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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 전문

New-Mountain(새뫼) 2016. 3. 15.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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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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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수길(平秀吉)의 야망(野望)


각설, 동남해(東南海)에 한 나라가 있으니 국호는 일본(日本)이라, 동서는 육십일 정이요 남북은 팔십이 정이요 팔도가 육십일 주니 삼십오 군이 일 주 되었더라.

조선국 경상도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로부터 수로(水路)로 일본을 가나니 대마도(對馬島) 상거(相距)가 삼백육십 리요 집마도 상거는 사백구십 리요 일기도(壹岐島) 상거는 육백사십 리요 철마도 상거는 오백사십 리요 말유관 상거는 칠백오십 리요 표화관 상거는 육백 팔십 리요 병교관 상거는 삼백리요 지우관은 사백이십 리요 오산은 삼백오십 리요 오산은 곧 일본이라, 합하여 사천육백육십 리러라. 혹 이르되 진시황(秦始皇) 시절에 서불(西巿) 등이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러 삼신산(三神山)을 찾아가 얻지 못하고 인하여 그 섬에서 살았는 고로 이제 이르되 서불의 자손이라 하더라. 그 후로 인물이 번성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예라 하더니 그 후 고쳐 왜()라 하더라.

신라 혜공왕(惠恭王)이 처음으로 왜란(倭亂)을 보고 또 자비왕(慈悲王)에 이르러 명장 석우(石尤)가 왜란에 죽고 고려왕이 왜로 더불어 결혼하더니 아조(我朝)에 이르러 호남(湖南)을 자주 침노하니 조선이 연하여 왜란에 곤하여 편치 못하더라.

각설, 대명 세종황제(世宗皇帝) 가정(嘉靖)년간에 중국 침주 땅에 한 사람이 있으니 성은 박()이요 명은 세평(世平)이니 기선은 박국진이라, 왜인이 자주 강남을 침범하다가 마침내 항주에 이르러 평이 왜인에게 죽고 그 처 진씨(陣氏)는 해내(海內)의 유명한 절색(絶色)이라, 왜인에게 잡힌 바 되어 인하여 살마도 땅에 있는 평신(平伸)이라 하는 사람의 아내 되니 진씨 박세평에게 있을 제 잉태 삼 삭이더니 평신에게 온지 십 삭 만에 한 아들을 낳으니 합하여 십삼 삭이라. 진씨 임산하기에 이르러 한 꿈을 얻으니 황룡(黃龍)이 공중에서 내려와 진씨 품으로 달려들거늘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그 후로 몸이 불평하더니 홀연 향내 방중에 진동하고 붉은 기운이 사면에 자욱하였다. 이윽고 일개 남아(男兒)를 생하니 용모(容貌)가 비상하여 용의 머리에 범의 눈이요 잔나비 팔이며 제비턱이니 짐짓 영웅의 기상일러라. 평신이 대희하여 이름을 수길(秀吉)이라 하고 자를 평운산이라 하니 길()이 삼 세(三歲)에 이르러는 음성이 용의 소리 같고 기이한 일이 많더라. 오 세에 이르매 문장을 능통하니 보는 자 아니 칭찬할 이 없더라.

수길이 점점 자라 나이 칠 세에 이르러는 기골(氣骨)이 장대하고 지략(智略)이 과인하여 범인으로 더불어 크게 다르러라. 일일은 수길이 스스로 생각하되,

내 마땅히 일본 육십육 주를 두루 구경하리라.’

하고 인하여 집을 떠나 원근 산천을 편답하더니 집마도 땅에 다다라는 날이 심히 덥고 몸이 곤하거늘 섬에 앉아 쉬더니 관원이 마침 풍경을 완상(玩賞)하고 돌아오다가 수길의 상모(相貌)가 기이함을 보고 심중에 생각하되,

이 아이 타일 귀함을 측량치 못하리니 가히 버리지 못하리로다.’

하고 즉시 수길을 불러 문왈,

그대는 어느 곳에 있으며 이름은 뉘라 하느뇨.”

수길이 대왈,

나는 살마도 땅에 사는 평신이로소이다.”

그 관원이 달래며 이르되,

나는 살마도주 관백(關白)이라 하거니와 일찍 한낱 골육(骨肉)이 없는 고로 정히 후사(後嗣)를 근심하더니 이제 우연히 그대를 만나매 사랑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는지라. 청컨대 나의 아들이 되어 후사를 잇게 하면 내 벼슬을 대신하여 일국 병권(兵權)을 총독하면 이는 장부(丈夫)의 쾌사라. 그대 뜻이 어떠하뇨.”

수길이 이 말을 듣고 땅에 내려 절하고 왈,

미천한 사람의 자식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렇듯 무애(撫愛)하시니 은혜 백골난망(白骨難忘)이라 감히 듣지 아니리이까.”

관백이 대희하여 즉시 수길을 데리고 궁중에 들어와 좋은 의복을 입히고 주찬(酒饌)을 먹이며 시사(視事)를 의논하니 대답이 여류(如流)하여 모를 일이 없는지라, 관백이 대희하여 드디어 수길로 지의장군을 명하니 수길이 스스로 그 지략을 헤아리며 주대(周代)의 여상(呂尙)과 한 대(漢代) 제갈량(諸葛亮)으로 더불어 병구할 것이요 겸하여 용력(勇力)이 절륜하니 당시 그 재주를 비할 이 없는지라. 이러므로 팔도 영웅이 망중(望重)하여 돌아오니 이로부터 일본국 육십육 주를 통령(統領)하여 위명(威名)이 크게 떨치니 해중의 모든 소국(小國)이 항복하는 자가 많은지라. 수길이 비로소 큰 뜻이 원대하고 우익(羽翼)이 많음을 인하여 드디어 황제를 폐하여 신성군을 삼고 제호를 칭하며 원을 고쳐 문득이라 하니, 차시는 아국 조선 선묘(宣廟)적 시절이라. 이백 년 승평(昇平)함을 인하여 상하인민이 재물을 탐하고 병기를 다스리지 아니하니 시사의 해이함이 이에 극하더라.

이때는 대명 신종황제(神宗皇帝) 만력(萬曆) 육 년 무인 춘삼월이라, 아조 관상감(觀象監)이 계사(啓事)하되,

장성(長星)이 동남을 가로선 지 수월이로소이다.”

하니 상이 근심하시니 백관(百官)이 조회에 여짜오되,

중국이 무사하고, 황제 아국을 극히 대접하시니 무슨 환란이 있으리이까.”

상이 반신반의(半信半疑)하시더니 기묘년에 이르러는 태백성(太白星)이 자주 뵈고 백홍(白虹)이 자주 해를 꿰니 지식 있는 자 가장 근심하더니, 경진년에 이르러는 경상도 단성 고을에 있는 해음강이 절로 마르고 동해서 나는 고기 서해로 모이고 연평 바다에서 나던 청어가 요동서 잡힌다 하여 소설(騷說)이 자자하더니 임오년에 다다라 범이 평양성(平壤城) 중에 들어와 사람을 무수히 살상하고 대동강(大洞江)이 혹 마르며 혹 핏빛 같아 칠 일을 두고 서로 돌며 두 빛이 되고 성중에 또 검은 기운이 충천하기를 또 칠 일을 하고 무자년에 이르러 황해도 물이 핏빛이 되어 삼 일을 끓으니 어족이 죽어 물 위에 무수히 뜨고 남해물이 자주 창일(漲溢)하니 사람마다 황황하여 의논이 분분하더니 전교수 벼슬하던 조헌(趙憲)이란 사람이 국중에 자주 재변(災變)이 있음을 보고 상소하여 가로되,

신이 비록 지식이 없사오나 요사이 천문을 보니 태백(太白)이 동으로조차 북으로 지고 재변이 연하여 일어나고 세도인심(世道人心)이 지극히 강악하여 부모형제 서로 인륜대의(人倫大義)를 모르오니 조만간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니 바라옵건대 성상은 각 도에 지휘하사 빨리 병기를 신칙(申飭)하소서.”

하였더라.

상이 그 상소를 보시고 의혹하여 결치 못하시더니 형조판서(刑曹判書) 유홍(兪弘)이 상전에 나아가 주왈,

이 같은 태평시에 조헌이 요망한 말을 내어 민심을 소요케 하니 그 죄 중하온지라, 원컨대 성상은 빨리 조헌을 찬출(竄黜)하사 민심을 진정케 하소서.”

상이 옳이 여겨 즉시 의윤(依允)하시고 조헌을 함경도 갑산(甲山)에 정배(定配)하시다.

 

각설, 평수길이 황제위에 오르고 제조(諸朝)를 항복받으며 뜻이 교만하여 스스로 이르되,

내 어찌 조그만 나라를 지켜 제후왕(諸侯王)과 같이 하리오.’

하고 드디어 문무중관(文武重官)으로 더불어 의논 왈,

내 이제 백만웅병(百萬雄兵)을 거느려 북으로 조선을 치고 인하여 대명(大明)을 엄습하고 천하를 도모코자 하나니 계교 장차 어디 있나뇨. 제신은 품은 바를 이르라.”

언미필(言未畢)에 한 사람이 이르되,

조선을 치고 대명을 통합코자 하실진대 반드시 조선을 무사히 지난 후에야 바야흐로 중원에 들어가오리니, 조선은 본디 예의지방(禮義之邦)이라, 현인군자 많으니 가볍게 도모치 못할지라. 조선을 치고자 할진대 마땅히 지용이 겸비한 사람을 가려 먼저 조선에 가 강약의 형세를 탐지하며 산천의 험세(險勢)를 살핀 후 동병(動兵)함이 늦지 아닐까 하나이다.”

하고 제신을 돌아보아,

뉘 능히 나를 위하여 먼저 조선에 나아가 허실을 탐지하여 올꼬.”

말이 마치지 못하여서 팔장(八將)이 일시에 뛰어나와 이르되,

소장 등이 원컨대 이 소임을 당하리이다.”

하거늘 돌아보니 제일은 평조익(平調益)이요 제이는 평조신(平調信)이요 제삼은 평조강이요 제사는 안국사(安國史)요 제오는 선강정(善江丁)이요 제육은 평의지(平義智)요 제칠은 경감로(景監老)요 제팔은 송인현소라. 평수길이 대희 왈,

경 등이 힘써 일을 이루면 반드시 중상이 있으리라.”

하고 각각 은자 삼천 냥씩 주어 반전(盤纏)을 보태게 하니 팔장이 즉시 하직하고 행장(行裝)을 수습하여 배를 타고 아국으로 향하더니 벌써 부산지계(釜山地界)에 이르러 배를 물가에 닿이고 각각 의복을 고칠새 혹 중[]되 되며 혹 거사(居士)도 되며 혹 장사도 되어 서로 길을 나누어 행할새 다시 기약하되,

우리 등이 각각 한 도씩을 맡아 허실을 탐지하되 삼 년을 한하여 도로 부산으로 모이자.”

하고 각기 각 도로 들어오니라.

차시에 아국이 운수가 불행한 중 일본이 동병하려 하는 줄 전혀 모르고 일체 군무(軍務)를 준비함이 없으니 어찌 가석치 아니하리요. 이때에 태평원 뒤에 큰 돌이 절로 일어서고 만수산(萬壽山) 아래에 봉선(奉禪)이 있어 날마다 웨여 이르기를 십여 일을 하는지라. 일로 인하여 인심이 소요하고 지식 있는 자 심산궁곡(深山窮谷)에 들어가 은거함이 많더라.

 

차시 왜장 팔 인이 아국 팔도에 흩어져 사적을 탐지할 뿐 아니라 도성(都城)에 들어와 궁중 대소사를 낱낱이 살핀 후에 부산으로 모여 다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들어가 수길을 보고 조선지도(朝鮮地圖)를 올리며 사정을 일일이 고한대 수길이 대희하여 중상(重賞)하고 즉시 사신을 청하여 국서(國書)를 아국에 보내니 그 글에 하였으되,

조선이 일본으로 더불어 접계(接界)하였으나 일찍 서로 통신함이 없으니 그 일이 가장 그르고 또 우리로 하여금 중국을 통치 못하게 하니 더욱 미안한지라. 작금 이후로 양국이 화친하고 일본 사신으로 하여금 중국을 통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먼저 조선에 대화 미칠지라.’

또 하였으되,

천하 형세 다 내 장악(掌握)중에 있나니 뉘 감히 거역하리요.’

하였더라.

상이 그 글을 보시고 크게 근심하사 만조백관(滿朝百官)을 모으시고 그 일을 의논하라 하신대 백관이 여짜오되,

가히 사신을 일본에 보내어 화친(和親)을 통하고 겸하여 왜인의 사정을 탐지함이 상책인가 하나이다.”

상이 즉시 김성일(金誠一), 황윤길(黃允吉)로 상부사를 삼아 일본으로 보내시니 이 인이 명을 받아 궐하에 하직하고 행하여 일본에 들어가 평수길을 보고 국서(國書)를 전하니 수길이 보기를 마치매 문득 크게 노하여 왈,

조선왕이 만일 친히 이르러 조회하고 일본 사신으로 하여금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 주면 말려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조선이 먼저 대화(大禍)를 만나리라.”

하고 아국 사신을 박주(薄酒) 수배(數盃)로 대접하고 회환시(回還時)에 은자 사백 냥을 상사(賞賜)하고 답서하여 주되 사기(詞氣) 더욱 패만하더라.

신묘년에 이르러 수길이 평의지로 하여금 부산 동헌관에 보내어 배를 타고 웨여 왈,

조선이 아국 사신을 인하여 대명(大明)으로 들어가게 하면 피차 좋으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너희 인민이 많이 상하리라. 이에 머물어 회답을 알고 가려 하노라.”

한 대 조선이 마침 한 말 대답함이 없으니 평의지 대로하여 배를 돌이켜 본국으로 돌아가 수길을 보고 회보하니, 차시 수길이 벌써 뜻을 결하여 제장으로 더불어 출병하기를 의논하더니 대장 청백세 이르되,

이제 만일 조선을 치고자 할진대 날랜 장수 넷을 뽑아 네 길로 나아가되 북해를 건너 부산지경에 이르러 두 장수는 수로로 행하여 조선국 삼남(三南)을 엄습하면 조선왕이 반드시 평안도(平安道)로 달아날 것이니 우리 군사를 거느려 그 도성을 웅거하고 일지병을 보내어 평안도를 엄습하고, 또 두 장수는 수로로 행하여 서해에 둔병(屯兵)하고 또 일지병을 보내어 압록강(鴨綠江)으로 나아가 북로를 막으면 조선이 비록 중국에 구원병(救援兵)을 얻고자 하나 어찌 능히 통하리요. 이리 한 후에 우리 능히 대병을 몰아 두 편으로 협공하면 조선왕(朝鮮王)을 능히 사로잡을 것이니 조선을 얻은 후 즉시 군사를 옮겨 평양에 둔하고 조선 군사로써 요동(遼東)을 치게 하고 우리 군사로 하여금 중원(中原)을 엄습하면 천하를 가히 도모하리라.”

한대 수길이 대희하여 일변으로 국중병을 다 일으키고 일변으로 해중병을 일으키며 해중제국에 격서(檄書)를 전하여 각각 군마를 거느려 싸움을 돕게 하고 대장 청정(淸正)으로 하여금 평행장(平行長)으로 더불어 일군을 거느려 육로로 나아가 조선 삼남(三南)을 치게 하고, 또 마다시 심안둔 이 장을 각각 일지병을 거느려 수로로 가 육로 군사를 접응하라하고 스스로 제장과 대군을 거느려 뒤를 따라 접응하려 하더라.

차시는 임진(壬辰) 사월이라. 정발(鄭撥)이 포졸을 데리고 칠섬가에 산행(山行)하더니 홀연 보니 오리 갈매기 까막까치 무리 지어 오거늘 발()이 가장 고이히 여겨 양구히 보더니 얼마 후에 물 위로 조차 들리는 소리 가까우니 발이 심중에 의혹하더니 이윽고 왜선 수백여 척이 내려오되 정기(旌旗) 바다를 덮었으며 창검(槍劍)이 일색(日色)을 가리우며 포성이 물결을 뒤치는 듯하는지라, 발이 대경하여 황망히 부산으로 돌아올새 미처 성주에 드지 못하여 왜전의 선봉(先鋒)이 벌써 성중에 돌입하여 군마(軍馬)와 관속(官屬)을 무수히 죽이고 후군(後軍)이 산야에 미만(未滿)하여 나아오니 부산이 인하여 함몰하고 다다개 지경에 이르러 첨사 윤홍신이 갑주를 갖추고 포졸 백여 명을 거느려 힘써 싸우다가 마침내 왜장의 죽인 바 되나 수하군사 하나도 남지 아니하나 다다개 또한 함몰하니라, 왜적이 동래로 향할새 함성(喊聲)이 백 리에 진동하니 형세 태산 같더라. 아국이 싸우지 아니하여 각각 명을 도망하는지라. 적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나아가 동래성(東萊城)을 싸니 좌수 백홍한이 이 기별을 듣고 대경하여 즉시 수성을 버리고 감영(監營)으로 달아나고 좌병사 이제는 겨우 노약군 수백을 거느려 동래로 가다가 무수한 왜적이 동래를 철통같이 싼지라,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드디어 소산봉(蘇山峯)에 진치고 승패를 관망하더니, 이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왜병의 급함을 보고 즉시 성문을 닫고 군민을 조발하여 성을 굳이 지키더니 적이 화포 화전(火箭)을 일시에 놓으며 성 치기를 급히 하니 성 지킨 군사 무수히 죽고 남은 군사 각각 명을 도망하는지라, 왜적 선봉이 먼저 성을 넘어 들어와 성문을 깨치고 대군을 맞아들이니 왜병이 물밀 듯 들어와 군인을 죽이니 곡성(哭聲)이 천지 진동하는지라. 상현이 능히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군관 김상관과 노자 영남으로 더불어 급히 아중에 들어와 조복(朝服)을 갖추고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크게 통곡 왈,

신이 무상하와 변방(邊方)을 방비치 못하고 국가 또한 불행하여 왜적이 성내를 함몰하되 신이 본디 지용(智勇)이 없어 능히 도적을 제어(制御)치 못하고 마침내 국은을 갚삽지 못하고 오늘날 죽으니 구천지하(九泉地下)에 가오나 눈을 감지 못하리로소이다.”

하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일수시(一首詩)를 쓰니 하였으되,


아중고성월훈(我衆孤城月暈)

대진불구(大陳不救)

사인사군의충(使人事君宜忠)

부자은경(父子恩輕)


외론 성이 달 두른 듯함이여 큰 진을 구치 못하도다. 임군을 섬기며 마땅히 충하도다. 부자 은혜 가배얍도다.’


상현이 쓰기를 마치매 노자 영남을 주어 이르되,

너는 이 글을 가지고 빨리 집에 돌아가 난을 피하라.”

하니 영남이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차마 떠나지 못하거늘 상현이 재촉하여 보내고 손에 칼을 짚고 호상(胡牀)에 앉았더니 적이 돌입하여 상현을 범코자 하거늘 상현이 분력(奮力)하여 왜적 수삼 인을 죽이더니 적이 무수히 들어와 어지러이 치니 상현이 마침내 난군(亂軍) 중에서 죽으니라. 왜병이 동래를 함몰하고 군사를 나누어 울산(蔚山)과 밀양(密陽)을 칠새 울산부사 힘써 싸우다가 수하군사 각각 명을 도망하는지라. 부사 허함이 적에 사로잡힌 바 되고 밀양부사 박진(朴晉)은 필마(匹馬)로 달아나니라.


 

이일(李鎰)과 신립(申砬)


차시 청정이 평행장(平行長)으로 더불어 동래 밀양 울산 등처를 함몰하고 경상도에 횡행하여 짓쳐 나아오니 군민의 주검이 뫼같이 쌓이고 피흘러 내[]가 되었더라. 경상도 순찰사 김수(金晬)가 적세 호대함을 보고 급히 각 읍에 신령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멀리 난을 피하라 하니 이로 인하여 각처에서 오던 군사가 병사의 전령을 듣고 흩어지니라. 김해 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唯儉)이 망풍(望風)하여 달아나니 이로 인하여 적이 무인지경같이 횡행하여 전라도를 또 엄습하니 상이 또한 대경하사 백관을 모시고 의논하여 가라사대,

사세(事勢) 이미 여차하니 경 등은 각각 지용의 장수를 천거하여 발마(撥馬)로 삼남에 내려 보내어 도적을 막게 하라.”

하신대 모든 대신이 주하되,

대장 이일(李鎰)과 신립(申砬) 등이 지용이 겸비하오니 이 소임을 담당할까 하나이다.”

상이 그 말을 좇으사 즉시 이일로 경상도 순변사(巡邊使)를 하이시고 승지 김성일이 또 장략이 있다 하사 경상도 좌병사를 하이사 호서 군사를 거느려 이일을 접응(接應)하라 하신대 삼 인이 즉시 하직하고 망야(罔夜)하여 내려갈새 이일이 먼저 격서를 보내어 도내 수령을 지휘하여 각각 군사를 거느려 대구(大邱)로 모두리라 하였더니 불행하여 약간 모였던 군사들이 밤으로 도망한 자가 많은지라, 모든 수령이 서로 의논하되,

순변사가 만일 이르면 우리 등이 어찌 죽기를 면하리요.”

하고 흩어지니라.

이때 이일이 주야로 달려가더니 충청도 지경에 다다라는 백성들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이끌고 심산궁곡(深山窮谷)으로 피난할새 곡성(哭聲)이 산야에 진동하는지라, 이일이 탄식하고 말을 재촉하여 경상도 지경에 이르러는 여염(閭閻)이 전혀 비었고 인적이 없으니 앞 길을 물을 곳이 없고 기갈(飢渴)을 참아 문경(聞慶) 고을에 이르러는 또한 사람이 없거늘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내어 밥을 지어 종자로 더불어 요기를 하고 대구 고을에 들어가니 또한 일공(一空)이라 하릴없이 하중을 재촉하여 상주(尙州) 고을에 들어가 장관 원길을 잡아 내어 기약 어김을 이르고 버히려 하니 원길이 애걸 왈,

군사를 이제 모으리라.”

