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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현대어풀이

New-Mountain(새뫼) 2016. 5. 2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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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 병자

만력(萬曆) 십칠 년 기축(1589) 구월, 오랑캐 누루하치는 명나라의 용호장군(龍虎將軍)이 라. 누루하치는 본래 여진(女眞) 오랑캐였는데, 제 할아비와 아비가 다 다른 오랑캐에게 의 죽게 되자, 누루하치 동쪽으로 달아나 북녘의 모든 오랑캐들을 공격하여, 기세가 점점 강해졌는데, 가끔 잡아온 한인(漢人)을 도로 보내 중국 조정에 충성심을 보이었는데, 이때 다른 오랑캐 극오십(克五十) 등이 시하보(柴河堡)를 노략질하여, 지휘(指揮) 유부(劉斧)를 죽이고 건주(建州)로 달아나니, 누루하치는 즉시 극오십의 머리를 베어 명 조정에 바치고, 또 좋은 말을 바치고, 제 할아비와 아비가 중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곡절을 아뢰어 대장(大將)의 이름을 얻게 되었느니라.

누루하치 점점 강성해져 제 아우 합치를 죽이고, 군사를 아울러 모든 오랑캐를 침노하더니, 무오(1618), 기미(1619) 연간에 무순성(撫順城)을 함락하니, 총병 장승 등이 죽었고, 경략(經略) 양효 등이 대패하고, 첨사(僉事) 반중안(潘仲安) 등이 다 죽다.

조선국에서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副元帥) 김경서(金景瑞), 종사관(從事官) 이민환(李民寏), 소장(小將) 김응하(金應河)등이 적을 막아, 이들을 좇아 삼백 리를 따라 들어가 도적에게 둘러싸이니, 김응하는 힘써 싸워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이를 이르러 김장군(金將軍)이라 하더라. 조정이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추증하고, 강홍립 이하 장수는 다 항복하였느니라.

기미(1619)년에 누루하치가 아국과 통하고자 강홍립은 머무르게 하고, 이민환 등은 내어 보내느라. 이 해 오월에 누루하치 국호를 금()이라 하고, 황제 옷을 입고, 자신을 짐()이라 하였다. 그 후에 심양(瀋陽)을 함몰하니, 천자(天子)가 원숭환(袁崇煥)을 경략(經略)으로 삼아 광녕(廣寧)으로 가 도적을 막게 하였는데, 병인(1926)년에 누루하치가 원숭환에게 패하여 분통이 나 등창이 나서 죽으니, 둘째 아들인 홍타시가 그 뒤를 이었느니라.

원래 누루하치가 놀다가 산 옆에서 한 계집이 오줌을 누고 지나가거늘, 보니 오줌이 산을 뚫어 그 깊이에 말채찍이 들어가니, 누루하치 기이하게 여겨 그 계집을 데려다가 아들을 낳으니 이가 이른바 홍타시라.

정묘(1627)년 정월에 홍타시가 강홍립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아국을 침범하니,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한 밤중에 의주(義州)를 기습하니, 부윤(府尹), 판관(判官)이 다 죽었고, 안주(安州) 역시 함락되니, 병사(兵使)와 목사(牧使)들이 다 죽다. 주상이 강화(江華)의 피란하시고, 세자는 전주(全州)로 분조하시다.

 

예전에 갑자(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 이괄의 장수 한명련(韓明璉)의 아들이 오랑캐 땅으로 도망가 거짓말로 아국이 강홍립의 가문을 모두 죽였다고 이르니, 강홍립을 도적을 데리고 인도하여 오니, 이때에 이르러 조정이 강홍립의 삼촌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과 강홍립의 처자를 진천(鎭川)의 보내어 강홍립을 보게 하니, 강홍립이 비로소 뉘우치고, 도적도 구태여 아국을 칠 의사가 없고, 아국도 또한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니 적이 허락하다.

 

상이 오랑캐의 사신과 더불어 피를 마셔 천지께 맹세사실 때, 대신(大臣) 윤방(尹昉), 오윤겸(吳允謙), 병조판서(兵曹判書) 이성구(李聖求), 참판(參判) 최명길(崔鳴吉)이 함께 맹세에 참여하니라. 홍타시가 강홍립과 강홍립의 호녀(胡女)와 한녀(漢女)다 내어 보내니, 아국이 오랑캐가 두려워 강홍립의 죄를 묻지 못하더니, 오래지 않아 강홍립의 가문이 의논하여 강홍립을 가만히 죽이다.

 

경오(1630)년에 오랑캐가 북경(北京)을 침략하니, 황제가 원숭환이 잘 막지 못했다 하여 잡아다 죽이다. 아국이 오랑캐와 더불어 형제가 되어 봄가을로 사신을 보내더니, 병자(1636)년 봄에 무신 이확(李廓)과 첨지(僉知) 나덕헌(羅德憲)이 사신이 되어 심양에 가니, 홍타시는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청(大靑)이라 하며, 이확 등을 협박하여 반열(班列)로 참여하라 하니, 이확 등이 죽기로 듣지 아니하니, 모든 오랑캐들이 이확 등을 치고 끌어 당겨 의관이 찢어졌지만, 종시 굴복하지 아니하였더라. 이확 등이 홍타시의 답서를 맡아 오다가 가만히 성을 지키는 오랑캐에게 주고 왔으나, 당초부터 그 편지를 맡았다 하여 조정에서 논죄하였더라.

 

다음 해 용골대(龍骨大) 마부대(馬夫大) 두 장수가 인렬왕후(仁烈王侯)의 국상에 조문하러 나오니, 이는 대개 아국을 염탐하려 함이라. 조정이 바야흐로 화친을 배척하여 오랑캐 사신을 대접하기를 야박하게 하고, 청의 왕자가 주상에게 편지하였지만 답하지 아니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 국상에 오랑캐가 와서 조문할 때는 궁궐에서 대행례(大行禮)하기를 허락하였지만, 이번에는 금천교(禁川橋)에세 장막을 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바람이 불러 장막이 열리니 금군(禁軍)들이 있어 용골대(龍骨大) 등을 크게 의심하니, 장령(掌令) 홍익한(洪翼漢)과 관학(館學)이 상소하여 오랑캐 사신을 베라 청하니, 용골대 등이 이를 듣고 황망히 달아나니, 경성(京城)이 진동하고 의정부가 황겁하여, 여러 신하들을 따라 보내어 머물기를 청하였지만 듣지 아니하고 돌아가더라.

 

주상이 팔도의 명을 내리시어 화친을 파하는 뜻을 이르니, 날마다 들어오는 상소는 오랑캐를 치라는 말이라. 부평(富平) 안산의 돌이 옮겨지고, 경상도 평안도의 오리가 싸우고, 대구(大邱)의 구름이 진을 치고, 청파(靑坡)의 개구리가 싸우고, 예안(禮安)의 강물이 끊어지고, 서울 땅이 붉고, 성중(城中)에 하루 동안 스물일곱 곳에 벼락이 치고, 큰물이 급히 들어와 동대문(東大門) 길이 막히고,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더라.

 

영의정(領議政) 김류(金瑬) 등이 묘당에 모였으되, 화친은 이미 믿을 것이 없고 싸우기와 지키기 밖에 모두 할 일이 없더라. 최명길이 상소하여 화친을 위한 사신 보내기를 청하되, 교리(校理) 오달제(吳達濟)와 이조정랑(吏曹正郞) 윤집(尹集)이 상소하여 최명길을 베어라 청하니, 조정은 이리고 못하고 저리도 못하더니, 김류와 최명길이 의논하여 역관을 심양에 보내어 오랑캐를 탐지하니, 홍타시 역관에게 이르기를,

 

네 나라가 동짓달 이십오 일 전에 대신(大臣)과 왕자(王子)를 보내지 않으면, 내 당당이 동으로 크게 나아가리라.”

하고 그 답서에서 이르기를,

내가 들으니 너희 나라는 산성을 많이 쌓았다고는 하나, 내 당당히 큰길로 나아 갈 것이니 산성에서 나를 막을 것인가. 너희 나라가 강화도를 믿지마는, 내가 조선 팔도를 짓밟을 터이니 조그만 섬에서 임금 노릇을 하겠는가. 너희 나라가 싸울 의논을 한다 해도 다 선비들이니 붓을 들어 나를 막겠는가.”

하였더라.

 

의정부에서 그 편지를 보고 대신을 보내고자 하나, 척화(斥和)하자는 의견이 바야흐로 무겁기에 보내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보내니 오랑캐가 믿지 못하더라. 김류, 김자점(金自點)이 의논하여 의주(義州) 군사를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옮기고, 황주(黃州) 군사를 정방산중(正方山中)으로 옮기고, 평산(平山) 군사를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 옮기니, 각각 큰 길에서 삼십 리나 떨어져 있고, 먼 곳은 이틀 길이라. 황해도와 평안도의 큰 길이 사람 없는 땅이 되고, 김자점이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이르되,

도적이 반드시 오지는 않으리라.”

하고, 혹 어떤 사람이 도적이 올 것이라 하면 크게 화를 내고, 성 지킬 군사를 한 명도 더 하지 아니하고, 의주 저 편의 용골산(龍骨山)의 봉화가 서울까지 가면 소동이 일어나리라 하여, 도원수가 있는 정방산성까지만 오게 하였으니, 섣달 초 육 일 이후에 연이어 봉화 두 자루를 하였어도 김자점이 이르되,

반드시 사신을 맞는 봉화라 어찌 도적이 올 수 있으리오.”

 

9

초구일에 비로소 군관(軍官) 신용(申榕)을 의주로 보내어 적병을 탐지하니, 신용이 순안(順安)의 이르니, 적병이 이미 널리 가득 찼는지라. 신용이 돌아와 보고하니 김자점이 크게 화를 내고 신용을 베려 하더니, 다른 군관이 또 보고하니 비로소 장계를 올리더라. 대개 적병이 강을 건너니 대로에서 거칠 것이 없는지라 오기를 바람같이 하고, 번사(藩司)의 장계는 적이 다 빼앗아 간 조정이 막연하게 몰랐더라.

