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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의기초 - 4.실전요약

New-Mountain(새뫼) 2015. 1. 6.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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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실전 요약

 

 4.1. 대학의 역할 

 - 2015 인하대 모의논술

 

  * 다음 제시문의 논지를 300자 내외로 요약하시오. (300±50)

학생은 학문을 연구하고 미래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대학에 들어온다. 이렇게 그들이 해야 할 과제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주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가 많다. 무엇보다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 그들을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대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오리엔테이션을 위한 강의나 실습시간 그리고 학업과정의 계획은 그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 부분적인 도움을 줄 뿐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 대학이라는 세계에서 강의든지 실습이든지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 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공부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기대하는 것은 전공과목에 대한 교육, 직업과 관련된 지식의 준비이다. 이는 대학이 사회구성원에 대한 사회화 및 선발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는 사회적인 통념과도 연관이 있다. 특히 사회가 복잡해지고 분화되면서 현대 사회는 다양하고 전문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요구된다. 이에 대학에서는 적성과 능력에 따라 사회 각 분야에서 필요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그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규범과 가치 등을 교육한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사회적 역할의 수행에 필요한 자질을 갖추고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적합한 구성원으로 사회화한다.

그러나 사회에서 대학에 거는 기대는 단순한 직업교육 그 이상의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근원적인 지적 욕구를 실현하는 데 있다. 특히 인간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며 그 앎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를 발견하는 데 깊은 관심이 있다. 이러한 알고자 하는 욕구는 관찰을 통해서, 체계적 사고를 통해서, 그리고 객관화에 대한 훈련으로서 자기비판을 통해서 실현된다.

대학교육의 궁극적인 의미와 방법은 우니베르지타스(Universitas: 교사와 학생을 의미, 후에 우주라는 의미로 변형)’라는 대학의 명칭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대학이 추구하는 것은 지식의 우주이다. 따라서 대학이 전문학교의 집합소가 되면 대학의 의미를 상실한다. 학문의 생명력은 전체와의 관계에 근거한다. 모든 개별적 학문의 의미는 학생들에게 특수 학문의 전체성과 지식의 전체성에 대한 이념을 심어주는 데 있다. 이렇게 전체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철학적 사고에 바탕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학문은 철학적이다. 이는 대학에서의 교육이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고, 사전적이고 기계적이지 않으며, 수집에만 몰두하거나 기술적이지만은 않으며, 단편적인 것에 빠져들지 않고, 추구하고 있는 이념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은 직업을 위한 전문교육에도 포함한다. 특별한 직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교육은 이미 알려진 지식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적 사고를 위한 능력을 단련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앞으로 지적이고 학문적인 훈련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다. 대학은 직업교육을 위해서는 단지 기초만을 마련해줄 뿐이며, 그 다음은 실습을 통해서 전문가가 된다.

이와 같이 대학은 전문성을 가르치는 학교임과 동시에 진리를 탐구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전수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에서 전문적 교육과 진리탐구의 학문을 동시에 만족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일반교양과 진리탐구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대학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대학을 특정분야의 교육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 특성화하자는 요구도 대두되고 있다. 대학은 물론이고 학생들도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4.2. 식량

 - 2015 아주대 모의

 

[문제 1-1] [][]를 순서에 따라 연계하여 한편의 완결된 글이 되도록 요약하시오. 글의 분량은 띄어쓰기를 포함하여 400±50자로 할 것(25).

 

[]

대부분 환경에서 식량 부족은 굶주림 곧 기아(飢餓)로 나타난다. 그런데 인간은 영양 섭취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면, 기아로 죽기 전에 다른 이유로 죽는 경우가 많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쉽게 회복될 수 있을 테지만, 기아 상태에 빠지면 저항력이 떨어져서 질병에 쉽게 걸리기 때문에 대개는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약해지면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익사하는 사고를 당하기 쉽고, 건강한 적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기 십상이다. 특히 식량 부족은 특정한 비타민, 특정한 미네랄, 단백질 등의 결핍으로도 나타난다. 특정한 영양소 결핍에 따른 질병의 경우에도 당사자가 해당 영양소의 결핍만으로 사망하기 전에 사고나 폭력 혹은 감염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사망의 근본적인 원인이 제대로 적시되지 않는다.