하거늘, 이일이 사하고 급히 취군(聚軍)하라 하고 일변으로 창고를 열어 군사를 초모(招募)할새 양식(糧食)을 얻으러 오는 자가 가장 많더라. 드디어 수백 인을 얻어 군총(軍摠)에 충수(充數)하고 산곡중에 혹 양반과 노약자(老弱者)많으나 하나도 싸울 자 없더라. 이일이 다 거두어 항오(行伍)에 채우고 상주에서 십여 리를 떠나 장천(長川)들에 진을 치고 판관 권길(權吉)과 종자 녹점 등으로 더불어 의논 왈,

마땅히 적세(敵勢)를 탐지하리라.”

드디어 군관 곽모(郭某)를 보내어 도적의 동정을 보라 할새 곽모가 말을 달려 예교들을 지나더니 왜적이 좌우수(左右手)를 속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고함치며 내닫거늘 곽모가 말을 돌려 달아나더니 문득 방포 소리 나며 곽모가 말에서 떨어지니 적이 달라들어 곽모의 머리를 버히고 일시에 짓쳐 오는지라. 이일이 호령하여 대적하라 한 대 군사 본디 오합지졸(烏合之卒)로 겁이 먼저 나고 또한 활에 익지 못한지라, 어찌 잘 싸우리요. 살이 중간에 떨어지고 하나도 적군을 맞히는 자 없는지라. 왜적이 더욱 승승하여 일시에 조총(鳥銃)을 놓으니 한 철환(撤還)에 삼사 인씩 죽는지라. 도적이 기를 두르며 북을 울리고 사면으로 짓쳐 오는지라. 이일이 군사를 반나마 죽이고 약간 남은 자는 각각 그 명을 도망하는지라. 이일이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죽도록 싸우다가 길을 앗아 달아나더니 탄 말이 주검에 거쳐 엎드리거늘 이일이 말과 갑주를 버리고 다만 한 창을 들고 내달으니 빠르기 제비 같은지라. 왜장 소섭(蘇攝)이 소리질러 왈,

이는 반드시 날개 있는 장수라, 가히 따르지 못하리라.”

하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이로 인하여 죽기를 벗어나 급히 산중으로 들어가더니 절벽 아래 한 암자(庵子)있거늘 들어가 보니 이 는 빈 절이라. 기갈이 심하되 하릴없이 몸이 가장 곤뇌한지라. 절 문에 다리를 걸고 잠깐 누웠더니 홀연 발을 당기는 것이 있거늘 급히 돌아보니 이는 범이라. 발로 한 번 차니 그 범이 한 소리를 지르고 거꾸러져 죽으니 이 같은 장사는 세상에 드물더라. 이일이 그날 밤을 절에서 머물고 이튿날 충주의 신립의 진으로 오니라.

각설, 충청도 순찰사 신립(申砬)이 망야하여 충주로 내려가니 백성들이 다 피난하고 없는지라, 겨우 백성 수천을 얻어 오산(烏山)을 지키고자 하더니 홀연 체탐군이 보하되,

경상도 순변사 이일이 대패하여 사생을 알지 못한다.”

하거늘 신립이 대경하여 진치거늘 제장(諸將)이 왈,

이곳이 진칠 곳이 아니라, 적이 만일 이르면 진실로 두용에 든 파리 같은지라.”

한대 신립이 왈,

옛적 한신(韓信)이 조()를 칠 제 배수진(背水陣)으로 크게 이겼으니 우리 군사 본디 전장에 익지 못하고 또한 겁이 많아 도망할 마음만 두었으니 반드시 죽을 땅에 둔 후에야 힘써 싸우리라.”

한대 제장이 이르되,

한신은 적군의 허실(虛實)을 알아 어린 아희 보듯하므로 요행히 이겼거니와 장군이 이제 조그만 군사로써 능히 무수한 적을 당하리요. 만일 이기면 좋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한 사람도 살지 못하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요.”

신립이 대로하여 간하는 자를 버히고자 하더니 홀연 보하되,

동편에서 한 장수가 창을 메고 우리 진을 행하여 온다.”

하거늘 신립이 대희하여 급히 진문 밖에 나가보니 이는 곧 이일이라 신립이 대희하여 맞아 들어가 서로 전일을 이르더니 군사가 급히 보하되,

왜적의 선봉이 벌써 조령(鳥嶺)을 넘어 풍우같이 오나이다.”

하거늘 이일이 함께 나아가 오는 양을 보니 말을 내어 만산편야(滿山遍野)하여 오는 것이 다 왜병이라, 아군이 한 번 보고 상혼낙담(喪魂落膽)하여 감히 싸울 마음이 없는지라. 신립이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궁노(弓弩)를 발하며 이일로 더불어 각각 창을 두르고 말을 놓아 바로 적진에 달아들어 좌충우돌(左衝右突)하더니 왜적이 물밀 듯이 이르러 사면으로 싸고 어지러이 짓치니 신립이 비록 용맹하나 어찌 능히 수다웅병(數多雄兵)을 대적하리요. 정히 한모(翰毛)를 헤치고 달아나더니 적의 철환을 맞아 물에 빠져 죽으니 적이 승승하여 일진을 혼살하니 아군이 왜적의 조총과 창검에 상하며 물에 빠져 죽는자가 부지기수(不知其數). 이일이 세() 이롭지 않음을 보고 필마단창으로 통영을 바라고 달아나더니 중로에 매복(埋伏)하였던 왜병이 내달아가는 길을 막거늘 이일이 평생 기력을 다하여 왜적 수십인을 죽이고 길을 앗아 달아나니 도적이 보고 감히 따르지 못하더라. 이일이 드디어 부여 고을에 들어가 패군한 장문(狀聞)을 올리고 다시 군사를 초모하여 도적을 막으려 하더라.

이때 조정이 신립, 이일 등의 사생을 아지 못하여 정히 민망하더니 사 월 이십팔 일에 한 군사가 전립(戰笠)을 쓰고 동대문으로 바삐 들어오거늘 길가의 모든 백성들이 문왈,

너는 어떤 사람이기에 무슨 일로 급히 오느냐.”

그 군사 대답하되,

나는 충청도 순변사의 가인(家人)이러니 순변사 작일에 왜적으로 싸우다가 전장에 함몰하여 순변사 죽고 왜적이 시방 경성(京城)을 향하나이다. 내 이제 와 가속(家屬)을 데리고 피난코자 하노라.”

한대 그 말이 일시에 전파하여 만성인민이 물끓듯하여 피난하는 사람이 무수하고 원근에 곡성이 진동하는지라. 조정이 이 소식을 듣고 또한 경황(驚惶)하더니 이 날 초경(初更)은 하여 이일의 패군 장문이 드니 상이 황망히 만조백관을 모으사 장계(狀啓)를 보시니 하였으되,

패장군 이일은 사죄(死罪)를 무릅쓰고 아뢰나이다. 신의 충성이 부족하고 지략이 없사와 마침내 전군이 패몰하오니 부월(斧鉞) 아래 주하옴을 도망하리이까. 당초에 신이 발마(撥馬)로 내려가 경상감사에게 전령하여 각 읍 군마를 대구로 모으라 하고 망야하여 내려가오니 군사는 새로이 수명 없삽는지라. 신이 홀로 어찌하리이까. 급히 산중에 피난하는 군민을 초모하오나 이 곧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 어찌 능히 무수한 왜병을 당하리요. 한 번 싸우매 전군이 패몰하여 신이 겨우 잔명(殘命)을 보전하여 충청도 신립의 진으로 들어오니 신립의 군사 또한 오합지졸이라. 한가지로 탄금대(彈琴臺)아래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군이 함몰하고 신립이 전망하며 신이 아직 부여 고을에 은신하와 다시 군민을 초모하여 도적을 막고자 하오나 적세 호대하오니 신이 또 사생을 예탁(豫度)치 못하옵고 다만 사죄를 기다리나이다.’

하였더라.

 

 

왕가(王駕)의 몽진(蒙塵)


상이 남필(覽畢)에 대경하사 제신다려 계교를 물으신대 백관이 황황하여 아무리 할 줄 모르더니 홀연 체탐군이 보하되,

왜적이 벌써 용인(龍仁)지경에 이르렀다.”

하거늘 영부사 김대영과 판부사 허적과 체찰사 유성룡(柳成龍)과 도승지 이항복(李恒福)과 판의금 이덕형(李德馨) 등이 주하되,

적세 이미 위급하였으니 청컨대 어가(御駕) 잠깐 평양으로 나아가 그 봉예(鋒銳)를 피하소서.”

상이 영부사 김대영다려 이르되,

나의 박덕함으로 인하여 의외지변(意外之變)을 만나 종사(宗社)를 하직하고 골육이 분찬하기에 미치니 이 정을 어찌 참으리요, 본디 경의 충성을 아나니 내 아희를 데리고 함경도로 피난케 하라. 만일 창천(蒼天)의 도움이 계시면 다시 보리라.”

김대영이 복지 주왈,

시운(時運)이 불행하여 이 지경에 미쳤사오니 신이 죽기로써 대군을 뫼셔 보호하리이다.”

인하여 하직하고 사대군(四大君)을 뫼셔 창황히 나올 새 앞이 어두워 길을 능히 분변치 못하더라. 상이 또한 내구(內廐) 말을 재촉하여 타시고 내전(內殿)을 거느려 궐문을 나실새 이양원(李陽元)으로 수성대장(守成大將)을 하이샤 이전(李戩)과 변언수(邊彦琇)로 더불어 한가지로 지키라 하시고 김명원(金命元)으로 한강(漢江)을 지키게 하고 신석으로 부원수를 삼아 이양원을 좇아 도성을 진수하게 하시고 급히 서문으로 나시니 성중 백성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이끌어 길가에 메여 어전(御前)에 이르러 여짜오되,

우리 주상(主上)이 이제 신민을 버리시고 어디로 가려 하옵시나이까.”

하고 일시에 곡성이 천지 진동하니 그 경상이 참불인견(慘不忍見)이러라.

벽제관(碧蹄館)에 이르러는 하늘에 운무사색(雲霧四塞)하고 큰 비 붓듯이 오는지라, 백관이며 호종군졸이 비를 맞고 황황히 행하더니 마산역을 지나 임진(臨陣)을 건너 동파역(東坡驛)에 다달으니 장단부사(長湍府使) 구유현이 약간 음식을 장만하여 가지고 대가(大駕)를 기다리더니 배종군민(陪從軍民)이 여러 날 굶었는지라, 음식을 보고 어찌 체면과 인사를 생각하리요. 다투어 앗아 먹으니 능히 금치 못하여 상께 드릴 차담(茶啖)이 없는지라. 구유현이 가장 무료하여 가만히 도망하니라.

오 월 초일 일에 개성부(開城府)를 지나 금천(金川) 숙소하시고 초이 일에 평산(平山)을 지나 무산역에 쉬오시고 초삼 일에 황주(黃州)에 이르시니 황해감사 조인득이 본주 병사와 두어 수령(守令)으로 더불어 군사 수백을 거느려 대가를 영접할새 차담을 성비(盛備)하여 군신 상하가 비로소 기갈을 면하고 초사 일 중화(中和)에 숙소하시고 초오 일에 바야흐로 평양(平壤)에 이르시니 감사 송언신이 대가를 맞은 후에 군사를 조발하여 수성(守城)하기를 준비하더라.

차시 왜적이 이미 충주(忠州)를 함몰하매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나아올새 왜장 평수정이 대군을 거느려 강을 건너 바로 경성(京城)에 다다르니 수성장 양원(陽元)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더니 체탐군이 보하되,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또 대군을 거느려 이르렀다.”

하거늘 부원수 신각(申恪)이 이르되,

적병의 형세 이렇듯 성하거늘 우리 사소한 군사로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만일 양식이 진하고 날이 오래면 능히 보전치 못하리니 일찍 성을 버리고 함경도로 들어가 군사를 초모하여 회복함을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한대 양원이 즐겨 듣지 아니하거늘 신각이,

스스로 성을 버리고 달아나되 죄 비록 중하나 마땅히 다른 공을 세워 죄를 속하리라.”

하고 밤에 가만히 동문(東門)을 열고 함경도로 달아나니라.

평행장의 대군이 바로 한강에 이르니 도원수 김명원이 군사를 거느려 강변을 지키다가 왜병이 한강을 건너 바로 경성에 이르러 성을 급히 치니 이양원이 왜병의 형세를 보고 창황실조(蒼黃失措)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왜장 평행장 청정 등이 대군을 몰아 경성에 웅거하고 다시 청병함을 청하니 평수길이 첩서(捷書)를 보고 대희하여 즉시 대장 안국사 평정성을 불러 분부하되,

이제 평행장 청정 등이 이미 호서(湖西)를 앗으며 조선왕(朝鮮王)이 평안도로 달아났다 하니 너희 양인이 각각 일지병을 거느려 나아가 청정 등을 접응하여 한가지로 평양을 엄습하라.”

양장이 청령(聽令)하고 각각 군사를 거느려 부산에 이르러 주야로 행하여 경성 가까이 이르러 둔병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성중에 들여보내어 청정 등에게 소식을 통하고 후에 군사를 나누어 혹 십 리씩 혹 이십 리씩 영채를 세우고 목책(木柵)을 많이 벌이고 각 관 창고를 열고 곡식을 수운(輸運)하여 군량(軍糧)을 삼으며 낮이면 금고(金鼓)를 울려 서로 응하고 밤이면 횃불과 등촉(燈燭)을 높이 달아 서로 비추며 도성민가(都城民家)와 각 마을에 불지르고 정선릉(宣陵)을 파니 참혹함을 뉘 능히 기록하리요.

차시 평수길이 종묘(宗廟)에 웅거하고 청정은 평행장으로 더불어 경복궁(景福宮)에 웅거하니 종묘와 사직에서 밤마다 신령(神靈)이 일어나 적병을 꾸짖어 보채니 능히 견디지 못하는지라. 평수정이 대로하여 종사를 불지르고 남별궁(南別宮)으로 옮아 머무르니 청정이 평행장에게 이르되,

조선왕이 이미 평안도로 달아났으니 그대 일지병을 거느려 급히 나아가 평양을 치면 조선왕이 반드시 의주로 달아나리니 그대 모름지기 평양에 웅거하고 일체 따르지 말라. 오래지 아니하여 마다시 심안둔이 각각 군을 거느려 서해로 압록강에 이르러 마주 짓쳐 오리니 만일 이같이 하면 조선왕이 갈 곳이 없어 반드시 함경도로 달아날 것이니 내 또한 일지군을 거느려 함경도로 들어 각처 액구(隘口)를 매복하고 형세를 보아 가며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통하리니 그대는 쉬 움직이지 말고 다만 접응하기를 기다리라.”

평수정 평의지 두 장수를 불러 이르되,

그대 등은 각각 일천 군씩 거느려 강원도로 들어가 험한 곳을 가리어 두었다가 나의 기별이 있거든 즉시 접응하라.”

하고 드디어 평조영 평조신으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고 평행장으로 더불어 각각 일천 군씩 거느려 발행할새 경복궁을 불지르고 서북으로 길을 나누어 나아가니라.

이때에 평의지 강원도로 나아갈새 제장(諸將)을 불러 이르되,

강원도 삼척(三陟) 땅에 있는 이지함(李之菡)은 가장 신기한 사람이니 만일 겁칙하려 하다가는 우리에게 해가 미칠 것이다. 삼척 근처에는 군사를 놓치 말라.”

하더라. 원래 이 사람은 토정(土亭)선생이라. 당초에 평의지가 조선을 탐지하러 왔을 적에 강원도를 편답하고 삼척 땅에 이르러 토정을 만나매 토정이 왜인인 줄 알고 죽이고자 하거늘 평의지 복지하여 이르되,

이는 천수(天數). 비록 나를 죽이나 무엇이 유익하리요, 전두(前頭)에 삼척은 침노치 아니하리라.”

하였는 고로 인하여 삼척은 병화(兵禍)를 만나지 아니하니라.

차시 좌의정 윤두수(尹斗壽)와 도승지 이항복(李恒福)이 주왈,

적장 청정과 평행장 등이 대군을 거느려 장구(長驅)하여 나아오니 그 뜻이 평양성을 겁측코자 함이라. 원컨대 전하는 미리 방비하소서.”

상이 즉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을 허체(許遞)하시고 금의 대장 신길(申硈)로 대장을 하시고 유극양(劉克良)으로 부원수를 하시고 첩지 중추부사 한응인(韓應寅)으로 후응사를 삼으사 각각 일군을 거느려 임진강을 지켜 도적을 건너지 못하게 하니라. 삼 장이 명을 받자와 즉일 군사를 거느려 임진을 향하여 나아가니라. 우의정 유홍(兪弘)이 주왈,

부원수 신각이 도성을 지키었다가 이양원의 명을 듣지 아니하고 도망하여 경성이 함몰케 하오니 그 죄 불용(不容)이라, 원컨대 선전관을 보내어 그 머리를 베어 다른 사람을 징계하소서.”

상이 그말을 좇으사 선전관을 보내어 신각을 버히라 하시니라.

재설, 부원수 신각이 경성을 떠나 함경도로 들어가 안변(安邊) 등처 군사를 거두워 도로 도송으로 향하더니 강원도 지경에 이르러 왜적 이유를 만나 힘써 싸워 도적의 수급(首級) 육십여 수를 버히고 어지러이 짓치니 이유가 대패하여 달아나거늘 신각이 뒤를 따라 편전(片箭)으로 이유를 쏘아 죽이니 남은 군사 사면으로 흩어지거늘 각이 승전하여 나아가는 표문(表文)을 닦아 평양으로 보내고 군사를 재촉하여 도성을 향하더니 중도에서 선전관을 만나매 성지(聖旨)를 전하고 각을 베어 돌아가니 일군이 통곡하고 각각 흩어지니라. 적기 아국에 들어옴으로부터 한 번 패함이 없더니 신각이 비로소 이기매 인심이 대열하더니 홀연 각의 죽음을 듣고 아끼지 아닐 이 없더라.

이때에 신각의 승전한 표문이 평양에 이르니 상이 대희하사 즉시 신각의 죄를 사하시고 사람을 보내어 주야 행케 하였더니 사자가 중도에서 선전관을 만나매 벌써 신각을 죽이고 돌아오는지라, 하릴없이 평양에 이르러 그 일을 상달하니 상이 차탄하시고 유홍을 대책(大責)하시니라.

 

차시 도원수 신길이 유극양으로 더불어 임진(臨陣)을 지키더니 김명원이 한강에서 도망하여 평양으로 돌아오다가 인하여 임진에 머물러 신길로 더불어 한가지로 군무를 의논하더니 홀연 보하되 왜적이 이르렀다 하거늘 신길이 군사를 벌여 진치고 선척(船隻)을 서편 언덕에 매고 지키기를 엄히 하는지라. 왜장 평행장이 먼저 이르러 물을 건너고자 하되 선척이 다 서편 언덕에 있는지라, 다만 물을 격하여 조총을 발하거늘 부원수 유극양이 방패를 끼고 편전으로 적병을 무수히 죽이니 적이 놀라 두어 리()를 물러 진치고 정히 조심하더니 문득 한 계교(計巧)를 생각하고 즉시 편녕하여 일시에 군막을 헐고 삼십리를 물러 진치고 제장으로 더불어 의논 왈,

삼십 리 물러 퇴병하는 형상을 지어 적군을 유인하고 그대 등은 각각 일지군을 거느려 좌우 산곡(山谷)에 매복하였다가 적군이 승세하여 물을 건너 또 오거든 일시에 내달아 그 뒤를 끊고 내 문득 정면으로 치면 가히 전승함을 얻으리라.”

한대 제장이 그 말을 좇아 각각 준비하더라.

이때 신길이 김명원으로 더불어 의논 왈,

적이 오래 상거하매 군량이 진하여 물러갔으니 만일 밤을 타 가만히 물을 건너 그 뒤를 엄습하면 반드시 공을 이루리라.”

한대 유극양이 이르되,

왜적이 본디 간사한 꾀 많은지라. 이제 따르면 행여 간계를 가질까 두리나니 모름지기 굳게 지킴이 양책(良策)일까 하노라.”

신길이 꾸짖어 왈,

네 어찌 어지러운 말을 내어 군심을 태만케 하느뇨, 만일 다시 영을 어기는 자 있으면 당장 버히리라.”

하니 유극양이 감히 다시 이르지 못하고 다만 궁노(弓弩)를 수습하여 신길의 뒤를 따라 물을 건너니라.

이때에 신길이 김명원 한웅인을 머물러 본진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일군을 거느려 차야에 가만히 물을 건너가니 적병이 간데없는지라. 마음에 가장 기뻐 군사를 거느려 삼십 리를 가더니 홀연 방포 소리 나며 화광(火光)이 충천한 가운데 청정이 평행장으로 더불어 각각 일지군을 거느려 짓쳐 내달아 일진을 엄살(掩殺)하니 신길이 크게 놀라 급히 군사를 돌이켜 임진 물가에 이르니 원래 평행장이 거짓 군사를 물리는체하고 가만히 일군을 거느려 뒤에 매복하였다가 아군이 물러 멀리 감을 보고 급히 군사를 몰아 강변에 이르러 신길의 건너온 배를 앗아 타고 물 건너 신길의 진을 엄습하니, 김명원이 한웅인으로 더불어 죽도록 싸우다가 군사를 다 죽이고 겨우 목숨을 도망하여 평양으로 돌아가니라.

