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설(愚巖說) ; 어리석은 바위 이야기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신영산 옮김
余旣卜居于愚伏之西麓. 其傍之亭臺潭洞以至巖石之奇秀者, 莫不有名焉.
直舍之東北隅, 有石臨潨, 高可四五丈, 獨未有以名之也.
여기복거우우복지서록 기방지정대담동이지암석지기수자 막불유명언
직사지동북우 유석림총, 고가사오장 독미유이명지야
나는 우복(愚伏)이라 하는 산의 서쪽 기슭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그 둘레에는 있는 정자와 누대와 연못과 골짜기로, 그리고 바윗돌에 이르기까지 기이하고 빼어났기에, 어느 하나 이름이 없는 것이 없었다.
다만 우리 집의 동북쪽 모퉁이에 돌 하나가 깊은 물가에 맞대어 있으면서, 그 높이가 네댓 길이나 되었는데도, 오로지 이것만이 이름이 없었다.
有一夜石言于夢 曰 :
“凡物之生, 顯晦有命, 遇不遇有時. 自吾之立於此蓋已久矣, 而名未顯於世.
然且不恨者, 所遇非其人也, 今幸得子以爲主, 則誠千載一時遇賞之秋也,
유일야석언우몽 왈
범물지생 현회유명 우불우유시 자오지립어차개이구의 이명미현어세
연차불한자 소우비기인야 금행득자이위주 칙성천재일시우상지추야
어느 날 밤 그 돌이 꿈속에서 나타나서 내게 말하기를,
“무릇 만물이 세상에 태어나서, 드러나거나 숨겨지는 것에는 하늘의 명이 있는 법이고, 좋은 때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서 있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한탄스러워 하지 않았던 것은, 이제까지 그럴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난 사람은 적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행히도 그대를 얻어서 제 주인으로 삼았으니, 이는 참으로 천 년에 한 번이나 만날까 하는 좋은 일이고, 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吾屬之環侍於左右者, 無不衣被光榮, 各有美名, 而獨於吾闕焉.
遇矣而未顯, 欲無憾得乎. 必有說敢請.”
오속지환시어좌우자 무불의피광영 각유미명 이독어오궐언
우의이미현 욕무감득호 필유설감청
그대의 주위에 둘러서서 그대를 모시고 있는 우리 무리들은 모두, 빛나는 영화를 입지 않은 것이 없고, 각기 아름다운 이름이 있는데도, 유독 저만은 이름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그대를 만났으나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어찌 유감이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해명할 말씀이 있을 것이니, 감히 말씀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余應之 曰 : “夫名, 實之賓也. 蔑實而得名, 智者懼焉, 愚者貪焉.
余之名石固多矣.
亭亭峭拔, 獨立霞外, 有擎天之勢者, 曰鼇柱石.
其方如矩, 其平如準, 而處絶頂風埃之表, 有如群仙散去, 棋枰獨存者, 曰爛柯巖,
여응지왈 부명 실지빈야 멸실이득명 지자구언 우자탐언
여지명석고다의
정정초발 독립하외 유경천지세자 왈오주석
기방여구 기평여준 이처절정풍애지표 유여군선산거 기평독존자 왈난가암,
하니, 이에 내가 대답하기를,
“무릇 이름이라는 것은 실체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네. 실체가 없으면서도 이름만 얻는다면, 슬기로운 자는 이를 두려워할 것이요, 어리석은 자는 이를 탐내게 될 것이라.
내 그동안 바위에다 이름을 붙여 준 것이 참으로 많네.
정정한 모습으로 가파르게 솟아올라, 홀로 노을 밖까지 우뚝 서서,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바위를 오주석(鰲柱石)이라 이름지었지.
그 모양이 반듯하여 곱자로 그린 것 같고, 그 평평함이 수준으로 고른 것 같으면서, 티끌로 덮인 세상에서 벗어나 산꼭대기에 처해 있어, 마치 여러 신선들이 놀다가 흩어져 가고, 바둑판만 홀로 덩그러니 남아 있는 듯한 바위는 난가암(爛柯巖)이라고 이름하였다네.
峙在潭心, 上有躑躅, 開花映水, 如爲人容者, 曰揷花巖.
削立溪濱, 宜坐而釣魚則謂之垂綸石.
盤陀澗曲, 可俯而弄泉則謂之倚筇巖.
치재담심 상유척촉 개화영수 여위인용자 왈삽화암
삭립계빈 의좌이조어칙위지수륜석
반타간곡 가부이농천칙위지의공암
깊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으면서, 그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물에 비치면, 마치 사람의 얼굴 모습이 되는 듯한 바위는 삽화암(揷花巖)이라고 이름지었지.
시냇가에 깎아 세운 듯이 서 있어, 앉아서 물고기를 낚기에 아주 좋은 바위는 수륜석(垂綸石)이라고 하였다네.
도랑물이 굽이쳐 돌아가는 넓은 곳에 자리하여, 엎드려 샘물을 희롱할 수 있는 바위는 의공암(倚筇巖)이라고 이름하였다네.
玆數名者, 或悅其狀, 或取其用, 惟實之是揆.
未嘗有溢美而虛錫之也.
余嘗諦夫汝矣.
