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풀어 읽기/국문산문

나주 임씨의 '병인양난록(병인양난녹)' 전문 현대어풀이

New-Mountain(새뫼) 2022. 8. 12.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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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년양난시 가사라’

- 병인양난녹(丙寅洋亂錄)

 

민치승(閔致升)의 부인 나주 임씨(羅州 林氏, 1818~1879)

이주홍 정리

신영산 옮김

 

 

 

 

1. 이주홍의 ‘뒷골목의 낙서’ 서문

 

나는 이 잡지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고전 문헌 하나를 발표하려 한다. 국문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연구자들이나 및 학생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려니와, 역사가들에게 있어서도 얼마만큼의 얻는 것은 있지 않을까 생각도 된다.

내가 이 문헌을 발견한 것은 1951년의 여름이었다. 여기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 발표했던 수필인 <어사만록> 중에서 말한 바가 있다. 세로로는 칠 촌 반 정도, 가로로는 육 촌 정도의 조선의 종이로 철을 하여 제본으로서, 모두 이십오 쪽이고, 매쪽마다 십일 행 내외로 궁체로 직접 손으로 썼다. 책 표지에는 <병인양난녹>이라 쓰고, 그 밑에 ‘젼’ 자를 넣어 전체가 기록되어 있음을 밝히고, 오른쪽 옆에는 ‘병인십이월긔’라 기록하여 손으로 옮겨 적은 연월까지 적어놓고 있다.

표지 안쪽 면에는 연필로 ‘경주김씨지소저야’라고 적어 넣은 것이 있으니, 이것은 묻지 않아도 후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하다. 아마 집에서 전해오던 책을 보관하고 있던 이가 적어 넣은 듯하다.

이 저작은 병인양요 때의 한 여성의 피난 수기이다.

 

 

2. 집안 내력

 

병인년에 오랑캐에게 당한 어지러운 때의 이야기를 대강 기록하려 하니 심히 처량한지라.

임진년 삼월에 강도 인정면 의곡지명에서 살아온 지 삼십오 년에 이르되, 별 재앙이 없었구나. 시부모님께옵서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두셨고, 아들들은 장가보내고 딸들도 시집을 잘 보내었으니, 모두가 가문을 빛내며 잘살고 있었지. 집안에서 과거를 보아 수십 번이나 급제하였으며, 살림이 구차하지 않았고, 또한 시부모님 두 분께옵서도 덕이 크고도 훌륭하셔서 귀한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대접을 마음과 힘을 다하셨다네. 서울이든 시골이든 사람들이 칭송하였고, 넉넉하지 않아도 넉넉하게 대접한다는 명성이 한없이 났었다네.

남편과 여러 아주버님들의 효성과 형제 간에 사랑하는 정이 남들보다 뛰어났기에, 마흔이 넘어 중년이 지나셨으나, 분가하기를 괴로이 여기셨지. 한 자리에 모이셔서 숙식을 같이 매일매일 담소하며 지내셨으니, 시부모님 두 분이 누리는 복을 서울과 시골 사람들이 칭찬하고, 흠모하여 높이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네.

 

 

3. 프랑스 이양선의 출현

 

그러다가 천만뜻밖에 국운이 불행하여, 병인년 칠월 초구 일에 문득 양선 하나가 와 닿으니, 그곳이 월곶이라. 온 고을이 놀라 움직이고, 삼영이 크게 놀라, 나라에 급히 아뢰니, 주상께서 또한 크게 놀라시어 통사관을 내려보내셨지. 왜 왔는지를 물으니, 양인이 대답하되,

“경성에 가서 임금을 보고, 남종삼을 죽인 이유를 묻고, 또한 나라 사이의 무역을 우리들이 우선하여 하려 하노라.”

하였다네.

“타국 사람이 어찌 그리하겠는가?”

하고 막으니, 대답이,

“아국이나, 귀국이나 백성은 일반이라.”

하며, 한사코 주장을 하였다네. 이때 박희경이가 덕산의 중군으로 몸이 바다에 나갔다가, 중군의 자격으로 통사관과 같이 가서 수작하고 달래기를,

“여기서 경성이 수천 리가 되니 못간다.”

하니, 양인이 망원경을 내어놓고 보이며

“속이지 마라.”

하고 크게 웃었다네. 나중에 하는 말이,

“조선국의 물자를 서로 통하여 사고팔 수 있게 강화 땅을 정하여 달라.”

하니, 즉시 주상께 고하였더라. 주상께서 난처하게 헤아리시다 허락하시는 하되,

“천자의 교지가 없으니 어렵다.”

하시며,

“중국에 가서 다녀온 뒤에 교지를 받고 허락하마.”

하시는, 전교를 전하였지. 이에 양인이 이르기를,

“그것은 걱정 말라. 우리는 한 달이면 중국에 갔다가 다녀오기에, 구월에는 교지를 맡아 오려니와, 조선에서 가면 내년 이삼 월에나 올 터이니, 우리가 가서 한 달 내로 다녀오마.”