차시 신길이 강변에 이르러 선척(船隻)이 없는지라. 경황(驚惶)하더니 적의 복병이 상하 강변으로 좇아 이르러 어지러이 짓치고 청정 평행장 등의 대군이 함께 협공하니 아군이 왜인의 창에도 상하며 서로 짓밟아 죽으며 물에도 빠져 죽는 자가 무수하더라. 신길이 평생용력을 다하여 좌충우돌하여 적군을 헤치다가 마침내 도적의 철환을 맞아 죽으니라, 부원수 유극양이 뒤를 좇아 힘세 싸우더니 신길이 죽고, 적군이 함몰함을 보고 앙천탄왈(仰天歎曰),

주장(主將)이 일찍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이렇듯 패몰(敗沒)하니 누를 한하리요.”

하고 드디어 말을 버리고 한 언덕을 의지하여 활로 왜적을 쏘아 죽이더니 살이 진하고 도적이 물밀 듯 짓쳐오니 극양이 탄왈,

내 어찌 차마 도적의 욕을 보리요.”

하고 스스러 목찔러 죽으니라, 평행장 등이 또한 임진을 건너 동파(東坡)를 지나 한성역에 이르러 군사를 나누어 두 길로 나아갈새 청정은 일군을 거느려 북도로 향하고 평행장은 평양(平壤)으로 향할새 함성과 고각(鼓角)이 산을 움직이고 기치창검(旗幟槍劍)은 폐일(蔽日)하였더라. 평행장 등이 행하여 송도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를 지나 중화(中和) 고을에 이르러는 평양이 멀지 아니한지라. 체찰사 유성룡이 백단 만호 임도정을 하여금 대동강에 있는 배를 다 잡아 언덕에 매고 군사를 조발하여 성을 지키게 할새 왜적이 만일 물가에 이르면 중군이 일시에 쏘니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더라.

재설, 청정이 대군을 휘동하여 함경도로 향할새 동파역에 다다르니 산곡 중으로서 두어 사람이 나오다가 왜병을 보고 황망히 달아나거늘 청정이 군사로 하여금 그 사람을 잡아다가 달래어 왈,

네 만일 바다로 가는 길을 가리키면 마땅히 중상하리라.”

한대 그 사람이 겁하여 길을 인도하거늘 청정이 대군을 몰아 산곡 속으로 토산을 지나 오릿고개를 넘어 안변 덕원으로 향할새 낮이면 사람을 문득 만나 해하거늘 고을의 수령들이 망풍하여 도망하는지라. 청정이 드디어 함흥을 향하더니 북병사 안국양(韓克誠?)이 청정의 대군이 이름을 보고 황망히 경흥 경원 회령 종성 온성 부평 육진(六鎭) 군사를 조발하여 해정창으로 나아가더니 정히 청정의 대군을 만나 양군이 대진하매 안국양이 먼저 보군으로 하여금 각각 방패를 끼고 왜병을 향하여 일시에 쏘니 적병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뒤로 잠깐 물러가거늘 국양이 마군(馬軍)을 놓아 짓치니 북도 마병이 본디 말에 익숙할 뿐 아니라 또한 용맹한지라, 일시에 말을 달려 적진을 충돌하여 왜병을 무수히 죽이니 청정이 대패하여 군사를 태반이나 죽이고 달아나거늘 국양이 군사를 몰아 뒤를 따르더니 청정이 달아나다가 산곡 중에 들어가 진치고 굳이 지키거늘 국양이 산세(山勢) 험준함을 보고 군사를 물려 너른 들에 영채를 세우고 군사를 쉬게 하더니, 차시 왜장 경감로가 일지병을 거느려 북도에 들어가 길주 명천 등처를 함몰하고 장차 함흥으로 나아가더니 청정의 위태함을 듣고 군사를 몰아 청정을 접응하여 전후로 협공합을 언약하니 청정이 대희하여 이날 밤에 군사를 내어 아군의 앞진을 치고 경감로도 그 뒤를 엄습하니 북군이 비록 용맹하나 전후로 대적치 못하여 각각 명을 도망하는지라. 안국양이 패잔군(敗殘軍)을 거느려 철령(鐵嶺)에 올라 잠깐 쉬더니 차야에 적이 가만히 영상(嶺上)에 불을 놓고 짓쳐 올라오니 북군이 창령싸움에 이미 곤하였는지라. 국양이 나와 불을 무릅쓰고 힘써 싸우더니 남녘에 홀로 불이 없거늘 그곳을 향하여 들어가니 적이 뒤를 따라 크게 엄습하니 아군의 죽는 수를 알지 못하더라. 국양이 군사를 다 죽이고 필마로 함흥으로 달아나거늘 청정이 군사를 몰아 남병영에 이르니 병사 이욱이 대경하여 갑산(甲山)으로 달아나거늘 청정이 드디어 군사를 나누어 여러 고을을 웅거하여 근본을 삼으니 형세 태산 같더라.

 

차시에 세자(世子) 대군(大君)이 함흥 계시더니 경성장교 국경인(鞠景仁)이라 하는 놈이 불측무도(不測無道)하여 몹쓸 흉계를 품고 저와 의합한 동료 십여 인으로 더불어 가만히 의논하여 왈,

이제 조선이 거의 왜국이 되어 회복할 세() 없이 이미 국수(國壽)가 진하였는지라. 어찌 서산의 낙일(落日)을 기다리리요. 동령(東嶺) 새달을 좇으면 사랑치 아니하리요. 우리 등이 이제 대군과 안국양을 사로잡아 왜진에 투항하면 반드시 중상이 있으리라.”

하고 세자 대군 사처에 들어가 거짓 창황한 빛으로 여짜오되,

적장 청정의 대군이 벌써 성하(城下)에 이르렀사오니 급히 산중으로 들어가 피난하소서.”

세자 대군이 대경하여 즉시 중신 김대영(金貴榮) 황정욱(黃廷彧) 등과 감사 유영립 등으로 더불어 일시에 성문을 내달아 황망히 달아날새, 이때 날이 어두웠는지라. 국경인이 길을 짐짓 인도하여 못 가운데 빠지게 하니 매복하였던 동류가 일시에 내달아 결박하여 말게 싣고 북영으로 들어가 청정에게 드리니 청정이 대희하여 국경인에게 벼슬을 주고 그 남은 이는 각각 중상하니라.

재설, 남병사 이은이 갑산 고을에 있더니 갑산좌수 주이남이 국경인의 벼슬하였음을 듣고 스스로 생각하되,

이런 시절에 굴기(崛起)하기를 도모치 아니하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리요.”

하고 밤들기를 기다려 칼을 감추고 이은의 하처에 들어가 보니 은의 종자(從者)가 다 잠이 깊이 들었거늘 칼을 뽑아 이은의 머리를 베어 북영에 들어가 청정에게 드리니 청정이 대희하여 즉시 이남으로 길주부사를 하이시고 인하여 문왈,

국경인의 잡아온 사람 중에 너의 친한 사람이 있느냐.”

이남이 감사 유영립의 맨 것을 끄르며 왈,

차인이 전일 사지(死地)에 들었을 제 날을 살려낸 사람이니 구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나이다.”

청정이 즉시 놓아 보내니 유영립이 목숨을 겨우 보전하여 평양으로 돌아오니라.

재설, 경상도 순찰사 이일(李鎰)이 충청도로 좇아 강원도로 들어가니 성중이 비었고 각 읍을 두루 돌아 사람을 모으려 하되 한결같이 비었는지라. 인하여 북도로 들어가니 청정의 군사 함경 일도에 미만하여 빈 곳이 없어 영채를 세웠는지라. 진실로 접촉할 곳이 없으매 하릴없이 갑산으로 좇아 평안도로 넘어 양덕 명산을 지나 평명에 이르니 의복(衣服)이 남루하여 머리에 헤진 전립(戰笠)을 쓰고 발에는 초리(草履)를 신고 손에는 다만 한 자루 장검(長劍)을 쥐었는지라, 상이 인견하사 전후수말(前後首末)을 물으시고 차탄하시기를 마지아니시니 백관이 아니 측연(惻然)할 이 없더라.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이르되,

그대 가히 수백 군을 거느려 나아가 영구대 아래 여흘[]을 굳게 지키라.”

한대 이일이 즉시 군사를 거느려 영구대를 찾아가더니 길을 잃고 강서(江西)로 향하다가 평양좌수 김윤을 만나 길을 물으니 만경대(萬景臺)를 가리키거늘 이일이 여흘 속을 찾아가니 왜장 평수맹이 군사를 거느려 여흘을 건너고자 하거늘 이일이 강변에 진치고 군사로 하여금 일시에 쏘라 하니 군사 겁내어 능히 쏘지 못하는지라. 이일이 또한 활을 잡아바라며 쏘니 시위를 응하여 왜병이 무수히 죽는지라. 평수맹이 능히 저항치 못하여 즉시 물러가거늘 이일이 인하여 그곳을 굳게 지키니라.


 

중원(中原)에 원병(援兵) 요청


이때 평행장이 장림 어귀에 진치고 봉산 황주 정방산성(正方山城) 창곡을 주야로 운수하여 군량을 삼고 또 사람을 도성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는지라, 체탐군이 이 일을 알고 즉시 평양에 들어가 보한데 체찰사 유성룡이 상께 주왈,

적장 평행장이 군사를 장림에 둔하고 또 사람을 경성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려 하오니 반드시 이 성을 겁측하려 함이라. 청컨대 이제 잠깐 의주(義州)로 들어가사 그 봉예(鋒銳)를 피하시고 사자(使者)를 중국에 보내어 황제(皇帝)께 주문하고 구병(救兵)을 청하여 왜적을 물리게 하소서.”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기사 즉시 좌의정 윤두수와 김명원 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평양성을 지키게 하고 말에 올라 보통문(普通門)을 나실새 판부사 노직(盧稷)이 내전(內殿)을 뫼셔 대가(大駕)를 따라가니 성중이 소요하며 백성들이 노직을 꾸짖어 왈,

네 진력하여 나라를 도와 이 성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제 우리를 버리고 임금을 뫼셔 어느 곳으로 가려 하느뇨.”

하고 막대로 어지러이 치니 노직이 말에서 떨어져 중상하되 종자 능히 금치 못하는지라. 평안감사 송인신이 군사를 호령하여 당장 괴수자(魁首者)를 잡아들이라 하니 모든 백성들이 비로소 흩어지는지라. 신 등이 드디어 노직을 구하여 데리고 급히 발행할새 어가(御駕)가 박천(博川) 지경에 이르러 청천강(淸川江)을 건너시더니 홀연 광풍(狂風)이 대작하며 큰비 붓듯이 오는지라. 길에 물이 가득하여 수세(水勢) 급한지라. 교량(橋梁)이 무너져 능히 건너지 못하니 호송군이 대가(大駕)를 뫼셔 물을 건너다가 군사 물에 빠져 죽는 자가 오륙십이나 되고 시신백관(侍臣百官)이 또한 물에 빠지는지라. 상이 정히 위급하여 계시더니 홀연 한 사람이 군사를 헤치고 급히 나와 물을 평지같이 들어와 상을 구하여 서편 언덕 위에 뫼시고 군복을 벗어 버리고 다리에 뛰어올라 한 옆에 사람 두셋 씩을 끼고 삼 간이나 무너진 다리를 건너다 놓으니 상이 용맹(勇猛)을 기특히 여기시고 그 사람을 불러 거주 성명을 물으신대 왈,

소인은 본디 황해도 재령(載寧)에 있사온대 성명은 최운측이로소이다.”

상이 가장 기특히 여기사 박천군수를 제수하시고 그 후에 용천부사를 돋우시며 화순군을 봉하시니라. 상이 박천 고을에 드시어 잠깐 쉬시더니 홀연 함경감사 유영립이 이르러 조현(朝見)하기를 마치매 상이 함흥이 함몰함을 물으신대 영립이 읍주 왈,

장교 국경인 등이 불측한 흉계를 내어 세자 대군과 좇아간 김대영 황정욱 등을 속여 이르되 적이 위급하였으니 빨리 산중으로 피난하소서하여 김대영 등이 황망히 세자 대군을 뫼셔 성문을 나가시더니 국경인 등의 복병(伏兵)이 내달아 세자 대군과 신 등을 결박하여 청정에게 드려 투항하오며 전혀 죽기를 기약하옵더니 갑산좌수 주이남이 또 남병사 이은의 머리를 베어 청정에게 바치고 공을 청하옵더니 신을 구하여 놓으며 도망하여 오옵다가 길에서 듣자오니 청정이 아장(亞將)으로 하여금 세자를 거느려 제나라로 가라 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까.”

상이 이 말을 들으시고 슬퍼함을 마지아니하더라. 이때 평행장이 진을 옮겨 대동강 남편에 일자진(一字陳)을 치거늘 좌의정 윤두수가 제장을 모으고 의논 왈,

도적이 가까이 와 결전함은 위엄을 뵈려 함이니 각별 굳게 지키리라.”

하고 드디어 송인신으로 대동강 문을 지키고 자산부사 윤수홍으로 장경문을 지키고 병사 이윤덕으로 부벽루(浮碧樓) 아래 여흘을 지키고 이일로 보통문을 지키게 할새 각각 장창대극(長槍大戟)을 두르고 북을 울리며 방포하기를 자주 하니 왜적이 감히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사장(沙場)에 모여 조총을 끼고 언덕을 겸하고 방포를 놓아 혹 대동문(大同門)도 맞히며 혹 연광정(練光亭) 기둥도 맞히니 대개 그 재주를 자랑함이라. 왜적 두엇이 사장 위에서 군복을 벗고 볼기를 두드리며 대동문을 향하여 욕하거늘 감사 송인신 병사 혁이 방패를 끼고 대동문 기둥을 의지하여 편전으로 그 왜인의 볼기짝을 맞혀 거꾸러치니 왜적이 대로하여 이 후로 편전의 살이 무섭다 하고 임의로 다니지 못하더라.

평행장이 감히 성을 치지 못하고 또 이십여 일을 견벽불출(堅壁不出)하며 제장으로 의논하며 가로되,

선척이 없어 대동강을 건너기 어렵고 각처 액구(隘口)를 지키니 졸연히 파키 어려운지라, 가히 군사를 돌려 순안을 지나 양덕 매산으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마다시 심안둔의 기회를 잃지 않음이 상책이라.”

하더라.

차시 김명원이 한 계교를 생각하고 즉시 제장을 불러 이르되,

이제 적병이 오래 이르지 아니함은 이 정히 구병(救兵)을 기다림이라. 만일 밤을 타 가만히 건너가 급히 치면 반드시 공을 이루리라.”

하고 드디어 중산첨사 고언백(高彦伯)과 백단만호 이성을 불러 적진을 엄습하라 한대 이인이 청령하고 군사를 점고하여 데리고 차야에 배를 타고 가만히 물을 건너가 적진 앞에 가 보니 각처 왜졸이 바야흐로 잠을 익히 들었거늘 언백 등이 중군을 지휘하여 일시에 고함하고 짓쳐 들어가니 적이 불의지변(不意之變)을 만나는지라, 어찌 능히 대적하리요. 황망히 사면으로 흩어져 달아나거늘 언백이 일진을 대살하고 전마(戰馬) 백여 필을 앗아 돌아오고자 하더니 홀연 후면으로 좇아 일성 포향(砲響)에 화광이 충천하며 이십여 둔병이 일시에 내달아 짓치니 아군이 대패하여 다만 목숨을 도망하여 달아나는지라. 언백과 이성 등이 평생 기력을 다하여 충돌하되 마침내 벗어나지 못하고 난중에 죽으니 여군(餘軍)이 다만 이십여 기(). 서로 다투어 황석탄 여흘로 건너오니 왜적이 그제야 황석탄 여흘이 얕은 줄 알고 기를 숙이고 북을 울려 대군을 몰아 여흘을 건너오는지라. 윤두수와 김명원 등이 막을 형세 없어 급히 보통문(普通門)을 열고 순안으로 달아나니라. 평행장이 군마를 재촉하여 개미떼같이 평양성에 들어와 웅거하고 백성을 함부로 해치더라.

중군 최원이 발마(撥馬)로 달려 박천에 이르러 평양성이 함몰함을 아뢴대 상이 들으시고 대경하사 즉시 박천을 떠나 가산(嘉山)에 이르시니 가산군수 임신겸이 나와 맞아 호송하며 여짜오되,

본읍에 관청미(官廳米) 일백 석이 있사오니 대가 아직 이곳에 머무르심이 마땅하올까 하나이다.”

상이 잠깐 쉬고자 하시더니 체탐이 보하되,

적이 박천을 지나 가산지경에 들었다.”

하거늘 상이 즉시 가산을 떠나 정주(定州)로 향하실 새 효절령에 올라 보시니 적의 선봉이 가산에 미만하였으니 임신겸이 죽도로 싸워 창곡을 다 잃고 목숨을 겨우 보전하여 도망하더라. 본군 아전 백학 등이 차담을 차려 드리거늘 상이 진어(進御)하시고 이튿날 선천(宣川)을 지나 의주에 들어 계시나 상이 날마다 통군정(統軍亭)에 오르사 경성을 향하여 통곡하시며 가로되,

선왕의 이백 년 기업과 조선 팔도 삼백여 군을 다 왜놈의 손에 넣고 박덕한 외로운 몸이 어디로 가리오.”

하시고 통곡하시기를 마지아니시니 좌우 시신이 아니 울 이 없더라. 상이 백관으로 더불어 의논하시고 봉황성(鳳凰城)장에게 이문(吏文)하여 보내시니 그 글에 하였으되,

조선 국왕은 삼가 긴박한 글로써 족하(足下)에게 부치나니 과인의 국수(國壽)가 불행하여 남만(南蠻)의 화를 만나 허다 신민을 왜놈에게 죽이고 골육이 분찬하여 무덕한 몸이 외로운 변지(邊地)에 이르러 의주성에 의탁하였으니 또한 장구지책(長久之策)이 아니라. 다만 원컨대 남은 신민을 거느리고 상국(上國)에 들어가기를 원하나니 이 뜻을 감히 황상께 주달하심을 바라나이다.’

하였더라. 봉황성장 번양성이 이 글을 보고 요동부(遼東府)에 보장(報狀)하니 부사 어합걸이 황성 병부상서(兵部尙書)에게 첨의(僉議)한대 병부상서가 이를 보고 즉시 천자(天子)께 계달하니라.

체찰사 유성룡과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주왈,

봉황성에 이문하였삽거니와 바로 청병사를 보내어 구원을 청함이 옳을까 하나이다.”

상이 옳이 여기사 이조판서 신점을 정사로 병조판서 정탁(鄭琢)을 부사로 삼아 보내시니 이신이 하직하고 즉시 압록강을 건너 연경(燕京)을 지나 천조(天朝)에 들어가 예부상서 설변을 보고 청병서(請兵書)를 드린대 예부상서가 그 글을 보고 가지고 들어가 천자(天子)께 상달하온대, 황제 옥화관에 전좌하시고 조선 사신을 인견하사 적의 형세를 물으시니 신점 등이 전후 사연을 자세히 아뢰고 다만 구원을 청하니 보는 자 아니 비감히 여길 이 없더라.

황제 만조백관을 모으시고 조선을 구원코자 하실새 대장 한 사람을 못 얻어 하시니 병부상서 주 왈,

요동이 조선과 연계하였사오니 요동군마를 일으켜 조선을 구함이 마땅할까 하나이다.”

황제 그 말을 옳이 여기사 즉시 요동부에 조지(朝旨)하여 조선을 구하라 하시고 참정 곽몽징(郭夢徵)으로 하여금 보군(步軍) 삼천을 거느려 가고 대조변(戴朝弁)은 용병을 거느려 가고 유격장군 사유(史儒)로 창군(槍軍) 일만 오천을 거느려 한가지로 요동도독 조승훈(祖承訓)을 도와 왜적을 치라 하고, 또 예부상서 설번(薛藩)으로 촉단 오백 필과 은자 일만 냥을 주어 조선왕을 위로하라 하시더라.

차설, 이때는 임진 칠 월이러라. 사유 등이 요동에 이르러 조승훈을 보고 조명(朝命)을 전하니 승훈이 즉시 정병 오천을 조발하여 사유 등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조선을 향할새 군율이 정제하고 기치(旗幟)가 선명하더라. 천병(天兵)이 나오는 패문이 의주에 이르니 체찰사 유성룡이 청주 곽산 등처에서 전전하여 군사를 모으며 군량(軍糧)을 준비하여 천병을 접대할새 선사개 첨사 장우성으로 대동강에 부교(浮橋)를 놓고 노량첨사 민교로 청천강에 부교를 놓아 천병을 건너게 하고 순찰사 이원익으로 하여금 병사 이빈을 거느려 순안을 지키게 하고 도원수 김명원으로 순천을 지키고 스스로 대장을 모아 안주를 지키게 하여 천병을 후대하더라.

이때 요동도독 조승훈과 참정 곽몽진과 유격 사유 등이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이르니 상이 시신(侍臣)을 거느리시고 강변에 나와 맞아 들어가 대접하고 군마를 호상하시고 명장 조승훈다려 가로되,

대장군은 힘을 다하여 왜적을 파하고 대국 위엄을 나타내게 하소서.”

하니 조승훈이 응낙하고 의주를 떠나 정주를 지나 순안을 들어가 삼경에 호군(犒軍)하고 오경에 행군하여 바로 평양으로 들어오더니 불행하여 모진 바람과 큰 비 급하니 성문에 지키는 군사 없는지라. 승훈이 대희 왈,

도적이 우리 오는 줄을 알고 대적할 형세 없어 싸울 의사를 아니하니 이제 급히 치면 가히 대사를 이루리라.”