기아는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이다. 풍요로운 사회에서는 매년 계절과 관계없이 언제든지 손쉽게 식량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요로운 선진국에서도 1년 중 몇 주일간만 구할 수 있는 계절성 식품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식량의 규모는 1년 내내 거의 일정한 편이다. 반면에 소규모의 전통 사회에서는 하루하루를 예측하기 힘들고 풍년과 흉년을 예측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기에 식량은 전통 사회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거의 불변의 주제이다. 예컨대 볼리비아의 시리오노족에게 최대의 관심사는 식량이며, 그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은 내 배가 텅 비었다.”먹을 것 좀 주시오.”이다.

우리와는 달리 전통 사회들, 특히 척박한 환경에 자리 잡은 사회들은 시시때때로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 식량 부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식량 부족이 느닷없이 닥치는 경우가 흔하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 잉여 식량을 저장해두는 전통 사회는 많지 않다. 뜨겁고 습한 기후에 처한 전통 사회의 경우에는 식량이 빨리 상하기 때문에 잉여 식량을 저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목하는 삶을 사는 전통 사회에서는 거처를 이리저리 옮기기 때문에 충분히 저장할 만큼 잉여 식량을 생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잉여 식량은 침략자들에게 빼앗길 위험마저 있다. 전통 사회에서는 좁은 지역에서 식량을 구하기 때문에 늘 식량 부족에 위협으로 시달린다. 그리고 전통 사회에서는 식량을 멀리까지 나르는 자동차, 선박, 항공기는 물론이고 도로, 철로와 같은 운송 수단이 없기 때문에, 기껏해야 가까운 이웃 사회로부터 식량을 구할 수밖에 없다.

전통 사회에서 식량 공급의 상황은, 최단 기간과 최소 공간으로 따지면, 사냥의 성공 여부에 따라 하루하루가 다르다. 식물은 움직이기 않기 때문에 하루 동안 얼마나 채취할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지만 동물은 돌아다니기 때문에 뛰어난 사냥꾼도 어떤 날에는 빈손으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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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리는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사회가 서너 명의 사냥꾼들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살면서 사냥꾼들이 사냥한 짐승을 공유하는 것을 목격했다. 리처드 리는 그 이유가 한 사냥꾼의 들쑥날쑥한 성과를 상쇄하는 데 있음을 알아차렸다. 리처드 리는 쿵족 사회에서 식량을 공유하는 양상을 모든 대륙의 수렵채집 사회로 확대해 일반화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을 가족끼리만 먹지 않는다. 식량은 함께 살아가는 무리, 심지어 30명 이상이 되는 무리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항상 공유한다.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 중 일부만이 매일 숲으로 나가 채집하고 사냥하지만, 사냥한 고기와 채취한 식량은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나눈다. 한마디로 사냥하고 채취하는 무리사회는 공유하는 사회다.”

리처드 리가 수렵채집 사회에서 찾아낸 공유와 공평의 원칙은 소규모 목축 사회와 농경 사회에도 적용된다. 수단의 누에르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에번스 프리처드는 누에르족이 고기, 우유, 물고기, 곡물은 물론이고 심지어 맥주까지 공유한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각 가정마다 자체의 식량을 소유하고 제 각기 식사 준비를 하며 공동체원의 욕구와 관계없이 살아간다. 하지만 여자와 어린아이까지는 아니어도 남자들은 서로 상대의 집에서 식사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보면 공동체 전체가 공동의 식량을 함께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손님을 환대하고 고기와 물고기를 분배하는 관습이 있어서, 식량의 공유는 각자의 소유권의 범위를 넘어서서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

 




 4.3. 역사교육

 - 2014 상명대 수시

 

문제 1) 제시문 ()()에 나타난 두 관점에 대해 차이점을 중심으로 요약하시오. [35, 답안지 8±2] (400자 내외: 300~500)

 

제시문 () :

우리는 거의 매년 봄 일본발 역사교과서 홍역을 치러야 한다. 지금껏 몇 차례인가 되새겨 보니 세기가 바뀌던 무렵부터 거의 연례행사 격이다. 이미 여러 번 그 처방을 강구해 보았건만 증세는 악화일로이다. 역사를 왜곡하는 바이러스는 날로 진화하고 있다. 게다가 이번 상대는 역대 가장 우파로 지목되는 아베 신조 내각이다. 2013년 지금, 다시 시작된 이 바이러스와의 싸움에 직면하여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 것인가?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위안부 문제나 독도 문제 등이 또다시 쟁점화될 것이다. 이에 이러한 현안들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해 나갈지에 관심을 두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대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러한 개별적 현안들보다 그 배후에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작용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이 더욱 중요한 문제점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있다.

