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먹물에 대한 이야기다. 구태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다. 오십줄에 거의 다다른 작자자가 자신이 이십줄이었을 때 한 참이나 나잇살 먹은 사람들을 비난하며 했던 호칭이 먹물이었다. 그 먹물 얘기를 지금 꺼내려는 것이다. 이러고 보니 먹물이라는 단어는 묵어도 보통 묵은 얘기는 아닐 것이다. 벌써 박물관 구석에서 먼지쓰고 들어앉아 있을 만한 놈이다. 그럼에도 먹물이다. 먹물이 필요한 듯해서다.
먼저 나는 먹물일까?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먹물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진지하게 나는 그 정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자, 이제 정의.
첫째, 어느 정도 가방끈은 길어야 할 것. 예전에 가방끈이라 했으면 대학물 정도였을 거다. 하지만 요즘이야 흔한 것이 대학이니, 이건 정의답지 못한 정의가 될 거다. 어쨌든 대학은 나왔고, 어설프게 시작하고 끝냈지만 그 이상도 다녔으니 이 정의는 충족한 셈이다. 일단 통과.
둘째, 어느 정도 긴 가방끈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그리 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을 것. 그리고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한 편으로는 못마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스스로 합리화시킬 수 있을 것. 이건 정확하게 나와 맞다.
셋째, 나름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불의에 대한 의기일 수도 있고, 못마땅한 세상에 대한 불평일 수도 있음. 그런데 이 두 가지는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게 그거다. 나는 어떤가. 의기도 없고 그렇다고 붚평이 맍지도 않다. 그게 그거다. 그게 그거라는 점만 따지면 먹물이다.
넷째, 적당히 저항적이어야 한다. 술 한잔 들어갔을때 더 두드러져야 한다. 저항이라고 해서 총칼 들드록 맞서 나가는 저하항이 아니다. 탁자를 두드리고 텔레비전을 향하여 주먹을 불끈쥐며 세상의 정의를 외치는 저항이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순응적인 제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가기는 힘들어도 돌아오기는 쉽다, 반은 먹물....
마지막으로, 현실에 대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 실상은 게으름에 기인한 것이지만, 명목은 현실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존심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영 아니다. 게으르기는 하지만,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늘 눌리어 있다.
다시 처음으로. 왜 먹물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먹물이 없어서이다. 가방끈들이야 다들 길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다음부터 답답하다. 대접을 받지 못함에 대한 생각이 없다. 다 자기탓이라던가 혹은 세상의 구조 탓이라던가 그런 확신이 없다. 신념이 없으면 불평이라도 있어야 할 터이지만, 그것마저도 없다. 젊음이란 패기일 터, 거기 맞는 저항도 없다. 그러니 점점 더 먹물이 없는 탁한 세상으로 갈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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