하고 사유로 선봉을 삼고 일시에 대군을 몰아 나아가며 대연고를 놓아 칠성문을 파하고 바로 성에 들어가되 동정이 없더니 문득 방포 소리나며 좌우 전후로 복병이 일어나며 어지러이 고함치며 에워싸고 짓치니 방포 소리 산천이 움직이며 철환이 비오는듯하는지라. 천병이 불의에 변을 만난지라, 창황하여 서로 짓밟혀 죽으며 철환에 상한 자가 부지기수라. 승훈이 대경하여 급히 징()을 쳐 군사를 물리더니 사유 등이 철환을 맞아 죽은지라. 진중이 요란하여 패주할새 큰 비 연하여 삼일을 오니 천병의 의장(衣裝)이 다 젖어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후군이 전군이 되어 창황히 달아나다가 진흙에 빠지며 철환도 맞아 크게 어지럽거늘 조승훈이 대패하여 멀리 퇴진하매 왜적이 천병이 패하여 물러감을 보고 성상(城上)에 홍기() 백기(白旗)를 세우며 북을 울리며 기를 두르니 쟁북 소리 천지를 뒤흔들더라. 조승훈이 군사를 점고(點考)하니 팔만여 인이 죽고 장수 삼십여 인이 죽었더라, 승훈이 마음에 한하여 즉시 군사를 거두어 요동으로 돌아가니라.


 

김응서(金應瑞)의 신술(神術)


이때에 상이 조승훈의 패문을 들으시고 실색하사 인하여 탐지하라 하시더니 조승훈이 패잔군을 거느려 요동으로 들어간다 하거늘 상이 악연하여 아무리 할 줄 모르시더니 이원익으로 일천 군을 거느려 수안을 진주하게 하고 김익수로 수군 삼천을 거느려 대동강 하류를 지키우니라. 처음에 평안도를 함몰하매 윤두수 김명원은 수안으로 달아나고 이일은 용강(龍岡)을 지나 청천강을 건너 안악(安岳) 고을로 들어가니 읍중이 일공이라, 하릴없이 피난군 백여 명을 모아 내어 거느리고 영등정[]에 들어가니 중 오십여 인이 있거늘 칼을 빼어 호령 왈,

너희 비록 중이나 이런 난세(亂世)를 당하여 어찌 평안히 이 산곡에 있으리요. 만일 내 영을 거역하면 즉시 버히리라.”

하고 몰아 내니 제승이 일시에 복종하거늘 승군 오십여 명을 데리고 한가지로 구월산성(九月山城)에 들어가 군기를 내어 가지고 나아가다 길에서 연박경을 만나니 한 사람을 천거하여 왈,

이는 문의 있는 사람이니 성은 한이요 명은 명현이니 용맹이 과인하며 지략이 무적하여 일찍 왜선 수백 척이 결성에 이르렀으되 막을 장수 없더니 명현이 말하되 원컨대 수백 군을 얻어 소노로 좇아 나아가 치면 반드시 적군을 파하리라하며 즉시 백여 인을 준대 명현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과연 왜적을 파하고 적병 백여 명을 버혀 왔거늘 내 장천하여 마병장을 시키니 제 평안도로 가려 하거늘 머물러 장하(帳下)에 두었나니 가히 이 사람을 불러 대사를 의논하라.”

한대 이일이 즉시 명현을 불러 보고 대희하여 시절일을 의논하니 대답이 여수하고 의사가 훤찰하며 국량(局量)이 당할 자 없는지라. 이일이 대희하여 데리고 해주를 떠나 평양을 향하여 가더니 홍수원에 이르니 왜적 백여 명이 둔취하였거늘 이일이 군사를 잠깐 물려 산곡에 둔병하고 명현을 불러 왈,

너는 마땅히 지용을 시험하여 도적을 치라.”

한대 명현이 이르되,

이는 서절구투(鼠竊狗偸), 어찌 족히 개의하리요. 원컨대 백 명 군사를 주시면 도적을 파하리이다.”

하거늘 이일이 즉시 일백 군을 주니 명현이 왈,

장군은 다만 군사를 거느려 산곡에 둔병하여 밤에는 불을 들어 응하고 낮에는 쟁북을 울려 왜병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인하여 뇌자산에 들어가 군사를 데리고 홍수원에 돌아와 십 리를 물려 진치고 군사를 다 왜인(倭人)의 복색(服色)을 하고 호드기를 만들어 각각 하나씩 주어 가로되,

오늘밤 삼경에 적진을 파하리니 너희 등은 오직 내 기()를 보아 가며 적진에 돌입하여 짓치되 호드기 없는 군사는 다 죽이라.”

약속을 정하고 밤들기를 기다리더니 이때 왜병 백여 인이 또 남으로부터 홍수원에 들어와 합진(合陳)하거늘 이일이 급히 명현에게 기별하되,

도적이 침병하여 형세 더욱 크니 모름지기 대사를 상심하고 실수함이 없게 하라.’

한대 명현이 글로써 회답하되,

적병이 삼만이라도 족히 일컬을 바 없으니 장군은 근심치 말고 다만 내 하는 대로 뒤를 좇아 접응하소서.’

하고 차야에 군사를 다 하무(銜枚)를 물리고 바로 적진을 향하여 들어가니 적인이 바야흐로 잠을 익히 들었거늘 명현이 군사를 재촉하여 일시에 고함하고 어지러이 짓치니 왜병이 어두운 밤에 동서를 분별치 못하고 달아나거늘 명현의 군사 승세하여 일군을 함몰한지라. 평명에 이르니 명현으로 더불어 남은 적병을 파하고 대희하여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며 이원익 김응수로 더불어 적세를 살펴 파적(破敵)할 계교를 의논하더니 이때는 임진 추팔월이라 이원익이 제장으로 의논하되,

내 적세를 보니 장수 다 교만하고 군사 방심하여 우리를 업수이 여겨 태만함이 심하니 이때 성을 급히 치면 도적이 패하여 내성으로 들어가리니 제장은 각각 군사를 모아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영()을 어기지 말라.”

하고 이원익으로 선봉을 삼고 고각(鼓角)을 울리며 성문을 향하여 나아가니 적장 평행장이 조선 군사가 성문 가까이에 옴을 보고 즉시 아장 종일을 불러 대적하라 한대, 종일이 갑주(甲冑)를 갖추고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일백 군을 거느려 내달으니 위풍이 늠름한지라. 이일로 더불어 싸울새 이십여 합에 다다르니 이일이 평생 기력을 다하나 팔이 무겁고 정신이 어찔하니 능히 그 적수 아님을 알고 말을 돌려 들어와 자송원에 진치니라. 종일이 따르다가 이일을 잃고 이원익을 급히 치니 원익이 군사를 다 죽이고 거의 잡히게 되었더니 문득 한 도사(道士)가 공중에 서서 소매에서 복성화채를 내어 적진을 향하여 뿌리니 적은 듯하여 왜병이 수족을 놀리지 못하고 정신이 혼미(昏迷)하여 발이 땅에 붙고 떨어지지 아니하니 이로 인하여 군사를 죽이고 황겁하여 성에 들고 나지 아니하니 원익이 군사를 거두어 진에 돌아와 제장다려 왈,

종일은 천하 명장이라, 조선에는 대적할 장수 없으니 부디 용맹한 사람을 얻어 종일을 죽여야 적군의 예기(銳氣)를 꺾으리라.”

하고 탄식하더니 한 군사 앞에 나와 고하되,

소졸의 동리에 한 양반이 있으되 성명은 김응서(金應瑞)니 용맹이 과인하여 일일은 큰 범이 담을 넘어 돝[]을 물고 가거늘 그 양반이 몸을 공중에 소소와 한 손으로 그 범을 잡고 또한 손으로 그 발을 잡아 땅에 부딪쳐 죽이니 가히 호걸(豪傑)이라, 어찌 찾아 의논치 아니하시나이까.”

원익이 이 말을 듣고 기뻐 문왈,

너는 어디 있느냐.”

그 군사 답왈,

용강(龍岡) 있나이다.”

원익이 즉시 발마로 용강에 이르러 김응서를 찾아보고 종일의 장함을 이르고 없이 하기를 의논하며 바삐 가 도움을 청한대, 응서 가로되,

사세(事勢) 비록 그러하나 즉금(卽今) 천상(天喪)을 만나 바야흐로 초상(初喪)이니 사정에 떠나기 민망하도소이다.”

원익 왈,

비록 부상(父喪)이 중하나 나라가 위태하매 주상(主上)이 종사(宗社)를 버리시고 의주성(儀註城)에 몸을 감추워 주야로 통곡하시니 어찌 사정을 생각하며 일신을 돌아보리요. 당당히 나라를 받들고 도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운 후 수상(隨喪)함이 방해롭지 아니하니라.”

다만 가기를 재촉하니 응서가 하릴없이 즉시 상복을 벗고 영구(靈柩)에 하직한 후 원익을 좇아 진중에 이르니 일군이 흥락하더라. 원익이 응서로 더불어 한가지로 밥먹으며 황육(黃肉) 닷 근과 황소주(黃燒酒) 한 말을 하루 사시로 먹이며 청룡검(靑龍劍)을 주어 일일 연습하여 십 일을 기약하더니, 응서 원익을 대하여 계교를 일러 왈,

소장이 오늘 밤에 성을 넘어 들어가 종일을 버혀 오리니 장군은 모름지기 성밖에 있다가 혹 급함이 있거든 구하소서.”

하고 청포검을 짚고 성을 뛰어넘어 들어가니 성중이 고요하여 순라(巡邏)하는 군사 군막을 의지하여 자거늘 응서 자취 없이 군막을 지나 관문에 다다르니 수문(守門)하는 군사 큰 칼을 좌우에 세우고 다만 사 오인이 잠을 깊이 들었거늘 응서 청포검을 들어 일시에 다 버히고 문을 넘어 들어가니 이때는 정히 삼경이라, 관중(關中)에 등촉이 조요(照耀)하고 호위하였던 군사 다 물러 잠들고 인적이 고요하거늘 응서 칼을 들고 주저할 즈음에 마침 수청하던 기생(妓生)이 소피(所避)하러 나왔다가 응서를 보고 대경 왈,

그대 어떤 사람이관대 이런 위태한 땅에 들어왔느뇨.”

응서 왈,

나는 본디 원익의 부장이라, 이제 적장(敵將)을 죽이고 평양을 회복코자 하노니 네 또한 조선 사람이라, 날을 위하여 왜장의 동정을 자세히 이르라.”

기생 왈,

왜장의 성명은 종일이오 관중에 거처하되 사면에 휘장을 드리워 그 귀마다 방울을 달고 방울이 조금 요동하면 소리 요란한지라, 이러므로 불의지변을 방비하고 하루에 두 말 밥과 두 말 술과 이십 근 고기를 능음하며 높은 배게에 상()을 돋우 놓고 누웠으니 삼경 전에 귀로 자고 눈으로 보며 삼경 후는 눈으로 자며 귀로 들으며 사경 후는 귀와 눈을 함께 자오니 장군은 모름지기 상심하여 대사를 그르게 마르소서. 만일 소루함이 있으면 대화(大禍)를 만나리니 첩()이 먼저 들어가 저의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탐지하고 인하여 방울 귀를 솜으로 막은 후 문을 열고 나오거든 장군이 즉시 들어와 하수(下手)하시고 저의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하니 몸을 급히 피하소서.”

하고 몸을 돌려 들어가더니 오래도록 나오지 아니하거늘 응서 칼을 짚고 주저할 즈음에 그 기생이 나와 이르되,

급히 들어가 하수하라.”

하거늘 응서 칼을 빗기고 바로 당중에 들어가니 종일이 술이 취하여 장창(長槍)과 보검(寶劍)을 가로 쥐고 누워 코를 우레같이 골거늘 응서 급히 뛰어들어가 칼을 들어 종일의 머리를 한 번 힘써 버히고 몸을 날려 들보 위에 올라 앉으니 종일이 이미 머리 없으되 분기를 발하여 일어서며 청룡검으로 들보를 치니 응서 군복 자락이 맞아 찢어져 내려지며 종일의 머리와 몸이 상하(床下)에 거꾸러지며 피흘러 장중에 가득하거늘, 응서 급히 뛰어내려 종일의 머리를 손에 들고 장()을 헤치고 나오려 하니 그 기생이 울며 고왈,

장군이 어찌 소인을 사지(死地)에 두고 가시나이까.”

하며 따라 나오거늘 응서 잔잉히 여겨 차마 보지 못하여 한가지로 나오더니 장중이 자연 요란하므로 관중(關中)이 소동하여 사면에 순라하던 군사가 일시에 횃불을 밝히고 창검을 두르며 함성이 진동하거늘 응서 그 기생을 거두 잡고 한 손으로 청포검을 들어 전군을 짓쳐 좌우로 충돌하여 나오더니 성 밑에 다다라는 왜장 평행장이 칼을 두르고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왈,

네 간사한 꾀로 가만히 들어와 우리 장수를 죽이고 당돌히 달아나고자 하느냐, 네 죄를 스스로 생각하여 내 칼을 받으라.”

하고 달려들거늘 응서 평생 기력을 다하여 청포검을 휘두르며 죽기로써 짓쳐 나오니 그 봉예(鋒銳)를 뉘 능히 당하리요. 청포검 이르는 곳마다 왜장의 머리 추풍낙엽(秋風落葉) 같은지라. 홍혈(紅血)이 점점이 군복에 젖었더라. 한 문을 헤치고 성을 뛰어넘으려 하니 응서 비록 용맹이 유여하나 기생을 업고 홀로 만군 중을 헤쳐 나오니 기력이 진 하였는지라, 기생을 업고 성을 넘어 올 제 전대(纏帶)를 끌러 기생을 잡히고 성을 넘더니 적장 평수맹이 급히 달려들어 고함하고 칼을 들어 기생을 죽이고 바로 응서를 취하거늘 응서 크게 소리 지르며 잡은 칼을 흔들어 수명을 버히고 내달으니 원익의 비장 안일봉이 백여 군을 거느려 복병하였다가 응서를 만나 한가지로 돌아오니 원익이 대희하여 큰 공을 칭찬하며 대연(大宴)을 베풀어 서로 하례하고 종일의 머리를 높이 길에 달아 호령하고 승전고(勝戰鼓)를 울리니 제장과 군졸이 즐기는 소리 진동하여 적진 중에 들리는지라. 평행장이 군사로 하여금 웨여 왈,

너희 등이 정도(正道)로 싸우지 아니하고 간사한 꾀로써 자취 없이 들어와 나의 수족 같은 장수를 해하니 이는 불의라. 내 당당히 조선 인민을 다 죽이고 또한 너희 등의 머리를 베어 우리 기대(旗臺)에 높이 달아 나의 분함을 풀리라.”

하고 무수히 질욕(叱辱)하거늘 원익이 대로하여 좌우를 돌아보아 왈,

뉘 능히 저 도적을 잡아 이 한을 풀리요.”

선봉 이일이 수하 장수를 지휘하여 적진을 향하여 싸움을 돋울새 왜장이 아군의 세() 큼을 보고 진문을 굳이 닫고 나지 아니커늘 이일이 대호 왈,

빨리 와 내 칼을 받으라.”

하고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왜진을 바라고 쏘라.”

하니 적병이 진문을 굳이 닫고 나지 아니하거늘 백광언 지세풍 두 장수 말을 달려 왕래하며 싸움을 돋우되 마침내 고요하더니 석양 때에 안국사 진문을 크게 열고 내달아 창검을 들어 백광언으로 싸워 두 합이 못하여 광언을 배여 마하에 내리치니 지세풍이 황겁하여 달아나다가 또한 안국사에게 버힌 바 되니 이일이 싸울 마음이 없어 군사를 거느려 돌아오니라.

각설, 총융사(摠戎使) 김성일(金誠一)이 갑병 천여 기(千餘旗)를 거느리고 경성으로 향하여 오다가 부평 땅에 이르러 왜적 위탁을 만나니 위탁의 신장이 팔 척이요 범의 허리에 잔나비 팔이며 철갑을 입고 머리에 금투구를 쓰고 장창을 두르며 말을 달려 달아드니 장졸이 한번 보고 경겁하여 사산분주(四散奔走)하거늘 김성일이 대호 왈,

여 등(汝等)이 내 영을 좇지 아니코 도망하니 이는 도적보다 더한지라, 어찌 나라를 보존하리요.”

비장(裨將) 이송이 부끄러워 즉시 활을 잡아 도적을 쏘아 백여 인을 죽이고 성일이 또한 유엽전(柳葉箭)으로 백여 인을 죽이니 적이 대패하여 달아나니라.

 


이순신(李舜臣)의 해전(海戰)


재설, 수군대장 이순신(李舜臣)이 자는 여해(汝諧)니 문무가 쌍전(雙全)하고 육도삼략(六韜三略)을 무불통지(無不通知)하며 지용(智勇)이 과인하매 사람들이 칭찬하여 이르되 당대의 호걸(豪傑)이라 하더라. 나이 십칠 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임 후로부터 수군을 모아 연일 연습할새 일일 차등하여 상급을 중히 하니 제장과 군졸이 다투어 활쏘기 말달리기를 힘써 하니 순신이 왜적의 이름을 미리 알고 군기를 수정하며 전선(戰船) 사십여 척을 지으되 위에는 거북이 형상을 만들고 편철(片鐵)을 쳐 배 위에 입히고 구멍을 무수히 뚫어 벌의 집 모양으로 살과 철환을 통하여 도적을 쏘게 하였더라.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고 날마다 장졸을 모아 수전을 연습하더니 이때에 마다시 심안둔 두 장수가 용병 팔십만을 거느려 전라 신도(身島)를 건너 우수영(右水營)을 범하니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원균(元均) 등이 황황 혼겁하여 아무리 할 줄 몰라 다만 전선을 타고 나아가니 순신이 또한 전선을 타고 나올새 왜장 마다시 이십만 수군을 거느리고 나오며 기를 두르고 북을 울리며 전선을 재촉하며 급히 쳐 오니 원균 등이 또한 고조납함(鼓譟吶喊)하니 피차의 기치검극(旗幟劍戟)이 일광을 가리우고 쟁북 소리 물결을 뒤치는 듯하더라. 순신이 한 계교를 생각하고 비장 이광연을 명하여 작은 배를 태워 원균에게 통하여 왈,

이곳이 심히 협착(狹窄)하고 돌이 많아 파선하기 쉽고 수전할 곳이 아니니 대해로 나아가 다투면 우리에게 이할 것이니 모름지기 그대 등은 내 뒤를 따르고 그릇됨이 없게 하라.”

하고 순신이 적으로 더불어 두어 번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배를 몰아 대해로 향하여 달아나니 원균과 이억기 등이 왜적으로 더불어 싸우다가 또한 양패(佯敗)하여 순신을 좇아 물러가니 적이 선두에서 대소 왈,

순신이 혼겁(魂怯)하여 도망한다.”

하고 일시에 고각을 울리며 전선을 재촉하여 따르거늘 순신이 배를 돌려 군사를 호령하여 일시에 쏘라 하니 이억기 전선은 우편으로 돌아들고 이순신 판옥선(板屋船) 사십여 척은 바로 왜진 가운데로 들어가니 삼노군이 상거 십여 보는 두고 일시에 접전할새 살과 철환은 빗발치듯 하고 서로 살벌하는 소리는 해중이 끓는 듯하더라. 순신의 배에 화포를 많이 실었는지라, 군사를 호령하여 적선을 바라고 일시에 화포를 놓으니 처처에 불이 일어나고 화염이 충천하니 적군이 무수히 죽고 또 대완포(大碗砲)를 놓아 적선을 많이 파하니 왜병이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만여 명이라. 왜장 마다시 대경하여 동쪽으로 달아나다가 영채를 세우고 크게 호군하여 제장과 군사를 중상하더니, 차시 왜장 마다시 아오마 즉시 전선 이백여 척을 거느리고 본진을 지키었더니 제형의 죽음을 듣고 분기를 이기지 못하여 즉시 전선을 다 거느리고 이날 삼경에 순신의 진으로 오더라.

차시 순신이 적이 올 줄 알고 군중에 전령하되,

금야에 적이 우리 진을 겁칙하리니 모두 자지 말고 대완포를 준비하라.”

하더니 마득시 전선을 재촉하여 들어오며 크게 고함하거늘 순신이 군사를 호령하여 대완포를 일시에 놓으니 적선이 편편이 깨어지고 군사 물에 빠져 죽는 수를 이루 헤아리지 못할지라. 마득시 대패하여 달아나거늘 순신 억기 원균 등이 한데 모아 진을 해중에 옮기고 크게 호군하더니 문득 동남풍이 불거늘 순신 왈,

금야에 도적이 반드시 순풍을 좇아 들어와 불을 놓을 것이니 우리 준비하였다가 대적하리라.”

하고 아장을 명하여 전선 십여 척을 거느려 나아가되 초인(草人)을 무수히 만들어 한 배에 싣고 방패를 세우며 청룡아기(靑龍牙旗)를 꽂아 작일 진친 데 있으라 하고 이억기로 오십 척을 거느려 일러,

오십 리만 가면 작은 섬이 있으니 수풀에 숨었다가 적선이 노량포(鷺梁浦)를 지나거든 내달아 엄습하라.”

하고 또 원균으로,

수군 삼천을 거느려 동도(東島)섬에 가 수풀에 숨었다가 왜선이 지나거든 내달아 엄습하면 반드시 적선을 파하리니 제장은 범홀히 말로 급히 나아가 영을 어기지 말라.”

한대 각각 배를 저어가 매복하니라.

이때에 마득시 동남풍이 일어남을 보고 마음에 기뻐하여,

어제 패한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제장을 분부왈,

이제 동남풍이 일어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로운 증좌라. 마땅히 순풍을 좇아 들어가 적군을 파함이 여반장(如反掌)이라.”

