥호(玉壺)의 향수(香水)를 기울여 아이를 씻겨 누이고, 간 데 없거늘, 부인이 기이 여기며 상서를 청하여, 이 일을 고하니, 상서가 기뻐하여 생년 월을 기록하며, 이름을 백로라 하고 자를 연우라 하다.
세월이 여류(如流)하여 백로의 시년(時年)이 십 세 되매, 얼굴과 풍채가 세상에 뛰어나고, 효용(效用)이 절인(絶人)하며, 효성이 또한 지극하니, 상서 부부의 사랑하미 비할 데 업더라.
재설(再說) 성남 오 리 밖 부주 땅에 남정운이란 선생이 있으되,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하매, 백로가 학문을 배우고자 하여, 부친에게 고하기를,
“듣자온즉 성남의 고명(高名)한 선생이 있다 하오니, 나아가 학문을 넓히고자 하나이다.”
하거늘 상서가 말리지 못하여 즉시 행장(行裝)을 차려 주며, 백학선(白鶴扇)을 주며 이르기를,
“이 부채는 선세(先世)부터 유전(遺傳)하는 보배라. 범연(泛然)히 알지 말라.”
하니 백로가 꿇어 받잡고 인(因)하여 하직(下直)하니라.
이 때 조성로란 사람이 세대(世代) 명문(名門)거족(巨族)으로 재학(才學)이 유명(有名)하여 벼슬이 상서의 이르고, 부인 순씨와 더불어 해로(偕老)하되, 일찍 슬하에 골육(骨肉)이 없어 슬퍼하더니, 일일은 부인에게 이르기를,
“우리 부부가 명도(冥途)가 기박(奇薄)하여 한낱 사속(嗣續)이 없어, 조상께 큰 죄를 면치 못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부인 이르기를,
“첩의 죄악(罪惡)이 관영(貫盈)하여 일점(一點) 혈육이 없사오나, 상공의 성덕(性德)으로 어찌 후사(後嗣)를 근심하리오. 불효(不孝) 삼천(三千)의 무후(無後)가 위대(偉大)라 하오니, 어진 숙녀(淑女)를 택하여 자손을 보소서.”
조공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도시(都試) 팔자소관이니, 내 어찌 부인을 저버리고, 다른 뜻을 두어 집을 요란하게 하리오. 사찰(寺刹) 도관(道觀)에 정성을 들여, 자식을 얻음이 왕왕(往往)히 있나니, 우리도 시험하여 보사이다.”
하고 도관으로 두루 찾아 도축(禱祝)하더니,
일일은 부인이 곤로(困勞)하여 잠깐 졸새, 오운(五雲)이 남방에서 일어나며, 풍악(風樂) 소리가 들리거늘 순씨가 귀경(歸京)하고자 하여 사창(紗窓)을 열고 바라본즉, 여러 선녀가 금(金)덩을 옹위(擁衛)하여, 순씨 앞에 이르러 재배하고 아뢰기를,
“우리는 상제(上帝)의 시녀이러니, 칠월(七月)칠석(七夕)에 은하수(銀河水) 오작교(烏鵲橋)를 그릇 놓은 죄로 인간에 내치시매, 일월성신(日月星辰)이 이리로 지시(指示)하여 이르렀으니, 부인은 어여삐 여기소서.”
이 낭자의 배필은 남경 땅의 유씨이오니, 천정(天定) 배우(配偶)를 잃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며, 낭자가 방중으로 들어가거늘, 부인이 감격하여 방중을 쇄소(灑掃)하고자 하다가 문득 깨달으니 침상(寢牀) 일몽(一夢)이라. 조공을 청하여 몽사를 이르니, 조공이 대희(大喜)하여 이르기를,
“창천(蒼天)이 우리 지성에 감동하사, 귀녀(貴女)를 점지하시도다.”
하더니 그 달부터 잉태하여 십 삭이 차매, 방중에 향기 자욱하며 부인이 순산할새, 한 쌍 선녀가 내려와 아이를 받다 누이고, 향수로 씻긴 후 문득 간 데 없으니, 공이 크게 기뻐하여 이름을 은하라 하여, 그 여자임을 혐의(嫌疑)하지 아니하고 만금(萬金)보옥(寶玉) 같이 사랑하더라.
광음(光陰)이 훌훌하여 은하의 나이 십 세 되매, 그 자태와 재질이 기이한지라. 마침 유모가 낭자를 업고 외가에 갔다가 오는 길에 유자를 따 가지고 오다가, 길가에서 쉬더니, 차시(此時) 유백로가 행리(行李)를 차려 성남으로 향할새, 한 곳에 이르매, 행인은 없고 한 노랑(老娘)이 어린 소저를 데리고 앉았거늘, 눈을 잠깐 들어본즉 나이 비록 어리나 화용월태(花容月態)는 고금의 제일이라.
한번 보매 마음이 황홀하여 여취여광(如醉如狂)한지라. 그윽하게 말을 붙여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하여, 이에 나아가 유자(柚子)를 구하니, 조낭자가 흔연(欣然)하게 유랑으로 하여금 두어 개 유자를 보내거늘, 백로가 마음의 고혹(蠱惑)함을 마지 아니 하고, 유자를 먹은 후에 백학선을 내어 정표(情表)하는 글 두어 구절을 써 주며, 마음이 백년가기(百年佳期)를 정하고 길을 떠나, 남정운을 찾아 수학(修學)한 지 삼 년 만에 문장이 거룩한지라.
백로가 사친지심(思親之心)이 간절하매, 선생을 하직하고 돌아와 부모를 뵈오니, 부모가 크게 반겨 손을 잡고 정회(情懷)를 이르며 학업이 대진(大振)함을 칭찬하여 더욱 귀중함을 이기지 못하더라. 일일은 백로에게 백학선을 가져오라 하거늘, 백로가 아뢰기를,
“우연히 노중(路中)에서 유실하였기에 감히 드리지 못하나이다.”
상서가 대노하여 이르기를,
“세전지물(世傳之物)을 네게 이르러 잃었으니, 어찌 불초자(不肖子)를 면하리오.”하고 차탄(嗟歎)함을 마지 아니 하더라.
차설(且說), 이때 병부상서 평진이 유상서를 보러 왔다가, 유생의 위인(爲人)을 보고 가장 아름다이 여겨, 사위 삼기를 청하거늘, 상서가 청파(聽罷) 후에 허혼(許婚)하고자 하나, 유생이 간(諫)하기를,
“소자의 마음이 작정하옵기를 타일(他日)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온 후, 가기를 정(定)하고자 하오니, 바라건대 부친은 소자의 정심(貞心)을 이루게 하소서.”
하니 상서가 이 말을 듣고, 기특히 여겨 허혼하지 아니하니라.
차시(此時) 유생의 나이 십칠 세라. 문장이 뛰어나고, 풍채(風采) 헌앙(軒昂)하매, 보는 사람마다 뉘 아니 칭찬하리오.
이적, 천자(天子)가 별과(別科)를 보게 하실새, 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장중(場中)에 들어가, 시지(試紙)를 펼쳐 붓을 한 번 놀리매 문불가점(文不加點)이라. 전(前)에 바치고 기다리더니, 이윽고 전두관(殿頭官)이 호명할새, 금방 장원(壯元)은 전임 이부상서 유태종의 아들 백로라 부르거늘, 유생이 크게 기뻐 인해(人海) 중을 헤치고 옥폐(玉幣)에 추진(推進)하니, 상(上)이 보시고 칭찬하사, 어주(御酒)를 사급(賜給)하시며 이르기를,
“네 선세(先世)부터 국가의 유공(有功)한 신하이라. 너도 주석지신(柱石之臣)이 되리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하시고 즉시 유백로에게 한림학사를 내리고, 유태종에게 기주자사를 내리라 바삐 명초(命招)하시니, 차시 유태종이 집의 있어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즉시 상경하여 유한림을 보고 못내 기뻐하고, 궐하(闕下)에 숙사(肅謝)한 후 기주로 도임(到任)하니라.
유한림이 또한 표(表)를 올려 선산(仙山)의 소분(掃墳)한 ,후 모친을 뵈옵고 돌아와 궐하에 숙사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시며 이르기를,
“경(卿)에게 순남순무어사를 내이리, 민간질고(民間疾苦)와 수령선악(守令善惡)을 살펴, 짐이 믿는 바를 저버리지 말라.”
하시니 어사가 즉시 하직하고 물러나와 헤아리되,
‘이제 남방순무어사를 하게 되었으매, 전일 소상죽림(瀟湘竹林)에서 백학선을 준 여자를 찾아 평생원(平生願)을 이루리라.’
하더라.
차설(且說) 이때 조낭자의 춘광이 십오 세이라. 요요(夭夭)한 태도와 기아(奇雅)한 기질(器質)이 짐짓 절대(絶代) 가인(佳人)이라. 이왕(已往) 소상죽림에서 일위(一位) 소년을 만나, 우연히 유자를 주고 백학선을 받아 돌아왔더니, 점점 장성하매 백학선을 내어본즉, 요조숙녀(窈窕淑女) 군자호구(君子好逑)라 쓰고, 그 아래 사주(四柱)를 기록하였거늘, 심중은 놀라나 차역(此亦) 천정(天定) 연분(緣分)이라. 어찌할 길 없으매, 마음에 기록하고 말을 내지 아니하더라.
차시(此時) 남방 남촌에서 사는 상서 벼슬 최국양은 당금(當今)의 상총(上寵)이 으뜸이오, 서자(庶子)가 하나가 있으되 인물과 재학이 뛰어났으매, 명사(名士) 재상(宰相)의 딸을 둔 자들이 구혼(求婚)하기를 무수(無數)히 하나, 마침내 허락하지 아니하고, 조성로의 여자가 천하(天下)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을 듣고, 매파(媒婆)를 보내어 구혼하니 조공이 즉시 허락한지라.