이러므로

 

12

십이일 오후에 비로소 적 세력이 급한 줄 알고,

13

십삼일에 강화로 들어가기를 의논하니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하고 이민구(李敏求)를 부사로 삼다. 김류가 자기 아들이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로되, 가족들을 피난시키기 위하여 김경징을 검찰사로 하고, 주상이 물으시니, 김류 아뢰되,

김경징이 마땅하다.”

하더라.

14

십사일에 임금의 가마가 급하게 남대문을 나서 강화로 향하려 하였더니, 적장 마부대가 수백 기를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弘濟阮)에 다다르니, 주상이 남문에 나와 보시고 어찌할 줄 몰라 하시니, 성중에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더라. 이판 최명길이 자청하여 적장에게 나아가면서, 훈련대장(訓練大將) 신경진(申景禛)에게 모화관(慕華館)으로 출진하게 하고, 임금의 가마는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서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들어가게 하다.

최명길이 마부대를 보고, 조선에 온 이유를 물으니 적장이 대답하기를,

너희 나라가 무단히 맹세를 배반하였으므로 화친하러 왔노라.”

하더라.

김류와 이성구 등이 임금을 모시고 새벽에 강화로 가시게 하였더니.

15

십오일에 주상이 걸어 행차하시다가 여러 번 엎어지니 옥체가 편하지 않으셔서, 도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시다. 대장 신경진이 동성(東城)을 지키고, 대장 구굉(具宏)은 남성(南城)을 지키고,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등은 북성(北城)을 지키고, 수어사(守御使) 이시백(李時白)은 서쪽 성을 지키고, 성중의 군병은 서울과 외방(外方), 산군(山軍)을 합하여 겨우 일만 이천여 인이오, 문무(文武) 남행(南行)관이 이백여 인이오, 종실(宗室)과 삼의사(三醫司) 백여 인이오, 모든 관원의 노복은 삼백여 인이라. 최명길이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홍제원에서 돌아와 마부대(馬夫大) 대장이 오지 않았다고 속이고,

16

십육일 식후에 청군이 따라와 남한산성 다다르니, 성을 지키는 군사 약하고 겁을 내어 나가 싸울 의사가 없더라. 마부대 왕자와 대신을 내어 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이 능봉수(綾峯守)를 대군이라고 하고, 형조판서 심즙(沈諿)을 대신이라 하여 적진으로 보내니, 심즙이 이르되,

내 평생 말을 충실하게 하기로, 오랑캐라도 속이지 못하리라.”

하여 마부대에게 이르되,

나는 대신이 아니오, 능봉수는 왕자가 아니니라.”

능봉수가 이르되,

진실로 심즙이 대신이오, 나는 진실로 왕자라.”

하되 적장이 속은 줄 알고 돌려보내니, 능봉수와 심즙이 도로 성중으로 오고, 마지못하여 좌상(左相) 홍서봉(洪瑞鳳)과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신국(金藎國)을 적진으로 보내어 이르되,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은 강화에 있으므로 못 보내노라.”

하니 마무대가 이르되,

동궁(東宮)이 아니 오면 화친을 못하리라.”

하거늘 좌상이 그저 돌아 오니라.

그 날 밤에 영상(領相), 김신국, 이성구, 최명길 등이 동궁을 보낼 것을 청하니,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이 기별을 듣고 비변사(備邊司)에 들어와 큰 소리로 가로되,

이렇게 의논하는 놈을 내 당당히 머리를 베고 맹세하여, 한 하늘에 서지 않으리라.”

하더라.

17

십칠일의 주상이 남문에 나오셔 애통함을 교서로 내리시니, 뜰에 가득한 모든 신하들 아니 우는 이 없더라.

18

십팔일에 북문대장 원두표(元斗杓)가 군대를 비로소 자못 받아 나아가 싸워, 도적 여섯을 죽이니라. 성중 창고의 쌀과 피 잡곡을 합하여 겨우 일만 육천여 석이 있으니, 군병 만 명의 한 달 양식은 되더라. 소금, , 종이, 면화 병장기와 그 밖의 물건들을 다 이서(李曙)가 장만하여 둔 것을 쓰니, 이서의 재주를 칭찬하더라.

19

십구일에 남문대장 구굉이 군대를 일으켜 싸워 도적 이십 명을 죽이다. 이 날 큰 바람 불고 비가 오려 하더니, 김상헌에게 명하여 성황신에게 제사를 올리니 바람이 즉시 그치고 비 아니 오더라.

20

이십일의 마부대가 통사(通詞) 정명수(鄭命壽)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언약하자 아니, 성문을 열지 아니하고, 성 위에서 말을 전하게 하다.

21

이십일일의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군대를 거느려 도적 여남은 명을 죽이고, 동문대장 신경진이 또 군대를 내어 도적을 죽이다.

22

이십이일에 마부대가 또 통사를 보내어 이르되,

만일 현명히 깨달아 왕자와 대신을 보내면 때를 정하여 화친하자.”

하되, 주상이 오히려 허락지 아니 하시다.

북문 어영군이 도적 여남은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삼십여 명을 죽이다. 주상이 궁의 음식을 내어 병사를 위로 하시다.

23

이십삼일에 동서남문의 영문(營門)에서 군사를 내고, 주상이 북문에서 싸움을 독촉하시다.

24

이십사일에 큰 비가 내리니,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이 얼어 죽은 이가 많으니, 주상이 세자와 더불어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며 말하기를,

오늘 여기까지 이른 것은 우리 부자가 죄를 얻은 것이니, 이 성의 군사와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하늘은 우리 부자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원컨대 백성들은 살리소서.”

대신들이 들어가시기를 정하되 허락지 아니하시더니, 오래지 않아 비 그치고 일기 온화해졌기에 성중의 백성들이 감격하여 우는 자가 없지 않더라.

25

이십오일 몹시 춥다.

의정부에서 적진에 사신 보내기를 청하오니, 주상이 이르기를,

아국이 매양 화친하자 하여 적을 속이니, 이제 또 사신을 보내면 욕되는 줄 알지만, 모든 의논이 이러하니, 이때는 새해라. 술과 고기를 보내고 은합에 과실을 담아 두터운 인정을 조인 후에, 그 후에 말을 나누며 적의 기색을 살피리라.”

하시다.

26

이십육일에 이경직, 김신국이 술과 고기를 은합에 넣어 가지고 적진으로 가니, 적장이 가로되,

우리 군중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고 보물이 산처럼 쌓였으니, 이것을 무엇에 쓰리오. 네 나라 임금과 신하들이 필시 굶을 것이니 가히 스스로 쓰는 것이 낫도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아니하니라.

27

이십칠일에 날마다 성 안에서는 구원하러 오는 군사를 바라되, 한 사람도 오는 이 없고,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는 강원도 군이 다 모이지 못하였기에, 양근(楊根)까지 물러난 후에 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먼저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검단성(劒端城)의 이르게 하고, 봉화를 올려 대응하다.

28

이십팔일에 체찰사(體察使) 김류가 친히 장졸들을 거느리고 북성으로 가 독전하니, 도적이 대포 소리 듣고 거짓으로 물러나며, 적은 군사와 마소를 머무르게 하니, 이는 유인하는 꾀라. 김류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사를 독촉하여 가서 치라 하니, 산 위에 있는 군사들은 그 꾀를 알고 내려가지 아니하더라.

김류가 병방비장(兵房裨將) 유호(柳瑚)에게 칼을 주어, 아니 내려가는 이를 어지럽게 찌르니, 군사들이 내려가도 죽고, 아니 내려가도 죽고, 비로소 내려가 적진의 마소를 빼앗아 오되, 적이 본 체 아니 하다가, 군사들이 다 내려오기를 기다려 적의 복병이 사면에서 내닫고, 물러서던 군사들이 나아들어, 잠시 동안에 우리 군사를 다 죽이고 접전하다.

김류가 화약을 아껴 군사에게 많이 주지 않다가, 달라 할 때를 기다려 주더니, 이 때 급하여 화약을 미처 달라하지 못하고, 조총으로 서로 치다가, 이기지 못하여 죽은 자가 부지기수라. 김류가 군사들이 패하는 것을 보고 비로소 초관(哨官)으로 하여금 깃발을 휘둘러 군사들을 물러나게 하나, 군사들이 지금 죽어가며 깃발을 어찌 보며, 깃발을 휘두르는 것을 본들 어찌 물러나리오.

김류가 초관을 참하니 사람들마다 다 원통하다 하더라. 김류가 스스로 싸워 패하고, 탓할 곳이 없으니 핑계로 이르되, 북진대장(北陣大將) 원두표가 구원하지 않았다 하여 장차 큰 죄를 주려 하니, 좌상 홍서봉이 이르되, 으뜸 장수가 패하고 버금 장수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하니, 김류가 마지못하여 대궐로 나아가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中軍)에게 곤장 팔십을 치다. 건장한 군사들과 날랜 무사들을 모두 체부(體府)에 모아 두었는데, 이 싸움에서 삼백여 인이 죽으니, 군중에서는 다시 싸울 뜻이 없으매, 의정부에서는 전혀 화친하기로 결단하더라.

심기원(沈器遠)을 제도도원수(諸道都元帥)로 삼다. 심기원이 유도대장(留道大將)으로 장계를 올리니, 포수 삼백여 인으로 밤에 애오개의 적진을 쳐 사오백 명을 죽였다 하되, 실상과 다르고, 호조(戶曹)의 기물을 삼각산(三角山)의 두었다가 도적에게 다 빼앗기고, 심기원이 적에게 패하여 양근(楊根)으로 가니, 여러 도의 군병들이 심기원이 양근에 있다는 것을 듣고 모두 양근으로 가니, 남한산성으로 오는 이 없고, 오직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충청군을 거느리고 적진을 뚫어 광주(廣州) 땅 산성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쳤다가, 결국 적에게 패하여 성공을 못하였지만, 그 충의는 기특하더라.