하고 즉시 전선 십여 척에 섶[]을 많이 싣고 석유황(石硫黃) 화약 철환을 갖추되 배마다 청포장을 둘러치고 선두에 기를 꽂고 바람을 응하고 뒤에는 군사 실은 배 백여 척을 실어 순풍을 좇아 나는 듯이 들어오며 일시에 방포하며 어지러이 짓쳐 오되 조금도 요동함이 없거늘 심중에 의혹하여 가까이 와 보니 이는 초인(草人) 실은 배라. 마득시 대경하여 꾀에 속은 줄 알고 배를 돌이키더니 문득 뒤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웨여 왈,

도적은 묘한 계교로 깨어지도다.”

하며 일시에 내달아 왜선을 둘러싸고 이르되,

오늘은 하늘로 오르랴 땅으로 들랴, 어디를 가리요. 빨리 항복하여 죽기를 면하라.”

하며 화전(火箭)과 진천뢰(震天雷)를 놓고 유엽전(柳葉箭)과 편전(片箭)을 무수히 발하여 급히 치니 마득시 대적코자 하나 초인 실은 배를 만나 이미 살과 철환이 다 진하였는지라, 감히 대적지 못하고 군사를 다 죽이고 겨우 백여 명이 남았거늘 배를 재촉하여 남을 향하고 달아나더니, 문득 수상(水上)으로 좇아 소리 들리며 기러기 무리 떠오듯 무수한 적선이 내려오며 큰 기에 썼으되 조선 대장 이순신(朝鮮大將李舜臣)’이라 하였더라. 마득시 대경하여 피코자 하나 어디로 가리오. 다만 배를 머무르고 죽기로써 싸우더니 순신이 대도(大刀)를 들고 뱃머리에 나서며 군사를 크게 호령하여 급히 전선을 몰아 일시에 짓치고 또 이억기와 원균 등이 이르러 좌우로 협공하니 왜병이 동서를 분변치 못하고 살[]도 맞아 죽으며 물에도 떨어져 남은 군사 아무리 할 줄 모르거늘 순신이 창을 들고 왜선에 뛰어올라 좌우로 충돌하여 왜적을 풀베듯 버히니 한 왜적이 가만히 활을 달여 순신의 어깨를 맞히니 순신이 왜적을 대적지 못하고 창을 끌고 본진으로 오니 몸에 피흘러 갑옷에 사무쳤더라. 제장이 대경하여 갑옷을 벗기고 보니 어깨에 철환(鐵丸)이 두엇이나 박혔거늘 모두 황겁하여 아무리 할 줄 모르거늘 순신이 불변 안색하고 좋은 술을 가져오라 하며 취토록 먹고 제장으로 하여금 칼을 주어 철환을 파내라 하고 신색을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며 제장으로 더불어 군무를 의논하니 보는 자 뉘 아니 실색하리요. 철환을 파내고 약을 발라 깁으로 동인 후 중인이 권하여 고요히 들어가 조리하라 한대, 순신이 비록 상처 심히 아프나 차시를 당하여 대장이 병들어 누웠으면 군중이 놀랄까 두려 눈을 부릅뜨고 꾸짖어 왈,

난세를 당하여 조그만 상처를 가지고 조리할진대 군중이 소동할지라, 다시 이르지 말라.”

하고 한산도(閑山島)로 나아가 진치고 군사를 중상하고 상처를 조리할새 순신이 문득 곤하여 부채를 쥐고 북을 의지하여 잠깐 조으더니 한 노인이 앞에 나와 이르되,

장군이 어찌 잠을 자느뇨. 도적이 들어오니 빨리 대적하라. 나는 이 물 지키는 신령[海神]이러니 급함을 고하노라.”

하고 크게 소리지르거늘 놀라 깨달으니 한 꿈이라. 순신이 눈을 들어 원근(遠近)을 살피니 수색(水色)은 하늘에 닿았고 월광(月光)은 벽수(碧水)에 희미하였거늘 순신이 처량한 회포를 이기지 못하여 서안(書案)을 의지하여 뱃전을 치며 한 소리를 읊으니 그 노래 웅건(雄建)한지라, 제장이 놀라 진중이 요란커늘 순신이 제장을 모으고 이르되,

오늘 동남풍이 불지니 바삐 나아가 우리 승전하고 돌아와 방비하리라.”

하고 차야를 타 가만히 들어와 겁칙할새 순신이 군기를 다스려 대적하라 하니 제장이 보지 아니하나 오직 순신은 보고 화포와 기계를 준비하더니 과연 삼경에 미쳐서는 달이 서령(西嶺)에 비쳤는데 왜적이 가만히 월하(月下)에 배를 저어 들어오거늘 순신이 제장을 명하여 천하성을 불어 일시에 방포하고 고함하니 도적이 또한 방포하며 시석(矢石)을 어지러이 날리니 피차의 고각과 함성이 물결을 뒤치는 듯하며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더라.

 

차설, 순신이 중장을 호령하여 좌우로 내달아 급히 치니 왜적이 대패하여 징을 울리며 남녘을 바라고 달아나거늘 원균의 비장 이영남이 따라가 왜선 일 척과 왜병 오십 인을 잡아들인데 왜병이 넋이 없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거늘 순신이 창검을 쥐고 왈,

너희 중 혹 조선 사람이 있느냐 바로 고하라.”

하니 한 사람이 고왈,

소인은 거제(巨濟)사람 김대용이러니 적에게 잡혀 가 적군에 충수(充數)하였삽더니 오늘에야 우리나라에 돌아오니 부모를 만남 같도소이다.”

하고 울기를 마지아니하거늘 순신이 문왈,

네 조선 사람으로 적군에 들었으니 반드시 조석의 기미를 알 것이니 자세히 아뢰라.”

그 사람이 왈,

왜선 사백 척은 장화포에 들어 숨고 또 백여 척은 안골포(安骨浦)에서 왜장 심안둔이 영거하여 서해로 가고자 하나 장군이 여기 있으므로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아직 섬에 올라 군막을 치고 있으니 장군은 빨리 쳐 공을 이루소서.”

하거늘 순신이 무사를 호령하여 왜적을 다 죽이고 즉시 오백 전선을 조발하여 밤들기를 기다려 가만히 장화포로 가며 또 정병 백여 기로 아장을 주어 육로(陸路)로 들어가 우리 전선이 장화포 어귀에 이름을 보고 일시에 군막에 불을 놓고 앞을 엄습하라 하고 수다 전선을 재촉하여 나아갈새 장화포 어귀에 다다라는 문득 섬에서 불이 일어나며 왜병이 전선을 타고 장화포를 지나 안골포로 가거늘 순신이 전선을 몰아가며 짓치고 육로로 들어간 군마는 도적의 군막을 불지르고 마주치니 왜병이 갈 곳이 없음을 보고 물에 빠지며 혹 불에도 타서 죽으며 사면으로 이산(離散)하거늘 순신이 왜선 백여 척을 파하고 인하여 안골포로 향하여 들어가니 왜장 심안둔이 장화포가 다 파하고 순신의 전선이 안골포로 들어온다 함을 듣고 대경하여 즉시 전선을 거느려 안골포를 버리고 남해 안도(安島)섬으로 달아나니라.

순신이 전선을 재촉하여 나아가니 왜병이 간데없거늘 이억기 원균으로 더불어 한산도에 들어와 승전한 첩서(捷書)를 보내고 전선을 무수히 지으며 군기를 수정하여 주야로 왜적 파할 의논을 마지아니하더라.

각설, 조원익은 창원 사람이니 일찍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나라에 득죄하여 평안도 강동(江東) 땅에 정배되니 원익이 강동에 이르러는 의탁할 곳이 없어 학동(學童) 삼십여 인을 데리고 이십여 년을 전학하였으되 뜻이 높고 행실이 출중하므로 타읍 선비들이 아름다운 이름을 듣고 구름 모이듯하더니 임진년에 이르러는 왜적이 조선을 쳐 경성을 범하여 상이 종사를 버리시고 평양에 유하신다 하거늘 원익이 생각하되,

이런 난세를 당하여 몸을 한가히 초야에 묻혀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리요.’

하고 탄식 왈,

내 비록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자 하나 빈궁이 태심하여 단독 일신이 사고(四顧) 친척에 의지할 곳이 없으니 무엇을 하리요.”

하고 슬피 울기를 마지아니하니 모든 선비 그 마음을 감격하지 않을 이 없더라. 원익이 비록 기질이 잔약(孱弱)하고 무예 갖지 못하나 충의지심(忠義之心)과 정열한 행사로 인심이 감동하여 원익을 좇아 일어나는 자 이백여 인이어늘 원익이 다 거느리고 상원 고을에 들어가 군기를 내어 가지고 삭주(朔州)로 향하더니 홀연 대풍을 만나 사람이 붙어 섰지 못하거늘 잠깐 산곡에 들어 쉬더니 이경(二更)은 하여서 산중서 한 사람이 웨여 왈,

예서 남으로 두어 고개를 넘어가면 큰 여염(閭閻)이 있고 그 고을에 왜적 백여 명이 둔취하였으니 조 장군은 이때를 타 들어가 도적을 파치 아니하고 어찌 공을 세우리요.”

하거늘 원익이 군사를 명하여 그 사람을 불러오라 하니 군사가 나아가 본즉 사람이 없는지라. 돌아와 그대로 고한대 원익이 탄왈,

이는 반드시 신령이 길을 가르침이로다.”

하고 즉시 군사를 거느려 두어 고개를 넘어가니 바람이 크게 불거늘 그 마을 앞에 가 불을 놓으며 급히 고함치니 왜적이 대경하여 급히 내달아 보니 불꽃이 하늘에 닿았고 사면에 함성이 진동하거늘 창황히 나와 불을 무릅쓰고 사면으로 달아나는지라. 원익이 군사를 재촉하며 따라 어지러이 짓치니 왜병이 무수히 죽고 남은 도적은 겨우 목숨을 도망하여 달아나니라. 원익이 도적을 파하고 그 마을에 들어가 도적의 노략한 양식이 삼십여 석이오 우마계견(牛馬鷄犬)이 많이 있거늘 그 쌀로 밥짓고 그 고기를 삶아 호군하고 영원(寧遠)으로 향하니라.




2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각설, 왜장 청정이 함경도에 들어가 함흥(咸興)을 웅거하고 이십칠관 수령을 다 제 앞으로 출석하며 각 읍 창곡(倉穀)을 수운하여 저의 근본을 삼으니 함경 일도는 전부 저희 땅이 되었는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이때에 북병사(北評使) 정문부(鄭文孚)와 회계첨사 고경민(高敬民)과 갑산부사 이유익이 본군이 함몰하매 피난하여 백두산(白頭山)에 숨었더니 문부가 나라를 위하여 왜적을 치고자 하나 단신이라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주야 자탄하며 생각하되,

산중에 피난한 자 중 혹 사의(死義)를 아는 자 있으면 함께 일을 도모하리라.’

하고 백두산을 곳곳이 심방하여 다니더니 한곳에 다다르니 백여 명 사람이 모여 소를 잡고 술을 많이 장만하여 잔치를 하거늘 문부가 문을 열고 들어가 좌중에 예하고 가로되,

내 이제 말을 냄이 불안하거니와 이 같은 난세(亂世)를 당하여 음주연락(飮酒宴樂)은 무슨 일인고. 방금 천하가 대란하여 임금이 종사를 버리시고 의주로 피난하사 일일이 고국을 생각하시며 통곡하시니 조선은 예의지국이어늘 일조에 왜노가 창궐하여 도성(都城)을 취하여 웅거하며 백성을 잔해(殘害)하여 인심이 조현하매 회복할 기약이 없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나는 북병사 정문부러니 매양 국가를 위하여 도적을 쳐 부끄러움을 씻고자 하나 다만 충의있는 사람을 만날까 하여 다니더니 천행으로 오늘날 그대 등을 만나니 신수와 기골이 장건할 뿐 아니라 반드시 충절(忠節)이 있을지라. 어찌 무단히 산곡에 둔취(屯聚)하여 백성의 재물만 노략하여 먹고 속절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적화를 면치 못하리니 그대 등은 모름지기 재삼 생각하라.”

그 중 고경인이라 하는 사람이 자칭 의병장(義兵將)이라 하고 각군을 모아 백두산에 들어가 밤으로 행하여 노략할새 좋은 술과 고기를 얻어 매일 취하여 먹고 있더니 이 날 문부의 말을 듣고 마음에 무록하여 능히 대답지 못하거늘 문부가 다시 감언이어(甘言利語),

그대들은 이제 날로 더불어 한가지로 왜적을 쳐 뜻을 이루면 아름다운 이름이 동국에 현달할 것이요, 불행하여 이기지 못하나 구천지하(九泉地下)에 충절의 사람이 되어 부끄럽지 아니하리니 다시금 생각하라.”

라고 이르자 고경인 등 백여 인이 일시에 절하고 항복하여 왈,

장군의 말씀이 사리에 마땅하온지라, 어찌 순종치 아니하리오.”

하거늘 문부 즉시 고경인을 데리고 비아진에 들어가 군기를 수정할새 고경인 등이 각각 피난군을 모으니 오백여 명이라, 이 날 돝을 잡고 제문 지어 하늘께 제하니 그 글에 하였으되,


조선국 함경도 북병사 정문부 등은 삼가 일월성신(日月星辰)께 고하옵나니 국운이 불행하여 남방 오랑캐 방자히 들어와 조선 예의지국을 일조에 병탄코자 하오니 식록신민(食祿臣民)이 어찌 분울(憤鬱)치 아니리이까. 이제 충의를 들어 국가의 위태함을 붙들고저 하옵나니 일월성신과 후토신령(后土神靈)은 국가의 형세를 감동하여 전필승공필취(戰必勝功必取)하게 도우소서.’

하였더라.

 

제사 지내기를 마치매 부윤(府尹)의 벼슬하던 사람 김익대 집에 내려와 명주 열닷 필을 내어 기치(旗幟)를 만들어 세우고 큰 기에 쓰되 의병장 정문부(義兵將鄭文孚)’라 하고 군사의 전립(戰笠) 위에 충성 충()자를 쓰며 군기를 정제하여 먼저 회령에 웅거한 왜적을 치려 할새 기치와 창검을 세우고 쟁북을 울리며 군사를 재촉하여 회령으로 나아가니 이때 회령 관속이 왜적에게 곤하여 매양 생각하되,

언제 본국병이 이르러 도적을 칠꼬.’

하며 대한(大旱)에 비 바라듯 하였더니 이 날 정문부의 군사가 이름을 보고 왜장 경감로에게 고왈,

조선의 병 십만이 성하에 이르렀다.”

하거늘 경감로가 미처 군사를 모으지 못하고 필마로 황망히 나오더니 백성이 다투어 감로를 쏘아 죽이고 문부를 맞아 들어가니 문부가 회령을 회복하고 각 관에 발문하니 그 끝에 하였으되,

의병장 정문부는 십만 충의지사(忠義之士)를 발하여 함경 일도에 웅거한 왜병을 소멸하려 할새 동심육력(同心戮力) 하여 도성의 위태로움을 붙들고 수하에 든 백성을 건지고자 하나니 격문(檄文) 이르는 날에 기미를 살펴 서로 접응하라.’

하였더라. 격문을 발한 후 창곡(倉穀)을 내어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니 원근 백성이며 이산한 군민들이 달려오는 자 부지기수라. 열읍 청북(淸北) 등처 군민이 일시에 문부를 응하여 기군하고 회계첨사 고명이 가만히 본진 군사를 거두어 회령으로 오더니 경성 고을에 들어가 국경인(鞠景仁)을 버히고 주야로 행하여 홍원으로 도래하니 군사 만여 명이요 갑산부사 성일이 또한 갑병 천여 명을 거느리고 함흥으로 향할새 낮이면 산상에 올라 일자진을 치고 주라(朱螺) 대평소(大平簫)를 불어 혼동케 하고 밤이면 횃불을 들어 사면에 벌여 세우고 쟁북을 울리며 웅장한 형세를 뵈더라.

이때에 청정이 사면으로 의병이 일어남을 보고 경겁하여 높은 대에 올라 적세를 살핀 후 돌아와 군사를 조련하더니 십여 일 후 정문부 조원익 등의 의병이 함께 이르니 삼만여 명이라. 함흥 십 리를 물려 진치고 밤들기를 기다릴새 문부가 장대(將臺)에 올라 제장을 보고 의논 왈,

원익은 오천 군을 거느리고 먼저 동문을 범하라. 나는 후군이 되어 남문에 불을 놓고 치면 도적이 필연 서문으로 가리니 양문으로 급히 몰아 협공하면 일정 대평산(大平山)으로 달아날지라. 뉘 감히 대평에 매복하였다가 대공을 세울꼬.”

말이 마치지 못하여 한 장수 웨여 왈,

소장이 원컨대 이 소임을 당하리이다.”

하거늘 모두 보니 이는 갑산부사 이유익이라. 즉시 삼천 군을 주어 보내고 삼경을 기다려 군사를 밥먹이고 사경에 행군하여 함흥성을 칠새 무수한 횃불을 세우고 크게 웨여 왈,

적장 청정은 사면을 돌아보아 살기를 도모하라.”

하고 치기를 급히 하니 청정이 대경하여 황망히 말께 올라 장검을 들고 내달아 동문을 막더니 군사 급히 보하되,

남문에 불이 일어나고 무수한 군사 벌써 성에 들어와 우리 군사를 다 죽인다.”

하거늘 청정이 더욱 놀라 남문을 구코자 하더니, 함흥 관속들이 가만히 군기에 불을 놓고 문 지킨 왜장을 죽이고 성문을 열어 의병을 맞으니 원익이 큰 칼을 들고 당선(當先)하여 왜병 백여 명을 죽이고 성에 들어가 좌우로 충돌하여 왜병을 삼 베듯 버히고 문부의 군사 또한 남문에 불을 놓고 일시에 들어가 어지러이 짓치니 청정이 죽도록 싸워 마침내 저당치 못할 줄 헤아리고 오직 서문이 고요하거늘 군사를 거느려 급히 서문을 나매 대평으로 달아나니 동방이 이미 밝았는지라. 청정이 대군을 거느리고 대평을 넘더니 문득 영상을 좇아 주라 소리 나며 대호 왈,

의병장 이유익이 예와 기다린 지 오랜지라 궁진(窮盡)한 도적은 닫지 말라.”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급히 쏘라 하니 청정이 군사를 태반이나 죽이고 죽도록 싸워 전면을 헤치고 패잔군을 거두워 안변(安邊)으로 들어가 웅거하니라.


 

유정(惟政)의 승군(僧軍)


각설, 왜장 선강정이 삭령 고을을 함몰하고 이천(伊川)군수를 죽이며 인하여 김성(金城)을 치고 또 회양(淮陽)에 머물며 각처에 노략질하더니 금강산(金剛山) 유점사(楡岾寺)에 들어가 법당에 앉고 제승을 불러 호령 왈,

너희 절에 있는 재물을 다 내어 놓으라. 만일 지완(遲緩)하면 즉시 버히리라.”

하니 절중들이 황겁하여 재물을 내어 월대(月臺)에 쌓으니 태산 같은지라. 혹 거역하는 중은 버히고 혹 동여매고 난타할 즈음에 한 중이 밖으로서 들어와 바로 부처께 예하고 돌아와 왜장을 향하여 읍하더니 선강정이 자세히 보니 그 중의 용모 비상하고 범의 눈이며 사자 뺨이요 수염 길이 자이 남으니 왜적이 좌우로 창검을 들리고 둘렀으되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거늘 비상한 중인 줄 알고 일어 답례하니 유정(惟政),

소승은 이 절에 있는 유정이라 하는 중이로소이다. 장군이 많이 험정에 괴로이 구치(驅馳)하사 폐암(弊庵)에 이르시되 소승이 먼저 맞지 못하오니 다만 죄를 기다리나이다.”

하니 소매에서 조그만 종과 차 넣은 병을 내어 표자(瓢子)에 부어 왜장에게 권하여 가로되,

산중에 각별한 별미 없이 송백차(松柏茶)를 드리나니 고이히 여기지 말으소서. 산승 행장(行狀)이란 것이 오직 표자 일 개요 석간(石澗)에 흐르는 물과 산상의 백운(白雲)뿐이라. 구태여 가져가려 하시거든 마음대로 가져가라.”

하고 사기 태연하니 왜장이 그 말이 갈수록 안연(晏然)함을 보며 반드시 속승(俗僧)이 아니라 하여 가로되,

그대는 진실로 범승이 아니로다.”

하고 유정을 청하여 데리고 안변 고을에 들어가 청정을 보고 가로되,

차승은 범승(凡僧)이 아니라 머물러 두고 대사를 의논함이 좋을까 하노라.”

청정이 유정을 보고 예로 대접하며 고금지란(古今之亂)을 의논하니 문답이 창해 같은지라, 청정이 대희하여 머무를새 청정이 대접을 관곡(款曲)히 하되 유정이 돌아갈 의사를 생각하고 문득 청정에게 묻기를,

왜국이 조선을 더불어 인국(隣國)이어늘 어찌 침노함이 이렇듯 심하뇨.”

청정 왈,

조선이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우리 명을 순종치 않으므로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이제라도 조선 국왕이 우리를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대명을 치고 인하여 우리나라를 섬겨 항복하면 도로 성지(城地)를 주고 왕을 봉하여 다시 침노치 아니리라.”

유정이 발연(勃然) 변색 왈,

조선왕은 대원한 임금이시고 또 조선이 일본으로 더불어 비컨대 대국이라, 체통이 유별하고 일본 관백은 본디 미천한 사람으로 그 임금을 내치고 스스로 서니 이는 천하의 큰 도적이라, 어찌 대국 임금이 소국 도적을 섬기리요.”