낭자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이날로부터 식음(食飮)을 전폐(全廢)하고 자리의 누워 일어나지 못하여 명재경각(命在頃刻)이라. 부모가 대경(大驚)하고 의아(疑訝)하여 여아(女兒)의 침소에 나아가 종용(慫慂)이 묻기를,
“우리 늦게야 너를 얻어 기쁜 마음이 측량없으매, 주야로 기다리는 바는 어진 배필을 얻어, 원앙이 쌍유(雙遊)하는 재미를 볼까 하였더니, 이제 무슨 연고(緣故)로 네 식음을 전폐하고 죽기를 자취(自取)하느뇨. 그 곡절(曲折)을 듣고자 하노라.
낭자가 주저하다가 천천히 눈물을 흘려 아뢰기를,
“소녀 같은 인생이 세상에 살아 무익(無益)한 고로, 죽어 모르고자 하옵나니, 바라건대 부모는 살피소서. 소녀가 십 세에 외가의 갔다가, 오는 길에 유자를 얻어 가지고 오다가, 소상죽림에서 잠깐 쉬더니, 한 소년 선비가 지나다가 유자를 구하기로 두어 개를 준즉, 받아 먹은 후에 회사(回謝)로 백학선을 주옵거늘, 어린 마음에 아름다이 여겨 받아 두었삽더니, 요사이 본즉 그 부채의 글이 백년가기(百年佳期)를 유의(有意)한지라, 그 때의 무심히 받은 것은 뉘우치나, 차역(此亦) 천정연분(天定緣分)이 분명하옵고, 또한 그 선비를 본즉 심상(尋常)한 사람이 아니오라, 소녀가 이미 그 사람의 신물(信物)을 받았사오니 마땅히 그 집 사람이라, 어찌 다른 가문에 유의(有意)하리잇고. 만일 생전에 백학선 임자를 만나지 못하오면, 죽기로써 백학선을 지키올지라.”
인하여 부채를 내어 아뢰기를,
“만일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소녀는 죽어 혼백이라도 유가(劉家)에 들어가 백학선을 전하고자 하옵나니, 원컨대 부모는 소녀의 박명(薄命)을 가련히 여기시고, 죽은 후라도 만일 유생이 소녀를 찾아오거든, 소녀의 조그만 정성을 갖추어 전하여, 소녀로 하여금 소상야우(瀟湘夜雨)의 고혼(孤魂)이 되지 아니하게 하소서.”
하고 언필(言畢)후에 눈물이 비 오듯 하니, 조공 부부가 또한 흐느끼며 이르기를,
“네 이 같은 사정이 있으면, 어찌 벌써 이르지 아니하였는가. 너는 일단 그 신물을 지키어 죽기를 정(定)하거니와, 저의 뜻을 어찌 알며, 일시(一時) 노중(路中)에서 우연히 만나, 주고 간 부채를 찾으러 오기 쉬울소냐. 그러하나 네 뜻이 이미 이러할진대, 내 그 선비를 찾고자 하나, 다만 거주(居住)와 성(姓)을 빙자(憑藉)하고, 천리 원정(遠征)의 어디를 지향(指向)하여 찾으리오. 일이 매우 맹랑하매 가장 난처하도다.”
낭자가 답하기를,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오, 열녀는 불경이부(不更二夫)라 하오니, 소녀는 결단코 타문(他門)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요, 하물며 그 사람은 잠깐 보아도 신의를 가진 군자이니, 무신(無信)할 리 없을 것이요, 또한 백학선은 세상의 기보(奇寶)이라. 무단(武斷)히 남에게 주지 아니할까 하나이다.”
하거늘 조공이 들으매 그 철석같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할 줄 알고, 어쩔 수 없어 이 뜻으로 최국양에게 전하니, 최국양이 불승분노(不勝憤怒)하여 장차 해(害)할 뜻을 두더라.
차설(且說) 이때 가달이 강성하여 자주 중원(中原)을 침범하거늘, 상이 최국양을 우승상으로 삼고, 도적을 파(破)하라 하교(下敎)하시니, 최승상이 황명(皇命)을 받자와 경성으로 올라갈새, 형주자사 이관현을 보고 가만히 부탁하기를,
“내 아자(兒子)로 조성로의 여아와 정혼(定婚)하였더니, 제 무단(無斷)히 퇴혼(退婚)하니, 그런 무신(無信)한 필부(匹夫)가 어디에 있으리오. 조고만 일개 미관(微官)으로 감히 대신을 희롱함이니, 내 마땅히 저의 일문(一門)을 살해할 것이로되, 국사(國事)로 올라가매, 그대는 조성로의 일가(一家)를 잡아다가 엄형(嚴刑) 중치(重治)하여 만일 허락하거든 용서하고, 듣지 아니하거든 대신을 속인 죄로, 엄치(嚴治) 즉사(卽死)하게 하고, 그 딸은 음행(淫行)으로 다스려 관비(官婢)에 정속(定屬)하라.”
하고 경사(京師)로 가니라.
자사가 즉시 하향현에 발관(發關)하여 조성로의 일가를 성화(星火) 같이 잡아 올리라 하니, 하향 현령 전홍노가 관자(關子)를 보고, 관차(官差)를 보내어 조성로를 잡아 오라 하니, 관차(官差)가 조부에 이르러 이 사연을 전하고 아중(衙中)으로 감을 재촉하거늘, 조공이 짐작하고 관차를 따라 관부(官府)에 이르니, 현령이 묻기를,
“그대는 이 일을 아느냐?”
조공이 헤아리되, 이는 반드시 최국양의 작얼(作孼)인 줄 알고, 전후(前後) 곡절(曲折)을 자세히 고하니, 현령이 듣기를 다하매, 가련히 여기며 이르기를,
“관문(官文)대로 잡아 보내면 죽기를 면치 못하리니, 내 일시 관원으로 왔다가, 애매한 사람을 사지(死地)의 보냄은 의(義)가 아니라. 하물며 자사도 최국양의 부촉(咐囑)을 듣고 인정을 돌아보지 아니할 것이매, 그대는 바삐 돌아가 경보(輕寶)를 품고, 밤에 도주하여 자취를 멀리 감추라.”
하고 즉시 회답하되, 연전(年前)에 조성로가 도주하여 없는 줄로 탈보(頉報)하고 조공을 놓아 보내니, 조공이 현령의 은덕을 못내 사례하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 황금 삼백 냥을 가지고, 여아와 더불어 유생을 찾으려 하고 도도(道途) 발섭(跋涉)하여 남경으로 향하니라.
차설(且說) 선시(先時)에 유어사가 우연히 소상강(瀟湘江)을 지나다가, 여랑을 만나 백학선을 주고 백년가기를 붙인 후, 일편단심을 어느 때도 잊지 못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나, 감히 이런 사연을 부모께도 고하지 못하고, 무정(無情)한 세월을 보내며 헤아리되,
‘그 여자가 장성하여 가취(嫁娶)할 때 되었는지라.’
그 여자를 찾아 평생 원(願)을 이루고자 하나, 부모의 명(命) 없이 떠나기 어렵고, 또한 몸이 벼슬에 매여 추신(抽身)하기 극난(克難)하매, 다만 장우단탄(長優短嘆)으로 추월(秋月) 춘풍(春風)을 허송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천자가 특별히 순무사를 내리어 바삐 발행(發行)하라 하시매, 즉시 하직하고 청주로 향할새, 위연(喟然)하며 탄식하며 이르기를,
“오늘날 이 길을 당(當)하니, 정(正)히 내 원을 마칠 때로되, 다만 그 여자의 거주를 알지 못하매 장차 어찌 하리오.”
하고 청주에 들어가 민정(民情)을 살피며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유의(留意)하여 심방(尋訪)하되, 마침내 종적을 알 길이 없어 낙막(落寞)한 심사를 이기지 못하여 침식(寢食)이 불감(不堪)하여 오매사복(寤寐思服)하더니, 이러구러 자연 병이 되어 해우(解憂)없이 침중(沈重)하매, 말에게 실려 하향현에 돌아오니, 현령 전흥노는 어사의 외숙이라. 어사의 병세가 예사롭지 아니 함을 보고 어사에게 이르기를,
“네 일찍 등과(登科)하여 청운(靑雲)에 올라 물망(物望)이 극진(極盡)하고, 하물며 쌍친(雙親)이 재당(在堂)하니 이만한 즐거움이 없거늘, 이제 네 병세를 살핀즉, 반드시 다른 사람을 오매사복(寤寐思服)하여 일념(一念)이 맺혀 있지 못하는 병이니, 심중에 걸린 말을 일호(一毫)도 기이지 말고 자세히 이르라.”
하거늘 어사가 숙부의 말을 들으매 자기 병증(病症)을 짐작하는 줄 알고, 기이지 못하여 자초지종(自初至終)을 고하니, 현령이 듣고 대경(大驚)하여 이르기를,
“이러할 줄이야, 어찌 알았으리오. 과연 연전의 형주자사가 내게 발관(發關)하여 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조성로의 삼 모녀를 잡아 올리라 하였기로, 괴이 여겨 조성로를 불러 그 연고를 물은즉, 네 말과 같이 여차여차 하기로 그 정상(情想)을 불쌍히 여겨, 가만히 도망하게 하였더니, 그 후 탐지(探知)하여 들은즉, 백학선 임자를 찾으러 남경으로 갔다.”
하더라 하거늘 어사가 이 말을 듣고 심사가 더욱 산란(散亂)하여,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지라. 바삐 남경으로 가고자 하나, 국가 중임(重任)을 폐(廢)하지 못할지라. 장차 표(表)를 올려 득병(得病)함을 주달(奏達)하고, 바로 남경으로 나아가 그 여랑을 찾을까 하고 계교(計較)하더라.
익설(益說) 조성로가 부인과 여아를 데리고 남경으로 나아갈새, 여아는 남복(男服)을 입혀 길을 행(行)하여, 수삭 만에 기주 지경(地境)의 이르러는, 조공 부부가 홀연 독질(毒疾)를 얻어 기동(起動)할 길 없고, 전도(前途)는 오히려 천여 리라. 낭자가 천만 의외(意外)의 이 지경(地境)을 당하매, 망극함을 이기지 못하여 다만 천지(天地)께 표배(表拜)하며 신령께 암축(暗祝)하여, 지성으로 구호하여 세월을 보내더니, 슬프다 마침내 창천(蒼天)이 무심하사, 백약이 무효하여 조공 부부가 일시에 구몰(俱沒)한지라.