29

이십구일은 아무 일이 없고,

30

삼십일은 큰 바람 불고 날씨가 참혹하더라. 이날 적이 광나루, 삼백대, 헌릉의 세 길로 병가를 내어 날이 저물도록 행군하니, 갈 때는 큰바람 불어 적병의 수를 모르되, 큰 눈이 왔지만, 중군(中軍)이 들을 덮어 한 점 흰 빛이 없으니, 그 수의 많음을 가히 알지라. 적은 그러하고 아국은 싸울 뜻이 없으며, 구원병은 오지 아니하고, 달리 할 일이 없었는데 행궁의 남쪽에 까치가 둥지를 지으니, 사람마다 다 이를 보고 길조라 하여 그만 믿었더라.

 

정축(1637) 정월 1

정축(1637)년 정월 초하룻날에 일식이 있었다. 광주목사 허휘(許徽)가 가래떡을 진상하고, 관리들에게도 두어 가래씩 보내었더라. 아침에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적진에 말을 전하려 김신국, 이경직을 보내려 하니, 적장이 대답하되,

()이 어제 도착하여 지금 산성의 형세를 둘러보니, 이후의 일은 우리들이 나설 바가 아니니, 돌아갔다 내일 다시 오라.”

하더라.

이날 오후에 동문 밖에 두 개의 양산과 큰 깃발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한의 것이리라.

 

2

초이일에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이 적진에 가니 적장이 누런 종이에 편지를 써서 상 위에 놓아두었거늘, 홍서봉이 먼저 네 번 절한 후에 편지를 마주 하니, 편지에 이르기를,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하노라. 내 군사가 지난해 양합(良哈)을 칠 때, 너희 나라와 마주하게 되고, 후에 또 명 황제를 도와 내 나라를 해하려 해도 내 오히려 개의치 않았는데, 새로 요동 땅을 얻자, 네 또 내 백성들의 꾀어 명나라에 바치니, 짐이 몹시도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치니, 어찌 마땅한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켰으리요. 네 어찌 도로 네 신하들에게 일러 결단하게 충의 있는 선비들은 모면할 계책을 세우라 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스스로 군을 좇으라 하였으니, 짐이 이제 친히 왔는지라.

네 어찌 한 번 나와 싸우지 아니하는가. 짐의 여러 왕들이 네게 편지하니 무슨 연고로 편지를 주고받은 관례가 없노라 하였느뇨. 정묘년에 강화도로 달아날 때, 편지 왕래한 것이 짐의 여러 왕이 아니고, 짐의 아우와 조카인 것이 여러 왕이 아니었는가. 짐의 아우와 조카가 어찌 너만 못하리오. 또 외번(外蕃)의 여러 왕의 편지를 막고 받지 아니하니, 이들 여러 왕들은 대원황제(大元皇帝)의 자손이라 무엇이 너만 못하리오. 대원(大元) 때 조선이 조공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더니, 이제 어찌 너희가 높은 체를 이다지도 하는가.

짐이 이제 네 나라를 아우로 대접하거늘, 네 더욱 패악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성곽을 던지며, 궁궐을 버리며 처자와 떨어져 서로 돌아보지 못하고, 네 한 몸이 산성으로 들어가니, 비록 천 년을 살아간들 무엇이 유익하리오. 정묘년의 치욕을 씻고자 하다가도, 이전의 즐겁기를 헐어버리고 후세에 웃음거리가 되니, 이런 치욕은 장차 어이 씻으리오. 네 비록 몸을 감추어 살기를 도모하나 짐이 어찌 즐겨 놓아 주리오. 짐의 내외의 여러 왕들과 문문 대신들이 짐을 권하여 황제가 되었는데, 네가 이르기를 이는 차마 듣지 못할 바라.’한 것은 어찌 이른 것인가.

황제가 되고 아니 되는 것은 네게 있지 아니하니라. 하늘이 도우시면 필부도 천자가 되고, 하늘이 벌을 내리면 천자도 필부가 되는 것이니, 네 맹세를 배반하고, 사신을 박대하고, 명 황제를 아비처럼 섬기겠다고 하여 짐을 모해하니 이것이 큰 죄라. 짐이 대병을 거느려 네 나라 팔도를 짓밟을 것이로되, 네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 황제가 무엇으로 구하리오. 어지서 자식이 급할 때 구하지 아니하는 아비가 있으리오. 그렇지 않으면 백성을 물불 속에 빠뜨리는 것이라. 네 만일 할 말이 있거든 밝혀 고하는 것이 해롭지 않을 것이라. 숭정(崇禎) 이년 정월 초 이 일이라.”

하였더라.

3

초삼일의 교서관(校書館) 고직(庫直)의 아내가 적진에서 도망하여 와 이르되,

그믐날과 초하루 날에 경성을 분탕하고 백성들을 노략질하며 인가를 많이 불 질렀다.”

하더라.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이 답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가니, 적장이 이르되,

황제가 명하시는 있으리라.”

하고 답서를 아니 받더라.

4

초사일에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여, 윤방(尹昉)과 김류가 나라를 그르친 죄를 자자히 일러 모두 참하라 청하니, 주상이 유백증을 파직하시다.

5

초오일에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祐申)이 장계를 올리되,

병사(兵使)와 순찰사(巡察使) 민경휘(閔聖徽)가 마병과 보군을 거느리고 양근(楊根)의 심기원(沈器遠)이 있는 곳으로 왔노라.”

하였더라.

북병사(北兵使)도 오래지 아니하여 다 도착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김준용(金俊龍)이 군대를 이끌고 광교산으로 오고, 감사(監司) 이시방(李時昉)은 직산(稷山)에 도착했다는 장계가 들어 오니라.

6

초육일에 안개 아득하다. 평안병사 류림(柳琳)의 장계에서

적병 오천 여기가 또 창성(昌城)으로 나오니, 창성부사(昌城府使)와 삭주부사(朔州府使)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

하였더라. 강원감사(江原監司) 조정호(趙廷虎)가 장계에서 검단에서 도적을 만나 스스로 흩어졌다 하였더라.

7

초칠일 김자점이 장계에서 황해병사(黃海兵使) 이석달(李碩達)과 더불어 군사를 이끌고 광릉에 왔다고 하였더라. 전라감사 이시방이 장계를 올려 군사를 이끌고 양지에 와 머무르고, 전라병사도 장계에서 형세를 보아 전장으로 가리라 하였더라. 여러 장계에서 군병 수도 많고, 도적을 치노라 한 이도 많았지만 실상과 다르더라.

8

초팔일에 아침에 눈이 와 어둑어둑하다.

9

초구일 이후에는 성 안과 성 밖이 더욱 통하지 못하여 장계도 끊어지다.

10

십일에 햇무리가 지다. 주상이 예조판서 김상헌을 보내셔 원종왕(元宗, 溫祚王)의 제사를 지내시다.

11

십일일에 해의 귀에 골이 생기고, 흰 기운이 하늘에 비치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주상께 아뢰어 가로되,

사람이 궁하면 근본이 돌아간다 하니, 이 위급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숭은전(崇恩殿)으로 의 나아가 제사를 올리나이다.”

숭은전은 개원사(開元寺)이니 원종대왕(元宗大王)의 화상을 모신 곳이라. 주상이 그러하다 하시고 해 뜨는 시간에 출궁하셔서 제사를 지낼 때, 백관이 배례하더라. 아침 전에 환궁하시다. 산성에 들어온 후에 성내에 까마귀 까치 없더니, 이날 많이 들어오니 사람마다 길조라 하더라.

12

십이일에 홍서봉, 최명길, 윤휘가 서간을 적진으로 보내되, 국서를 전하지 못하고 내일 서문으로 다시 오라 하더라. 들으니 적병 수만 명이 또 조선으로 온다 하더라.

13

십삼 일에 서남풍이 일어나다. 또 홍서봉, 윤휘, 최명길을 적진으로 보내니 용골대(龍骨大) 가 국서를 받고, 이유가 없이 맹세를 저버린 일을 책망하니, 최명길이 가슴을 두드리고 머리 조아리며 가로되,

이것이 다 주상의 뜻이 아니오, 신하의 죄라. 창자를 빻아 임금이 그렇지 아니한 줄을 밝히려 하노라.”

용골대 등이 언약하되, 수일 내로 회신한다 하더라.

국서에 쓰되,

일찍이 소국의 신하들이 청군에 편지를 받들어 바친 바 있더니, 돌아와서 이르되, 황제의 장차 황제의 명이 있을 것이라 하니, 소국의 신하들은 목을 늘이고 날마다 기다리다가, 이미 십여 일이 지나도록 흑백이 없으니, 형세가 구차하여 두 번 여쭙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오직 황제는 살펴주오. 소국이 일찍이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도 형제로 의탁하여 밝혀 천지께 맹세하였으니, 비록 땅은 나누어졌으나, 가까운 정은 간격이 없는지라. 스스로 만세의 끝없는 복이라 하였는데, 맹세가 채 마르지 아니하여서 의심하는 틈이 미치어 위급한 화에 빠져 천하에 웃음거리가 되니, 천성이 유약하고, 신하들에게 속아 혼미하고 불찰하여 이에 이르니, 자책할 따름이라. 다시 무슨 말이 있으리오.

다만 형이 아우의 죄악이 있으면 노하여 책망하기는 마땅하거니와, 책망을 너무 엄하게 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를 상하게 되어,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아니리요, 소국이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오직 시 짓기로 일을 삼고, 병장기를 익히지 않았더니, 약한 이가 강한 이에게 항복하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일은 떳떳한 일이라.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겨루리오.