꾸짖기를 마지아니한대 청정이 대로하여 좌우로 꾸짖어 원문(轅門) 밖에 버히라 한 대, 유정이 조금도 두리는 빛이 없고 앙천대소 왈,

내 잠깐 장군을 시험함일러니 진실로 소장부로다. 한 사람이 도적이라 하면 도적이 되며 성인이라 하면 성인이 되는가, 천하가 다 성인이라 하여야 성인이요 천하가 다 도적이라 하여야 도적이 되나니 이는 작은 필부(匹夫)라 어찌 대사를 이루리요.”

하고 쾌히 걸어 나가니 청정이 도로 무료하여 친히 내려가 무사를 꾸짖어 물리치고 유정의 소매를 이끌어 장중에 들어와 사례 왈,

내 거의 신승을 해할 뻔하였나니 그대는 모름지기 허물치 말고 안심하라.”

한대 유정이 웃고 손사(遜辭)하더라. 이튿날 유정이 청정에게 이르되,

내 들으니 선강정이 삭령으로 간다 하니 반드시 경기감사 심대를 죽이리니 내 평일 심대로 더불어 좋은 사이러니 나아가 구코자 하노라.”

청정 왈,

그대 여기 있어 어찌 죽음을 아는다.”

유정이 웃고 왈,

대장부 세상에 처하매 비록 만 리 밖 일이나 어찌 헤아리지 못하리요. 하물며 삭령은 불과 천 리라, 어찌 모르리오. 장군이 사람 보기를 썩은 풀같이 하도다.”

하고 대소하기를 마지아니하니, 홀연 서문 지킨 군사가 글을 올리거늘 바라보니 이는 선강정이 심대를 죽인 승전보장(勝戰報狀)이어늘 청정이 대경하여 급히 유정을 청하여 가로되,

그대는 진실로 세속 범승이 아니니 오래 요란한 전장에 머물음이 불가하리라, 빨리 산야로 들어가 선도(禪道)를 힘쓰라.”

하거늘 유정이 청정을 이별하고 유점사로 돌아와 사승(寺僧)들을 다 불러 왈,

우리는 조선국 중이라, 이제 우리 예의지방(禮義之邦)이 마침내 왜노(倭奴)의 웅거한 바 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며 우리 비록 중이나 또한 조선 인민의 자손이라, 이제 왜노에 속할진대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요. 내 당당히 나라를 위하여 은혜를 갚고자 하노라. 너희가 내 영을 듣지 않으면 즉시 버히리라.”

한대 모든 중들이 순종하거늘 유정이 차일 군기와 기치를 수정하고 큰 기에 쓰되 조선 승군 도원수 유정(朝鮮僧軍都元帥惟政)’이라 하고, 일변으로 군복을 입으며 일변으로 강원도 각처에 사통하여 승군을 모으니 차차 이 소문을 듣고 바람을 좇아 오는 자 천여 명이러라.

각설, 유정이 유점사에서 승군을 데라고 들에 내려와 일일 연습하며 활쏘기와 총놓기를 익히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각처 승군들이 연일하며 유정이 그 군사를 거느리고 고성현에 들어가 군기를 내어 가지고 양덕 맹산을 지나 의주로 향하니라.

각설, 김제군수 정남과 해남현감 변홍정이 군사 오백여 명을 거느리고 웅천고을에 영채를 세우고 왜병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더니 차시 왜장 평정성이 이만 병을 거느리고 경성을 지나 전주로 향하더니 정남 변홍정이 웅천에 둔병함을 보고 총 잘 놓는 군사 일천으로 좌편에 있게 하고 창군 일백으로 우편에 세우고 일시에 북을 울리며 기를 두르고 좌우로 내달아 총을 놓으니 정남의 군사 삼대 쓰러지듯 하고, 또 창든 군사 일시에 달려들어 목책(木柵)을 파하고 썩은 풀베듯 무수히 죽이거늘 정남 변홍정이 각각 창검을 들어 적병을 대적하며 크게 군사를 호령하여 유엽전(柳葉箭)으로 쏘니 왜병이 잠깐 물러가거늘 정남 변홍정이 좌우로 충돌하니 왜병이 살을 맞아 수백 명이 죽고 진세(陣勢) 어지럽거늘 평정성이 쟁쳐 군을 거두고 남쪽으로 달아나더니 앞에 일지 군마가 오거늘 이는 왜장 안국사의 군사라. 평정성이 대희하여 합병하니 군사가 만여 명이러라. 다시 웅천을 향하여 나아오니 정남 변홍정이 맞아 대진하고 종일토록 어지러이 싸우니 피차에 죽는 군사 무수하여 주검이 뫼같이 쌓이고 피흘러 내가 되었더라.

차일 초혼(初昏)에 왜병이 군사를 몰아 정남의 진을 겁칙코자 하여 나아오거늘 정남이 군사를 호령하여 쏘라 한대 군사 동개에 살이 없는지라, 하나도 쏘지 못하니 정남이 하릴없어 좌수에 창검을 들고 우수에 철편을 두르며 왜군을 짓치니 붉은 피 점점이 튀어 군복에 사무치더라. 좌충우돌하여 적군을 죽이더니 문득 칼이 부러지거늘 주먹으로 무수히 치더니 기운이 쇠진하여 마침내 난군 중에 죽으니 변홍정이 또한 철퇴를 들고 왜진에 들어가 어지러이 치니 왜병이 철퇴를 맞아 팔도 부러지며 혹 머리도 깨어지며 무수히 죽이다가 또한 기력이 진하여 입으로 피를 토하고 죽으니 일군이 다 흩어지고 군기만 남았더라. 평명에 평정성이 보고 불쌍히 여겨 군사로 하여금 죽은 군사를 모아 쌓고 흙을 덮으며 큰 나무를 깎아 세우고 쓰되 조선 충신 정남변홍정지처라 하니라.

이튿날 안국사로 더불어 군사를 거느려 전주로 향하여 가니 차시 재령 사람 정남이 저희 노복과 동리사람을 데리고 피난하다가 급히 전주성에 들어가 관속과 인민을 놓아 군기를 주어 가로되,

왜적이 웅천을 파하고 승승하여 전주를 치러 오니 제군은 힘을 다하여 싸우라.”

하고 급히 성문에 올라 성가퀴[城堞]마다 무수한 기를 세우고 군사로 하여금 고각을 울리며 방포와 시석(矢石)을 내리어 왜군이 이미 웅천싸움에 많이 죽은지라, 급하여 밤으로 도망하니라.

각설, 조방장 원후 이전부 등이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여주로 나오더니 왜적 평수정이 육만 군을 거느리고 충주를 지키며 김수 등은 사만 군을 거느려 원주를 지키게 하고 군사를 놓아 각처에 노략할새 혹 사오백이며 혹 육칠백이 연하여 죽산 양지 용인 양근 광주로 왕래하며 노략질하니 원후가 군사를 거느려 여주 기미포에 매복하였더니 왜장 길인걸이 오천 군을 거느리고 기미포를 건너오거늘 원후가 방포를 놓으니 복병이 일시에 내달아 급히 치니 왜병이 물에도 빠지며 살도 맞으며 죽으니 길인걸이 군사를 다 죽이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도망하니라. 이 적에 이천부사 변응성이 삼천 군을 거느려 전선을 타고 가만히 안개 속으로 배를 저어 나아가며 도적을 살피더니 왜병 오천이 노략질하거늘 편전과 유엽전으로 일시에 쏘아 왜적 천여 명을 죽이니 왜군이 도망하여 그 후부터는 여주 양주 근처에 감히 다니지 못하더라.

재설, 강원감사 유형립이 원후로 하여금 도적을 치라 하되 원후가 군사 오천을 거느리고 나아가더니, 군사 기갈이 심하여 걷지 못하거늘 노변 여사(旅舍)에 들어가 양식을 얻어 밥을 지으며 군사를 쉬게 하더니 왜장 선강정이 탐지하고 군사를 몰아 급히 엄습하니 원후가 대경하여 미처 군기를 차리지 못하고 군기 다 헤어지거늘 원후가 하릴없이 군관 칠 인만 거느리고 창검을 두르며 달아드니 선강정이 맞아 싸워 삼십여 합에 이르러는 적세를 능히 대적지 못하여 한 문을 헤치고 달아나 한 언덕을 의지하고 앉았더니 언덕 위에서 문득 고함 소리 나며 적이 일시에 내달아 총을 놓아 원후와 군관 칠 인을 일시에 철환을 쏘아 죽이니라.

 

 

곽재우(郭再祐)와 김덕령(金德齡)


각설, 회람 사람 곽자위(郭再祐)의 자는 계수(季綏)니 감사 곽월의 아들이라, 비록 급제는 못하였으나 문장이 출중하고 지략이 관영(貫盈)한지라, 시절이 어지럽거늘 가산을 흩어 사람을 사귀어 군정(軍丁) 수백 인을 얻으니 즉시 나와 도적을 칠새 왜선 삼십 척을 쳐 물리치고 창곡 백여 석을 취하여 군사를 크게 호궤(犒饋)한 후 초계(草溪)고을에 들어가 군기를 내어 가등첨사 정응남으로 군관을 삼고 열읍 창곡 일천여 석을 얻어 기민(機敏)을 진휼(賑恤)하니 이십여 일 만에 군사 만여 명이 모였더라. 이 적에 안국사 갑병 팔십만을 거느리고 물을 건너 의령을 치려 할새 강변의 해자(垓字)깊으니 혹 군사 빠질까 나무로 깎아 물의 표를 삼으니 곽자위 군사로 탐정하여 왜적이 물에 표함을 알고 즉시 그 표를 빼어 옮겨 꽂고 해자 가에 복병하였더니 과연 차야에 안국사 이만 군을 거느리고 물을 건너오다가 표를 그릇 보고 군사 다 빠져 죽거늘 복병이 일시에 내달아 어지러이 치니 안국사 대패하여 달아나니라. 자위가 비로소 군위를 정할새 장대에 앉고 기치검극(旗幟劍戟)을 좌우로 세우고 제장을 다 붉은 옷에 백마를 태우며 큰 기에 쓰되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하고 장졸을 모아 호령 왈,

오늘 안국사 패하였으니 밤을 타 반드시 우리 진을 엄습하리니 제장은 모름지기 상심하여 적을 막으라.”

하고,

장수 십여 인씩 정하여 좌우 전후 산곡에 매복하였다가 적병이 지나거든 내달아 시살하되 혹패혹주(或敗或走)하라, 자연 계교 있으리라.”

하고 분부하기를 마치매 일군을 지휘하더니 차일 안국사 오만 군을 거느리고 바로 곽자위 진을 향하여 돌입코자 하거늘 자위 진문을 닫고 요동치 아니하거늘 국사가 싸움을 돋워 날이 늦으매 자위 진문을 크게 열고 백마 탄 장수 창검을 두르고 적장으로 더불어 싸우다가 거짓 패하여 산곡으로 달아나니 왜장이 승승(乘勝)하여 따르더니 문득 한 모롱이를 지나며 간 곳을 아지 못하고 주저할 즈음에 홀연 좌편 수풀에서 홍의(紅衣)를 입은 백마 탄 장수가 문득 패하여 산곡으로 달아가거늘 패장이 따르더니 또 잃고 주저할 즈음에 홍의에 백마 탄 장수 내달아 싸워 이렇듯하기를 십여 차에 이르러는 왜장이 크게 의혹하여 속은 줄 알고 급히 군사를 물리더니 문득 방포 소리 나며 사면팔방으로서 함성이 대진하거늘 안국사 실색하여 달아나고자 하나 사면 복병이 일시에 일어나니 왜병이 크게 어지러워 짓밟혀 죽는 자 그 수를 알지 못하고 남은 군사는 각각 명을 도망하는지라. 곽자위 군사를 몰아 전진가의 목책을 버리고 홍기(紅旗) 백기(白旗)를 십 보에 하나씩 꽂고 아장 정지명으로 하여금 군량을 준비하라 하고 이운정으로 군정사를 삼아 가음 알게 하고 심대승 백맹신으로 선봉을 삼고 정달로 군기 찾이를 삼고 정인으로 후군대장을 삼고 유락으로 용인을 지키게 하고 심기로 전선을 차지하게 하고 탐지군을 놓아 서로 출입하며 지키더니 왜적이 감히 근처에는 엿보지 못하더라. 조정이 이 소식을 듣고 병조정랑 유정을 보내어 그 지략과 공을 표하니라.

각설, 왜적이 조선 팔도 삼백여 주를 아니 간 곳이 없이 인민을 살해하더니 여러 해 되매 인민이 서로 모여 사면으로 의병이 일어나 군위고을 좌수 장사진이 의병을 거느려 왜적 팔백여 명을 죽이고 또 충청도 대홍사 중 수운이 승군을 거느리고 청주고을에 웅거한 왜적 백여 명을 죽이고 홍경삼이 신계고을에 웅거한 왜적을 파하고 이정함은 연안성에 든 선강정으로 파하고 광주교생 김덕령(金德齡)은 재인군으로 오색 반의(班衣)를 입히고 각각 장창을 주어 호남 호서로 왕래하여 왜적을 만나면 평지에서 뛰놀고 말 위에서 거꾸로 서며 혹 몸을 날려 공중에 오르니 왜적이 그 의복과 재주를 보고 가장 괴이하게 여겨 이르되,

이는 진실로 신병(神兵)이로다.’

하여 매양 만나면 피하여 달아나더라.

 


중원(中原)에 재원병(再援兵) 요청


이때에 유격장군 심유경(沈惟敬)이 돌아간 후 일향 천병의 소식이 없는지라, 상이 근심하사 즉시 이덕형(李德馨)으로 청병사(請兵使)를 삼아 천조(天朝)에 들어가 구병(救兵)을 청할새 덕형의 일행이 성야(星夜)로 행하여 천조에 들어가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통하여 천자께 주하자 천자 사신을 인견하사 위문하시니 덕형이 울며 복지 주왈,

신의 나라가 왜란을 만나 팔도 인민을 다 죽이고 도성이 함몰하며 국왕이 종사를 버리시고 의주성에 몸을 감추어 일야호곡(日夜號哭)하오매 오직 천조구병을 기다리오니 바라옵건대 폐하는 인홍대덕(仁弘大德)을 드리우사 특별히 천병을 조발하여 왜적을 진멸하옵고 억만창생(億萬蒼生)을 건지시며 고국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하고 인하여 통곡하거늘 천자 가로되,

()이 일찍 요동도독(遼東都督) 조승훈(祖承訓)을 보내어 구하라 하였더니 조선이 군량(軍糧)을 수운치 아니하기로 대군이 주려 마침내 패하여 돌아왔으니 이제 너희 경상은 불쌍하거니와 대군이 나아가는 날 무엇으로 군사를 거느려 먹이려 하느냐. 대국이 또한 연흉(連凶)을 만나 백성이 곤궁함을 면치 못하니 어찌 구응하리요. 연이나 짐이 생각하여 처결하리니 아직 관역(館驛)에 머물러 조명(朝命)을 기다리라.”

하시고 예부(禮部)로 후대(厚待)하라 하신대 덕형 등이 옥화관에 머물러 음식을 전폐하고 주야 비읍(悲泣)하니 보는 자 아니 차탄할 이 없더라.

이러구러 수월이 되도록 구병을 얻지 못하더니 임일은 신종황제(神宗皇帝) 한 꿈을 얻으니 무수한 계집이 볏단을 이고 조선대해로 이르러 상을 밀치거늘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 마음에 의심하더니 홀연 해오되,

조선이 왜란을 만나기로 몽사(夢事) 그러하도다.’

하시고 글자로 해독하시니,

사람인()변에 벼화()를 하고 벼화 아래 계집녀()자니 왜국 왜()자라, 왜적이 반드시 범할 뜻이 있도다.’

하시고 가장 놀라시더니, 또 몸이 곤하여 신음하더니 비몽사몽(非夢似夢)간에 홀연 공중에서 번개 세 번 하고 천문(天門)이 열리는 곳에 일위신장(一位神將)이 운무중(雲霧中)으로 내려와 계하(階下)에 서거늘 황제 괴이히 여겨 물어 왈,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짐을 보아 무엇 하려 하느뇨.”

그 사람이 여짜오되,

소장은 삼국적 관장(關將)이로소이다. 소장이 안양 문추를 버히매 옥제(玉帝)께서 무죄한 사람을 죽이다 하사 다시 세상에 환생치 못하게 하시니 외로운 넋이 조선에 의지하여 향화(香火)를 받잡더니 이제 조선이 왜란을 만나 억만창생이 수화중에 있삽고 조선왕이 종사를 버리고 의주로 달아나 몸을 감추고 위태함이 경각(頃刻)에 있으니 바라건대 전하는 인홍대덕(仁弘大德)을 드리우사 천병을 조발하여 조선을 구하소서.”

황제 가라사대,

()이 조선을 구코자 하나 대장 할 사람을 얻지 못하여 근심하노라.”

운장이 여짜오되,

요동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지용(智勇)이 쌍전하오니 대장을 하이사 조선을 구하소서.”

황제 다시 묻고자 하시더니 홀연 음풍(陰風)이 삽삽(颯颯)하고 흑무(黑霧) 소소하여 문득 간 바를 알지 못할러라. 놀라 깨달으시니 침상일몽(枕上一夢)이라. 드디어 뜻을 정하사 조선을 구하려 하실새 즉시 이덕형을 불러 위로 왈,

중국이 흉황할 뿐 아니라 인마여력(人馬餘力)이 많이 상하매 경동치 못하더니 여 등의 충성을 감동하여 조선왕을 구하려 하나니 여 등은 돌아가라.”

하신대 덕형 등이 천은을 숙사하고 관사에 들어와 행리(行李)를 수습하여 성야로 행하여 의주에 이르니 상이 인견하사 천병 나옴을 아시고 크게 기뻐하시더라.

대명 신종황제 조서(詔書)를 내리사 병부상서 송응창(宋應昌)으로 경략(經略)을 삼고 병부시랑 유황상으로 방해군무(防海軍務)를 삼고 요동제독 이여송으로 대장을 삼아 삼영장(三營將) 이여백(李如栢) 장세작(長世爵) 등과 남경장수 낙상지(駱尙志) 등을 거느려 가게 하고 산동미(山東米) 삼만 석과 대군 십만을 조발하여 조선을 구하라 하신대, 이여송 등이 하직코 대군을 휘동하여 조선으로 향할새 정기는 해를 가리우고 쟁북을 일제히 울리니 그 소리 산을 움직이며 군열(軍列)이 수백 리에 이었으니 사람은 천신(天神) 같고 말은 비룡(飛龍) 같더라. 대군이 호호탕탕 행하여 연경(燕京)을 지나 봉황성(鳳凰城)에 이르러 제독이 먼저 패문을 만들어 의주로 보내니 상이 대희하여 즉시 이항복으로 접반사(接伴使)를 삼아 청병을 맞아 좌하신대 항복이 명을 받자와 책문(柵門)에 이르러 청병을 맞아 압록강에 이르러는 문득 해오리[白鷺] 서녘에서 북녘으로 날아가거늘 이여송이 마상에서 활에 살을 먹여 하늘을 우러러 가만히 빌어 왈,

대명 대도독 이여송이 황명을 받자와 대군을 거느려 왜적을 치고 조을 구하고자 하옵나니 만을 공을 이루리라 하시거든 해오리 맞아 떨어지고 만일 성공치 못하리라 하시거든 맞지 않으소서.’

하고 빌기를 마치며 공중을 향하여 쏘니 활시위를 응하여 해오리 살을 띠고 발 앞에 떨어지거늘 이여송이 대희하여 군사를 재촉하여 압록강을 건너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제장으로 더불어 좌정하고 조선 체찰사(體察使)를 보니 이때는 아무런 줄 모르고 답지 못하더니 다시 재촉하는 소리 우레 같은지라. 병조판서 이항복이 체찰사 유성룡을 데리고 들어갈새 정충신(鄭忠信)이 조선지도를 오성(鰲城)의 품에 드리더라. 오성이 무사를 좇아 당하에 이르니 제독이 호상(胡牀)에 거러앉아 이르되,

대병이 이에 이르렀으니 조선이 향도(嚮導)를 겸하여 선봉이 될 것이요, 또 왜적을 칠 기계(奇計)를 차렸느냐.”

오성이 창황중 생각지 못하다가 품으로조차 지도를 내어 드리니 제독이 보고 대희 왈,

조선 국운이 불행하여 왜란을 만났으나 이제로 보면 졸연히 망치 아니하리라.”

하고 또 이르되,

조선 왕을 한번 보고자 하노라.”

말이 마치지 못하여 승전(承傳)이 들어와 고왈,

조선 국왕이 오신다.”

한대 이여송 등이 상에 내려 예필 좌정 후 이여송이 눈을 들어 조선왕의 상을 보니 제왕(帝王)의 기상이 아니라, 문득 의아하여 조선 체찰을 불러 왈,

너희 조선이 간사함이 특심하여 우리를 업신여겨 임금이 아닌데 임금이라 하여 우리를 취맥하니 내 어찌 구할 뜻이 있으리요.”

하고 분기를 발하여 회군하는 영을 내리고 징을 쳐 군사를 물리라 하니 백관이며 모든 백성이 일시에 통곡 왈,

이제 천병이 물러가니 동방예의지국이 속절없이 왜국이 되리로다.”

하고 곡성이 진동하는지라. 이항복 유성룡이 상께 주왈,

이제 천병이 물러가오니 왜적을 저당치 못하올지라, 일로 혜옵건대 조선이 일조에 왜국이 되올지라. 어찌 망극지 아니하리요. 전하는 통촉하소서.”

하고 인하여 통곡하니 상이 또한 방성대곡(放聲大哭)하시더니 이때 이여송의 무리 장중에 있더니 곡성을 듣고 좌우에게 문왈,

이 어인 곡성이뇨.”