소저가 망극지통(罔極之痛)을 당하여 하늘을 부르며 땅을 두드려 통곡하매, 산천초목이 다 슬퍼하는 듯하니, 대저(大抵) 뉘 아니 부모상(父母喪)을 만나리오마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 만 리 타향에서 이 지경을 당하여, 돌아 의논할 곳이 없고 장차 향할 바를 알지 못하니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한들, 어찌 하늘이 조낭자 같은 정녀(靜女)에게 이 같이 앙화(殃禍)를 내리시리오. 그 참담한 형상은 목석간장(木石肝腸)이라도 또한 슬픈지라. 유모 춘낭 등이 망극한 중에 낭자가 과도(過度)함을 민망히 여겨, 만단(萬端) 위로하여 권도(權道)로 장사(葬事)를 지내매, 그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할지라.
손을 서로 이끌어 길을 떠나려 하더니, 문득 시비 옥연이 이 밖에서 들어와 고하되,
“요사이 가달이 남경을 쳐 파하고 웅거(雄據)하였다 하오니, 이를 어찌 하리오.”
하거늘 낭자가 들으매 심신이 아득하여, 속절없이 눈물만 흘려 어찌할 줄 몰라, 그곳의 명복(名卜)을 찾아 황금 십 냥을 주고, 길흉(吉凶)을 물으니, 복자(卜者)가 척전(擲錢)하여 괘(卦)를 얻고 이르되,
“바삐 고향으로 돌아가면 목(木)이 봄을 만나고, 차가운 자가 다시 더운 격이니, 만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십육 세에 만나지 못하면 이십 세에 만날지라. 이 괘 글을 해득(解得)한즉, 그대가 여자로 군자를 찾으려 하는 괘라 하였거니와, 연즉(然則) 더욱 본토(本土)로 돌아가야 좋은 일이 있으되, 만일 금년에 실수하면 반드시 임술년(壬戌年) 추팔월 초오일에야 비로소 만나리라.”
하거늘, 낭자가 이 말을 들으매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즉시 주인에게 돌아와 행장을 차려 본토로 돌아가고자 하더니, 천만 의외에 십여 명의 차사(差使)가 달려들어, 낭자를 결박하여 관전(官前)의 잡아들리니, 낭자가 불의지환(不意之患)을 당하여, 혼백이 비월(飛越)하고 정신이 아득하여, 아무런 줄 모르고 관정의 굴복(屈伏)하니, 자사가 묻기를
“내 들으니 네게 백학선이 있다 하니, 만일 은휘(隱諱)하면 장하(杖下)로 죽으리라.”
하거늘 낭자가 인사(人事)를 차려 답하기를,
“소생에게 과연 백학선이 있으되, 선세(先世)로부터 전래지물(傳來之物)이거늘 무슨 연고로 물으시니잇고.”
자사가 대노(大怒)하여 이르기를,
“그 백학선은 본디 내 집 기물(奇物)이라. 우연히 일렀더니 네가 잘못 들었거늘 어찌 네 집 전래지물이라 하느냐. 그 부채는 범상(凡常)한 기물이 아니라 용궁(龍宮) 보물(寶物)이매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고, 다만 열절(烈節) 있는 숙녀가 가지나니 네게는 당치 아니한지라. 이제 그 부채를 바치면 도리어 천금을 주려니와, 불연(不然)한즉 네 여기서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하니 낭자가 내념(內念)으로 헤아리되,
‘이 부채가 보물이매 위력(威力)으로 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답하기를,
“소생의 조부가 종계 현령으로서 용왕을 현몽(現夢)하고 얻었사와, 소생에게 전한 기물이라. 비록 천금이 중한들, 어찌 자손의 도리를 팔아 없이 하고, 구천(九泉) 타일(他日)에 무슨 면목으로 조선(祖先)을 뵈오리오.”
자사가 이르기를,
“네 말이 가장 간사하도다. 나의 오대조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우연히 잃고, 찾지 못하였거늘, 네 감히 이 같이 말을 꾸며 발악하니, 이는 살지무석(殺之無惜)이로다.”
낭자가 답하기를,
“소생의 조선 기물이 아니면, 어찌 이렇듯 항거하리잇고. 자사가 구태여 가지려 하시거든 소생을 죽이고 탈취하소서. 소생이 몸을 버리고 잃는 것은 내 죄 아니오니 설마 어찌 하리잇고.”
하거늘, 자사가 더욱 분노하여, 낭자를 엄수(嚴囚)하라 하니 슬프다. 낭자가 수천 리 타향에 와서, 일시에 부모를 여희고 망극한 가운데 또한 천만 몽외지변(夢外之變)을 만나니, 그 명도(冥道)가 기험(崎險)함을 어찌 측량(測量)하리오. 춘낭 옥연 등을 불러 가만히 당부하여 이르기를,
“내 백학선을 죽기로써 주지 아니하면 응당 겁탈할 것이니, 부디 자취를 모르게 깊이 간수하고, 만일 너희를 잡아들여 부채를 찾아 드리라 하고, 엄형(嚴刑)할지라도 반드시 내게 미루고, 죽기로 허(許)하지 말라. 만일 그것을 잃은즉, 내 몸은 죽을 것이니, 부디 마음을 굳게 잡아 깊이 간수하라.”
춘낭 등이 막중(莫重)하게 옥중(獄中) 조석(朝夕)을 정성으로 공궤(供饋)하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옥중의 든 지 이미 수년이 되었는지라. 낭자가 일변(一邊) 부모를 생각하며, 일변 백학선 일절(一切)을 헤아리매 내두사(來頭事)가 어찌 될지 몰라 이렇듯 사상(思想)하매, 자연 용모(容貌)가 초췌하고, 기골(氣骨)이 전패(顚沛)하니 그 형상이 참담함을 이로 기록하지 못할지라.
춘낭 등이 낭자의 형용(形容)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소저께서 어찌 귀한 몸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느뇨. 심려를 허비하지 말고 일신을 보전한 후에 낭군을 만나볼 것이오니, 속절없이 백학선으로 말미암아 만일 옥중에서 불행할진대 혼백인들 어디 가 용납(容納)하시며, 소비(小婢) 등도 어디 가 의지하리잇고. 바라건대 소저는 널리 생각하사 후일을 기다리소서.”
낭자가 또한 울며 이르기를,
“너희가 주인을 위하는 정성을 내 감탄하거니와, 내 부모가 아니 계시고, 다만 하늘이 유의(有意)하신 백학선을 의지하여 신(信)을 삼을지니, 내 생사(生死) 간에 어찌 못할지라. 만일 하늘이 밉게 여기사 낭군을 찾지 못하고, 내 죽을지라도 부디 부채를 내 몸의 넣어 부모 곁에 묻어 주고, 너희는 고향으로 돌아가 깨끗이 있어 살라.”
하며, 실성(失性) 통곡하다가 인하여 기절하더니, 문득 향기 진동하고, 패옥(佩玉)이 쟁쟁(錚錚)하며, 청의(靑衣) 숙녀가 한 쌍 여동(女童)을 데리고 낭자 앞에 나와 이르되,
“우리 낭랑(娘娘)의 명을 받자와 낭자를 청하나이다.”
하거늘 낭자가 급히 일어나 사례(射禮)하며 이르기를,
“낭랑은 뉘시며 어디 계시뇨?”
천여(天女)가 답하기를,
“가시면 자연 알리이다.”
하니 낭자가 괴이 여기며, 숙녀를 따라 한 곳의 이른즉 서기(瑞氣)가 영롱(玲瓏)한데, 주궁패궐(珠宮貝闕)이 가장 엄숙하고, 채의(彩衣) 입은 숙녀 등이 그 규문(閨門)으로 분분(紛紛)히 출입하는지라. 여동이 아뢰기를,
“아직 예차(預差)를 정하지 못하였으니, 낭자는 잠깐 머무소서.”
하고 인도하여 동편 한소(閑所)에 앉히고 들어가거늘, 낭자가 유유(悠悠)하게 앉아 쉴새, 문틈으로 열어 본즉 용봉(龍鳳)기치(旗幟)는 좌우(左右)에 벌려 있고, 수십 명의 관원(官員)이 동서(東西)로 배립(排立)하고, 부인이 숙배(肅拜)를 인도하여 옥계(玉階)에서 행례(行禮)한 후, 전상(殿上)의 올려 좌우 반열(班列)을 정제(整齊)하고, 크게 풍악을 자약(自若)히 울리거늘, 낭자가 여동에게 물어 가로되,
“오늘이 무슨 날이며 무슨 예차(預差)를 저리 하느뇨?”
여동이 미답(微答)하며 이르되,
“오늘이 망일(望日)인고로, 모든 부인이 밤 하례(賀禮)하는 절차(節次)라.”
하더니 이윽고 예관(禮官)이 나와, 낭자를 인도하여 옥계의 나아가 배례한 후. 즉시 전상의 올려 좌차(座次)를 정하거늘, 낭자가 잠깐 눈을 들어 살펴본즉, 양위(兩位) 낭랑(娘娘)이 머리에 용봉관(龍鳳冠)을 쓰고 앉았고, 좌우에서 시비들이 모셨으니, 그 위의(威儀)와 예모(禮貌)가 가장 단아(端雅)하고 정숙한지라.
낭자가 황공하여 말석(末席)에 앉아더니, 이에 낭랑이 물어 가로되,
“조낭자가 우리를 알아볼소냐.”
낭자가 답하기를,
“소녀(小女)는 인간 비천한 계집이오라. 어찌 선계(仙界) 낭랑을 알리잇고.”
낭랑이 추연(惆然)하여 탄식하기를,
“낭자가 일찍 고서(古書)를 통람(通覽)하였으매, 우리 자매의 사적(事跡)을 알 것이거늘 어찌 모른다 하느뇨. 우리는 과연 요(堯)의 딸이요 순(舜)의 처이니, 사기(史記)에서 이른바 아황여영(娥皇女英)이오, 상군(湘君) 부인이라.”