다만 대대로 명 황제의 은혜를 받아 명분이 정해져 있었고, 일찍이 임진년 난리에 소국이 망하게 되었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병을 움직여 백성을 물불 가운데서 건저주시니, 소국의 백성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뼈에 삭이고 있어, 차라리 대국에 죄를 짓더라도 차마 명 황제를 저버리지 못하니, 이는 다름이 아니고, 은혜가 두터워 백성들이 감동을 깊게 받은 것이리오.

은혜를 끼치시는 것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고, 종사의 위태함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내어 난리를 구원하는 것과 군사를 물리어 생존을 보존하게 하는 것아 그 일이 비록 다르나 은혜는 한 가지라.

지난 해 소국이 일을 그릇되게 하여 여기에 이르니, 임금과 신하와 아비와 아들이 외로운 성에 있어 그 곤함이 심한지라. 진실로 이때에 대국이 허물을 버리게 하고, 스스로 새롭게 되기를 허락하시어 종사를 보존하고 길이 대국을 받들게 하면, 소국의 군신과 부자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오. 천하가 이를 듣나니 대국의 위엄과 신망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을 지니, 이는 대국이 큰 은혜를 동토에 맺게 하고, 넓은 명예를 만국에 베푸시는 것이니, 이는 소국에 베풂이라.

그렇지 아니하고 오직 하루아침의 분한 것을 결단하려 병력을 다하려 하면, 형제의 의를 상하게 하고, 여러 나라가 바라는 것을 끊어버리게 되어, 이는 또한 대국에 옳지 않은 일이니, 황제가 고명하기로 이를 염려치 아니 하리요, 가을이 되면 죽고, 봄에 살아나는 것이 천지의 일이요, 약한 것은 불쌍히 여기고, 망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은 패왕(霸王)대왕의 업이라.

이제 황제 바야흐로 여러 나라를 어루만지고, 큰 이름을 세워 천지의 도를 본받고 패왕의 업을 널리 펴면, 소국은 전의 허물을 고치고, 의탁하기를 원하는 자는 마땅히 버림받지 않으리니, 이제 가히 존엄을 피하지 못하리니 존귀한 명령을 내리기를 청하노라.”

하였더라.

14

십사일에 김신국이 양식을 마련하여 하루의 양식을 군병은 세 홉씩 줄이고, 백관들은 다섯 홉씩 줄여도 다음 달까지는 다하지 못할 것이니, 오래 도적에게 둘러싸이면 어찌 될지 모르리라.

15

십오일에 장계가 들어오다.

16

십육일에 눈보라치다. 홍서봉, 최명길, 윤휘가 적진으로 가 전에 보낸 국세가 오래 되도록 회신이 없어 곡절을 물으니, 용골대 등이 저희는 말을 무수히 하고, 또 장차 강화를 범할 것이라 하며, 또 흰 기에 항복을 권하는 글자를 써 망월봉(望月峯) 아래에 세웠더라.

17

십칠일에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가 홍서봉, 최명길, 윤휘를 불러내어 답서를 주어 받아오니, 답서에 이르기를,

대청국 관은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명을 내리노라. 네가 보낸 편지에서 이르기를, ‘책망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면, 도리어 형제의 정리를 상하게 되어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게 될 것이라하였으나, 짐이 정묘년의 맹세를 중하게 여겨, 일찍이 네 나라를 여러 번 타일렀더니, 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생명을 근심하지 않아, 먼저 맹세를 저버리는지라.

네 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려는 뜻이 있는 줄 알고, 짐이 문득 네 사신을 대하여 이르되, 네 나라가 이렇듯 함부로 하니, 이제 내가 나가 칠 것이니, 돌아가 네 임금에게 이르라 하여, 밝혀 일러 보내었으니, 속임수로 군사를 일으킨 것은 아니니라. 또 너희가 맹세를 저버리고, 틈을 벌어지게 한 것을 자세히 하늘에게 고하고, 군사를 내었으니, 네 어찌 도리어 하늘을 들어 참는다고 말하느뇨.

또 이르기를, ‘소국은 오직 시 짓기를 일삼고 병장기는 익히지 않았노라하였지만, 지난 번 기미년에 조선이 까닭 없이 침략하니, 짐은 너희 나라가 반드시 병서를 알 것이다 하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너희의 어리석은 일을 보면, 너의 군사 반드시 병서를 익혔을 것이라. 오히려 익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뜻이리오. 네 진실로 군사를 모아 이후에 다시 병서를 익힌 것이 마땅하도다.

또 이르기를 임진년에 신종황제가 천하 군사를 움직였다하였지만, 천하는 크고, 천하에는 나라가 많은지라. 너희의 난리를 구한 것은 명나라 한 나라뿐이라. 어찌 천하의 여러 나라의 군대가 다 이르렀으리요. 명나라와 네 나라서 서로 도와, 네 나라가 속임수가 많아 마침내 거리낌이 없고, 이제 이미 곤하게 산성을 지키며 목숨이 조석에 있으되, 오히려 부끄러움을 모르고 이렇듯 빈 말을 하니 무엇이 유익하리오.

또 이르기를 형제의 우애가 상하게 되고, 여러 나라들이 바라는 것을 그치게 되면 대국으로서 옳은 일이 아니니, 황제가 고명하기로 이를 염려치 않겠는가하였지만, 네가 형제의 좋은 것을 헐어 버리고 나를 해치려 하니, 어찌 내 나라가 은혜를 베풀 것인가. 이렇듯 하였으니 네가 스스로 고명해지려는 것이라.

또 이르기를, ‘황제 장차 천지의 도를 본받고 패왕의 업을 열지 아니하려는 것이 아니리오하였는데, 무고히 군사를 일으켜 네 나라를 멸하고, 네 백성을 해치려 하는 것도 아니요, 오직 옳고 그름을 분별하려 함이라. 또 천지의 도는 어진 이에게는 복을 주고, 사나운 이에게는 화를 주나니, 짐이 하늘을 본받아 마음을 기울여 내 명이 돌아오는 이를 거느리고, 죄를 청하는 자는 평안하게 하고, 명을 거스른 자는 죄를 주고, 거만하고 순하지 않은 자는 사로잡아, 힘이 센 자들은 징계하고, 교활한 자들은 없애려 하나니, 이제 짐에게 적국이 된 고로, 군대를 일으켜 여기까지 이른지라. 만일 네 나라가 다 아국이 된다면, 짐이 어찌 어린 자식같이 보지 아니리오.

또 네 말과 네가 하는 일들이 심히 같지 아니하니, 전후에 왕래한 문서를 내가 얻어 보니, 내 나라를 도적이라 하였으나, 몸을 숨기고 남의 물건을 가만히 가지는 것이 도적이니, 내가 과연 도적이면 네 어찌 도적을 잡지 못하느뇨.

우리나라의 풍속은 말과 하는 일이 같아, 이러함을 경계하나니, 너의 나라처럼 남을 속이고 교활하고 거짓되고 믿음이 없어,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나는 자가 있으리오. 네가 살고자 한다면 성을 나와 내 명을 따르고, 싸우려 한다면 쉬이 한 번 싸우라. 두 군사가 서로 부딪히면 하늘로부터 반드시 처분이 있으리라.”

하였더라.

 

18

십팔일에 홍서봉, 최명길, 윤휘가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보내니, 용골대 이르되,

마부대가 다른 곳에 나가 있어 받지 못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내일이나 모래 두 날 중에 싸울 것이다.”

하더라. 국서에 쓰기를

대청국 관은인성황제께 글을 올려 엎드려 명을 받드니, 그렇게 책망을 엄격하게 하는 것은 가르치기를 지극하게 함이라. 추상같은 엄한 말 가운데 따뜻한 봄볕 같은 뜻을 띄고 있으니, 엎드려 읽으매, 황송하고 감격스러워 몸둘 곳이 없도다. 대국의 위엄과 덕망이 멀리까지 퍼지고, 번방(蕃邦)들이 말씀을 한 가지로 받들어,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는 바이요, 큰 명이 바야흐로 새롭거늘, 소국이 십 년의 형제였지만, 도로 죄를 지었으니 미치지 못할 뉘우침이 있는지라.

이제 원하는 바는 다만 마음을 고치고, 염려를 바꾸어, 옛 버릇을 한결같이 씻어버리고, 나라를 들어 명을 받아, 다른 모든 번방(藩邦)과 비할 따름이라. 진실로 극진히 구원하여 돌보아 주시고, 스스로 새롭게 되기를 허락한다면, 문서와 예절에서 자연 응당한 법규와 격식을 따를 것이니, 결정하여 행하는 것이 오늘날에 있는지라.

성에서 나오라 함은 실로 어진 뜻이로되, 그러나 둘러싸인 것이 풀리지 않았고, 황제의 노함이 바야흐로 성하였으니, 여기에 있어도 또한 죽고, 성을 나서도 도한 죽을 것이라. 이러므로 용기를 바라며 죽기를 결단하니, 그 심정이 또한 서럽도다. 이러함에 황제의 명을 다름이라. 황제가 바야흐로 천지 만물을 살리는 마음을 가지니, 소국에서 사람을 기르는 일에 참여시켜주지 못하리오. 황제의 덕이 하늘과 땅 같으니 감히 실정을 말하고, 공경하여 은혜를 기다리노나.”

하였더라.

이는 이판 최명길이 지은 것이라. 예조판서 김상헌이 비변사에 들어가, 이 편지를 보고 손으로 찢고, 실성하고 통곡하니, 곡소리가 대궐 안에 사무치더라. 김상헌이 인하여 이르되,

대감이 차마 어찌 이런 일을 하느뇨.”

최명길이 가만히 웃고 말하기를,

대감은 찢으니 우리는 당당이 죽으리라.”

하고 종이를 낱낱이 주어 이어 붙이노라. 병판 이성구(李聖求) 크게 화내며 말하기를,

대감이 전부터 척화하기로 국서가 여기까지 미쳤으니, 대감이 마땅히 적진으로 감직하다.”