하고, 크게 기뻐였더라. 또 이르기를,

“우리들은 큰 바다를 건너온 대영국 사람과 청나라 사람으로 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

하는데, 온 사람 수는 백여 명인데, 배 안의 치장과 병기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청나라 사람도 여러 명이 아니었더라. 청나라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통사관에게 은근하게 글을 적어 주었는데, 글에서 이르기를,

‘타국에서 조선국을 끔찍이 어렵게 여기고 있음을 아는데, 어찌 허술하게 허락하려 하느냐?’

하였고, 크게 꾸짖으며,

‘그리 말라.’

하고,

‘우리는 청나라 사람인데 이놈들한테 잡히어 다니노라.’

하였는데, 이 글이 적힌 것을 보고 통사관이 감추고 발설하지 않아, 주상을 속였다더라.

이때 양인이 허락을 구하면서 선물을 청하니, 외참외와 숭어와 계란을 주니 좋아하며, 저희는 유리병과 무엇인지를 모르는 여러 물건을 정표로 주고 이르기를,

“우리 배는 아무 탈이 없으나, 이 뒤에 화선이 올 것이니 조심하라.”

하니, 그 배가 오는 물으니,

“천주교를 포교하러 다니는 배라.”

하니,

“그러면 막아 달라.”

하였더니,

“그리 하마.”

하고 거듭거듭 인사하고 떠났다더라.

배 몰골은 상어 같이 생겼으며 길고 산더미같이 크고, 돛대만 두 개가 서고, 가운데 굴뚝 있어 노 젓는 일이 하나도 없고, 굴뚝에 연기 피우며 화살 가듯 가니, 들어온 지 육일 만에 나가더라.

 

이때쯤에 그 배가 들어올 때 교동에 먼저 와 잠깐 서 있다가 강화로 오니, 강화에서 장계가 먼저 들어갔으니, 교동 수사가 미처 장계하지 못한 죄로 파직당하고, 죄를 받았다더라.

또 뱃놈 중에 장단에 살던 놈이 양인에게 기이한 물건을 받고, 길을 가르쳐주어 강화로 들여보낸 죄목으로, 큰 군법으로 강화에서 죽였는지라.

 

 

4. 프랑스 배의 한양 침략

 

이때 큰 환란이 있을 줄 알았으나, 잠시나마 안정이 되었더니. 과연 팔월 십이일부터 양선이 오는데, 처음에서 평안도에서부터 난리를 일으키며 오더니, 이날 초지진과 황뫼의 경계쯤에 무수하게 와 섰다 하더라.

그리고는 두 척만 먼저 터진개를 향하여 연기를 피우며 화살 날아가듯 가니, 그날에 풍덕에 머물다가 서울로 치달아 가니, 강화에서는 군사들은 마구 뽑아 길목을 지키게 하였더라. 그러니 집집마다 곡소리가 낭자하였고, 대포 놓는 소리와 대완구 소리가 산천이 무너지는 듯 때때로 들리니, 정신이 아득하고 허둥거리기만 하였더라.

양선들이 벌써 가서 서울의 검은돌에 가 서니, 주상께서 크게 놀라 얼굴빛이 상하셨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군문의 군사들을 일으키어 치려 하니, 군사들이 용맹이 하나도 없어 한 번도 치지 못하고 헛되이 총을 쏘았으니, 지저분하고 졸렬하기만 하였더라.

그런데 양인들이 무슨 뜻인지 크고 작은 배 두 척을 향하여 대완구를 쏘면서, 배 안의 사람들에게 다 내리라 하고 배만 치니, 사람은 하나도 다치지 아니하였더라. 저들은 용맹함과 어진 마음만 자랑하고 도로 내려와 느릿느릿 터진개로 지나치더니, 배들과 장수들이 있는 곳인 초지진과 황뫼로 의논이라도 하려는지 가더라.

경성에서는 어언 간에 온 장안이 모두 피난을 간다 하고 성문이 닫히기 전에 급히 나오니, 가난한 집 부인들은 종도 없이 가마꾼만 데리고 나가다가 가마가 짓밀렸으니, 급히 나와 잠시 쉬다 보면 바꾸어 메고 가는 이가 무수하였더라. 재상집이며 여염집에서 모두가 집안 살림을 버리고 모두 도망하였더라.

이때 큰딸아이의 시가인 김참판 댁은 용인으로 간다 하고 십여 일 전에 떠났으니, 자식을 다시 못 볼 듯 슬픈 마음을 금하지 못하였더라. 둘째 아주버님은 벼슬에 매여 있어 성안에 계셨으니, 이런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죽고 사는 일을 도모하지 못하고, 나라에 매여 계셨다. 이에 두 분 노친네께서 지나치게 슬퍼하시니 일마다 두려워하셨더라.

 

큰 환란이 이때 있었으나, 양선이 잠깐 물러섰기에, 장조카 부만의 혼사를 죽산의 안영장 집에서 하기로 미리 정하였지만 공교롭게도 못 지냈더니, 다시 잡아 정한 날을 어기지 못하고 팔월 이십 팔일에 죽산으로 보냈더라. 먼저 저의 부친께 서신을 보내며 혼인에 필요한 여러 물건을 차려 다 보내게 하고 여러 날을 보냈는데, 이날이 구월 초육일이라.