하거늘 낭자가 그제야 깨닫고 고두(叩頭) 사례(射禮)하며 아뢰기를,
“소녀가 고서를 보옵고, 항상 성덕(盛德) 정렬(貞烈)을 사모하옵더니, 오늘날 뵈오매 죽어도 회한(悔恨)이 없을까 하나이다.”
낭랑이 위로하여 가로되,
“가련하도다. 낭자여. 그대의 청덕(淸德)과 열절(烈節)이 구천(九泉)에 통하기에 한번 보고자 하여 청하였거니와, 그대 부디 이제 고행(苦行)을 한하지 말고, 일 년만 기다리면 자연 낭군을 찾아 만나리라. 우리는 대순(大舜)과 더불어 이별하고 창오산(蒼梧山)과 소상강(瀟湘江)으로 두루 다녀 찾으려 하다가, 해음(害陰)없이 혈루(血淚)를 뿌려, 대나무에 점점(點點)이 들었는 고로, 세상 사람이 이르기를 소상반죽(瀟湘斑竹)이라 하거니와, 그대는 불구(不久)에 사모하던 낭군을 만나 해로(偕老)하리니, 어찌 우리 형상(形像) 같으리오.”
하고, 좌우의 앉은 부인들을 가리켜 가로되,
“이 부인들도 고금의 으뜸 절부(節婦) 절녀(節女)로, 한 번씩 고행을 경력(經歷)한지라. 옥황상제께서 우리 형제 절의를 포장(褒章)하사, 특별히 봉(封)하여 이때 여군(女君)을 삼으시고, 천하(天下)의 여부(女夫)를 가음알아 하시매, 동편 좌상(座上)에는 경력 높은 주태사(周太師)요, 다음은 초왕(楚王)의 딸 반첩여(班倢伃)요, 서편 좌상에는 위(魏)나라 장강(莊姜)이요, 다음은 양처사(梁處士)의 처 맹광(孟光)이요, 그 남은 부인들도 다 고금 열녀라. 매양 삭망(朔望)이면 이곳의 모여 즐기나니, 사람이 일시 고행이 일장춘몽(一場春夢) 같으매 어찌 깊이 근심하리오.”
낭자가 이 말을 듣고, 즉시 좌우 부인들께 배사하며 아뢰기를,
“옛 고적(古蹟)을 보아 자고이래(自古以來)의 허다(許多)한 열절지행(烈節之行)을 매양 흠선(欽羨)하옵더니, 금일 여러 부인을 뵈오매, 그 즐거움을 측량치 못하리로소이다.”
하니, 모든 부인이 팔을 들어 답례하고, 못내 겸손해 하더라. 낭랑이 가로되,
“낭자도 후일에 이곳에 모이려니와. 낭자가 십 세에 유자를 가지고 이곳을 지나다가, 백학선을 주던 유한림이 글을 지어 우리를 위로하매, 그 뜻이 가장 감사한고로, 그대를 청하여 반기나니, 그대는 가히 돌아가 유한림에게 이 사연을 전하라.”
낭자가 아뢰기를,
“마땅히 교명(敎命)을 전하려니와, 유한림은 뉘릿고?”
낭랑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대 낭군이 연전(年前)의 장원급제로 즉시 유한림학사를 하고, 즉금(卽今) 청주 순무어사로 내려와 두루 다니며, 그대를 찾되 종적을 모르는 고로, 일로 인하여 병이 중하였나니 바삐 찾되, 만일 금년에 만나지 못하면 임술 팔월 초오일에는 반드시 상봉할 것이니, 그리 알아 기회를 잃지 말고, 또한 그대에게 용력(勇力)을 점지하여 어려운 때 부리게 하나니, 삼가 행하라.”
하니, 낭자가 이 말씀을 듣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여 즉시 하직하고, 옥계(玉階)를 내려오다가 실족(失足)하여,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이때 옥연 등이 낭자를 붙들고 통곡하다가, 소저가 도로 회생(回生)함을 보고 대희(大喜)하여 하더라.
화설(話說) 기주자사가 백학선을 찾으려 하여, 낭자를 옥중에 가두고 사람으로 하여금 혹 우루(愚陋)하게 저히며, 혹 천금으로 달래되 굳은 마음을 돌이킬 길이 없는지라. 자사가 헤아리되,
‘백학선은 용궁의 지극한 보배니, 사람마다 가질 바가 아니거늘, 천만 의외로 그 사람이 가졌으니, 이는 하늘이 임자에게 전하신 바이매 인력(人力)으로 찾지 못하리라.’
하고, 드디어 낭자를 방송(放送)하라 하니, 낭자가 대희하여 주육(酒肉)을 갖추고 옥졸(獄卒) 등을 대접하고, 수일을 쉬어 행자(行資)를 수습하여 옥연 등을 데리고 유생을 찾으려 하여 청주로 향할새, 불과 백여 리를 지나 몸이 곤핍(困乏)하고 발이 아파 기동(起動)할 기약(氣弱)이 없어, 서로 붙들고 노방(路傍)의 앉아 울더니, 마침 청주에서 오는 사람이 있거늘, 낭자가 우연히 그 사람을 대하여 청주 순무어사의 소식을 탐문(探問)한즉, 기인(其人)이 이르기를,
“전(前) 어사 유한림은 신병으로 사직(辭職) 상소(上疏)하여 갈려 가고, 새로 황한검이 어사로 내려왔다.”
하거늘, 낭자가 듣고 다시 묻기를,
“그대 어찌 자세히 아느뇨?”
기인 이르기를,
“우리는 청주 관인으로 유한림을 뫼셔 보내고 오는 길이라.”
하니 낭자가 이 말을 듣고 방황하다가 바로 경성으로 행하더라.
각설, 유한림이 그 외숙부에게 조낭자의 사연을 들은 후에, 심신이 산란(散亂)하여 병세가 더욱 침중(沈重)하매, 안찰사 문서를 닦고 병세 침중하므로, 사직 상소를 올리니, 상이 상소를 보시고 이르기를,
“유백로의 병세가 이 같으매, 원방(遠方) 중임(重任)을 감당치 못하리니, 어사를 갈라 내직으로 대사도(大司徒)를 하였나니, 바삐 올리라.”
하시고 기주자사 유태종에게 예부상서를 내리시니, 사도(司徒) 부자(夫子)의 물망(物望)이 조야(朝野)에 혁혁(赫赫)하더라. 사도가 황명을 받자와 북향(北向)에 사배(四拜)하고 행공(行公)치 못하므로, 수차 상소하되 마침내 윤허(允許)하지 아니 하시매, 마지못하여 즉시 상경하여 궐하(闕下)에 나아가 사은숙배(謝恩肅拜)하니, 상이 인견(引見)하시어 사도의 병세가 비경(非輕)함을 보시고, 대경하사 치료하라 하시니, 사도가 즉시 퇴조(退朝)하여 집의 돌아오매, 일일(日日) 조정(朝廷)에서 문병하며, 어의(御醫) 도로(徒勞)의 연속하였으되, 오직 사도는 배필을 찾지 못하여 오매(寤寐)간에 일념의 맺힌 심사를 억제치 못하매, 벼슬을 원치 아니하여 세상만사를 부운(浮雲) 같이 여기더라.
차설, 이때 유상서와 전(前) 태수가 한 데 모여 별회(別會)를 이루어 담화(談話)하다가, 상서가 태수에게 이르기를,
“아이의 혼사(婚事)를 벌써 하려 했으되, 제 소원이 입신양명한 후에 취실(娶室)하겠노라 하더니, 제 이제 이미 공업(功業)을 이루었으매, 쉬이 성친(成親)하고자 하노라.”
태수가 아뢰기를,
“사도의 혼사가 늦었으나, 아직 내두(來頭)를 보아 처치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상서가 묻기를,
“이 어찌된 말인고?”
태수가 아뢰기를,
“연년에 소자가 하향현 태수로 있을 때, 여차여차한 일이 있기로 이리이리 하였노라.”
하고 인하여 사도가 백학선을 찾으려 하던 일을 고하니, 상서가 대경하여 이르기를,
“이런 사정이 있으면 어찌 나를 지금까지 속였느뇨. 내 기주 자사일 제, 노자(奴子) 대종이 아뢰되, 백학선을 어떤 행인이 가졌더라 하매 바삐 그 사람을 잡아오라 하여 위엄으로 드려라 한즉, 그 사람이 아뢰되, 저의 세전지물이라 하여 죽기로써 거절하기로, 하마 죽이고 앗으려 하다가, 다시 생각한즉 인명이 거중(居重)하매 옥중(獄中)의 가두고, 말 잘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금을 주어 달래되, 종시 듣지 아니하고 갇힌 지 수년이로되, 칼을 벗지 아니하고, 다만 자처(自處)하려 하거늘, 내 생각하매, 이는 반드시 하늘이 그 사람에게 주신 바이라 하고 방송하였거니와, 그때 그 사람의 용모와 성음(聲音)을 살핀즉, 계집의 태도가 있으매 가장 의심이 있었으되, 미성(未成)한 아이이매 그러하나 여기고, 또한 그 뜻이 강강(剛剛)하기로 의심치 아니하고 놓아주었는지라. 지금 헤아리건대, 그 여자가 남복하고 남경으로 찾아 가던 길이로다.”
하고 사도를 책(責)하여 이르기를,
“네 어찌 이런 일을 부자지간에 이르지 아니하였느뇨. 나도 병이 되었거니와 그 여자 정상(情狀)이 어찌 가련치 아니하리오. 너를 찾으려 하여 생사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남경을 향하여 갈 것이니, 이제 가달이 남경의 웅거하는지라. 만일 그 여자가 그 곡절을 모르고 적혈(賊穴)의 들어갔으면 반드시 죽었을 것이니, 어찌 가련치 아니하리오. 고언(古言)의 일렀으되 일부함원(一婦含怨)의 오월비상(五月飛霜)이라 하였으니, 우리 집에 어찌 다화(多禍)가 없으리오.”