김상헌이 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죽고자 하되, 자결하지 못하더니, 만일 적진으로 보내어 죽을 곳을 얻으면 이는 그대의 은혜로다.”

말을 마치고 사처로 나가 사람을 만나면 통곡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이 날부터 밥을 먹지 아니하고 스스로 죽기를 기약하더라.

 

19

십구일에 최명길, 윤휘가 적진으로 가 국서를 전하되, 끝내 답서를 내어 주지 아니하더니, 우상 이홍주(李弘胄) 그저 돌아오니, 참판 한여직(韓汝稷)이 이르되,

국서에 한 글자를 쓰지 않았으니, 내 이미 대답이 없을 줄 알았노라. 한 글자는 클 거() 자이니 김상헌이 사처로 나갔으니, 때를 아 그 글자를 급히 쓸지라.”

최명길이 옳다 하고, () 자를 쓰기를 정하다.

전 대사간(大司諫) 윤황(尹煌)은 병들었음을 일컫고, 문 밖을 나서지 아니하니, 매일 저녁에 자기 아들을 불러다가 묻되,

화친하는 일은 어찌되어 가느뇨. 사람이 장차 죽으리로다.”

하니 윤황은 본지 척화하던 사람으로 나중에 말이 이러하니 사람들이 다 웃더라.

이 날 이홍주가 적진으로 가니, 용골대 등이 이르되,

많은 군대를 여러 도로 보내었고, 부원수(副元帥)가 잡혔으며 강화도도 함락하였다.”

하니 두려운 말이더라.

성중에서 병들어 죽은 신하는 두어 사람이더라,

20

이십일에 큰 눈 오고 센 바람 부나 이홍주와 최명길, 윤휘가 적진으로 가 답서를 받아오니, 답서에서 이르기를,

대청국 관은인성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이르노라.

네 하늘의 명을 어기고 맹세를 저버린 고로, 짐이 혁연히 노하여 군사를 거느려 나와 치니, 바야흐로 용서할 뜻이 없더니, 이제 네 외로운 성이 곤하여, 짐이 조서를 내려 심하게 책망함을 보고, 죄를 뉘우치니, 짐이 너를 용서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려 함은, 힘으로 너를 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네게 명하여 성을 나와 짐을 보게 하려 함은, 하나는 네 성심으로 항복함을 보려 함이고, 또 하나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유지케 하고, 군사를 돌이켜 인심으로 천하를 보이려 함이라.

만일 계교로써 너를 달랜다 할 적이면, 짐이 바야흐로 천명을 받들어 사방을 어루만지니, 정히 네 죄를 용서하여 명나라를 따른 허물에 표식을 하려 함이라.

만일 간사한 속임수로 너를 잡는다면 천하의 큰 것을 다 속임수로 얻을 것인가. 네 만일 의심하여 성을 나오지 않는다면 지방을 다 짓밟고, 생명은 다 진흙이 될 것이니, 진실로 일각도 머무르지 못하리라.

너를 으뜸으로 하여 맹세를 저버린 신하를 짐이 처음에는 다 죽이려 하였더니, 네 이제 과연 성을 나와 명을 따르겠다면, 우선 으뜸으로 꾀하던 두세 사람을 매어 보내라. 짐이 당당히 효시하여 뒷사람들에게 경계하리라. 짐이 명나라와 싸울 큰 계교를 그르치게 하고, 너희 생명을 물불에 빠뜨린 것이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인가. 네 만일 성을 나서지 않으면 아무리 빌어도 듣지 않으리라.

하였더라.

주상이 차라리 척화신과 더불어 함께 죽을지언정 어찌 가히 매어 보내리오. 동궁이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그대들로 하여 우리 집이 다 죽게 되었네.”

하시니 신하들이 할 말이 없더라.

21

이십일일 해 뜰 무렵 우상 이해가 적진에 가 국서를 전하고, 저녁에 다시 나가 답서를 받으려 하니, 출성하기와 척화신을 잡아 보내는 일을 주상이 허락하지 아니하기로, 적들이 대로하여 국서를 그저 돌려보내고 답하지 아니하더라. 그 국서에 이르기를

조선 국왕 신() ()는 삼가 대청국 관은인성황제폐하께 글을 올리나니, 신이 하늘에 죄를 얻어 아침저녁으로 장차 망할지라. 비록 사정이 급박하여 여러 번 글을 올려 스스로 새롭기를 구하나, 실로 감히 이루어지지 못하더니, 이에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지난 죄를 다 버리고, 추상의 엄한 위엄을 녹이고, 양춘의 어진 덕을 펴, 장차 동방 수천 리의 생명들로 하여금 물불 가운데서 벗어날지라.

군신부자(君臣父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려 갚을 바를 알지 못하되, 신이 애타는 걱정하는 사정으로 폐하께 위하여 베푸나니, 동방 풍속이 좁고 예절이 까다로워, 그 임금의 거동이 잠깐 예사롭지 아님을 보면, 놀라 서로 보며 괴이한 일로 삼나니, 만일 풍속을 인하여 다스리지 아니하면 마침내 나라를 세우지 못할지라.

오늘날 모든 관리들과 모든 백성들이 사세 급박함을 보고, 명을 따르자는 의논은 한결 같으나, 다만 출성하기는 이르되, 고려(高麗) 때부터 없는 일이라 하고, 죽기를 결단하여 반드시 출성은 못하리라 하니, 만일 대국이 독촉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면, 다른 날 얻는 것은 불과 주검이 쌓인 빈 성일 따름이라.

이제 성안 사람들은 아침저녁에 다 죽을 줄을 알되, 오히려 이러하니 성 밖이야 하물며 다르겠는가. 또 예부터 나라가 망하는 것은 적국에 있지 아니하나, 비록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세우나, 오늘의 인심을 볼진대 반드시 즐겨 폐하를 섬기지 아닐지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운 바이오.

또한 폐하가 불쌍히 여기는 본심이 아니라, 폐하가 벼락같은 군사로서 깊이 천 리까지 들어와 두 달이 못되어서, 그 나라를 바르게 하고 그 백성을 어루만지니, 천하에 기특한 공이오, 전대에 없는 바이라. 어찌 구태여 출성하기를 기다려 이겼다 하리오.

또 성을 치는 것은 최를 치는 것이라. 이제 이미 항복하니 성을 무엇에 쓰리오. 척화신의 일은 소국의 옛 대간(大諫)들이 간쟁(諫爭)하기를 주장하더니, 지난 일이 망령되어 소국이 이에 이른 것이 다 그 죄라.

지난 해 이미 적발하여 죄를 주어 내쳤으니, 이제 비록 황명이 있으나, 신의 본심이 불과 편벽되고 어두워 천명을 알지 못하고, 떳떳한 것을 지키려 함이라. 이제 폐하가 군신간의 의리로써 천하를 움직이니, 이 무리를 마땅히 용서할지라.

엎드려 생각하지 폐하의 큰 도량이 천지에 천지 같은지라. 이미 이금의 죄를 사하시면, 이런 소신(小臣)들은 다만 소방(小邦)에 맡겨 다스림이 더욱 큰 덕이라. 신이 이미 폐하의 위엄으로 구함을 입은 고로, 성심으로 친하고 붓조차 소회를 다하여 삼가 주기를 무릅쓰고 드리노라.”

하였더라.

이는 최명길이 지은 바이라.

주상이 최명길과 대제학 이시직으로 하여금 다시 지게 하니, 비록 최명길이 글을 쓰지 않았으나, 뜻은 다름이 없으되, 이시직이 제 글을 쓰지 아니한 고로 최명길을 공치사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니, 사람들이 다 웃더라.

이때 이조참판(吏曹參判) 정온(鄭蘊)이 국서에서 신()이라 칭함을 보고 분통하여 상소하니, 원래 정온은 영남(嶺南) 사람으로 남인(南人)에 속하였고, 역적 정인홍(鄭仁弘)의 헛된 명성이 성할 때에, 정온이 정인홍의 사나움을 알지 못하고, 가까운 문인 중에 들었더니, 정인홍이 하는 일이 패악하고 광해군(光海君)이 간신의 말을 들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대비 품에서 뺏어 교동도로 귀양 보내어 즉시 죽으니, 천지간의 큰일이라. 정온이 호걸이므로 정인홍을 끊어버리고, 광해군께 상소하여 예로부터의 인륜을 지키고 대의를 밝히니, 광해군이 살피지 못하여 제주로 안치하였더니, 지금의 주장이 반정하시고 공을 불러 크게 쓰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고, 이 때 주상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왔더니, 도적에게 신하를 청함을 보고, 분개하여 상소하니, 상소에 이르기를,

엎드려 신이 그윽이 듣자오니, 어제 사신이 적진에 갈 제, 신하를 칭한다 아뢰는 말씀이 있사오니, 이 말씀이 진실로 그러하나잇가. 진실로 그러하면 최명길의 말이라. 신이 듣자오니 마음과 쓸개 다 터지고, 목이 메어 능히 말을 이루지 못하리이다.

모든 국서가 다 최명길의 손에서 나오니, 말씀이 극히 낮아 진실로 항복하는 편지라. 그러나 오히려 신자(臣字)를 쓰지 않았더니, 이제 신하라 칭하니 군신의 명분이 정해졌사오니, 장차 명령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라. 저들이 만일 명령하여 성을 나서 항복하라 하면, 전하 장차 북녘으로 가실 것이며, 복색을 고치고 술잔을 드리라 하면, 전하 장차 술잔을 드리시리잇가.

만일 순종하지 않으면, 저들이 반드시 군신의 대의로써 죄를 나타내어 칠 것이니, 그리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이 지경의 이르러 장차 어찌 하려 하시리잇가. 최명길의 뜻대로 하면 한 번 신하를 칭하면 둘러 쌓인 것이 풀릴 것이요, 임금을 가히 평안이 하리라 하나, 설사 이리하여도 오히려 소인들의 충()이라. 예부터 천하의 국가가 망하지 않은 국가가 있으리잇가.