제장이 가로되,

천병이 물러가옴을 조선왕이 통곡한다 하나이다.”

이여송이 가로되,

이는 반드시 용()의 소리라. 분명한 왕의 울음이라 가히 아니 구치 못하리라.”

하고 제장을 분부하여 회군하는 영을 거두니라.

차설, 이 제독(李提督)이 왕상(王相)을 청하여 다시 위로하기를 마치며 즉시 의주를 떠나 안주에 이르매 성남에 하채하니 정기(旌旗) 폐일하고 검극은 상설(霜雪) 같고 군용이 융성하니 조선사람이 아니 기뻐할 이 없더라. 체찰사 유성룡이 들어와 이 제독을 보고 일을 의논하매 이때에 제독이 안주 동헌(東軒)에 앉아 혼연히 좌를 주고 왜정을 자세히 물으니 성룡이 일일이 대답하고 인하여 평양지도를 내어 드리니 제독이 보기를 마치매 성룡에게 이르되,

왜적이 다만 조총(鳥銃)만 믿었나니 우리 대포를 발하면 오륙 리는 가는지라. 적이 능히 어찌 대적하리요.”

성룡이 대희하여 칭사하고 물러 왔더니 제독이 본총병사 대수로 하여금 먼저 순안에 보내어 왜적을 속여 왈,

천조 이미 화친을 허하시고 심유경이 장차 이리로 온다.”

하니 왜적 평행장이 대희하여 잔치를 벌여 서로 경하할새 왜승 현소(玄蘇) 글을 읊으니 그 글에 가로되,


부상복중화(扶桑伏中華)

사해통일가(四海通一家)

희기능소설(喜氣能銷雪)

건곤태평하(乾坤太平下)

 

일본이 중원을 항복받으니 사해 한집 같도다. 기쁜 기운이 능히 눈을 녹이니 하늘 땅이 태평하도다.’

하였더라.


이때는 계사 춘정월(春正月)이라. 평행장의 부장 평호란으로 하여금 사십여 인을 거느려 순안에 가 심유경을 맞으라 하였더니 부총병사 대수 거짓 속여 술을 먹으라 하고 인하여 평호란을 미리 보내고 그 수하 군사를 다 잡아 죽이려 하더니 그 중 두어 사람이 도망하여 평양에 들어가 보하니 적이 비로소 천병이 이른 줄 알고 마음에 가장 두려워하더라. 제독이 안주를 떠나 수안에 이르러 군사를 쉬게 하고 이튿날 군을 나와 평양을 싸고 보통문(普通門) 칠성문(七星門)을 치니 왜병이 조총과 돌을 발하거늘 천병이 또한 대포를 놓으니 연염(煙焰)이 충천하고 성중 거처에 불이 일어나 왜병이 황겁하여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하거늘 천장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등이 절강 용사 수백을 거느려 각각 단검을 차고 성상에 뛰어오르니 왜적이 능히 대적치 못하고 내성으로 달아나거늘 지국이 뒤를 따라 엄살하고 제독도 대군을 몰아 내성을 싸고 왜적이 성상에서 조총을 발하며 돌을 날리니 천병이 많이 상하는지라, 제독이 즉시 군사를 거두어 성 외에 진치고 제장으로 더불어 의논하여 왈,

궁적(窮敵)을 급히 핍박(逼迫)하면 반드시 죽기로써 싸우리니 스스로 달아나게 한 후에 그 뒤를 따라 엄습하면 가히 크게 이기리라.”

하더라.

재설, 평행장이 천병의 물러감을 보고 서로 의논하되,

이여송이 지용이 겸전하고 또 천병의 용맹을 대적하기 어려우니 장차 어찌하리요.”

평의지 평조선 등이 이르되,

우리 만일 싸우지 아니하고 굳게 지키면 천병이 양식이 진하여 물러가리니 그때를 타 엄습하면 가히 전승함을 얻으리라.”

평행장이 이르되,

우리 만약 고성(孤城)을 지키다가 조선군사 천병으로 협력하여 전후로 협공하면 어찌 능히 대적하리요.”

하고 연하여 얼음을 타고 대동강(大洞江)을 건너 경성을 바라고 가더니 의승장(義僧將) 유정(惟政)을 만나 일진(一陣)을 대패하고 급급히 도망하니라. 원래 유정이 금강산으로부터 평양으로 향할새 얻은 바 승군이 천여 명이라, 나아가 장림에 진치고 왜적의 체탐을 많이 죽이고 이 날 밤에 왜적이 도망함을 보고 그 뒤를 따라 짓치고 치중안마(輜重鞍馬)를 많이 얻으니라. 이튿날 이 제독이 왜적의 도망함을 보고 드디어 성중에 들어가 웅거하고 적병을 따르지 아니하더라.

각설, 의병장 고충경과 황해도 열읍에 웅거한 왜적을 엄습할새 호성 도정이 풍천으로 좇아 구월산(九月山)에 이르러 와 왜적의 종적을 탐지하다가 궁산벽처(窮山僻處)에 물을 곳이 없어 정히 방황하더니 마침 중 셋이 오거늘 그 중을 불러 왈,

이제 왜적이 웅거한 곳이 많거늘 너희는 임의로 다니니 필연 연고 있도다. 만일 실정을 고치 않으면 당장 버히리라.”

그 중이 대왈,

소승은 강원도 중으로 적장 선강정에 잡히어 밥짓는 군사 된 고로 이렇듯 다니나 조선을 어찌 일신들 잊으리오마는 다만 호혈(虎穴)에 들어가 일시도 평안치 못하오니 언제 좋은 사람을 만날까 하나이다.”

말을 마치며 눈물을 흘리거늘 호성 도정이 이르되,

너희 말에 하늘이 감동하시리니 내 말을 들으면 더욱 충성이 빛나리다.”

하고 독약(毒藥) 한 쌈을 주어 왈,

이 약을 가지고 왜병을 호궤할 제 음식에 섞어 먹이면 반드시 죽으리니 생심도 누설치 말라.”

한대 그 중이 허락하고 이르되,

장군은 모름지기 성 밖에 복병하여 있으면 소승이 약을 하수한 후 즉시 나와 고하리니 장군이 군사를 몰아 들어와 급히 치면 승전하리이다.”

호성 도정이 군사를 일으켜 산성밖에 매복하였더라. 그 중이 성중에 들어가 석반(夕飯)에 그 약을 섞어 모든 도적을 먹였더니 적은 듯 밥먹은 도적은 절로 쓰러지거늘 그 중이 급히 나와 호성 도정을 보고 그 일을 자세히 고하니 호성 도정이 급히 군을 거느려 성중에 돌입하여 일시에 고조납함하고 나아가니 선강정이 대경하여 비록 싸우고자 하나 군사 태반이나 독을 만나 아모런 줄을 모르는지라, 이미 모책이 있는 줄 알고 남은 군사를 거느려 달아나고자 하더니 호성 도정이 중군을 지휘하여 일시에 불을 놓고 어지러이 짓치니 선강정이 능히 저당치 못하여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자 하더니 호성 도정이 중군을 재촉하여 뒤를 따라 신천 땅에 이르러 홀연 전면을 바라보니 티끌이 이는 곳에 일조군마 풍우같이 이르러 선강정 가는 길을 막으니 이는 의병장 고충경이러라. 원래 충경이 봉산 안악 등처에 있는 왜적을 죽이고 황주로 가다가 정히 선강정을 만나 일진을 엄살하니 선강정이 황망히 북편 소로로 달아나더니 초토사 이정함을 만나 군사를 무수히 죽이고 남을 바라보고 급히 달아나더니 또 방어사 이시언을 만나 크게 싸우더니 호성 도정과 고충경이 함께 따라와 전후로 협공하니 선강정이 사면에 달아날 길이 없음을 보고 스스로 자문(自刎)하여 죽거늘 이시언 등이 남은 적장을 짓치고 황주로 행하더니, 이때 평행장이 평양을 버리고 대군을 거느려 검수참에 이르러 기갈을 못 이겨 대오(隊伍)가 어지럽거늘 이시언 등이 뒤를 따라와 엄살하여 도적 천여 명을 버히고 일변으로 이긴 기별을 평양에 보하며 일변으로 뒤를 따르니라.

처음에 제독이 평양을 칠 제 천병은 보통문을 치고 순변사 이일은 김응서로 더불어 함구문으로 좇아 들어가더니 제독이 군사를 거두며 이일 등이 성 외에 물러와 둔병하였더니 야반에 도적이 달아났는지라, 제독이 도적을 놓아 보낸 허물을 아군에게 돌려보내어 깊이 책하고 그 일을 의주로 이문하니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문죄하고 이빈으로 이일의 벼슬을 대하고 정병 삼천을 거느려 제독을 따라 경성으로 향케 하니 이때 대동강 남편부터 연로(沿路)에 둔취하였던 왜적이 다 도망하였으매 이 제독이 비로소 도적을 따르고자 하여 체찰사 유성룡을 불러 왈,

독군(督軍) 전로에 양초(糧草)없다 하니 그대는 급급히 군량을 준비하여 조금도 소루함이 없게 하라.”

성룡이 청령하고 급히 달려 중화를 지나 황주에 이르니 이때 왜병이 물러간 지 오랜지라. 일로가 공허하여 인민히 희소하매 베풀 계교없어 급히 황해감사 유영성에게 이문하여 김응서로 하여금 평양 있는 곡식을 수운(輸運)하여 황주로 오게 하니 바야흐로 군량을 준비하여 대군이 이미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니라. 이때 경성에 웅거한 도적이 행여 아국 백성이 내응함이 있을까 두려 의심할뿐더러 또 평양의 패함을 분노하여 국중 신민을 낱낱이 죽이고 장차 천병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는지라. 제독이 군사를 나와 패주 주찰하였더니 차일 부총사 대수가 아국장수 고언백으로 더불어 수백 군을 거느려 도적 백여 인을 버히니 제독이 듣고 제장을 머물러 영채를 지키게 하고 다만 천여 군을 거느려 혜음령(惠陰嶺)을 지나가더니 적이 대군을 여석령(礪石嶺)에 매복하고 다만 수백 군을 거느려 영상에 있는지라, 제독이 적병의 적음을 보고 업신여겨 군사를 재촉하여 영상으로 오르더니 홀연 일성포향(一聲砲響)에 산 뒤에서 수만 복병(伏兵)이 내달아 어지러이 짓치니 천병이 능히 대적지 못하고 죽고 상한 자 많은지라. 제독이 급히 군사를 물려 동으로 돌아가려 하거늘 체찰 유성룡이 우상 유홍과 도원수 김명원 등으로 더불어 제독을 보고 힘써 이르되,

승패는 병가의 상사라, 마땅히 적세를 살펴 다시 진병할 것이어늘 어찌 가벼이 물러가리오.”

제독 왈,

우리 군사 작일에 적병을 많이 죽였으나 다만 이 땅이 비오기로 물이 많아 영채 세우기 편치 않은지라, 이러므로 잠깐 동파(東破)로 돌아가 다시 진취키를 도모코자 하노라.”

하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동파로 돌아왔더니 마역(馬疫)이 크게 일어나 전마(戰馬) 만여 필이 죽은지라, 제독이 부총병 사대수(査大受)로 임진을 지키게 하고 송파로 돌연 왔더니 전하는 말이 있어 적장 청정이 함흥으로부터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을 엄습하라 하거늘 제독이 북으로 돌아갈 마음이 있더니 이 소식을 듣고 이르되,

만일 평양을 잃으면 아 등이 장차 어디로 가리요.”

하고 다만 왕필적으로 송도를 지키게 하고 접반사 이덕형에게 이르되,

이제 조선 군사 외로우니 빨리 제군을 거두어 임진 북녘으로 모으라,”

하니 전라 순찰사 권율(權慄)이 행주(幸州)목을 지키게 하고 도원수 김명원으로 임진(臨津) 남녘을 지키고 있는 고로 제독이 여러 곳 군마를 거두고자 함이라. 체찰사 유성룡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중로에 이르러 제독을 보고 다섯 가지 퇴군치 못함을 베풀어 왈,

선왕의 분묘(墳墓)가 적혈(賊穴)에 침몰하였으니 가히 버리지 못할 것이요. 백성이 날마다 왕사(王師)의 이름을 바라다가 물러감을 들으면 다시 굳은 마음이 없어 도적에게 귀순할 것이요, 아국 토지를 척촌(尺寸)이라도 가히 버리지 못할 것이요, 아국 장사가 비록 미약하나 장차 천병의 위엄을 의지하여 진취하기를 도모하다가 이제 물러감을 들으면 반드시 이산할 것이요, 대군이 한 번 물러가면 적이 필연 따르리니 임진 북녘을 또한 보전치 못하리라.”

한대 제독이 듣지 아니하고 돌아가니라.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


각설,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천병이 장차 물러가 경성으로 행하려함을 듣고 강을 건너 고양으로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올라 결진하였더니 천병이 물러가매 적이 경성으로 쫓아 행주에 이르러 산성을 치니 인심이 흉흉하여 달아나고자 하되 강을 등졌는 고로 감히 도망치 못하고 죽기로써 싸우니 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권율이 뒤를 따라와 수백 인을 버히고 즉시 군사를 거느려 임진에 이르러 체찰 유성룡이 권율로 하여금 순변사 이빈(李蘋)으로 합병하고 파주산성(坡州山城)을 굳이 지켜 서로 가는 도적을 막게 하고 방어사 고언백 이시언과 조방장 정희현 등으로 하여금 창릉(昌陵) 근처에 매복하였다가 적병이 만일 많이 오거든 피하고 적게 오거든 싸워 짓치라 하니, 이로 인하여 적이 성 밖에 나오지 못하더라. 성룡이 또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경기수사 정길 등으로 배를 타고 용산 근처에 행하여 순강(巡江)하는 왜적을 무수히 죽이니 이러므로 적세 많이 피폐하였더라.

이때 적이 경성에 웅거한 지 이미 수년이라. 백성이 주려 죽는 자 무수하더라. 마침 성룡이 동파에 있음을 듣고 남은 백성이 늙은이를 붙들고 어린이를 이끌고 돌아오는 자 무수한지라, 총병사 대수가 길가에서 어린아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빨아 먹는 양을 보고 참혹히 여겨 군중에서 기르고, 성룡에게 이르되,

왜적이 지금 물러가지 아니하고 인민의 형상이 이렇듯 참혹하니 장차 어찌하리요.”

성룡이 마음에 가장 슬퍼 눈물을 흘리며 왈,

왕이 이제 비록 진휼하고자 하시나 저축한 양식이 없고 남방으로 양전(良田)이 물가에 매였으나 천병이 장차 이르니 어찌 감히 다른데 쓰리요.”

하고 정히 근심하더니 마침 전라도 소모관(召募官) 안빈학이 피곡(皮穀) 천여 석을 배로 수운하여 이르렀거늘 성룡이 대희하여 일변 설진하는 뜻을 장문하고 일변으로 설진하여 기민을 구제할새 전군수 남진관으로 감진관(監賑官)을 삼아 송엽(松葉)가루를 피죽에 섞어 기민을 먹이되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은 고로 능히 구하지 못하는지라, 대수가 참지 못하여 군량 삼십여 석을 진휼(賑恤)에 보태고 오히려 미치지 못하더니 일야간에 큰 비 붓듯이 오는지라, 기민의 신음하는 소리 그치지 아니하더니 이튿날 보니 죽은 자 심히 많거늘 성룡이 차탄함을 마지아니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땅을 파고 묻으라 하다.

심유경(心惟敬)의 화친교섭(和親交涉)

창의(倡義) 김천일의 군중에 이시충이란 사람이 있으되 스스로 경성에 들어가 왜적을 탐지할새 양 왕자와 배행(陪行) 황정욱 등을 찾아보고 돌아와 이르되,

적이 강화(講和)할 뜻이 있다.”

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장 평행장이 글월을 김천일의 진주에 보내어 강화하기를 청하거늘 이때 천일이 주사를 거느려 용산에 있더라. 천일이 그 글로써 성룡에게 보내니 성룡이 천장 사대군으로 하여금 뵈고 제독에게 보내여 품()하니 사대수가 즉시 가정 이성으로 하여금 글을 평양으로 보내니 제독이 보고 즉시 유격장군으로 심유경을 경성에 보내어,

왜적의 동정을 탐지하라.”

하고 뒤를 따라 대군을 거느려 송도에 주찰(駐札)하니라.

이때 심유경이 행하여 동파에 이르니 도원수 김명원이 유경에게 이르되,

적이 평양에서 속음을 분노하여 하니 반드시 좋은 뜻이 없을까 하노라.”

유경이 소왈,

적이 어찌 나를 해하리요.”

하고 드디어 경성에 이르러 적장 평행장을 보아 가로되,

너희 만일 강화하고자 할진대 먼저 조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군을 부산으로 물린 후 비로소 화친을 허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목금(目今)에 조선팔도 용병이 벌[] 일 듯할 뿐 아니라 천자 분노하사 대병을 보내어 너희를 전멸하려 하시나니 일찍이 뜻을 결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 만일 말을 듣지 아니하면 하늘과 신령이 한가지로 노하시면 그때 비록 돌아가고자 하나 미치지 못하리라.”

한대 평행장이 이르되,

그러면 우리 군사를 물려 본국으로 돌아간 후 중국이 조선으로 더불어 벼슬을 일본으로 보내어 화친을 이르게 하라.”

유경 왈,

실로 화친할 뜻이 있거든 조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라.”

평행장이 허락하거늘 유경이 즉시 돌아오니라.

이때 청정이 함경도를 좇아 경성에 돌아왔더니 행장이 청하여 퇴군할 일을 의논하되 청장 왈,

이제 어찌 무단히 물러가리요. 더 나아가 이여송을 항복받은 후 바야흐로 돌아가리라.”

하고 즉시 날래 장수 엄홍 이현을 불러 왈,

너희 장진에 나아가 이여송을 불러 이르되 만일 퇴군하여 본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거든 즉시 그 머리를 베어 오면 중상이 있으리라.”

한대 양장이 청령하고 각각 비수(匕首)를 감추고 송도에 이르러 장영으로 들어가니라.

이때에 제독이 장중에서 머리를 빗더니 홀연 은독 둘이 장중으로 들어오거늘 제독이 자객(刺客)인 줄 알고 황망히 한 손으로 빗던 머리를 붙들고 한 손으로 보검(寶劍)을 들어 이 적으로 장중에서 시살하니 병기 서로 부딪는 소리 장 밖에 들리는지라. 제장이 놀라 창틈으로 엿보니 은독 셋이 장중에서 구르니 대개 검술을 잘하면 검광이 왼몸을 둘러 은독같이 되는지라. 제장이 감히 들어가지 못하더니 이윽고 제장을 불러 이것을 치우라 하거늘 제장이 그제야 비로소 들어가 보니 두 사람의 시신(屍身)이 있거늘 제장이 놀라 왈,

장이 좁기로 들어와 돕지 못하옵더니 도독의 신위(身位)로 양적을 하례치 아니리이까.”

도독이 웃어 왈,

자객(刺客)이 본디 칼쓰기를 너른 곳에서 배운 고로 장중에서 임의로 쓰지 못하여 내게 버힌 바 되나 만일 장 밖에서 싸웠다면 힘을 많이 허비할 뻔하였다.”

하더라.

이때 진중에서 양식이 진하여 주려 죽는 자가 많은지라, 평행장이 청정으로 더불어 의논을 정하고 평조선 평조강으로 더불어 충청도로 내려가 군량을 수운하라 한대 양장이 청령하고 일만 정병을 거느려 남대문으로 쫓아 청파(靑坡)로 향하더니, 문득 대풍이 일어나며 검은 기운이 적진을 둘러싸고 무수한 신병(神兵)이 쫓아 오는 곳에 일위대장이 당선하여 왜장을 충돌하니 낯은 무른 대추 빛 같고 단봉안(丹鳳眼)에 눈썹을 거스리고 손에 청룡도(靑龍刀)를 들고 적토마(赤免馬)를 탔으니 위풍이 늠름한지라, 적병이 신위를 두려 황망히 달아날 새 서로 짓밟아 죽는 자 무수하더라. 그 장수 바로 남문으로 좇아 깨쳐 들어와 동대문을 짓쳐 나아가더니 홀연 간데없는지라. 평조신 등이 군사를 태반이나 죽이고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돌아와 평행장을 보고 그 일을 고한대 행장이 대경하여 왈,

이는 반드시 삼국적 관운장이 현성함이로다. 전일 당장 심유경이 이르되 우리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천신이 한가지로 노하리라 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도다. 이제 만일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화를 입으리라.”

하고 즉시 각 전에 천령하여 군사를 거두어 도성을 떠나 어지러이 한강을 건너 삼남을 향하니라. 이때는 계사(癸巳) 이 월이라, 제독이 송도 있어 왜적의 물러감을 듣고 대군을 거느려 경성에 이르니 방방곡곡에 주검이 뫼같이 쌓이고 남은 백성이 귀형(鬼形)이 되었으니 그 참혹한 형상을 이로 기록지 못할러라. 제독이 처소를 남별궁(南別宮)에 정하고 군사를 조발하여 성중을 쇄소(灑掃)하고 안둔코자 할새 이때 종묘 사직의 대권과 각 사문이 불에 타 남은 것이 없으되 남별궁은 오직 평수명이 머물던 곳이라, 이러므로 남았더라. 유성룡이 먼저 종묘터에 와 통곡하고 제독 하처(下處)에 와 문후(問候)한 후 인하여 물어 가로되,

적이 물러간 지 오래거든 도독은 어찌 따르지 아니하느뇨.”

제독이 가로되,

내 또 이 마음이 있으되 다만 강의 선척(船隻)이 없음을 근심하노라.”

성룡이 가로되,

제독이 만일 따르고자 하실진대 비직(鄙職)이 마땅히 선척을 준비하리이다.”