하거늘, 사도가 이 말씀을 들으매 일변(一變) 황송하며, 일변 낙루(落淚)하는지라.
태수가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 헤아리건대 그 여자의 절행이 거룩하매 반드시 하늘이 무심치 아니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심려치 말라.”
하거늘, 사도가 아뢰기를,
“여자가 나를 위하여 절행이 여차(如此)하니, 내 어찌 죽기로 힘써 찾지 아니하리오.”
하고 마음을 정하니라.
화설(話說) 일일은 유사도가 최국양을 찾아보고 가로되,
“이제 가달이 남경에 웅거하였거늘, 승상은 어찌 장수를 보내어 파멸(破滅)치 아니 하느뇨. 내 비록 재조가 없으나 한 번 나아가 도적을 물리쳐 나라 근심을 덜고자 하나이다.”
하니, 최국양이 심중으로는 음해(陰害)하고자 하여 대희하여 이르기를
“나도 주야(晝夜)로 근심하되, 가합(可合)한 사람을 얻지 못하더니, 그대 자원 출전(出戰)하매 이는 국가의 다행이도다.”
하고 즉시 탑전(榻前)의 아뢰니, 황제 대희하사, 즉시 유백로에 병부상서 겸 정남대장군을 내리시고 정병(精兵) 삼만을 조발(調發)하여 주시니, 이 날 유장군이 사은(謝恩) 숙사(肅謝)하고 부중(府中)의 돌아와 자모(慈母)께 하직하고, 대군을 휘동(揮動)하여 남경으로 향하니라.
차설(且說) 장군이 행군하여 서주를 지날새, 대로변에 큰 바위 있거늘 장군이 석수로 하여금 그 바위에 새기되,
‘신유(辛酉)년 팔월의 병부상서 겸 정남 대장군 유백로는 황천(皇天) 후토(后土)께 비나니, 이제 황명을 받들어 대군을 거느려 적진으로 향하매, 병가(兵家)의 승부는 예탁(豫度)지 못하거니와, 다만 성남 하향현 조낭자를 서로 만남을 원하나니, 황천후토는 살피소서.’
하였더라.
인하여 행군하여 삼 삭 만에 남경의 득달(得達)하여 위수를 격(隔)하여 진을 치고, 가달과 더불어 상지(相知)한지 장근(將近) 만년(萬年)에 마침내 승부를 결(結)하지 못하였더니, 최국양이 황상께 참소(讒訴)하여, 바삐 싸워 승부를 결하라 재촉하나, 심(甚)하여 양초(糧草)가 핍진(乏盡)하여 기갈(飢渴)이 심하매 어찌 능히 싸우리오.
이러구러 임술년(壬戌年)이 되었는지라. 장군이 회군(回軍)하려 하니, 니괴에서 싸움을 재촉하시매, 유장군이 어쩔 수 없어 칼을 빼어 땅을 쳐 가로되, 흉적(凶賊) 최국양이 국권을 잡아 사람을 이렇듯 모해(謀害)하고, 내 시절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뉘를 원(怨)하며 한(限)하리오 하고 통곡하더니, 이때 가달이 명진(明陣)의 양초(糧草)가 진(盡)함을 알고, 사면(四面) 요해처(要害處)를 철통같이 지키었으니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삼군(三軍)이 기갈(飢渴)를 견디지 못하여, 서로 붙들고 통곡하며 이르되,
“애매(曖昧)한 삼만(三萬) 병(兵)이 간신 최국양의 간교를 인하여, 만 리 전장(戰場)의 원혼(冤魂)이 되니 유유창천(悠悠蒼天)은 아소서.”
하고 자수(自手)하여 죽는 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요, 남은 장졸(將卒)의 명이 또한 조석(朝夕)에 있더라.
가달이 군사를 몰아 사면으로 마구 쳐 들어오니 어찌 능히 대적하리오. 유장군이 진력(盡力)하여 도적을 막다가, 당치 못하여 말에서 떨어지니, 적장(敵將)이 달려들어 사로잡아 가달에게 들이되, 가달이 꾸짖기를,
“너는 빨리 항복하여 살기를 도모하라.”
하거늘 유장군이 눈을 감고 가로되,
“내 불행하여 네게 잡혔으나, 어찌 개 같은 오랑캐에게 항복하리오. 속히 죽여 충신의 뜻을 표(表)하라.”
하니 가달이 대노하여 무사(武士)에게 호령하여,
“내어 베어라.”
하거늘, 상장(上將) 마대영이 간(諫)하기를,
“명장(名將)의 기골(奇骨)을 본즉 충의지심(忠義之心)이 초일(超逸)하오니, 남의 나라 충신을 죽임은 불의(不義)라. 아직 살려두어 내두(來頭)를 보사이다.”
가달이 이 말을 조차 죽이지 아니하고 옥의 가두니라.
익설(益說) 조낭자가 옥연 등을 데리고 경사로 올라올새, 일일은 각력(脚力)이 시진(澌盡)하고, 일석(一夕)은 저무매 점막(店幕)을 찾되, 마침내 없는지라. 노주(奴主)가 서로 슬퍼하며 길에서 방황할 즈음, 문득 동편을 바라본즉 수간초옥(數間草屋)의 등촉(燈燭)이 휘황(輝煌)하거늘, 조낭자가 나아가 본즉, 일위 노인이 서안(書案)을 지켜 글을 보는지라. 낭자가 귀려(貴慮) 이배(二拜)하니, 노인이 책을 놓고 익히 보다가 가로되,
“그대 아니 조낭자가 아니냐? 그대의 이름을 들은 지 오래더니, 오늘 만나매 반갑도다.”
낭자가 이르기를,
“생은 과연 일개 서생(書生)이거늘, 낭자로 지칭(指稱)은 무슨 일이오며, 어찌 생의 사근(事根)을 아시니잇고?”
노인이 웃으며 이르기를,
“그대 비록 나를 속이고자 하나, 나는 이미 알고 기다린 지 오래도다.”
하고 두어 낱 환약(丸藥)을 주며 이르기를,
“그대 지금 낭군을 찾으러 가는 길이매 기간(其間)의 사단(事端)이 많을지라. 이 약을 먹은즉 베우지 아니한 병법과 익히지 아니한 검술을 자연 알 것이요, 용력(勇力)이 또한 배증(倍增)하리니 부디 삼가 낭군을 구하라.
하거늘, 낭자가 그 약을 바다 먹은즉, 과연 정신이 쇄락(灑落)하고 기운이 승승(乘勝)하여, 협태산 초북해(挾泰山越北海) 할 마음이 있는지라. 이에 일어나 재배하고, 내두(來頭)의 길흉을 물으니 노인이 이르기를,
“천기(天機)를 누설(漏泄)치 못하리라.”
하고,
“이곳에서 쉬고 명일(明日) 떠나라.”
하며 안으로 들어가거늘, 낭자 노주(奴主)가 잠을 잠깐 들었더니, 동방이 이미 밝았으매, 일어나 살펴본즉 집은 간 데 없고 솔 아래 바위 밑이거늘, 낭자가 그 산신의 조화인 줄 알고 무수히 사례한 후, 행하여 한수(漢水)에 이르러 주인을 찾아 쉬더니,
주인 이르기를,
“공자(公子)는 어디에 계시기에 이렇듯 초초(草草)하시뇨?”
낭자가 이르기를,
“나는 하향현 사람이라. 경성 친구를 찾으러 가노라.”
주인 이르기를,
“어떤 사람을 찾아 가는지 모르거니와, 행색이 가장 가긍(可矜)하도다. 내 약간 음양(陰陽)을 알매, 그대를 위하여 길흉을 점복(占卜)하리라.”
하고 즉시 육효(六爻)를 벌여 이윽히 보다가 대경하여 이르기를,
“이 점괘는 실로 괴이하도다. 옛날 자란(子蘭)이 이정(李靖)을 찾으러 가는 격이니, 아마도 그대 여화위남(女化爲男)하여 낭군을 위함이거니와, 보건데 피차 언약이 금석(金石) 같기로 이에 찾고자 하나, 그대 낭군이 벼슬하였으면 금번(今番) 전장(戰場)에서 군병(軍兵)을 다 죽이고, 몸조차 타국 귀신이 될 수이니 실로 어렵도다. 그러하나 운안(雲雁)이 쌍비(雙飛)하고 봉황이 기승(騎乘)하다 하니, 만일 천선(天仙) 같은 사람이 구하면 요행(僥倖) 살까 하노라.”
낭자가 이 말을 듣고 신기하게 여겨 이르기를,
“선생의 점괘가 그르도다. 내 어찌 여자가 남자 되리오.”
선생 이르기를,
“그대 천지 귀신은 속이려니와 어찌 나를 기사(欺詐)하리오. 점서(占書)에 일렀으되, 이정(李靖)이 적진에 쌓여 위태할 때, 자란(子蘭)이 구하여 득공(得功)한 괘(卦)이니, 그대 진정으로 구하면 살 것이니, 그대는 의심치 말고 내당의 들어가 쉬고 바삐 가라. 이제 오일이면 그대 낭군의 소식을 들으리라.”
하니 낭자가 들으매 간담(肝膽)이 서늘하여 이르기를,
“선생은 실로 신인(神人)이로다. 존성(尊姓) 대명(大名)을 듣고자 하노이다.”
선생 답하기를,
“내 성명은 한복이요, 별호는 태양 선생이라. 내 일찍 벼슬을 하직하고 이곳에 와 풍월을 벗 삼아 한유(閑遊)하더니, 오늘날 우연히 그대를 만나도다.”
하고 인하여 낭자를 데리고 내당에 들어가, 부인 양씨에게 그 말을 이르고 모녀지의(母女之義)를 정하라 하니, 양씨 그 경상(景像)을 가련히 여기고 드디어 수양녀(收養女)를 삼으니라.