무릎을 굽히고 사는 것이, 바른 것을 지키고 죽느니만 같지 못하니, 하물며 군신 부자가 성을 의지하여 한 번 싸우면 성을 오나전하게 할 도리가 없지 아니하니이다. 아국과 중국이 부자의 은혜와 군신의 나눔이 있으니 어찌 가히 배반하리오.

하늘에 두 해 없거늘, 최명길이 해 둘을 만들고자 하고, 백성에게 또한 두 임금이 없거늘, 최명길이 임금 둘을 만들고자 하니, 이를 차마 하면 또한 무슨 일을 못하리오.

신이 힘이 약하여 비록 스스로 최명길을 죽이지 못하나, 차마 한 자리에 서로 용납지 못하나, 원컨대 전하는 최명길을 내쳐 나라를 파는 죄를 밝히시고, 그렇지 않다 하실진대 신에게 죄를 주소서.”

하였더라.

날이 춥고 눈이 녹지 않으니, 나무를 얻을 길이 없어 개원사(開元寺) 행랑과 고을 옥집을 허물었느니라.

동궁이 군관에게 이르되,

내 이미 자식이 있고 아우 있으니, 내 어찌 목숨을 아끼리오. 내일 정하여 성을 나가고자 하니 이 뜻을 비변사에 이르라.”

비변사에서 의논하여 세자는 출성을 마시라 하고, 잡아 보냄을 정하니 이조참판정온이 글을 올려 이르기를,

엎드려 생각하니, 신이 실로 최명길이 신을 칭하는 말을 막으려 하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문득 그 계교를 행하여 신이 미처 막지 못하여 죽기로써 막지 못하니, 신의 죄 큰지라. 임금의 욕됨이 이미 급하였으니 신하된 자 죽기 마땅하되, 오히려 자결하지 못함은 전하가 오히려 출성하실 뜻이 없으니, 신이 어찌 감히 가볍게 죽으리잇가.

다만 들으니 도적이 척화한 사람을 찾기를 심히 급히 한다 하오니, 신이 비록 먼저 척화를 주장한 사람이 아니오나,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한 것은 신의 일이라. 만일 신이 죽어 한 터럭이나 국가에 유익하면, 신이 어찌 감히 내 몸을 사랑하여 임금을 위하여 죽지 않으니잇고. 원컨대 전하는 빨리 의정부에 명하셔, 신으로써 도적이 요구하는 것을 응하소서.”

하였더라.

23

이십삼일에 주상이 병환으로 미령하시니, 내의원(內醫院)에서 가져온 약재 다만 정기산 열 첩뿐이라. 정기산 두 첩을 지어 드시니 즉시 나으시다.

적이 척화신을 아니 보내기로, 화친을 허락지 아니하더니, 체부(體府) 중군(中軍) 신경인(申景禋)과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와 구굉(具宏)이 적진에 왕래하여 가만히 의논하고, 수원(水原)에 들어온 장관(將官) 등과 훈련도감(訓練都監) 초관(哨官) 수백 인을 부축하여 먼저 체부(體府)로 가 칼을 어루만지며, 임금에게로 가 척화신을 내어 놓으라 보채니, 대개 수원부사(水原府使)는 구인휘(具人垕), 죽산부사(竹山府使)는 구인기(具仁基), 군병(軍兵)은 구굉(具宏)에게 속하였고, 신경진(申景縝)은 훈련대장(訓練大將)이라. 오늘 이 일은 거진 분병의 뜻이 아니더라.

우상 이해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가, 출성을 못한다는 말은 이전의 편지와 같고, 척화신을 내어 주기는 허락하시니, 그 말씀에 하였으되,

척화신의 망령된 말로 양국의 큰 계교를 그릇되게 만드니, 다만 폐하가 싫어할 뿐 아니라, 실로 소방(小邦) 군신이 한 가지로 분통하여 하는 바이라. 도끼로 죽임이 어찌 조금인들 아까우리오. 다만 먼저 주장한 대간(臺諫) 홍익한(洪翼漢)을 평양서윤을 하여 저더러 스스로 대병을 이끌라 하였으니, 만일 벌써 잡히지 않았으면 반드시 평안도 평양에 있을지니, 대군이 돌아갈 길에 잡아매어도 어렵지 아니하고, 그 남은 이는 길이 통하지 못하여 거처를 찾지 못하니, 폐하가 반드시 궁극히 찾으라 하시면 군사가 돌아가는 날에 청하건대, 사정을 조사하여 그 사람을 얻어 처분을 기다리마.”

하였더라.

김상헌이 국서를 찢고 십팔 일부터 밥을 먹지 아니하여 절곡 한 지 엿새라. 목숨이 경각이러니 척화신을 보내려 하는 것을 들으매 이 날부터 비로소 음식을 먹어 이르되,

내 만일 먼저 죽으면 적진의 가기를 피한다 하리라.”

하더라.

윤교리(尹校理) 오수찬(吳修撰) 양인이 연명 상소하여 척화한 일을 자수하고 적진의 가기를 청하니, 대개 김류, 이성구, 최명길이 의논하여 척화한 이들을 다 잡아 보내려 함이라.

다음날 밤, 삼경에 도적이 서쪽을 치고, 오경에 동편으로 망월봉을 범하여 성중을 침노하다.

24

이십사일에 적이 남성을 범하고, 종일토록 행궁을 향하여 방포하니, 철환이 사발 같고 삼층 기와집을 뚫어 한 자 넘어 들어가더라.

25

이십오일에 적이 서문으로 따라와 우리 사신을 부르니, 이덕형, 이성구, 최명길이 적진로 가니 적장이 국서를 도로 내어주고 이르되,

내일이면 돌아가려 하나니, 만일 출성을 아니하면 화친이 되지 못하리니, 이후는 다시 오지 말라.”

이리 이르고 종일토록 방포하더라.

26

이십육일 신경진, 구굉의 장수가 또 임금 앞에 아 척화신을 내어주기를 청하니, 대개 김상헌을 이름이라. 장관(將官)들이 승정원까지 들어가 떠들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승지(承旨) 이행원(李行遠)이 이르되,

임금의 거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 감히 이렇듯 하느뇨.”

군병(軍兵) 등이 눈을 부릅뜨고 대노하여, 장차 난동할 형상을 하니 인심이 흉흉하더라. 한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다만 신경진, 구굉의 군사가 그리 하고, 다른 군사는 그리 하는 이 없으므로, 사람이 알고 이를 이 있으므로, 또 북성을 지킨 총용군병(總戎軍兵)을 달래어 와 청하되, 오직 서쪽 성을 지킨 대장 이시백(李時白)의 군사는 한 사람도 오는 이 없더라.

이 날 저녁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이 적진에 가니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가 강화도를 함몰하고, 대군(大君) 형제(兄弟)와 숙의(淑儀) 동궁(東宮) 일행이 이미 통진에 이르렀고, 대군부인(大君夫人)은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따르게 하여 모레면 여기에 이를 것이요, 경성 궁궐을 불지르지 아니하여 국왕이 출성한 후야 다시 궐내의 들게 하고, 세자(世子)와 대군(大君)만 북녘으로 데려가려 할세, 대군의 편지를 주며 이르되,

너희 대군 편지니 너희 임금께 드리라.”

가져 오매 성중이 믿지 아니하더니, 상이 보고 가로되,

이는 분명 대군의 친필이라 종가가 이미 망하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지라.”

이로 인하여 출성할 계교를 정하시니,

27

이십칠일에 안개 자욱하여 지척을 분변치 못하다가, 최명길, 이성구 등이 국서를 가지고 적진으로 가니, 이는 출성을 허락하는 뜻이라.

가로되,

신이 황제의 명을 받고부터 천지를 용납하는 큰 덕을 감사하여, 돌아가 따를 마음이 더욱 간절하되, 신의 몸을 돌이켜 살피니 쌓인 죄 뫼 같은지라. 여러 날 머뭇거려 태만한 죄를 더하였는데, 이제 폐하가 돌아갈 날이 있음을 들으니, 일찍이 우러러 폐하의 은혜를 바라지 못하면, 작은 정성을 펴지 못하고 이제야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오.

신이 바야흐로 삼백 년 종사와 수천 생명을 폐하께 의탁하나니, 정세 진실로 가련한지라. 만일 그릇됨이 있으면 칼을 들어 자결함만 같지 못하니, 엎드려 원컨대 밝혀 조서를 내리어 마음을 평안케 하고 명의 돌아갈 길을 열라.”

하였더라.

이 날 김상헌이 스스로 목매여 거의 명절하게 되였더니, 사람이 풀어 놓았더니, 또 허리띠로 묶었더니 또 풀어놓고, 이조참의(吏曹參議) 이경여(李敬與)와 공()의 자제들이 붙들고 지키어 자결치 못하게 하더니, 그 날 이후로 공을 잡아 적진의 보낼 의논이 있으매, 차후로 는 자결할 뜻을 그치니라.

이조참판 정온에게 동향 사람이 묘비명을 청하는 이 있더니, 이 날은 글을 지어 첩자를 맡겨 그 사람에게 전하라 하고, 또 글을 지어 가로되,

임금의 욕됨이 이미 급하여시니 신하가 어찌 죽기 더디리오. 수레를 따라 나가 항복함을 실로 부끄러 하노라.”

이리 짓고, 찬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찌르니, 유혈이 베개에 가득하였더니, 사람이 급히 가보니 오히려 죽지 않아 웃고 이르되.

내 일찍 글을 읽었으나, 그 뜻을 몰랐도다. 옛말에 이르기를 칼날에 엎드려야 죽는다 하였으니, 오장이 상하여 죽을 것을 누워서 찌르기에 죽지 않았노라.”