자수명자 혹열기상 혹취기용 유실지시규
미상유일미이허석지야
여상체부여의
이름을 지어 준 몇 개이 바위들은, 내가 그 형상을 좋아하여 지은 것도 있었고, 그 쓰임새를 취하여 지은 것도 있었는데, 오로지 실체만을 헤아려 이름을 붙인 것이라네.
일찍이 너무 지나치게 찬미하여 헛되이 이름을 지어 준 것은 없었다네.
그런데 내가 일찍이 자네에게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은 체념하였지.
頎然長矣, 而無峭峻之姿. 肨然大矣而無奇古之形.
其面窪然, 無花卉之飾, 其顚隆然, 不可得以憑依焉.
狀非可悅, 用無所取, 而欲其名之顯, 無乃不智耶.”
기연장의 이무초준지자 방연대의이무기고지형
기면와연 무화훼지식 기전륭연 불가득이빙의언
상비가열 용무소취 이욕기명지현 무내부지야
자네는 풍채가 뛰어나고 점잖아도, 험하면서도 날카로운 자태가 없었지. 넉넉하고 크기는 하였만, 기이하거나 옛스러운 모습도 아니었다네.
얼굴이 깊이 패이기는 하였지만 꽃나무를 장식할 수도 없었고, 이마가 툭 튀어나왔지만 붙잡고 의지할 수도 없었다네.
그 형상이 보고 좋아할 만한 것이 없고, 그 쓰임새도 취할 만한 것이 없었네. 그런데 이름을은 세상에 드러내고자 하니, 이는 지혜롭지 못한 일이 아니겠는가.”
曰 : “凡子之評吾者審矣, 然狀者貌也, 用者才也.
徇貌者遺其內, 尙才者後其德. 君子之評物, 宜不若是也.
왈 범자지평오자심의 연상자모야 용자재야
순모자유기내 상재자후기덕 군자지평물 의불약시야
하였다. 그러자 바위가 말하기를,
“무릇 그대는 저를 참으로 자세하게 저를 평하셨습니다. 하지만 형상이란 것은 모양새이고, 쓰임이라는 것은 재주일 뿐입니다. 모양새만 따라가다 보면 그 안의 것을 버리게 되고, 재주만 숭상하다 보면, 그 덕을 뒤로 하게 될 것입니다. 군자가 사물을 평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그리하여서는 안 됩니다.
今吾所處, 適當山麓之尾兩水之交.
方其秋水時至, 萬壑爭流, 狂瀾之所呑噬. 崖岸崩摧, 而吾能挺然獨立, 確乎不動.
折其勢而排之, 是麓之不入於崩湍, 誰之力歟.
取此以名之, 不亦可乎.”
금오소처 적당산록지미양수지교
방기추수시지 만학쟁류 광란지소탄서 애안붕최 이오능정연독립 확호부동
절기세이배지 시록지불입어붕단 수지력여.
취차이명지 불역가호
지금 제가 있는 곳은, 마침 산기슭의 끝에 있으니, 양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이 교차되는 곳이지요. 이에 바야흐로 가을물이 때때로 흘러내려, 여러 골짜기에서 다투어 쏟아질 때는, 미친 듯이 넘쳐 흘러 씹어 삼키듯이 합니다. 언덕과 낭떠러지가 무너져 내릴 지경이 되더라도 나는 능히 우뚝하니 홀로 서서 굳건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강한 기세를 꺾어 밀쳐 내어, 이 산기슭이 언덕처럼 무너져 물살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게 하니, 이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이를 생각한다면 이름을 지으심이 옳지 않겠나이까.”
余笑而應之 曰 : “無難拔之根柢, 而戰方盛之波濤, 欲效力於砥柱, 汝於是爲眞不智矣.
夫狀非可悅則愚, 用無所取則愚, 不自量而當大節則愚.
以若是之愚, 居愚山之內, 爲愚人所隣, 而貪蔑實之名.
如欲強名之, 則當目之曰愚巖可乎.”
여소이응지 왈 무난발지근저 이전방성지파도 욕효력어지주 여어시위진부지의.
부상비가열칙우 용무소취칙우 부자량이당대절칙우
이약시지우 거우산지내 위우인소린 이탐멸실지명
여욕강명지 칙당목지왈우암가호
하였다. 이에 내가 웃으면서 답하기를,
“뽑기 힘든 굳센 뿌리도 없으면서, 저리 기세가 성한 물길과 싸우며, 지주(砥柱)처럼 힘을 내려고 애쓰고 있으니, 자네는 참으로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겠다.
무릇 그 형상이 남을 즐겁게 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것이요, 그 쓰임새가 취할 만한 게 없다면 역시 어리석은 것이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헤아리지 못하고, 큰 절개만 감당하려 한다면 그것도 어리석은 것이리라.
이와 같이 어리석은 자네가, 어리석은 산에 있으면서, 어리석은 사람인 나와 이웃하여 있는데, 실체에 맞지 않는 헛된 이름이나 탐내고 있도다.
만약 억지로라도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어리석은 바위라는 우암(愚巖)이라 하면 가히 좋겠는가?”
石響應曰 : “可.”
余覺而異且感焉, 遂取而自號云,
석향응왈 가
여각이이차감언 수취이자호운
하니, 돌이 큰 소리를 울리며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나는 꿈을 깨고 나서 이상하기도 하고 또 느낀 점이 있어서, 드디어 이 어리석을 우(愚) 자를 취하여 스스로 호(號)를 삼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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