낭자가 수일을 머물어 하직할새, 결연(決然)함을 금치 못하여 후일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길을 재촉하여 서주에 이르러는 길가의 한 비석이 있거늘, 나아가 본즉 유백로의 필적이라. 드디어 실성(失性)통곡(痛哭)하다가 기절하거늘, 춘낭 등이 구호(救護)하여 이윽고 정신을 차리는지라. 춘낭 아뢰기를,
“소저는 너무 상해(傷害)치 마시고, 이 앞에 객점(客店)이 있으니 오늘 밤을 지내고 계양으로 가, 그곳은 수로(水路)를 통한 대로(大路)이니, 유원수의 소식을 탐청(探聽)하사이다.”
하거늘, 소저 그 말을 좇아 주점(酒店)을 찾아 밤을 지내더니, 문득 성중(城中)이 요란하거늘, 소저가 놀라 그 연고를 물으니, 주인이 밖에 나가 알고 들어오며 통곡하며 이르기를,
“유장군이 삼만 군을 위수에 함몰(陷沒)하고 사로잡혀 가신다 하니, 그 사생(死生)을 어찌 알리오.”
하는지라. 소저 청파(聽罷)하고 대경하여 묻기를,
“그 일이 정녕(丁寧)하며 그대 또한 무슨 연고로 저리 슬퍼하느뇨?”
주인 답하기를,
“나는 유장군댁 노자(奴子)로서 이곳의 와 사옵더니, 이런 망극한 일을 당하매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오.”
하거늘, 소저 또한 낙루(落淚)하는데, 주인이 괴이 여겨 묻기를,
“노신(奴身)은 노주지간(奴主之間)인 고로 슬퍼하거니와, 그대는 무슨 연고로 저렇듯 하느뇨?”
하니, 소저가 그윽한 곳으로 들어가 수말(水沫)을 자세히 이르니, 주인 부부가 이 말을 듣고 땅에 내려 절하여 이르기를,
“어찌 사기(事記) 이 같은 줄 알았으리잇고.”
하며, 소저를 모셔 내실에 들어가 위로하니, 소저가 오열(嗚咽)하며 이르기를,
“내 적년(積年) 구치(驅馳)하여 유원수를 찾지 못하고, 도리어 이런 소식을 들으매 어찌 망극하지 아니하리오. 그러나 금일 노옹(奴翁)을 만남은 진실로 하늘이 지시하심이로다. 원수는 이미 생전의 만나보기 망연(茫然)하매, 내 한번 구문(舅門)에 나아가 구고(舅姑)를 뵈옵고, 어린 정원(正員)을 고하고자 하나니, 노옹은 나를 위하여 인도하라.”
하고 일봉(一封) 서간(書簡)을 닦아 주거늘, 노옹이 응낙(應諾)하고 즉시 떠나 경사(京師)의 득달(得達)하여 유부(劉府)에 이른즉, 선시(先時)에 유원수 패군(悖君)한 죄로 상서 부부가 황옥(荒獄) 죄수 되었다 하는지라.
노옹이 바로 황옥으로 나아가 옥졸에게 뇌물을 주고, 옥중에 들어가 공(公)의 앞에 부복(俯伏)하여 슬퍼하거늘, 공이 놀라 묻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중지(重地)의 들어와 이렇듯 슬퍼하느냐?”
노옹이 재배하고 아뢰기를,
“소인은 고향 창두의 충복(忠僕)이옵더니, 남경에 출전(出戰)하신 소상공 소식을 고하러 왔나이다.”
공이 비로소 깨달아 불승(不勝)비감(悲感)하며 아자(兒子)의 소식을 물으니, 충복이 서간을 드리며 소저의 사연을 자세히 고하니, 공의 부부가 서간을 보고 더욱 차악(嗟愕)하여 이르되,
“가석(可惜)하다. 저의 절행(節行)이 이렇듯 지극하거늘 창천(蒼天)이 무심하시도다. 아자는 호지(胡地)에 잡혀가고, 우리는 죄수 되었으니, 제 아무리 상경한들 뉘를 의지하리오. 그러하나 제 소원을 본즉, 생사를 우리와 같이 할 의향이매 버려두지 못하리라.”
하고 즉시 글월을 닦아 전홍노에게 기별하여 친히 가 소저를 데려오라 하니, 전홍노가 듣고 즉시 행장을 차려 서주로 가, 소저를 호행(護行)하여 상서 부중(府中)으로 돌아오니라.
이때는 임술년 칠월 망간(望間)이라. 소저가 이에 이르렀으나 구고를 뵈올 길 없고, 원수의 존망(存亡)을 몰라 주야로 초전(焦轉)하다가, 홀연 생각하되,
‘태양 선생이 이르기를 처자 간 같은 사람이 구하면 요행 살리라 하였으매, 내 쾌히 자원 출정하여, 가군(家君)의 생사를 알아 다행히 살았으면 구하여 돌아오고, 만일 불행하였으면 해골이나 거두어 선영(先塋)에 안장(安葬)하고, 그 뒤를 좇으리니, 내 어찌 속절없이 심사(尋思)를 사르리오.’
하고 이날 밤에 표를 지어 명일 용전(龍殿)에 올리니 가로되,
‘패군장(敗軍將) 유백로의 처 조은하는 돈수백배(敦壽百拜)하고 황제 용탑(龍榻) 아래에 올리나니, 대개 삼강(三綱)의 으뜸은 자식이 부모께 효도를 극진히 하고, 그 둘은 신하가 임금께 충성을 다함이요, 셋은 계집이 지아비께 절(節)을 온전하게 함이오니, 이러므로 사람마다 두고자 하나 어렵고, 행하고자 하나 또한 어려운지라. 매양 효자와 충신의 문(門)에서 충효열절(忠孝烈節)이 나오는 고로, 봉(鳳)이 닭을 낳지 아니하옵고, 범의 새끼 개 되지 아니한다 하오니, 신첩(臣妾)의 지아비는 대대로 충효가(忠孝家) 자손이라. 어찌 홀로 폐하께 다다라 충성하지 아니하리잇고. 지아비 황명(皇命)을 받자와 삼만 군을 통솔하여, 만 리 호지(胡地)에 나아가 강적을 막기에 다다라서는 세궁(細弓)하고 역진(力盡)하매, 일 년을 상지(相知)하여 물러나지 아니하오니, 그 절제(節制)함을 가히 알지라. 조정에 충량지신(忠亮之臣)이 없어 군량(軍糧)을 운전(運轉)치 아니하고, 응병지도(應兵之道)를 아니한 연고(緣故)로 군졸이 주린 귓것이 되고, 유백로가 기진(氣盡)하여 도적에게 생금(生擒)한 바 되오나, 이 어찌 원억(冤抑)하지 아니하오며, 도적에게 잡혔으나 응당 굴슬(屈膝)하지 아니하였사오니, 어찌 정충(貞忠) 대적(對敵)이 아니리잇고. 바라건대 폐하는 저의 패군(敗軍)한 죄를 십분(十分) 용서하시고, 만민(萬民)의 소원을 찰납(察納)하소서. 신첩이 비록 규중(閨中) 여자(女子)이오나, 이런 때를 당하와 분개(憤慨)한 마음이 없지 못하오며, 하물며 지아비 정사(情私)를 생각하올진대 어찌 슬프지 아니하오며, 국가 대사가 또한 그릇 되올지라. 신첩이 비록 여자이오나 또한 폐하의 신자(臣子)이오니, 원컨대 삼천 철기(鐵騎)를 빌려주시면 가달을 멸(滅)하여, 위로 황상 근심을 덜고, 아래로 지아비를 구하오리니 만일 그름이 있거든 지아비와 한 가지로 군법을 당하여지이다.’
하였거늘, 상이 의외의 상소를 보시고 믿지 아니하시나, 그 뜻이 상쾌함을 기특히 여기사 즉시 명초(命招)하시니, 소저가 궐하(闕下)로 나아가니, 상이 가까이 좌(座)를 주시고, 그 표표(表表)한 기상을 칭찬하며 이르기를,
“네 지아비는 장부로되 삼만 군을 일조(一朝) 함몰(陷沒)하고, 필경 사로잡힌 바가 되었거늘, 너는 아녀자로 무슨 지략이 있기에 망령되이 조정을 희롱하여, 외람(猥濫)되고 기군(欺君)하는 죄를 당하고자 하느뇨. 여자가 지아비를 위하여 죽음은 열절이라 하려니와, 출전(出戰)한다는 말은 실로 짐을 희롱함이로다.”
소저가 부복(俯伏)하고 주(奏)하기를,
“하교(下敎) 지당(至當)하옵거니와, 자식이 아비를 속이면 불효요, 신하가 임금을 속이면 불충이오니, 신첩이 감히 헛말 삼아 천의(天意)를 희롱하리잇고. 저울로 달아 본 연후의 경중(輕重)을 알고, 자로 재어 본 연후의 장단(長短)을 안다 하오니, 폐하는 믿지 아니하시거든 무슨 재조를 시험하사 허실(虛實)을 살피소서.”
상이 좌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천하에 어찌 이런 기이한 여자가 있을 줄 알리오.”
하시니, 좌우(左右)가 그 충렬과 장기(將氣)를 흠탄(欽歎)하나, 감히 가부(可否)를 아뢰지 못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차인(此人)을 내어 짐을 돕게 하심인가 하나니, 마땅히 대원수를 봉하여 출정하게 하리라.”
하시니, 승상 최국양이 이에 다다라서는 출반(出反)을 주(奏)하기를,
“저 여자가 일정(日程) 나라를 망할지라. 그 지아비 자원하여 삼만 군을 함몰하고 적에게 사로잡혀 천위(天位)를 최절(摧折)하였거늘, 차녀(次女)는 자원하니,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조정을 능욕함이니 그 죄를 다스려 민심을 진정하소서.”
상이 미처 대답하지 못하여서 소저가 분연(奮然)히 이르기를,
“간신(奸臣)이 어찌 나를 망국하리라 하느뇨. 승상이 만인지상(萬人之上)에 거(居)하여, 갈충보국(竭忠報國)하기를 생각지 아니하고, 소소(小小)한 혐의(嫌疑)를 전주(傳奏)하여, 유백로로 하여금 적수(敵手)에 사로잡히게 하니, 이는 가위(可謂) 망국(亡國)할지라. 천하(天下)가 승상의 불충을 절치(切齒)하나니 불구(不久)의 앙화(殃禍)가 있으리라.”