 

 

5. 프랑스 함대의 강화 상륙과 약탈

 

그러다가 마침내 양선 여섯 척이 도로 그리로 올라와, 터진개 앞을 덮으며 올라왔는데, 강도의 군사와 삼영에서 아무것도 할 줄을 몰랐더라. 이윽고 서양인들이 갑곶에 가서 땅에 내린 뒤에 한 곳에 진을 치고 모이니, 위풍이 늠름하였더라.

그리고 강화 관아와 삼영을 침노하니, 유수 이인교가 당하지 못할 줄 알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백성들과 같이 섞이어 동정을 살피다가, 하릴없이 도장을 들고나와 통곡하며 빠져 도망하였더라. 삼관이 모두 그리되니 서양인이 더욱 거리낌이 없게 된 것이라.

양인들이 강화 본읍을 아주 차지하고 제멋대로 다니면서 중영만 남기고, 상교청과 관사며 대궐과 창고며 모두 불 지르니, 불꽃이 하늘을 찔렀더라. 이때 교관 황호덕이 급함을 보고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도망가더라.

읍 안에서 수만금을 가진 부자들을 골라 재물을 빼앗았고, 집까지 불을 놓으니, 도망한 자 그 수를 알 수 없었더라. 남동 이 참판의 손자 이철주도 거기에서 살았는데, 비록 가난했지만 좋은 집에서 세간을 치장하는 것이 찬란하더니, 급한 지경이 되니 다 버리고 부인네들이 총각인 체하고 손목을 맞잡고 도망하였더라.

그 집도 불을 놓고 세간을 다 부수고, 마을마다 떼 지어 다니며 여인을 욕보이고, 세간 물건을 탈취하였는데, 남자들 옷과 쇠붙이와 돈이며 양식을 빼앗아 갔더라. 소 잡기와 닭을 더 좋아했으니, 집 문을 잠그고 도망친 집은 다 부수었고, 혹 불도 질렀더라. 주인이 집에 있어 대접하고 닭까지 잡아주는 자가 있으면 주인을 칭찬하며, 그리하면 그 집 물건은 가져가는 것이 없었더라.

제각기 살기를 구하여 겁을 내어 두려워했으니, 어느 누구라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할 자 있었으리오. 슬프다. 윤리와 기강이 모두 상하였고, 마음이 음흉한 백성들도 노략질을 하며 양인과 같이 다니더라. 양인들은 노략질한 짐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지게 하여, 잘 져다 주면 삯전을 후하게 주고, 상을 차려 주어 포식을 시켜 보내니, 삯짐 지기 자원하는 자 무수하였더라.

양인들이 여인을 보는 족족 욕을 뵈니, 상민 계집은 얼마나 당했는지 수를 모르나, 사대부가 황이천 집 부인과 동리 양반 심선달 부인 둘이 욕을 보았다 하였으니, 죽고 사는 일이 시각에 달렸더라.

 

 

6. 난리를 피해 피난하기로 결심함

 

이때 양인들이 전등사를 치러 간다 하니, 전등사 가는 길은 우리 집 문 앞이라. 날마다 지난다는 소리뿐이니, 이런 어지러운 때를 당하는 것은 지금 우리 집뿐인 듯하더라. 목숨이 붙은 것이 우환이나, 다만 자식과 손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노친을 생각하니, 눈앞이 막히더라.

이 가운데 급한 환란을 면하자 하고, 앞 남산의 솔밭에 사흘 동안 낮이면 숨고, 밤이면 집에서 지내다가, 점점 급한 근심의 시각이 다가오니 모면할 계책이 망연하였더라. 깊은 한 꾀를 내었는데, 후원 산밑에 구덩이를 밤에 파고, 삼일을 땅속에서 있게 되니, 이때의 정경을 어디에 비할 수 있었으리오.

이때 철없는 아이들은 들끓으며, 양인들이 자기들 배로 들어간다고 소리를 지르더라. 조급한 심사와 두려운 마음을 거두어 황혼 녘에 집에 들어와 모두 모이어 저녁을 하고 앉으니 이날은 십 일이라.

그 동리의 소임 하나가 밖에 와 알리되, 나라에서 강도의 백성들이 모두 양국에 붙었다 함을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사 군대를 일으켜 강화의 백성부터 멸하라고 전교를 내리셨다 하더라. 이날 밤에 이 말을 듣고 대체 정신이 아득하고 이 한 몸이 떨려 혼이라도 날려 통곡이 낭자하고 허둥지둥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 중에, 의논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다가, 아무쪼록 강도 밖으로 나서기를 원하나, 어려운 때에 어디를 향하여 배를 타리오.

 

사방의 길목에 모두 양선이 진을 쳤되, 서해가 트였다는 말이 들리니, 그제야 계집종의 남편인 귀탁을 불러 이르되,

“밤에 다니며 동정을 탐문하여 보고, 사곡의 이판서 댁에 가 이렇게 어지러운 일이 일어나게 된 연유를 다 가서 여쭙고 서간을 드리라.”