최근 일본의 총리인 아베 신조와 집권 자민당의 여러 의원들은 소 위 종군위안부의 강제동원은 없었다.’라는 기본입장을 거듭 강조해 왔고, 이러한 해석이 역사교과서 수정에 반영되지 않았다며 문부과학성 관계자들을 강하게 질타한 바 있다. 또한 일본 역시 핵무기가 사용된 전쟁의 피해자라며 과거의 전범행위를 공공연히 부인하는 것도 이젠 흔한 일이 되었다. 최근에는 군사력의 방어적 사용을 명시한 평화헌법을 수정하겠다며 군국주의적인 야욕까지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상식마저 실종된 채로 정치논리의 괴물만이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인식이 계속해서 판을 친다면 역사학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진실에서 가해자는 가면 뒤로 숨고, 그렇게 남겨진 선량한 피해자들만이 매번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일본 사회 주류의 이러한 역사인식이 지속되는 한,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에 대한 철저한 반성은 요원할 것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독도에 대한 집요한 시비가 멈추는 날도 기대할 수 없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동북아 시대의 평화로운 동반자로 공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일본 사회의 주류가 먼저 솔직한 자기성찰을 통해 왜곡된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일본 스스로가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입장 차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제 나쁜 일본 두들기기에 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나쁜 행위가 인류사회의 공공의 적임을 자각하고 이를 알려나가는 데 힘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분노의 날을 어떻게 하면 더욱 날카롭게 세울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제시문 () :

일본 식민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우리 한국인들이 겪은 경험은 매우 가슴 아프고 잊기 어려운 일이다. 그에 대한 진심어린 성찰을 통해 평화와 신뢰가 정착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한 목소리를 높여 반성을 촉구하는 방법으로는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어렵다. 설령 한국이 일본으로 하여금 식민통치 문제와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등에 대해 그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도록 관철시킨다고 하여도, 과연 한국과 일본이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왜냐하면, 한일 간 역사적 경험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역설적으로 한일 양국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 다시 말해 한일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자국/자 민족 중심주의적인 역사관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역사관 하에서는 자기 민족/국 가의 장구한 역사와 자랑스러운 전통만을 내세우면서 이웃 민족/국가에 대해서는 타자화하고 무시하는 등 적대적인 시각으로 일관하게 된다. 사실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도 중국도, 이러한 역사관을 부지불식간에 내면화해 왔다. 근대 이전의 역사에 있어, 한국의 국사교과서 역시 일본에 대한 한국의 우월한 문화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에 대해 일본이 왜곡이라고 항의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자국/자 민족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과 여기에 기반한 역사연구 및 역사교육이 지속되는 한, 한국과 일본사이의 진정한 화해 및 미래지향적인 관계설정은 요원하다. 서로를 선한 피해자와 악한 가해자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만 바라본다면, 설령 일본이 몇몇 사안에 대해 사과를 하고 한국이 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전히 두 국가 사이의 적대적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며, 언제든지 두 국가 간의 갈등은 반복될 것이다.

결국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악한 가해자 일본선한 피해자 한국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혹시나 우리도,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행위를 정당화해 온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과 맺어 왔던 관계를 일방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찰적 관점이라면 일본의 자국중심적인 시각을 자극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의 자국중심적인 역사인식을 비판하는 일본 내의 양심적 움직임과 신뢰를 공유하며 협력할 수 있고, 그래야만 항구적인 화해공존을 바탕으로 한일 양 국가 간의 진정한 동반자적인 관계가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4.4. 욕망

 - 2015 경희대 모의

 