하거늘 상이 국양을 책(責)하여 이르기를,
“사람의 재조를 측량하지 못하나니, 이 여자의 여기(膂氣)를 꺾어 책언(責言)을 취(取)하느뇨. 이제 저의 재조를 시험하여 말과 같을진대, 국가의 다행이니 어찌 남녀를 혐의(嫌疑)할 바이리오.”
하시고, 즉시 손오병서(孫吳兵書)를 내어 의논하시니, 소저의 문답이 여류(如流)하여 도처(到處)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하매, 상이 기뻐 칭찬하시고 다시 용맹을 보고자 하시니, 소저가 주(奏)하기를,
“폐하가 차신 칼을 주소서.”
하거늘, 상이 즉시 칼을 끌러 주시니, 소저가 받아 들고 옥계 아래서 칼을 둘러 춤을 추며 공중에 솟아오르니, 사람은 아니 뵈고 다만 이화(梨花)가 어지러이 떨어지는지라. 이윽고 몸을 감추어 내려올 즈음에 마침 황국전(皇國殿) 들보 위에 제비 앉아 지저귀거늘, 소저가 몸을 날려 제비를 두 조각의 내여 떨어뜨리니, 만조(滿朝)가 실색(失色)하고. 상이 대희하시더니, 소저가 다시 뜰에 내려 망주석(望柱石)을 들고 바로 국양을 채(責)할 듯하다가, 도로 놓고 부복하니 원래 이 망주석은 전후에 드는 자가 없던 바이라.
상이 제신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는 반드시 신녀(神女)로다. 이런 재용(才勇)으로 어찌 가달을 근심하리오.”
하시고, 즉시 조은하로 대도독 겸 대원수를 내리시고, 황금 부월(斧鉞)과 인검(引劍)을 주시며, 정병 삼만을 조발하여 출정하라 하시고, 최국양을 파직하여 하옥하여 조은하의 승첩(勝捷)한 후 처치(處置)를 기다리게 하시니라.
차설(且說) 도원수가 숙사(肅謝)하고 다시 주(奏)하기를,
“이제 신첩이 출사(出師)하오매, 구고(舅姑)를 잠깐 보아 이별하고자 하오니, 폐하는 살피심을 바라나이다.”
상이 윤허(允許)하시고, 특별히 방송(放送)하고 환본직(還本職)하라 하시니, 원수가 즉시 물러나와 구고께 배알(拜謁)하니, 공의 부부가 일희일비하여 원수의 옥수(玉手)를 잡고 통곡하거늘, 원수가 온화한 말씀으로 위로하고 출전하는 사연을 고하여 하직하고, 다시 궐하에 나아가 하직하고 숙배(肅拜)할새, 칠척(七尺)의 아여자(兒女子)가 변하여 당당한 대장부가 되어 병막(兵幕)을 갖추었으니, 그 늠름한 기세는 여자로 알아볼 리 없으매, 좌우 제신이 암암(暗暗)히 칭찬하며, 상이 또한 치경(致敬)하시며 이르기를,
“경이 여자의 몸으로 국가를 위하여 새외(塞外)에 출정하니, 고금의 희한한 일이매, 부디 성공하여 짐의 근심을 덜게 하라.”
하시고 궐문에서 전송하시니라.
원수가 제문을 지어 남단(南壇)의 올라 제(祭)하니, 제문(祭文)에 가로되,
‘모년 월일의 정남 대원수 조은하는 삼가 천지께 제하나니, 이번 출전하매, 한북의 가달을 멸하여, 일변 국가 근심을 덜고, 일변 가군(家君)을 구하려 하옵나니, 황천후토(皇天后土)는 조은하의 정성을 돌아보사, 좌우로 도우심을 비나이다.’
하였더라. 읽기를 다하고 창두(蒼頭) 충복(忠僕)을 불러, 중상(重賞)하여 비석을 잘 수직(守直)하라 하고, 대군을 휘동(麾動)하여 여러 날 만에 위수가에 다다르니, 이곳은 유원수가 패하였던 곳이라. 비풍(悲風)이 소슬(蕭瑟)하고 수성(水聲)이 참담하여, 사람의 심회를 산란케 하매, 원수가 생각하되,
‘이 반드시 삼만 군의 원혼이라.’
하고 군중(軍中)에 분부하여, 우양(牛羊)을 잡아 제(祭)하여, 원혼을 위로한 후 즉시 상(上)에 표(表)하기를,
“신첩이 행군하여 위수의 이른즉, 유백로의 삼만 장졸이 원혼이 되어 물가의 어리어 침노(侵擄)하오니, 최국양의 머리를 베어 제하여야 무사할까 하나이다.”
하였더라.
차설(且說) 이때 상이 조은하를 보내시고, 민간(民間) 시비(是非)를 염탐하고자 하사, 친히 미복(微服)으로 슬행(膝行)하실새, 동요(童謠) 있어 가로되,
‘천작얼(天作孼)은 유가위(猶可違)이니와, 자작얼(自作孼)은 불가활(不可活)이라’
하니, 저 최국양이 어찌 무사하리오. 유원수가 패군(敗軍)함과 삼만 병의 원사(冤死)함이, 도시(都是) 국양의 군량(軍糧)을 운전(運轉)치 아니하고 응병(應兵)을 아니한 탓이로다 하거늘, 상이 들으시고 그제야 국양의 작죄(作罪)로 그리됨을 아시고, 국양을 추문(推問) 정법(正法)하시려 하더니, 도원수의 표(表)를 보시고 비답(批答)하여 이르기를,
“짐이 불명(不明)하여 목하(目下)에 역신(逆臣)을 두고 살피지 못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오. 국양은 내 친히 다스릴 것이니 경은 안심하라.”
하다.
차시(此時) 국양의 서자(庶子)가 옥중(獄中)의 갇히었더니, 원수의 전령(傳令)이 왔거늘, 군무사(軍務司)를 어기지 못하여 무사(武士)에 명하여 성화(星火) 압송하라 하시니, 무사가 명을 받아 최생을 함거(檻車)에 실어 위수의 이르니, 원수가 죄인을 아직 군중에 가두라 하고, 사자(使者)를 관접(款接)할새, 문득 흑운(黑雲)이 화화(火化)하며, 궂은 비 몽몽(濛濛)하여 천지를 분변치 못하더니, 일모(日暮)하매 무수한 원귀가 진중을 둘러싸고 공중에서 지저귀되,
“도원수는 빨리 적자(敵子)를 베어 우리 원억(冤抑)함을 위로하소서.”
하거늘, 원수가 즉시 최생을 베고, 제전(祭典)을 갖추어 제하(提河)니, 이윽고 안개 걷히며 천기(天氣) 명랑(明朗)한지라. 원수가 사자를 전송하고, 신기(身氣) 곤피(困疲)하여 잠깐 졸더니, 공중에서 일위(一位) 노옹(老翁)이 이르되,
“소저는 지체하지 말고 바삐 행군하라.”
하거늘, 놀라 깨어 군사를 재촉하여 위수를 건너, 적진 오십 리를 격(隔)하여 결진(結陣)하니라. 차시(此時) 가달이 몽고(蒙古)와 화친하였으니, 파하기 어렵고 유원수의 존망(存亡)을 모르는지라. 왕시(往時)에 가달이 유원수를 생금(生擒)하고 군령(軍令)이 해태(懈怠)한지라. 도원수가 적세(敵勢)를 탐지한 후 약속을 정제(整齊)하고, 격서(檄書)를 적진(敵陣)에 전하니라.
각설 가달이 격서를 보고 대노하여, 제장을 분발(奮發)할새, 마대영으로 선봉을 삼고 스스로 후군이 되어, 정병 십만을 조발하여 대전하려 하더라. 차시 도원수가 도영으로 선봉을 삼고 환한으로 후군을 삼고 스스로 중군이 되어, 정병 십만을 거느려 나아갈새 단(壇)을 쌓고 하늘께 제한 후, 문득 공중에서 선녀가 내려와 이르되,
“소저는 근심 말으사. 부디 소저의 가진 바 백학선은 난중(亂中)의 쓰는 보배라. 진언(眞言)을 여차여차 염(念)하고 사면(四面)으로 부치면, 자연 풍우(風雨)조화(調和)가 무궁하오니, 부디 잊지 마소서.”
하고 간 데 없거늘, 원수가 대희하여 이튿날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접전(接戰)할 새, 선봉 도영이 내달아 꾸짖으며,
“무도(無道)한 가달은 내 칼을 받으라.”
하니 가달이 분노하여 마대영으로 나가 싸우라 하니, 마대영이 정창(挺槍) 출마(出馬)하여 교봉(交鋒) 칠십여 합(合)에 불분(不分) 승부(勝負)이러니, 도영의 창법(槍法)이 점점 산란(散亂)한지라. 도원수가 내달아 협공하니, 적진 중에서 가달이 내달아 또한 협공하는지라. 사장(四將)이 어우러져 싸워 사십여 합에 가달의 용맹을 당하기 어려운지라.
원수가 말에서 나려 앙천(仰天) 배례(拜禮)하고 진언을 염하며, 백학선을 사면으로 부치매, 천지 아득하고 뇌정벽력(雷霆霹靂)이 진동하며, 무수한 신장(神將)이 내려와 돕는지라. 저 가달이 아무리 용맹한들 어찌 당하리오. 황겁(惶怯)하여 일시에 말에서 내려 항복하는지라.
원수가 가달과 마대영을 당하(堂下)의 꿀리고 대매(大罵)하기를,
“네 유원수를 지금 모셔 와야 목숨을 용서하려니와, 불연(不然)즉 군법을 시행하리라.”
하니, 가달이 급히 마대영을 명하여 유원수를 모셔오라 하거늘, 마대영이 급히 달려 유원수의 곳에 나아가 고하기를,
“원수를 소장(小將)이 구함이 아니런들 벌써 위태하실 터이오니, 소장의 공을 어찌 모르소서.”