하니, 귀탁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탐지하고, 이판서 댁에 가 서간을 드리며 연유를 다 고하였더라. 그 집에서도 도망하려는 중에, 이 기별을 듣고 반겨 하며 같이 피난 가려 하자면서, 즉시 사공을 불러 엄히 분부하고 조용히 달랬더라.

처음에는 사공이 은을 주어도 응하지 아니할 듯하더니, 차차 달래어 배 세 척을 잡으니 뱃삯이 매우 높게 오른지라. 뱃삯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아니하고 달라는 대로 정하여 잡고 돌아와 보니, 이제는 눈에 여유가 뵈는 듯하여, 빠져나오기를 마음 조이며 바랬더라.

셋째 아주버님이 이판서의 집에 가 보니, 피차 정분이 있게 사는 터라. 아주버님을 보시고 반겨 하시며, 같이 가서 어디가 되던지 죽고 살기는 함께 도모하자 하시기에 언약하고 오셨더라.

 

 

7. 강화를 떠나기 위해 배에 오름

 

이때 황혼 무렵에 급히 짐을 꾸렸는데, 대강 양식 가마니인지 하고 의복 가지 겨우 가리어 싸고, 살림은 모두 흩어버렸다네. 구백흥이라 하는 사람에게 땅굴과 집을 맡기고 십일 일 밤에 떠났는데, 남자들은 지고 여자들은 이고 하여 사곡 이십 리를 걸어 나왔지. 달빛이 밝게 비취는데 대완구 소리가 이어져 들리니, 등신들만 걸어가는 듯해 더욱 혼이 다 떠나는 듯하였다네.

두 분 노친네를 가마에 뫼시고, 아이들은 더러 가마에 태우기도 하고, 업기도 하며, 종들도 제 자식들을 업고 안고 하여,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지경으로 사곡을 나오게 되었지. 이판서 댁의 덕분으로 갯가에 집을 잡았으니, 거기에서 그날 밤 지내며 드러누웠다네.

그날 이판서 댁에서도 자기 집 사당의 신주를 땅에 묻었느니, 이판서와 그 집안이 통곡하고 집안이 경황이 없어 하면서도 그 밤에 음식하여 오고 찬거리 십여 개를 가져왔다네. 우선 반찬으로 하여 그 밤을 거기에서 머물렀지.

 

다음 날은 십이 일이라. 석양에 배 타려 하는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혼잡하여 피난 가는 사람들의 들끓는 소리가 천지에 드높았지. 너른 갯벌에 가득한 사람들이 제가끔 살기를 구하며,

“어디를 가면 살겠느냐?”

하는 소리 넘치고, 배 돛대 강변의 별 걸리듯 하였지.

사당의 위패를 모시고 노친네와 많은 식솔들이며, 노비들의 식솔들까지, 모두 육십여 명이라. 이웃하여 살던 이생원 집도 같이 나오니 십여 명 식솔이며, 이판서 집 식솔들까지 거의 이십 명이더라. 모두 거느리고 종일 마니산 아래의 소나무를 의지하여 밀물 때를 기다렸다네.

노을빛이 나기를 기다려 어두워진 후에야 배 위에 올라가 잠시나마 앉았는데, 너무 사람과 짐이 너무 많아 배 가라앉겠다고 사공이 성화를 냈네. 애를 써서 이생원 집은 또 다른 배 하나를 간신히 더 잡아주어 그 집과 종들을 나누어 타고 떠났다네.

이판서의 이름은 이시원이라. 충성스러움과 효성이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었고, 정직한 군자로 이 시대에 뛰어나 이름을 얻은 사람이라. 다만 그 식구들과 자손들을 구하려 우리 집에 부탁하여 어느 섬보다 나은 섬으로 피난 보내고, 자기는 스스로 아우 집에 떨어져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마음을 두었으니, 그 뜻을 뉘 알았으리오. 그 아들 이상학이 전혀 모르고 우리와 같이 왔는지라.

 

 

8. 시도와 신도에 머묾

 

살섬으로 와 이날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바닷속을 관망하니 산더미 같은 크고 작은 배들이 좌우로 벌려 섰고, 밀물과 썰물이 들락날락하니 더욱 처량했지. 무수한 배들이 왕래하는 것이 육지와 같은데, 이양선이 좌우로 끼어드는 듯하니 배에서의 요란한 소동은 육지보다 더 했다네.

살섬에서 피난할 의사를 두고 유의하여 형세를 살폈는데, 쌀 실은 배 한 척이 오니 이 배는 우리 동네의 홍생원이 쌀을 싣고 오는 배였지.

그런데 살섬의 인심이 괴이하고, 불측한 백성들은 흉측한 뜻을 품었다네. 수십여 명이 몰려나와, 홍생원 부자에게 욕을 잔생이 뵈고 결박하려 하며 모두 탈취하려 하더니, 어찌 생각하고 얼마쯤만 빼앗아 갔지.

홍생원이 하는 말이, 전쟁이 끝나게 되면 값을 주겠다고 하고 빼앗아 갔다고 했다네. 이 거동을 직접 목격하여 보니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였다네.

우리들이 탄 배는 감히 범접하려는 마음을 먹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민진사 셋째 아들 의곡댁의 배인가’하고 서로 일컬으며 부끄러워하는 눈치가 분명하였다고 하더라.