하더라.

28

이십팔일에 김류, 홍서봉, 이홍주가 입시하여, 김류가 청하되,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과 전 대사간 윤황의 아들 윤문거(尹文擧)와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김수익(金壽翼), 김익희(金益熙), 정뇌경(鄭雷卿), 이행우(李行遇), 홍탁(洪琢) 등 십 인을 다 적진의 보내게 청하니, 대개 적이 홍익한(洪翼漢) 밖에 허락하는 이 없는 고로, 화친을 허락하지 않음이 여러 사람을 가려 뽑기가 어려워 다시 청하고, 김류, 최명길과 더불어 마음이 같고, 김상헌의 말이 김류를 거슬린 이유더라.

나만갑(羅萬甲)이 이경석(李景奭)에게 이르되,

응당 장관이 어찌 잠잠히 있으리오.”

이경석이 답하여 이르기를,

대사간이 들어오면 한 가지로 다투리라.”

하더니, 대사간 박황(朴潢)이 들어 와 김류에게 이르되,

적진에 보내기는 비록 두어 사람이라도 책임이 되거든 어찌 여러 사람을 이르리오. 교리(校理) 윤집(尹集)이 당초의 상소하여 힘써 척화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보내기 차마 못할 바이로되, 많이 보내기보다 낳으리다.”

하니, 그 말을 따르니라.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이 적진의 나가 출성하오실 조목을 마련할 때, 이 일이 예부터 규례가 있으니, 으뜸 절목은 참혹하니, 둘째 절목이 마땅하도다. 이른바 으뜸 절목은 반합(飯盒)하는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을 싣고 나가는 것이오. 둘째 절목은 군신과 하인 합하여 오백 인을 거느리고, 위엄과 군병을 없게 하고, 그믐날 출성하라 하되, 구태여, 청의(靑衣)는 입으라 하는 일은 없으나, 최명길이 제 짐작으로 이르되,

용포를 입지 못할 것이니 청의를 입으심이 마땅하니라.”

하고, 주상과 세자 입으실 청의를 밤새도록 재촉하여 지으니라.

이 날 밤에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가 답서를 가져오니 답서에 이르기를,

관은인성황제는 조선국왕에게 가르치노라. 황제에 올리는 글에서 마음을 정히 하고 명을 따르기를 간청하였으니, 짐이 거짓말할까 여기는가. 이제 전죄를 다 버리고 규례를 다시 정하나니, 네 만일 허물을 고치고 은덕을 잊지 아니하여, 자손들이 장구할 계교를 할진대, 명나라에서 준 고명(誥命)과 인신(印信)을 돌려드리고, 명나라와 교통하기를 그치고, 문서에 우리 연호를 쓰고, 네 맏아들과 둘째 아들로 볼모를 삼고, 여러 대신이 아들 있는 이는 아들을 보내고, 없는 이는 아내로 볼모를 삼고, 짐이 명나라를 칠 때, 네 수만 기를 내어 기약을 어기지 말며, 조총과 화살을 스스로 준비하고, 대군이 돌아갈 제, 음식을 베풀어 구사를 위로할 것을 드리고, 황제의 생일과 정초와 동지와 황후의 생일과 태자 생일에 하례하고, 조문할 일에는 대신에게 명하여 표()를 올리고, 황제에게 올리는 글의 격식과 짐의 조서를 네 사신으로 더불어 서로 보고, 혹 네가 천자의 신하를 뵐 적 예절을 명나라 때와 달리 말고, 내외의 여러 신하와 더불어 혼인하여 화친을 굳게 하고 지내라.

짐이 이미 죽은 몸을 살리고, 망한 종사를 완전케 하였으니, 다른 날 네 자자손손이 신의를 어기지 말라. 네 나라가 교묘히 속이기를 반복하기로 인하여 이리하노라. 매년 조공 물목은 황금 일백 냥, 사슴 가죽 일백 장, 담배 일천 근, 수달 가죽 사백 장, 다람쥐 가죽 이백 장, 패도(佩刀) 이십육 자루, 조선종이 일천 권, 용무늬 돗자리 네 채, 무늬 놓은 돗자리 사십 입, 흰 모시 일백 필, 색색의 명주 이천 필, 삼베 사백 필, 색색의 베 일만 필, 베 일천 필, 백미 일만 석을 기묘년(1639) 가을부터 시작하라.”

하였더라.

이 날 윤오 이공이 장차 적진으로 나갈 때, 기색이 종래와 같더라. 주상이 친히 보시고 술 먹여 이별하며 가로되,

너희 부모 처자를 당당히 종신토록 돌아볼 거시니, 이는 염려치 말라.”

하시더니, 그 후 수년을 쌀을 주시고 다시 은전이 없더라. 윤오 이공(二公)은 적진으로 가 화를 입은 일을 홍공과 아울러 삼학사전(三學士傳)’을 지으니라. 이조참판 정온이 또 상소하니 상소에 이르기를,

엎드려 바라오니, 신이 자결하기는 정히 오늘날을 차마 아니 보려 힘이러니, 실 같은 잔명이 삼 일이로되, 오히려 죽지 아니하니 신이 실로 고이하여 하나이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항복하시게 하니, 군신간의 의리가 이미 명백히 정하였는지라.

신하가 임금에게 한갓 순순히 따를 뿐 아니라, 가히 다투려 하면 가히 다툴 것이니, 저들이 만일 명나라의 인신(印信)을 드리라 하거든 전하 당당이 다투어 말하시기를, ‘임금의 조상으로부터 이 인을 받아 이제 삼백 년이니, 이 인을 당당이 명나라에 드릴 만하고, 청나라에 드림이 불가타할 것이오. 저들이 만일 명나라를 칠 군사를 청하거든, 전하 당당이 다투어 가로되, ‘명나라와 부자 같은 은혜는 청국도 또한 알지라. 아들을 가르쳐 아비를 치게 하는 것은 윤리와 기강이 변하는 것이니, 다만 치는 죄가 있을 뿐 아니라 가르치는 죄 또한 같이 아니하니라하시면, 저들의 흉학하고 교활한 마음으로도 반드시 살필지라. 원컨대 전하는 이 두 가지 일을 다투어, 천하의 후세에 죄를 짓는 일을 면하시면 매우 다행하여이다. 신이 명이 다하게 되어, 능히 전하의 가마를 따르지 못하니 신의 죄 큰지라. 신의 벼슬을 갈아 신으로 하여금 눈을 감게 하소서.”

하였더라.

30

삼십일에는 햇빛이 없었다. 주상이 세자로 더불어 청의를 입으시고, 서문으로 따라 나가실 때, 성에 가득한 사람이 통곡하여 보내니, 성중의 곡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더라.

()이 삼밭 남녘에 구층으로 단을 만들고, 단 위에 장막을 치고, 누런 양산을 받치고, 단 위에 용문석을 깔고, 용문석 위에 비단으로 만든 교룡요를 펴고, 그 위에 누런 비단 차일을 높이 치고, 뜰에 누런 양산 셋을 세우고, 정병 수만을 키 크고 건장하기가 거의 비슷한 이로 각각 비단 갑옷을 다섯 벌씩 껴입고, 호위하였더라.

한이 황금상 위에 걸터앉아 바야흐로 활을 타며, 장수들에게 활을 쏘아 보이더니, 활 쏘기를 마치고, 전하로 하여금 걸어 들어가시게 하니, 백 보는 걸어 들어가 삼공육경(三公六卿)과 더불어 뜰 내 진흙 위에서 배례하실 때, 군신이 돗자리 깔기를 청하오니, 주상 이르기를,

황제 앞에서 어찌 스스로 높이리오.”

그리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 좇는 예를 행하시니, 저들이 인도하여 단에 오르시어 서쪽을 향하여 제왕 오른쪽에 앉으시게 하고, 한은 남쪽을 향하여 술고 안주를 베풀고 군악을 연주하더라. 한이 전하께 돼지 가죽옷 두 벌을 드리고, 대신 육경승지(六卿承旨)에게 한 벌씩 주니, 주상이 한 벌을 입으시고 뜰에서 삼배 사례하시니, 대신이 또한 차례로 사례하더라.

이 날 저녁에 전하가 서울에 들어오실 때, 인평대군(麟坪大君)과 대군부인(大君夫人)과 숙의(淑儀) 다 모여 들어오고, 동궁과 빈궁과 봉림대군(鳳林大君)과 대군 부인은 다 장차 심양으로 들어가시므로 인하여 진중에 머무르고, 적장이 최명길의 가속을 놓아주니 최명길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더라.

22

이월 초이일에 성내 사람이 다 성에 나오니, 적병이 곳곳에 가득하여 동서를 알지 못하더라. 적병 가운데에 아국 사람이 따라가니, 감히 소리를 못하고 가만히 울어 사람을 향하고, 혹 길에 엎드려 비는 형상 같으면 적이 쇠채로 치더라.

혹 성의 적하고 말을 달리는 이가 있으니 평안도의 기녀더라. 사대부의 처첩과 처녀들은 차마 낯을 내지 못하고 머리를 싸고 있는 이 무수하더라. 이 날 한이 길을 떠나니 주상이 동교(東郊)에 나가 보내시다.

3

초삼일의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가 정명수를 거느려 임금에게 오니, 영상 좌상이 나서 대접할 때, 김류가 용골대 등에게 이르되,

이제는 우리 양국이 부자가 되었으니 무슨 말을 아니 들으리오. 이후에 명나라를 칠 제, 명대로 하리라.”

홍서봉이 또 이르기를,

아국이 황금이 나는 곳이 아니니 한에게 주청하여 덜어줌을 바라노라.”

정명수가 답하여 이르기를,

본국이 처음에는 황제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니, 내 어이 감히 용장군에게 이르며, 용장군이 어찌 한에게 이르리오. 대감은 체면을 생각지 않느냐.”