[ 논제 ] 제시문 [][]의 내용을 욕망을 핵심어로 하여 요약하고, 그 욕망의 유사성을 논하시오. (501자 이상 600자 이하 : 배점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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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면을 처음 먹어 본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다. 하굣길에 읍내 아버지 사무실에 갔다가 사환으로 있던 동네 형을 만났다. 아버지는 안 계셨고 형은 그때 마침 라면을 끓여 도시락과 함께 먹으려는 찰나였다. 꼬불꼬불한 국수 모양이 신기했고 납작한 양은 냄비, 거기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읍내에서 십 리 길 가까운 시골에 사는 내게는 도시적이다 못해 이국적인 느낌마저 불러일으켰다. (중략)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각자 밥을 꽉 눌러 채운 도시락을 하나씩 들고 분식집에 모였다. 그러면 주인은 미리 껍질을 벗겨 놓은 라면을, 역시 미리 스프를 풀어 끓여 놓은 냄비 속에 빠뜨렸다. 그러고는 시큼하고 커다란 단무지 세 쪽 아니면 네 쪽을 접시에 담아 냄비와 함께 가져다주었다. 식탁에 있는 고춧가루를 살짝 풀어 라면과 함께 밥을 말아 먹으면 도서관에서의 한밤까지도 든든했다. 그때 그 라면이 얼마나 맛있었으면 도서관에 남아 공부를 하려고 라면을 먹는지, 라면을 먹으려고 도서관에 남아 있는지 잘 모를 지경이었다. (중략)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라면의 맛을 잃어버렸다. 라면의 종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아졌고 재료 역시 좋아졌지만 내가 찾는 그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동안 나는 초겨울 빈 들에 구하기도 힘든 찌그러진 양은 냄비를 들고 나가 짚으로 라면을 끓여 먹어 보기도 했다. 또 어렵사리 분유 깡통을 구해 젓가락을 넣다가 합선 사고를 내기도 했고 납작한 양은 냄비를 찾아 시장을 헤맨 적도 있다. 여러 사람의 자문을 얻어 이것저것 실험도 해 보았다. 라면을 끓이는 냄비는 성냥불만 닿아도 파르르 반응하도록 얇을수록 좋다. 스프는 미리 찬물에 풀고 그 물을 최대한 오래 끓인 뒤 면을 넣는데 뚜껑은 덮지 말고 면을 섞거나 뒤집지 않는다. 날씨는 추울수록 좋고 끓는 부분과 차가운 대기에 접촉하는 면이 공존해야 한다. 면을 넣은 뒤 최소한의 시간만 익히고 곧 먹어야 한다, 등등. 이런 식으로 한겨울에 마당에서 라면을 끓여 먹다가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은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때와 같은 맛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전에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나는 라면을 먹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을 먹고 싶어 하는 거라고. 무지개를 찾는 소년처럼 헛되이, 저 멀리에서 황홀하게 빛나는 그 시절을 되찾으려는 것이라고.

 

[]

1930년대에 미국 일리노이 주 시서로 시에 소재하고 있던 웨스턴 일렉트릭 사의 호손공장에서는 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 연구는 공장의 조명을 바꾸는 실험으로 시작되었다. 전제되는 이론은 조명이 밝으면 노동자들의 사기가 올라가고 그 결과 생산성이 향상된다는 것이었다. 연구책임자였던 메이요와 그의 연구원들은 비용이 높지 않으면서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수준의 조명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호손의 노동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누어졌다. 한 그룹은 조명의 조도를 높였고 차츰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다른 그룹의 조명은 평상시 조도 그대로였으나 역시 생산성이 향상되었다. 전제되는 이론에 반하는 결과에 의아함을 느낀 연구팀은 이번에는 한 그룹의 조명의 조도를 과감하게 줄였다. 이번에도 이 그룹의 생산성은 향상되었다. 나중에는 이 그룹의 조명을 아주 칙칙할 정도로 낮추었다. 노동자들은 달빛 아래서 일하는 것처럼 압박을 느끼고 짜증을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생산성은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때로는 증가하기까지 했다. 특별히 두 사람의 노동자가 실제 최소한의 조명을 받으면서 아주 작은 방에 고립되었다. 이번에도 그들의 생산성은 감소하지 않고 지난 수준을 유지했다. 연구원들은 이러한 결과에 혼란을 느끼며 그동안 자신들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지 않았나 의아해 하며 연구를 뒤돌아보았다. 연구원들은 경영자와 함께 연구기간 동안 관심을 기울여 두 노동자 그룹을 선발했었다. 연구를 위하여 선택된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경영자가 자신들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에 대한 강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동료와 잘 지내고 싶다는 욕망, 이른바 인간의 결합 본능은 단순히 개인적인 이해와 그럴싸한 경영원칙을 토대로 한 추론의 논리를 쉽게 능가한다.”고 연구책임자 메이요는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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