이는 시부모님의 밝으신 성품이나 지혜와 어진 성덕으로 인심 얻으신 덕택이라. 이 섬 인심이 괴이하여 피난을 여기에서는 못한다 하고, 황해도로 향하여 농장이 있는 데로 가려는 생각을 하였지.

도로 건들로 들어가 이판서를 뵙고 서로 의논하여 모시고 나오려 하고, 도로 강도의 건들로 들어가니, 이때 이판서 벌써 일이 돌아감이 그리될 줄 알고, 도로 배 들어올 줄 알고 나루터에 하인을 내보내어 기다리더라. 그런 일을 보아도 지혜가 분명하고 남들이 칭찬함이 공연함이 아닌 듯하니, 정녕 그러하셨지.

도로 들어왔음을 가 고했더니, 이판서 친히 나와 보고 슬퍼하며 시부모님께 부탁하며 이르기를,

“나는 이제는 죽는 사람이니, 내 후손들이나 잘 구하여 달라.”

하시고,

“나는 상소 지어 나라에 내 조카에게 주어 경성으로 보냈노라.”

하셨다네. 또,

“유서를 지어 자손에게 지어 놓고, 형제와 죽으려 하노라.”

하시니, 팔십 노인이 흰 수염을 붙이고 나오셔서, 이런 유언을 하니 돌이나 나무인들 감동하고 슬프지 않으리오.

이 도사와 그 식솔들이 모두 그제야 부친이 하신 말을 비로소 알고, 천지가 무너지는 듯 당황하였으니, 어찌할 수 없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황황이 굴다가, 하릴없어 속절없이 들어가게 되었지. 이도사 댁이 아들 삼형제와 딸린 식구들과 작별하니 그 집 정경이 불쌍하여 차마 눈으로 보지 못하겠더라. 슬피 이별하여 눈물 자국을 지우고 들어가더라.

 

신도 섬에 이날 내려와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아침 밖을 보니 해변 산기슭에 몇 간의 작고 초라한 집이 있었지. 강화부에서 경력을 하는 윤수라 하는 이가 도망하여 와 있었는데, 경력도 도망왔다고 하며 불쌍하다 하였네.

윤수와 고생을 같이 겪는 여덟 살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홍역을 앓고 있었다네. 집에서 열이 나는 것을 데리고 나와, 늦게까지 한데에서 잠을 재우고, 찬 곳에서 바람을 쐬니, 살갗에 발그레한 부스럼이 잘 가라앉고, 성한 아이 같이 일어나 앉더구나. 명을 이겨내는 듯 신통하여 차마 기특한지라.

노비 중에 순애와 순단이는 정이 없다고. 제 자식들을 훈계하더라. 자식들이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고, 농사지은 것이나 찾아 먹겠다고 하며, 죽기로 기를 쓰고 강화로 돌아갔지. 생사를 서로 모르고 주인과 노비가 이별하니, 배 위에서 하직하는 소리 목이 메었지. 들어가게 되니 슬프고 비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며 산꼭대기에서 바라보았네. 잠들려는 하는 새는 날아들고, 바닷속에 들리나니 물소리니, 종들도 슬퍼함이 이와 같으니 슬픈 마음을 도왔더라.

 

이날은 십육 일이니 신도섬을 떠나 진염으로 오니, 이판서 집에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이었던, 김사진이라 하는 사람이 살고 있더라. 각별히 대접하고 여러 바깥 양반들에게 진귀한 음식으로 상을 하여 드렸지.

“홍역을 앓는 아이도 데리고 들어와 쉬소서.”

하더라. 또 김경률이라 하는 사람은 친한 사람인데, 섬에서 나올 때 아무도 없는 시절에 짐 한 짝 도울 자가 없더니, 김경률이 짐을 여러 바리 실어 내고 힘을 썼지. 제 식솔도 그 집 배에 올라 같이 오려 하더니, 우리 노비들이 들어갈 때 같이 되돌아 들어갔네. 자기 사촌이 진염에 산다 하고 집을 말해 주었는데, 이 사람도 김사진이와 같이 각별히 대접하며,

“홍역하는 아기를 데려와 쉬소서.”

하니, 이 중에 대접하는 자의 은혜가 적지 아니하였네.

 

 

9. 평산으로 배를 타고 떠남

 

밀물이 늦어가니 석양으로 노를 저어 큰 바다로 향하는데, 이때 양선 때문에 네 길목이 막혔지. 겨우 서해로 빠져나오니 점점 노을 색이 나는데, 서해를 지나며, 교동도 가는 길목을 넘어 보려 위를 바라볼 즈음에, 매일매일 좋던 날씨가 하루 저녁 사이에 변하여 풍랑이 일어나며, 끝없는 큰 바다에 파도는 천지에 뒤높고, 검은 구름은 푸른 하늘을 가리니 천지가 망망하여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였다네. 그러는 중에 간간이 묽은 비가 떨어져 자주 떨어지며 풍랑이 점점 크게 일어나려 하니, 사공이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고 어지러이 겁을 내니, 끝없는 큰 바다에 이를 어찌하였겠는가.