하고 수레에 싣고 몰아가거늘, 원수가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에 다다르니, 일위 소년 대장이 맞아 이르기를,
“장군이 누대(累代) 명신(名臣)으로 이렇듯 곤함이 도시(都是) 명(命)이라. 안심하여 개회(介懷)치 마소서.”
하거늘 유원수가 눈을 들어 본즉 이는 소매평생(素昧平生)이라. 거수(擧手) 칭사(稱謝)하여 이르기를,
“뉘신지는 모르거니와 뜻밖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 본국의 귀신이 되게 하시니 백골난망(白骨難忘)이오나, 이제 패군지장(敗軍之將)이 되어 군부(軍府)를 욕되게 하오니, 하면목(何面目)으로 군부를 뵈오리오. 차라리 이곳에서 죽어 죄를 속(贖)할까 하나이다.”
원수가 재삼 위로하기를,
“장수되어 일승일패(一勝一敗)는 병가상사(兵家常事)이오니, 과히 번뇌(煩惱)치 마소서.”
유원수가 사사(謝辭)하더라.
가달과 마대영을 함거의 싣고 회군(回軍)할새, 먼저 승전한 첩서(捷書)를 올리고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행할새, 유원수가 수색(愁色)이 만안(滿顔)함을 보고, 도원수가 묻기를,
“장군이 이제 사지(死地)를 벗어나 고국으로 돌아오시니, 만행(萬幸)이거늘 어찌 이렇듯 수척하시뇨?”
원수가 차탄(嗟歎)하여 이르기를,
“소장이 불충불효한 죄를 짓고 돌아오니 무엇이 즐거우리요. 원수가 이렇듯 유념(留念)하시니 황공(惶恐) 불안(不安)하여이다.”
도원수가 짐짓 묻기를,
“듣자온즉 원수가 일개 여자를 위하여 자원 출전하셨다 하오니, 이 말이 옳으니잇가?”
원수가 수괴(羞愧) 무언(無言)이거늘, 도원수가 또 가로되,
“장군이 이미 노중에서 일개 여자를 만나, 백학선의 글을 써 주었던 그 여자가 장성하매 백년을 기약하나, 임자를 만나지 못하매, 사면을 찾아 서주의 이르러 장군의 비문을 보고 기절하여 죽었다 하니, 어찌 가석(可惜)하지 아니리요.”
유원수가 청파(聽罷)에 참절(慘絕)하여 탄식하기를,
“소장이 군부에게 욕을 끼치고, 또 여자에게 적원(積怨)하오니, 차라리 죽어 모르고자 하나이다.”
원수가 미소하고 백학선을 내어 부치거늘, 유원수가 이윽히 보다가 묻기를,
“원수가 그 부채를 어디서 얻으시니잇고?”
원수가 가로되,
“소장의 조부가 상강현령으로 계실 때에 용왕을 현몽(現夢)하고 얻으신 것이니이다.”
유원수가 다시 묻지 아니하고, 내심 헤아리되,
‘세상의 같은 부채도 있도다.’
하고 재삼 보거늘, 원수가 이를 보고 참지 못하여 이르기를,
“장군이 정신이 소삭(蕭索)하여 친히 쓴 글씨를 몰라 보시는도다.”
하고 부채를 유원수의 앞에 놓으니, 유원수가 비로소 조소저인 줄 알고, 비회(悲懷)를 이기지 못하여 나아가, 그 옥수를 잡고 이르기를,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깨닫지 못하리로다. 생은 장부로되 불충불효을 범하고 몸이 죽을 곳에 빠지되, 그대는 규중 여자로 출전(出戰) 입공(立功)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니, 가위 규중(閨中) 호걸(豪傑)이로다.”
하며 여취여광(如醉如狂)하거늘, 조소저가 또한 비회(悲懷) 교집(交集)하나 군중(軍中)이라 말씀할 곳이 아니고, 황상(皇上)이 기다리심을 생각하고 행군을 재촉할새, 위수에 이르러 용신께 제하고, 삼만 군 혼백을 위로한 후, 묘당(廟堂)을 지어 사적(事績)을 기록하고, 전결(田結)을 회급(回給)하여 사시(四時)로 제향(祭享)을 받들고, 장졸을 놓아 보내며 이르기를,
“돌아가 부모처자를 반기라.”
하고 여간(如干) 남은 군졸을 거느려 행하여 아미산의 이르러, 유원수의 친산(親山)의 소분(掃墳)하고, 석일(昔日) 주인과 인비(隣比)를 모아 즐기고, 옥졸을 후히 상급(賞給)하고, 소상죽림에 이르러 황릉묘를 수리한 후, 하향 고토에 다다라 인비 노소를 모아 석사(昔事)를 이르며 금은을 흩어주고, 태양 선생을 찾아 전일 덕택을 사례한 후, 노창두(老蒼頭) 충복(忠僕)을 찾아 천금을 상사(賞賜)한 후 경사로 향하니라.
선시(先時)에 도원수가 표(表)을 올려 가로되,
“정남대원수 조은하는 돈수백배하옵고 용탑(龍榻) 아래에 올리옵나니, 신첩이 폐하의 특은(特恩)을 입사와, 한번 북을 처 호적(胡狄)을 소멸(燒滅)하옵고, 유원수를 구하오니, 신첩의 외람하온 죄를 거의 속(贖)하올지라. 탑하의 봉명(奉命)하옴이 바쁘오나 분묘(墳墓)을 수리하고 대죄(待罪)하리이다.”
하였더라. 상이 남필(覽畢)하고 대찬(大讚)하기를,
“기특하다 조은하여. 규중 여자로 출전(出戰) 입공(立功)함은 고금의 희한한 일이로다.”
하시고 최국양을 요참(腰斬)하라 하시며, 그 가속(家屬)을 원찬(遠竄)하라 하시다.
원수의 선봉이 이르매, 상이 백료(百僚)를 거느리시고, 십 리 밖에서 맞으실새 도원수가 유원수와 더불어 복지(伏地)하니, 상이 반기사 원로(遠路) 구치(驅馳)를 위로하시고, 유원수의 운액(運厄)함을 차탄(嗟歎)하시고, 인하여 양 원수를 시위(侍衛)하여 환궁하사 전교(傳敎)하시되,
“가달과 마대영을 참하라.”
하시니 양 원수가 불가(不可)함을 주(奏)하니, 상이 좇아 은위(恩威)를 베풀어 위유(慰諭)하시고 사(赦)하시니, 가달이 백배 고두하고 돌아가, 성상의 덕택과 양 원수의 은덕을 탄복하더라.
출전(出戰)제장(諸將)을 작상(爵賞)하실새, 조은하를 충렬 왕비에 봉하시고, 유백로를 연왕을 봉하시며, 유상서로 태상왕을 봉하시고, 진씨를 조국 부인을 봉하시며, 황금 만 냥과 채단(綵緞) 삼천 필과 전답 노비를 사급(賜給)하신 후, 친히 주혼(主婚)하실새, 충렬의 부모가 없다 하사 대내(大內)에서 주장(主掌)하게 하시고, 택일한즉 불과 일순(一旬)이 격(隔)한지라. 예부(例付)의 전지(傳旨)하사 절차(節次)를 거행하라 하시다.
어언지간(於焉之間)에 길일이 다다르매, 연왕이 위의(威儀)를 차려 신부를 맞을새, 합환(合歡) 교배(交拜)를 마치매, 연왕이 눈을 들어 보고, 전일 군중의 원융(元戎) 대장이 지금 신부됨을 도리어 어이없어 하더라. 일모(日暮)하매 시녀가 촉(燭)을 잡아 인도하여, 신방의 이르러 신부로 상대하여 전일(專一)을 이르며 침석(寢席)에 나아가니, 무산낙포(巫山洛浦)라도 이보다 지나지 못할레라.
명일(明日)의 부부가 태상왕께 문안하니 태상왕이 매우 기뻐함을 마지 아니 하더라.
세월이 여류하여 충렬이 연하여, 이자 일녀를 낳으니, 장자의 명(名)은 용운이요, 차자의 명은 봉윤이니, 다 왕후(王侯) 거족(巨族)을 성취하고, 일녀의 명은 혜경이니 태자비 되었더라.
차설 태상왕이 천년(天年)으로 세상을 버리매 선산에 안장하고, 삼상(三喪)을 마친 후 용윤, 봉윤이 다 생산하매, 자손이 만당(滿堂)하여 곽분양(郭汾陽)에 비길레라.
일일은 연왕이 비(妃)와 더불어 모든 자손을 거느려 완월루에 올라 잔치하며, 즐기더니 홀연 오운이 영롱하며 선악(仙樂)이 제명(諸鳴)한 가운데, 선동 선녀가 내려와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는 옥제(玉帝) 명을 받자와 왕과 왕비를 뫼시라 왔사오니, 바삐 채교(彩轎)에 오르시고 더럽히지 마소서.”
하거늘, 왕과 비가 망조(罔措)하나, 어쩔 수 없어 자손 등을 불러 경계하여 이르기를,
“내 이제 세연(世緣)이 진(盡)한지라. 여등(汝等)을 이별하매 그윽이 창연(愴然)하도다. 연이나 여등은 진충(盡忠) 갈력(竭力)하여 국은(國恩)을 갚으라.”
하고 왕과 비가 채교의 오르매, 선동이 옹위(擁衛)하여 공중으로 올라가거늘, 자손 등이 청천(靑天)을 앙망(仰望)하다가, 어쩔 수 없어 선산에 허장(虛葬)하고 용윤이 연왕을 승습(承襲)하여, 자손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여 누천년을 누리더라.
'고전 풀어 읽기 > 국문소설,판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옥주호연' 전문 현대어풀이 (0) | 2018.01.11 |
---|---|
'정수정전' 전문 현대어풀이 (0) | 2018.01.09 |
'소대성전' 전문 현대어풀이 (0) | 2018.01.03 |
'김영철전' 전문 현대어풀이 (0) | 2017.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