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또는 함께/어울리며 사랑하며

1987년 아프도록 슬픈 님을 위한 행진곡

New-Mountain(새뫼) 2014. 5. 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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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년이 된 딸에게

 

행복하고 기쁜 글을 남기고 싶지만, 깊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옛 일은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도 그해 여름을 말하고 싶다.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오늘이 아니었으면 평생 글이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글이 되지 않았으면 내 기억에서도 사라졌을 거다. 그래서 다행이다.

 

많이 과거로 가 보자. 87년이었으니까 거의 30년 전의 이야기이다. 아빠는 21살이었으며 대학 3학년이었다. 그리고 그해 5월에 어머니, 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때 참 힘들었다. 어머니가 아프신 건 알았지만, 얼마나 아프셨는지는 알지 못했고, 당연히 그 고통의 과정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임종하기 직전에야 뵐 수 있었을 뿐이다. 대학은 먼 지방에서 있었는데, 어머니는 공부하는데 방해된다고 알리지 말라 하셨다고 한다. 가족들은 그 말을 따랐다. 나는 그런 사정을 몰랐기에 위급하다는 연락을 받기 전전날까지도 만취해 있었다.

그 과정에서의 일을 여기 적으려면 끝이 없을 정도로 나 스스로 비참한 감정만 남게 될 것이어서 차마 적지는 못하겠다.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장례를 치렀다. 울었다. 어머니를 여읜 슬픔으로 울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미움으로 또 울었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에 대해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 상태로 다시 대학으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내 생각했다. 학교를 그만둘까 아니면 휴학을 하고 군대에 갈까?

휴학을 하기로 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렇게 학비가 싸고 졸업 후 취직이 쉬운 대학에 다시 입학하기 어려울 듯싶었던 거다. 그러니까 그때도 아빠는 너무 현실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휴학을 위한 행동을 쉬 옮겨지지 않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모두 기숙사에서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기만 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버리니 휴학이라는 절차 또한 귀찮았고 별 의미가 없었던 거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에 토요일인가 부여 백마강가 신동엽 시비를 찾아갔다. 왜 신동엽 시비였는지는 모른다. 그냥 간 곳이 거기였다. 시비에 담배 한 개비 불붙여 놓았다. 멍청하게 앉아 있다가, 시비에 적힌 신동엽의 시구절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볼 수 없어도'를 읽다가 울컥했다. 참지 못하겠더라. 그냥 울었다. 온종일 울다가 왔다. 그리고는 다시 기숙사에 칩거. 다시 누워 있기.

며칠 후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강의 들으러 가자."

그냥 따라나섰다. 술자리도 몇 번 나갔고, 얼렁뚱땅 리포트도 제출하고, 수업에서 발표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 다니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보름 지나고 나니 휴학은 아예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다.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애써 태연한 척하기에는 학교생활, 친구들과 어울리기처럼 편한 게 없다.

그렇게 며칠 후 새벽, 기숙사에 있던 같은 과 침구들이 방문을 두드렸다. 내 생일이란다. 기숙사 안에서 조촐하게 생일상을 차려 주었다. 물컵 가득 소주를 부어 주기에 받아 마셨다. 노래를 하라기에 노래를 했다. 그러다가 울어버렸다. 친구들은 처음 말리다가 그냥 울어버리라고 나를 두고 가버렸다. 혼자 남아 밤새 울었다.

그리고 곧 방학. 하지만 집에 가기 싫었다. 다들 짐을 싸는데 혼자 기숙사 창가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때 한 녀석이 내게 그랬다. 자기 집에 가자고. 안되어 보였었나. 짐은 기숙사 창고에 대충 넣어두고 따라나섰다. 사양도 하지 않았다. 염치도 없었고, 녀석의 집은 광주 송정리였다. 거기서 하룬가 이틀인가 기식하다가……. 아침을 먹고 녀석이 그랬다.

"우리 망월동이나 갈까?"

망월동, 광주 항쟁, 금남로.

그때까지도 숨어서나 조곤조곤 말하고 들을 수 있었던 금기어였다.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말한 이도 들었던 이도 공권력에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그런 단어였다. 하지만 가자고 했다. 딱히 할 일도 없었지만, 그런 일탈 아닌 일탈도 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 나섰다.

그렇지만 망월동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잘못 타고. 녀석도 망월동 가는 길을 잘 알지 못했다. 광주에서 살았어도 아직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는 것. 가 보고는 싶었지만. 용기가 문제가 되었을 거다. 그날도 그랬다. 버스를 타면 이 버스 망월동 갑니까 하고 물어야 하는데,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하고 어디서 들은 망월동 근처 지명만 웅얼거리니 제대로 망월동을 찾아갈 리가 없는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녀석도 내가 있었으니 망월동에 가려는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몇 시간을 헤맨 끝에 망월동에 도착했다. 원래 입구가 그런 것인지 입구를 잘못 찾아 곁으로 들어온 것인지 몰라도 풀이 길었고, 이슬에 바지가 다 젖었다. 그리고 거기 무덤들이 있었다. 그냥 무덤들이었다. 비석도 없었고, 꽃도 없었다. 어머니가 묻힌 공동묘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썰렁한. 이곳의 지명이 왜 금기어인지, 왜 이곳에 오기가 힘든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아무 무덤 옆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무덤만이 의미가 되어 먼 곳에 묻힌 육친 생각을 하며.

그때. 들었다.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끔 어설프지만, 대학에서 데모란 것도 몇 번 해 보았기에 저 노래가 어떤 노래인지는 알고 있었다. 서로 어깨 걸고 교문을 향해 다다르며 목청껏 부르던 노래. 행진곡이었으며 투쟁가였다. 처절하게 힘찬 노래였다. 그렇게 불러야 하는 노래였다.

하지만 내 귀에 들리는 ‘한평생 나가자는 뜨거운 맹세’는 너무나도 서러웠다. 저렇게 저 노래를 부르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노래가 불리는 곳은 몇 기 건너 한 무덤. 몇몇 젊은 청년들이 무덤 하나를 가운데 두고 예의 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부는 앉았으며, 일부는 섰다. 몇몇은 고개를 숙였고, 누구는 먼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노래를 불러갔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하고 노래 부르기를 마쳤을 때, 내가 그 노래 듣기를 마쳤을 때, 무덤가의 한 청년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청년은 소주를 병째로 들고 네게 왔다.

"학생이오?"

"예."

"와 고맙구만이라. 술 한 잔 하소"

내 말도 듣지 않은 채 우리들의 종이컵 가득 소주를 부었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다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끝까지 기울여 소주를 목구멍으로 흘렸다. 그리고 취기가 올라오기도 전인데도, 왜 눈물이 나던지…….

참으려다 참으려다 못 참아서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왜 여기서 울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친구 녀석은 내 등을 토닥였고, 내 우는 모양을 본 그 청년이 다시 술병을 들고 와 다시 종이컵에 부었다.

"뭔지 몰라도……. 한잔 더 하소."

그 술을 마시고 또 울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남의 무덤 앞에서.

 

하지만 87년의 5월 6월 7월 무렵이었다.

연관이 없는 일들과 일들 사이에서 많이 울었던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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