다만 하늘을 우러러 탄식할 뿐이오, 다 죽은 사람같이 숨도 크게 못 쉬고 서로를 바라보면서 죄목이 있고 없음을 생각할 따름이었네.

 

하지만 하늘의 덕이 가득하여 이윽고 확연히 운무가 흩어지고 달빛이 차차 나며, 명랑하고 간간이 순풍이 되어 화살 가듯 하였네. 산봉우리가 육지의 틈을 지나가듯 어지러움이 물러가니 벌써 삼경에 이르러 거의 다 오게 되었으니 자루개가 이십 리라.

사공이 그리하며 참물 때에 서니, 조금은 살 듯했네. 또 그날을 넘겨 다음 날은 십팔 일이라. 거기에서 종일을 지내고 황혼에 노를 저어 자루개를 향하였지. 사공이 길이 서투르고 황혼이 점점 나니, 어서어서 갈 마음으로 미처 물이 차오르지 않았을 때, 노를 젓다가 해초 사이에 걸렸다네.

 

배가 반이나 기울어지니 사공의 기겁하는 소리 진동하고. 배 위의 사람 모두 기절할 듯하며, 구멍으로 빠져드는 듯하여 파리 목숨 같아서 죽기를 기다렸지.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있음이라, 잠깐 지나 배가 도로 서니, 모두 숨을 쉬고 정신을 차려 분간하며 순풍에 돛을 달았다네.

잠시 간에 거의 다 오니 평산의 일은 아주 전혀 모르고 오게 되었다네. 곁에 지나는 배를 보고 이 고을 난리 난 일을 물으니, 답하기를,

“평산과 금천에서 군사 거의 다 뽑고 군사를 실으려 배를 잡는데, 그 명이 지엄하다.”

하니, 사공이 그제야 말을 듣고서 크게 놀라며 울려 하면서,

“아무렇게나 하던지 되는 대로 뭍에 내리소서.”

하며 기를 쓰니, 급한 중에 짐 한 짝 어찌할 수 없었다네. 이곳의 소동은 요란하게 더해가니, 일 돌아가는 형세가 난처하여 헤아려도 하릴없어 방게라 하는 개포를 찾아가자 하니 거기에서 오십 리라.

거기 이생원 집 하나 있으니 시어머님의 아우님 댁이라. 아우님은 작고하시고 남동생과 조카딸이 하나 있으나, 멀리 살기에 자주 연락도 못하고 지냈더라. 이날 삼경에 그 집의 가 셋째 아주버님이 사정을 말하니, 거기에서 놀라고 말을 하여 강가의 집을 잡아주었다네. 즉시 내려 그 집으로 들어가니 더욱 한심하였지. 와 들으니 군사 거의 다 뽑혔으니, 군사 뽑혀간 백성의 집들에서 우는 소리 낭자하고, 도둑맞은 이도 많고 산골짜기로 피난한 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더라.

 

본관의 평산 부사는 시누이의 시당숙 홍신규라. 그 전에 돕는 일이 많더니 이때를 당하여 강화로 행군할 새 자다가도 슬퍼하며 군사를 끔찍이 아껴 자주 먹이며 자상히 사랑하였지. 지위와 명령이 엄숙하고 위엄하고 정중하니, 온 고을이 다 명관을 만나 살겠도다 하고 일컫었네.

요란한 소동은 끔찍하고 방게에서 이틀을 묵었는데, 그 집에서 음식도 하여 오고 각별하게 대접하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였네.

 

 

10. 평산에 도착하여 머묾

 

이십 일에 넷째 아주버님이 용두 구기에서 들어와 혼자 모두 다 물에서 나오고 고생한 이야기를 하니, 다 놀라고 반기었지.

이곳에서는 강화가 함몰된 줄 알고 또한 헛소문이 났다 하데. 우리가 떠나지도 않았는데, 민진사 댁과 이판서 댁이 피난길에 올랐다가 난리를 만나서 배 타고 오다가, 송도에서 내렸다는 헛소문이 일었다더라. 배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멈추었다고 하니 백모께서 와 온 집안이 놀라시고 노비들이 급히 마중 나갔으나, 헛소문이라 하니 그만 돌아서 들어 왔다고 하였지.

 

그때 대진과 용철이라 하는 하인 둘이 강화를 향하여 강도 근처까지 갔다가 들어가지는 못하였으나, 거처나 알고 오려고 떠났다더라. 이때 방게에 와서 내렸다 하는 소문을 용두에서 듣고, 또 헛말이라 하다가 이날 나온다는 것을 알았으니, 헛소문이 어찌 이와 같이 미리 났으니 신출귀몰함을 다 일컫더라.

그날 밤으로 이생원 댁에서 주선하여 소와 말 삼십 필을 내오고, 노비들은 소와 말보다 더 많았고, 가마가 여섯이 나왔으며, 당질 도경 선경 형제가 나왔으니, 모두 반김이 무궁하더라.

이날은 이십 일이라. 구기에서 일가가 연속하여 늘어서 들어오니, 가는 길을 눈여겨 자세히 보았다 하더라.