홍서봉이 다만 옳다 하더라. 김류의 첩 딸이 사로잡히니, 용골대에게 이르되,

만일 풀어준다면 당당히 천금을 주리라.”

하니, 이로부터 포로된 사람의 값이 무거워졌으니 김류의 말 때문이니라. 용골대 등이 나갈 때, 두 대신이 뜰에 내려섰더니, 김류가 문득 정명수를 안고 귀에 대고 이르되,

이제 판사(정명수)와 더불어 일가와 같으니, 판사의 청을 내 어이 아니 들으며, 내 청을 판사가 차마 어이 듣지 않으리오. 딸자식 살리는 일을 판사가 십분 주선하라.”

정명수가 대답하지 않으매 차마 안고 놓지 아니하니, 정명수가 괴로이 여겨 옷을 떨치고 가니라.

6

초육일 아침 식사 후에 주상의 가마가 서강(西江)으로 가시니, 구왕자(九王子)는 한의 아홉째 아이라. 우리 세자 또한 그 근처의 계시더니, 상이 먼저 세자 처소에 가 보신 후 구왕을 가서 보실 때, 구왕을 길 가운데서 만나 맞아, 말 위에서 인사하고, 함께 세자 처소로 가 상대하여 좌정하고, 신하들은 그 뒤에 앉은 후 구왕이 술안주를 배설하고 군악을 연주하더니, 구왕이 음식을 물러 그 장관을 주니, 상이 또 구왕 하는 대로 음식을 좌우로 주시니, 신하들이 오히려 주렸다가 달게 먹더라.

8

초팔일에 주상이 세자의 행차를 보내시려, 창릉(昌陵) 길가로 나가시더니, 말을 멈추고 말씀하신 후, 세자의 처소에 들르신 후, 주상과 빈궁과 대군 부인은 처소에 드시고, 세자는 밖에 계시더니 군신이 절하여 하직하니라.

세자, 봉림대군과 더불어 떠나시니, 빈궁의 시비는 여섯이요, 대군 부인 시비는 넷이 따랐더라. 백관 상하가 일시에 부르짖어 우니, 주상이 또한 눈물을 금치 못하시더라. 주상이 그 참혹한 형상을 차마 보지 못하여 대로를 거치지 아니하고, 뫼를 의지하여 오시니, 서대문으로 환궁하시다.

419

사월 십구 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받들어, 한에게 사은하고 방물을 바칠 제, 고운 황색 삼베 삼십 필, 고운 백색 모시 이십 필, 흰 무명 일천 필, 용무늬 돗자리 두 장, 황금빛 꽃무늬 돗자리 한 일 장, 꽃무늬 돗자리 이십 장, 색색 무늬 돗자리 십오 장, 표범 가죽 열 장, 수달 가죽 삼십 장, 흰 종이 일천 권, 기름먹인 종이 석 장, 족제비털 붓 일백 병, 참먹 오십 정, 곶감 삼십 접, 마른 밤 십오 두, 큰 전복 한 접, 이는 한에게 보내고, 중궁에게 예물은 홍색 모시 이십 필, 백색 모시 삼십 필, 백색 삼베 이십 필, 흰 무명 오십 필, 꽃무늬 돗자리 열 장, 색색 무늬 돗자리 열 장, 족제비털 붓 사십 병, 참먹 사십 정이러라.

으뜸 척화신 홍익한을 처음에 적병을 막으라고 평양서윤을 시켰는데, 길이 통하지 못하여, 천신만고하여 겨우 임지에 이르러 백성을 어루만졌는데, 그 길로 잡혀가니, 사람의 애통하고 안타까운 바이러라.

정축(1637)년 십일월에 한이 용골대, 마부대 두 장수를 보내어, 새로이 아국 주상을 봉하여 조선국왕을 삼아 인신과 고명을 보내고, 특별히 검은 여우 가죽 갖옷 한 벌과 돼지 가죽 일백 장, 준마 일 필, 광채나는 안장 하나를 보내고, 삼공육경(三公六卿)과 사대부 집이 저들과와 혼인하고, 절색의 시녀들을 보내라 청하였더라.

용골대 등이 아국에 와 폐를 끼치고 아름다운 기생을 들이라 하니, 원접사(遠接使)가 처음에는 막다가 조정에 품하니, 조정이 막지 못하여 허락하니, 각 관의 기생이 다 적의 기생이 되고, 서울은 의녀와 무당이 들어와 잠깐 뜻의 맞지 않으면, 사대부 치기를 노복같이 하니, 병조정랑(兵曹正郞) 변호길(卞浩吉)이 용골대(龍骨大)에게 매맞아 죽으니라.

삼공육경과 사대부들이 장차 도적으로 더불어 결혼하랴 정하고 기별하였더니 한이 이르되,

멀리 오기 폐가 있으니 오지 말라.”

하다.

각 도의 기생 여남은 명을 선택하여 시녀로 보내었더니, 그 후에 다시 보내지 말라 하였더라.

적이 삼밭에서 승전하고 항복받은 고로, 칭송하는 비석을 세우라 하는지라. 아국이 즉시 강가의 채색한 누각을 짓고 높은 비를 세우고, 대제학 이경석(李景奭)을 명하여 비문을 짓고, 참판(參判) 오준(吳竣)이 쓰고, 참판(參判) 여이증(呂爾徵)이 전자(篆字)로 새기니, 그 글이 이르기를,

대청 숭덕(崇德) 원년 겨울 십이월의 황제 화친을 헐어 버리기를, 우리로부터 하였다 하사 크게 노하여, 바로 두드려 동녘으로 오시니, 가히 항거할 자 업는지라. 우리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위태로워 봄여름까지 이어질까 두려워함이 거의 오십 일이나 하더니, 동남쪽 여러 도의 군병이 연이어 흩어지고, 서북 군사가 깊은 골짜기로 달아나 능히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성중의 양식이 다하니, 이때를 당하여 대병으로 성을 치기를 서리와 바람이 가을 풀잎을 걷어치우고, 화롯불이 기러기의 털 사르는 것 같거늘, 황제 죽이지 아니키로 위엄을 삼고, 오직 덕을 펴기를 먼저 하여, 이에 칙서를 내려 잘 타일러 가로되, 오면 짐이 너를 완전케 하고, 아니 오면 치리라 하여, 용골대 마부대 등 여러 장수가 황명을 받들어 길에 서로 다하시니, 이에 우리 임금이 문무 여러 신하를 모아 일러 가로되, 내 화친을 청나라에 의탁한 지 십 년이라. 내 사리가 어둡기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늘이 치는 것을 재촉하여 만백성이 어육이 된 것이 내 한 사람의 죄라. 황제 오히려 치지 아니하여 글로써 잘 타이르니, 내 어찌 공경하여 받들어 위로 종사를 완전케 하고, 아래로 생명을 보존케 아니 하리오. 하신대, 대신이 합하여 도우니 드디어 수십 기를 따라 군문에 가 죄를 청하니, 황제 이에 예법대로 하고, 은혜로 어루만져, 한 번 보고 마음속으로 믿고, 서로 생각하는 은혜는 총애하는 신하에 미쳤으며, 예를 파하고 즉시 우리 임금을 도성으로 들여보내고, 군병이 남으로 내려간 자를 즉시 부르고, 군사를 서로 돌이킬 때, 사나운 것을 금하고 농사를 권하여, 멀리 가까이 새와 짐승같이 헤어진 자 모두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니, 동쪽 수천 리 강산이 즉시 옛날과 같아진지라. 서리와 구름이 변하여 따뜻한 봄볕이 되고, 가물은 것이 도리어 때에 맞는 비가 된지라. 이미 망하였다가 다시 얻고,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이으니, 이는 실로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한강 상류 삼밭 남녘은 곧 황제가 머무시던 곳이라. 단이 있었으니 우리 임금이 공조(工曹)에 명하여 단을 더 높이고 크게 하며, 돌을 베어 비를 세워 길고 오래도록 두워, 황제의 공덕이 바로 조화로 더불어 한 가지로 흐름을 밝히니, 어찌 다만 우리 소방(小邦)이 대대로 길이 힘을 입을 뿐이리오. 또한 청나라의 어질고 위엄스럽기가 이로부터 말미암은지라. 돌아보건대, 천지의 큰 덕과 해와 달의 밝은 것을 그림으로 그리매 족히 방불치 못할 것이로되, 잠깐 대략을 기록하노라.”

()에 가로죄,

하늘이 서리와 이슬을 내리오시니, 이에 씩씩하고 이에 기르도다. 오직 황제가 이를 본받으니 위엄과 덕을 베풀도다. 황제 동녘으로 치니, 그 군사가 십만이로다. 은은하고 소리가 대단하니, 범 같으며 곰 같도다. 서쪽 변방과 북녘 부락이 창을 잡고 앞에서 모니, 그 위엄 있는 명령이 빛나도다. 황제가 심히 어질어 은혜의 말을 내리니, 황제의 명령이 밝아 도리어 엄하고 또한 온화하도다. 처음에는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근심을 끼쳤더라. 황제의 밝은 명이 있으니 잠이 깬 듯 하도다. 우리 임금이 공경하여 항복하니 서쪽으로 거느리고 돌아가도다. 한갓 위엄을 두려워할 뿐이나, 오직 덕을 의지하도다. 황제 아국을 아름다이 여기사 덕택에 흡족하고 극락 가기 위한 덕이 넉넉하도다. 이에 기꺼워하며, 이에 웃고, 병장기를 묻도다. 무엇을 주었는고. 좋은 말이며 가벼운 갖옷이로다. 도인과 선비와 부인이 이에 노래를 부르도다. 황제 군사를 돌이켜 농사를 권하도다. 마른 뼈에 두 번 살이 나, 시든 풀에 다시 봄이 되도다. 돌이 있어 아름답고 성하니 큰 강가로다.”

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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