 

그 다음에 백부댁에 먼저 들어오니, 팔순이 되신 백모님을 다시 뵙고 동 항렬의 형제들이며, 그 지어미나 지아비들은 만나보니 피차 반김이 측량 없더라. 수십 번이나 다시 정회를 베푸나, 백부와 사촌 형제 삼형제 분이 다 돌아가셨으니, 대청에 반듯이 앉으셔서 반기시던 목소리와 모습이 아직도 또렷한 듯하여 몹시도 슬픈 마음이 끊이지 않더라.

이곳은 평산 서봉면 용두라. 민씨 집안의 오륙 대가 대대로 이어오는 집안의 터라. 들은 넓고 과수 나무는 깊고 그윽하며 산천이 수려하니, 백여 호의 큰 마을이되, 하나도 다른 성씨는 없고 모두 민씨 성을 가진 마을이고, 유명한 명승지로 일컫는 곳이라. 집집마다 부유하고 정문(旌門)도 선 집이 있고, 벼슬하는 이도 많았지. 난리 중에도 도적 떼가 들어오지 못한다 하더라.

 

다음 날은 이십이 일이라.

수많은 일가 식구들이 하인들이 상하와 노소 없이 모두 다 모이니,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 길 없고, 불행 중에 무사히 나옴을 일컬어 복력이 좋으시다 하고 모두 일컫더라.

계집종 중에 춘례와 춘애가 나이 많아 과하게 늙었으되, 이십 리를 마주 나와 보고, 순업도 나와 반김을 헤아릴 수 없고, 백부댁의 계집종이라 하는 이며, 고모 댁의 계집종인 복매도 나이 많고, 옛날 종이라 못내 반겨 하더라. 그중에 춘례는 심지가 슬기롭고 환히 통하는 바가 있는지라.

미친 듯이 기뻐하여 상전을 만나는 일이 많으니, 강도로 짐을 옮겨 이사할 때, 춘례가 마음에 들어 하더니, 이때 도로 옛집에 들어가려 한즉 속마음에 꺼린다 하여 못 들어가더라. 결국 신생원 집을 빌려 들어갔는데, 그 집은 일가붙이도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양순하기로 정하였더니 난리 중에 그 집은 어떠했는가.

몇 간의 작은 집이라 비좁아도 어쩔 수가 없고, 비록 고향이라 하나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라. 스산한 가운데 시절은 처음부터 끝까지 위태롭고 이때 편히 앉아 있을 수도 없으니, 머물러 있는 것이 심란하여 강화에서 살던 일은 지난 일 같으니 세상사를 어찌 재어 헤아리리오.

 

 

11. 흩어진 가족을 그리워함

 

여기 와 집집이 다 음식과 반찬이며 각각으로 정으로 대접하니 받아먹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더라. 지난 일을 역역히 생각해보니, 갑자년에 둘째 딸이 이직각 집에서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당하여 흉한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마음 상한 마음을 비길 데 없으나, 겨우 억제하여 가더니, 졸지에 장녀의 김 집까지 멀리 떠나가 더욱 소식도 들을 수 없으니 처량한 마음뿐이더라.

본가로 돌아갈 생각하니, 거기에는 노친네 계시옵고, 동생 형제 장조카 있어 다 번성하니 다른 염려 없으나, 조모께서 연세 지긋한 노친네로 계시오니, 이러나저러나 슬픈 느낌의 마음이 들며, 문안드린 지 오래이니 일마다 한심하더라.

 

맏시누이 댁에서 삼척 부사로 계셔 이때 모두 집안 식구를 데려가셔서 그곳에 가 계시니, 그 고을은 천여 리의 높고 가파른 고개를 넘는 산골짜기라. 임의로 내왕을 못하니 기별이 아득한지라. 형제지간에 지극히 길고 오랜 시간 동안 십 년간 함께 지내며, 형제간에 우애의 정이, 서로 남에 없고, 생각하는 마음이 자상하고 인자하시기로, 내소사 의논을 서로 하며 지내더니, 졸지에 멀리 갈리니 고적하고 처량하더라,

셋째 아주버님은 자녀 데리고 방게에서 손을 나누어, 율동의 며느리 보러 근친 가 계신 곳에 가니, 조카며느리의 본가는 정서방 집이라. 인심이 후덕하여 사돈에게 집을 정하여 주며 일용품을 덜어 나누어 주니, 비로소 세간살이가 되니 심히 섭섭하더라.

장조카를 난리 중에 죽산으로 떨어져 보내고 와 피차 죽고 삶을 모르니, 노친네께옵서 더욱 슬퍼하시고, 둘째 아드님 생각을 과도히 하시더니, 전쟁이 끝난 뒤에 둘째 아주버님 내려와 뵈오니, 저승에 갔다 다시 만난 것이 중하여, 한편으로는 슬프고 또 한편으로는 신기함을 이기지 못하더라.

 

 

12. 그 후의 이야기들

 

둘째 아주버님은 십여 일을 묶다가 경성으로 가셨노라.

강화로 들어오며 즉시 아이들의 홍역을 남녀 없이 치료하려 하였노라.

장조카 부만은 어지러운 때에 급하게 용인의 사촌누이 집으로 갔더라. 거기의 사촌매부 김상현이라 하는 이는 남의 사위지만, 사람됨이 활발하고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이었지. 아내의 사촌 아우의 혼례식에 쓸 제구를 다 준비하여 친히 데리고 가서 예식을 치르고, 삼일 묵게 한 후에, 도로 자기 집으로 돌아와 홍역을 거기에서 치료하고, 원기가 회복된 후에 올려보내니 인품이 남다른 사람이었다네.

여하튼 천성이 극히 착하며 효성스럽고 유순하며 아름다운 사람이요. 또 사위가 이같이 매사에 무던히 얌전하니 다른 염려 없으나, 삼십이 넘도록 아이를 갖지 못하니 조물주의 시기 탓인 양 원통한지라.

이판서 말미암아, 그때 배 위에 유언하고 들어가 즉시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만고의 드문 일이라. 나라에서 홍살문을 내리고 그 손자인 이건창이 십오 세에 도과에서 급제하여 벼슬을 받으셨더라.

 

 

13. 강화를 지켜낸 양헌수의 공적

 

이때 양헌수라 하는 사람이 순무중군으로 있었으니, 양인이 치기 시작하여 한 달 남짓 이르되, 나라를 지킬 장수가 없음을 보고, 분기를 견디지 못하여 자원하여 내달았더라. 부원수는 공연히 딴 의심만 하고 행여 양헌수가 서양인의 편 될까 의심하였더라.

양헌수가 군중에 이르되,

“너희 자원 군사 있거든 나서라.”

하니, 평안도 군사 오백 명은 본대 자원 군사로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는지라. 경군도 몇 명인가 자원하고 나서는 군사 많으니, 일시의 신임을 받아 강화로 행군할 때, 평안도 포수들을 앞장을 세웠더라. 경군들이 뒤를 쫓아오는데, 평안도 군사들이 크게 화를 내며,

“너희는 주인이요, 우리는 손인데, 어째서 우리들을 앞에 세우느냐? 너희는 나랏일에 꾀만 부리니 큰 역적이라,”

하고, 경군을 다 죽이려 하니, 경군이 간신이 빌어 화친하고 군대를 일으켜 강화로 행군하매, 광성진에 숨었다가 밤에 건너갔더라. 전등사에 가서 진을 치고 모였는데, 그 절에 중이 모두 다 도망하고 늙은 중 하나가 남아있다가 다가와 이르되,

“어제 양인이 여기에 와 닥치고 재물을 탈취하여 갔었는데, 명일 또 온다 하나이다.”

하니, 그때부터 용맹 있는 군사로 갈라서 총에 화약을 장전하고 기다리더라. 이날은 시월 초사일이라.

 

양인이 과연 전등사 노리는 차로 많이 떼 지어 갈 때, 우리 살던 집 앞길로 지나더라. 복색은 검은 털두루마기 입고 무수히 떼 지어 가더라. 우리 빈 집에 들어와 다 둘러보며 갈 때 조사하고 탐지하려는 뜻을 두고 들쑤시니, 중들도 거기 들렀다가 숨었더라.

이때 전등사로 행하여 가니 전등은 높은 산성이라.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북과 나팔을 크게 울리며 좌우에서 총에 화약을 재어 넣은 뒤에 총알을 놓으니, 양인 장수가 죽고, 말 아래에 떨어지며, 양인 십여 명이 죽으니 양인이 대패하여 나누어 오는지라.

총을 간간이 쏘며 쫓아가니, 양인들이 제 동무의 시신을 옆에 끼고 급히 본진으로 도망할 때, 우리 살던 집에 달려들어 가마를 떼어 시신을 담아 마주 메고 도망하더라.

벼 베던 일꾼 하나가 거기 있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보고 두 팔을 휘저으며 어서 도망하라 일러주었더라.

양인들이 제 진으로 어지러이 물러가, 시신를 화장하여 궤에 각각 담고 성명을 적어 제가끔 각각 써 붙여 가지고, 십이 진의 군기와 도감 군기, 호랑이 가죽으로 짠 자리 하며 강도 재물을 모두 탈취하여 다 져다 쌓았다가, 시월 초오일 제 배에 싣고 다 도망하여 나가다 전쟁을 끝내자 하더라.

양헌수가 양인 장수와 십여 명 양인을 죽이고, 내친김에 적진까지 쫓아가 찧어 버리려 하다가 화약이 없는지라. 분함을 견디지 못하여 본진에 기별할 때, 미처 적어 줄 새도 없이 말로 통지하니, 도원수 종시 딴 의심만 하고, 나라에부터 먼저 아뢰어 화약을 들여보내라 주문하였더라.

양헌수 기다리다 지쳐 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분함을 견디지 못하더라. 양헌수 공로로 강화 중군을 제수받으셨더라

 

우리가 배 타고 교동 바다 넘던 날, 양인들이 인화성과 교동을 치고 도성 안을 불 지르니 불꽃이 보였다 하더라. 이때 교동이 강화에 속하고, 풍덕도 강화에 속하였으니, 벼슬이름을 갈아 삼도통어사라 하였더라. 황호덕이 공로로 다시 벼슬을 제수하시고, 평안도 포수 선달을 제수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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