제독이 즉시 허락하거늘 성룡이 급히 달려 강변에 이르러 경기감사 선영과 정걸 등으로 하여금 대소 선척을 모으니 이미 팔십여 척을 얻었는지라. 급히 제독께 고한대 제독이 즉시 이여백으로 더불어 일만 군을 거느려 도적을 따르라 하니 여백이 강상에 이르러 호령하고 성중으로 돌아오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제독이 본디 도적을 따르지 말고자 하는 고로 여백이 짐짓 따르지 않은 배러니, 도적이 물러간 지 수십 일 후에야 비로소 패문을 발하여 이 제독으로 하여금 적병을 따르게 하니 이는 사람의 의논이 있을까 두려함이러라. 제독이 비로서 적을 따라 문경에 이르니 도적이 이미 물러가 울산 동래 김해 웅천 거제에 영채를 세워 오랜 계교를 삼고 결복하여 바다를 건너지 아니하는지라. 제독이 사천총병 유경으로 하여금 각처에서 초모한 군사 오천을 거느려 팔계를 지키게 하고 이청 조승으로 거창을 지키게 하고 갈봉 오유충으로 성주를 지키게 하고 스스로 경성에 돌아와 심유경을 일본에 보내어 관백을 보고 화친을 허하니 적이 양 왕자와 배신 황정욱 등을 놓아 돌려보내고 일변 군사를 나와 진주(晉州)를 싸고 이르되,

우리 전일 패한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임진년에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성을 굳게 지키게 하고 적을 많이 죽였는 고로 이를 복수하려 함이러라. 처음에 적병이 물러가매 조정이 제장을 재촉하여 도적을 따르라 한 대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과 각처 의병장이 다 의령에 모여 의논할새,

권율이 한 번 행주서 싸워 이김으로부터 기운이 승승하여 팔을 뽐내며 가히 강을 건너 따르리라.”

한대 의병장 곽재우와 전 양주목사 고언백이 이르되,

적세 바야흐로 성할 뿐 아니라 아군은 본디 오합지졸(烏合之卒)이요 전로에 양식 없으니 가히 나아가지 못하리라.”

권율이 듣지 아니하고 드디어 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러 보니 성이 비었고 또한 양식이 없거늘 제군이 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다시 싸울 마음이 없더니, 체탐군사 보하되,

왜병이 김해로부터 크게 이른다.”

하거늘 혹 이르되 함안을 지키자 하여 의논이 분분하더니 홀연 포향(砲響) 소리 일어나며 사람마다 크게 두려 다투어 전진물을 건널새 죽은 이와 이때 피난한 사민(士民)과 각처 의병장의 죽은 자 육만여 인이라. 대저 왜병이 일어남으로부터 사람의 죽은 적이 이만함이 없더라. 그 난을 평정한 후 조정이 천일로써 왕사에 죽다 하여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을 추중하고 순찰사 권율이 능히 도적을 두리지 아니한다 하여 김명원이 도월수를 배하니라. 천병 의승 수정이 진주 함몰함을 듣고 파례로부터 합천에 이르고 오유충은 초계에 이르러 우도를 보호하니라. 적이 이미 진주를 파하매 계견(鷄犬)을 남기지 아니하고 부산에 들어가 말을 전하되,

천조가 만일 강화함을 기다려 바다를 건너리라.”

하더라.

재설, 이 제독이 사람을 의주에 보내어 상()을 청하니 상이 즉시 의주를 떠나 도성에 이르시니 성곽이 다 무너지고 인민이 희소한지라, 상이 체읍(涕泣)하시기를 마지않으시고 인하여 이여송을 보아 공로를 치하하시고 잔치를 배설하여 관대하실새, 천자가 사자를 보내어 왕상과 이여백을 위로하시고 용포(龍袍)를 상께 사급하고 이여송에게 호군할 은자(銀子)와 채단식물을 사급하시니 상과 이여송이 북향사배하고 다시 술을 나와 서로 권하시더니, 이여송이 계충 삼 개를 내어 상 위에 놓고 이르되,

이 버러지는 서촉(西蜀) 회자국에서 진공한 것이니 하나의 값이 삼천 냥이라 사람이 먹으면 늙기를 더디 하는 고로 조선왕을 각별 대접하사 특별히 보내시더이다.”

하고 저()를 들어 그 버러지 허리를 집으니 발을 허위적거리며 괴이한 소리를 지르니 부리는 검고 빛은 오색을 겸하였으니 보매 가장 홀란한지라, 상이 처음으로 보시매 한창 진어치 못하사 주저하시더니 이여송이 소왈,

세상에 희귀한 진미(珍味)를 어찌 진어치 아니하시나이까.”

인하여 그것을 집어 먹으니 보는 자 낯을 가리우고 눈썹을 찡그리지 않을 이 없더라. 상이 가장 무료하여 안색을 변하시거늘,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항복이 급히 장 밖에 나와 사람으로 하여금 생낙지 칠 개를 얻어 쟁반에 담아 상께 드리니 저로 집어 진어하실새 낙지발이 저에 감기고 또 수염에 감기는지라, 상이 또 이여송을 권하신대 이여송이 낙지의 거동을 보고 눈썹을 찡그리고 능히 먹지 못하거늘 상이 소왈,

대국 계충과 소국 낙지를 서로 비하매 어떠하뇨.”

이여송이 대소하고 다른 말하더니 이때 경상병사 김응서가 잔치에 참여하였다가 나아와 이르되,

금일 연석에 즐길 것이 없으니 소장이 검술(劍術)을 시험코자 하나이다.”

여송이 허락한대 응서가 즉시 빛나는 군복을 입고 두 손에 비수(匕首)를 가로 잡고 대명전(大明殿) 월대(月臺)에서 검술을 시작하니 중국 사람과 아국 사람이 좌우에 둘러 구경할새 검광이 응서의 몸을 둘러 백설이 날리는 듯하더니 홀연 사람은 보지 못하고 은독[銀甕] 하나가 공중에서 구르는지라. 보는 자 칭찬 않을 이 없더라. 이윽고 응서가 검무를 파하고 당전에 나아가 이여백에게 왈,

소장이 삼국적 관운장(關雲長)께 비하면 어떠하니이까.”

여백이 소왈,

네 어찌 이런 오활(迂闊)한 말을 하느뇨, 너희 열이 내 부장 낙상지를 당치 못하고 낙상지 열이 나를 당치 못할 것이요 나 열이 관공(關公)을 당치 못하리니 네 비록 종일을 죽였으나 어찌 관공께 비하느뇨.”

응서가 무료히 물러가니라.

선시에 심유경이 일본에 들어가 소섭으로 더불어 관백의 항표(降表)를 가지고 중국에 돌아오니 천조가 거짓 항표라 하여 의심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이 진주를 함몰하니 그 일이 허탄한지라. 중국이 소섭을 요동에 두고 오래 희보치 아니하더라.

이때 이여송이 제장으로 더불어 돌아가고 오직 사천총병 옥정과 남성장사 오유충 왕필적 등을 각각 일지군을 거느려 성주 등처에 주찰하였더니 노약(老弱)은 군량 운반하기에 곤하고 장정은 싸움에 곤할 뿐 아니라 여역(礪疫)이 대치(大熾)하여 인민이 거의 다 죽게 되었고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지라. 유정 등이 군사를 남원에 옮기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경성에 와 십여 일을 머물더니 또 서로 돌아가고 적이 오히려 해상에 있으니 인심이 흉흉하더라.

조선이 다시 청병사를 천조에 보내다. 경략사 송응창(宋應昌)이 죄를 얻어 돌아가고 고양겸이 요동에 이르러 부장 호척으로 하여금 글월을 아국 군사에게 부치니 그 대략에 가라사대,

왜적이 호흡 사이에 조선 삼도를 파하고 왕자와 배신을 사로잡으니 황상이 크게 놀라서 군사를 일으켜 문죄하시매 적이 천위를 두려 왕자와 배신을 도로 돌려보내고 마침내 멀리 도망하니 조정이 소국을 대접하심이 이에 지나지 못할지라, 이제 양향(糧餉)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군사를 또한 다시 쓰지 못할지라, 왜적이 또한 천위를 두려 항복하기를 청하고 또한 봉공하기를 구하매 천조 바야흐로 다시 침노치 않게 하려 하나니 이는 천조가 조선을 위하여 구완지계를 함이어늘 이제 조선이 양식이 진하여 사람이 서로 먹기에 이른지라. 스스로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다시 군을 청함은 무슨 연고뇨. 대국이 이제 병량(兵糧)을 발치 아니하고 또 왜적을 봉공하기를 그치면 적이 반드시 노를 벌할 것이니 조선이 어찌 화를 면하리요. 모름지기 일찍이 장구한 계교를 정하라. 옛날 월왕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곤하였을 제 어찌 오왕 부차(夫差)의 고기를 먹고자 하지 않았으리오마는 오히려 분(忿)을 참고 욕()을 견디어 마침내 원수를 갚았나니 이제 조선 군신이 분을 참고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를 생각한즉 천의(天意) 순환하기를 바라리니 어찌 복수할 일이 없으리요.’

하였더라.

호척이 관중에 머무른 지 달이 남되 조정 의논이 능히 결치 못하는지라. 유성룡이 탑전(榻前)에 계사하대,

왜인의 봉공을 청함은 대의에 불가하오니 마땅히 근일 사정을 자세히 주문하여 증조 처분을 기다리게 하소서.”

상이 그 말을 좇으사 허유로 하여금 지주사(知奏事)를 삼아 즉시 발행케 하였더니 천조에서 왜사 소섭을 황경(皇京)으로 불러 세 가지 일을 언약하니, 하나는 다만 봉왕하기를 허함이요 입공하기는 허치 않으며, 둘은 하나도 부산에 머무르지 아니함이요, 셋은 다시 조선을 침노치 아니함이라. 소섭이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여 약속함을 좇으리라 하거늘 천조가 심유경으로 하여금 소섭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왜진에 가 성지(聖旨)를 권유하라 하시고 이종성과 양방현으로 더불어 상부사(上副使)를 삼아 일본에 보내어 평수길을 봉하여 옹을 삼고 종성 등으로 조선에 머물러 왜인이 다 돌아간 후 가라 하시니라.

을미 사 월에 천사(天使) 종성 등이 조선에 이르러 왜인의 해도(海渡)하기를 재촉하니 적이 거제와 웅천에 둔취하였던 두어 진을 거두어 신()을 보이고 이르되,

평양에 속았으니 천사 왜진에 온 후 바야흐로 언약같이 하리라.”

한대 팔 월에 양방현이 먼저 부산에 이르러 적이 오히려 천연(遷延)하고 다시 상사를 청하니 사람이 의심할 이 많으되 홀로 병부상서 석성(石星)과 심유경이 이르되,

왜인이 별로 다른 뜻이 없다.”

하고 또 퇴병하기를 급히 하여 여러 번 이종성을 재촉하니 부사 양방현이 홀로 대진에 있어 여러 도적을 무휼하고 아국에 이문하여 경동치 말라 하고, 심유경의 돌아오기를 기다리더라. 이종성이 왜진을 떠나 도망할새 감히 대로로 가지 못하고 성주로 좇아 경성에 이르러 인하여 서로 돌아가니라. 양방현이 왜진에 머무른 지 수월이 지난 후 심유경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돌아와서 겨우 촉도에 둔취하였던 도적을 거두고 다만 부산에 있는 군사만 거두지 아니하고 양방현으로 더불어 바다를 건너갈새 심유경이 아국 사신을 데려가고자 하여 그 조카 심우지를 보내어 재촉한대 조정이 즐겨 듣지 아니하더니 무신이 한가지로 가려 하거늘 무신 이봉추로 사신을 삼아 보내려 하니 혹왈,

무신이 문사에 익지 못하여 그릇함이 많으리니 문관 중 해사(解事)하는 이를 가려 보내라.”

한대 이에 접반사 황신으로 사신을 삼고 발행케 하니 천사 심유경 등이 조선 사신으로 더불어 행하여 일본국 중에 이르러 관백을 보니, 평수길이 처음은 위의를 갖추어 봉작(封爵)을 받으려 하다가 홀연 좌우에게 묻되,

조선 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소섭이 대답하되,

이는 조선 말짜 신하 황신(黃愼)과 이봉춘이니라.”

수길이 대로 왈,

내 일찍 조선 왕자를 돌려보내었는데 조선이 마땅히 왕자를 보내어 사례함이 옳거늘 이제 지극히 낮은 신하로 사(使)를 삼아 보내었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김이라.”

하고 즐겨 왕작을 받지 아니하는지라.

황신 등이 시러곰 국서(國書)를 전치 목하고 즉시 양방현 심유경으로 더불어 재촉하여 돌아올 제 또한 천조의 사은함이 없더라. 청정이 뒤를 따라 대군을 거느려 부산에 이르러 말을 전하여 이르되,

만일 조선 왕자 이르러 사례치 않으면 우리 또한 군사를 물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대개 평수길의 구하는 바라, 다만 봉작뿐이 아니라, 천조 다만 봉작을 허하니 수길이 이로 인하여 군사를 물리지 아니하더라. 당초에 심유경이 왜진에 출입하여 다닐 제 평행장으로 하여금 사리 미후한 고로 일을 임하여 구차히 미봉하고 실정을 말하지 아니한 고로 천조 아국으로 더불어 한가지로 저에게 속은 바더라. 이미 아국이 사신을 천조에 보내어 그 일을 주문하니 이로 인하여 병부상서 석성과 심유경이 다 죄를 얻고 천병이 다시 나오니라.


 

원균(元均)과의 불화


처음에 경상수사 원균(元均)과 통제사 이순신이 구함을 입어 능히 보전하였는 고로 서로 사귐이 가장 후하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서로 공을 다투어 틈이 있는지라, 이로 인하여 조정이 원균을 옮겨 충청병사(忠淸兵使)를 삼았더니, 원균의 성정이 본디 시험할 뿐 아니라 순신의 벼슬을 앗고자 하여 순신을 모함하니 매양 이르되,

순신이 처음에 나를 구하지 말고자 하다가 나의 괴로이 청함을 보고 경상도에 이르러 크게 이겼으나 이는 실로 나의 공이라.”

하고 또한 원균을 도와 순신을 훼방하는 자 많으되 홀로 이원익이 그렇게 여기지 아니하고 또 이르되,

순신이 원균으로 더불어 각각 경계를 지켰으니 처음에 즉시 나오지 아니함이 고이치 아니하다.”

하더라. 병진에 이르러 적장 평행장이 거제(巨濟)에 이르러 결진하고 순신의 위병을 꺾어 백계(百計)로 도모코자 할새 그 수하 말장 요시라(要時羅)로 하여금 반간(反間)하는 계교를 행하라 한대 경상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들어가 응서를 보고 은근히 이르되,

우리 주상 평행장이 본디 강화할 뜻이 있거늘 청장이 홀로 싸움을 주장하니 이로 인하여 서로 틈이 있는 고로 우리 주상이 반드시 청정을 죽이고자 하는지라. 오래지 아니하여 청정이 다시 나오리니 우리 즉시 소식을 통하거든 조선이 통제사로 주사를 거느려 나와 치면 가히 청정을 버혀 조선 원수를 갚고 또한 우리 주상의 한을 씻으리라.”

하고 인하여 거짓 진실하는 일을 뵈는 체하더라. 응서가 그 일을 주문하니 조정이 그 말을 믿을 뿐 아니라, 유근수 더욱 그 말을 주장하여 기회를 가히 잃지 못하리라 하고 여러 번 계청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나아가 청정을 치라 하고, 또 도원수 권율이 한산진(閑山陳)에 이르러 순신에게 왈,

그대는 마땅히 요시라의 언약을 좇아 기뢰를 잃지 말라.”

하는지라. 순신이 이미 간사한 도적의 계교인 줄 알고 여러 날 주저하고 나아가지 아니하더니 정유(丁酉) 정월에 이르러 운천에서 글을 보하되,

금월 십오 일에 적장 청정의 전선이 이미 장문도에 이르렀다.”

하고 요시라 또 이르되,

청정이 이미 뭍에 내렸는지라, 기회를 잃으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요.”

하고 거짓 뉘우치기를 마지아니하니 조정이 듣고 허물을 순신에게 돌려보낼 뿐 아니라 대간(臺諫)이 계사하여 나국엄문(拿鞠嚴問)함을 청하고, 현풍현감 박성이란 사람이 또한 상소하여 순신을 버힘이 가하다 하거늘 상이 즉시 금부도사(禁府都事)를 보내어 이순신을 나래(拿來)하시고 원균으로 통제사를 시키시고 오히려 진적(眞的)한지 모르사 어사(御使)를 보내어 염탐하라 하시니, 어사 발행하여 전라도에 이르러 보니 인민이 다투어 길을 막고 순신의 원억(冤抑)함을 고하는자 무수하되 어사 실문치 아니하고 다만 이르되,

청정의 전선이 해중에 걸려 칠 일을 능히 운동치 못하는지라, 아군이 만일 나아간들 반드시 사로잡을러니 이순신이 짐짓 두류(逗遛)하고 기약을 잃었다.”

하는지라.

이 날 김명원과 관부사 정탁(鄭琢)이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였더니 주하되,

왜적이 물에 가장 익거늘 어찌 칠 일을 해로에 걸리게 하리이까. 이 말이 실로 허()한가 하나이다.”

상이 가라사대,

내 뜻과 같은지라, 가히 그 실상을 구핵(究覈)하리라.”

하시더라. 그 후에 원균이 패하고 순신이 다시 통제사가 되어 대공을 세우고, 전일 어사 되었던 자가 옥당(玉堂) 벼슬하여 입직하였는지라, 동류가 조용히 묻되,

왜적의 전선이 해중에 칠 일을 걸려다 함을 어느 곳에서 들었느냐. 내 또한 호남의 어사 되어 갔으되 이 말을 일찍 듣지 못하였도다.”

기인(어사)이 능히 대답지 못하다가 가장 부끄러워하더라.

정유(丁酉) 이 월에 순신이 나명(拿命)을 만나 장차 경성을 향할새 일로의 군민이 길에 메여 이르되,

이제 장차 어디로 가시느뇨. 우리 등이 이로 좇아 능히 죽기를 면치 못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순신이 이미 행하여 경성에 이르매 혹 이르되,

상이 노하시고 조정 의논이 또한 중하니 일을 가히 중량치 못하리라.”

한대 순신이 이르되,

사생(死生)이 유명(有命)하니 어찌 죽기를 두려하리요.”

하더라.

화설, 이순신이 옥중에 들어가매 혹 이르되,

뇌물(賂物)이 있은즉 죽기를 면하리라.”

한대 순신 왈,

사즉사의(死卽死矣). 어찌 회뢰(賄賂)를 행하고 구차히 살기를 도모하리요.”

하더라. 이때 순신의 제장의 친족이 경사에 있는지라, 순신의 하옥(下獄)함을 보고 행여 연루(連累)함이 있을까 두려하더니 순신이 초사(招辭)하기를 당하여 다만 전후 수말(首末)을 베풀 따름이요 조금도 다른 사람을 인증(人證)함이 없는지라, 듣는 자 탄복지 아닐 이 없더라. 상이 금오당상(金吾堂上)으로 하여금 순신을 향문 일차 후에 대신을 명하여 다시 그 죄를 의논하라 하신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정탁(鄭琢) 주왈,

순신은 명장이라, 여러 번 대공을 세웠으니 가히 죽이지 못할 것이니 군정의 이해를 멀리 있어 헤아릴 바 아니라 순신이 나아가지 아님이 아니니 청컨대 잠깐 관서(寬恕)하옵시어 후에 공을 세워 죄를 속하게 하옵소서.”

상이 그 말을 좇으사 잠깐 삭직(削職)하여 도원수 막하(幕下)에 충수케 하라 하시나 원래 노모(老母)의 나이 구십이라 충청도 아산(牙山)땅에 있다가 순신의 하옥함을 듣고 마음에 놀라 인하여 죽었는지라. 순신이 옥에서 나와 전 원수의 진중으로 갈새 길이 아산을 지나는지라. 잠깐 들어가 성복(成服)하고 즉시 발행할새 크게 통곡하여 왈,

이제 충효(忠孝)를 양실(兩失)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하더라.


차설, 판중추 정추밀이 주왈,

순신은 명장이라, 여러 번 대공을 세웠으니 죄 비록 중하나 죽이지 못할 것이요 또한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순신의 죄를 아직 사하여 후에 공을 이루어 죄를 속하게 하소서.”

상이 의윤(依允)하사 순신을 도원수 권율 막하에 충군(充軍)하여 두시니라.

정유 오 월에 천자 다시 군사를 발하여 병부상성 형개(邢玠)로 군무총독을 삼고 요동조정사 양원호로 경리를 삼고 총병관 마귀(麻貴)로 제독을 삼아 조선을 구할새 부장 동일 원유정 등이 각각 일군을 거느려 먼저 이르러 전라도로 내려가 남원을 지키니 대개 영남은 호남을 왕래하는 길이요 성이 자못 굳은지라. 이러므로 지키더라. 성 외에 곤룡산성이 있으니 제장이 이곳을 지키고저 하거늘 양원호가 들어와 해자(垓字)를 깊이 하고 양마장(養馬場)을 만들어 오래 지킬 뜻을 하더라.


재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제 한 집을 짓고 우주당(宇宙堂)이라 하고 제장과 그 집에서 의논할새 지어소졸(至於小卒)이라도 하정(下情)을 통하더니, 원균이 통제사 되매 모든 기녀(妓女)를 우주당에 모으고 장()을 둘러 내외격절(內外隔絶)하니 제장이 그 낯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균의 천성이 잔포(殘暴)하여 형장을 과히 하니 일군이 변심하여 이르되,

적병이 이르면 도주할 따름이라.’

하더라. 칠 월에는 반간(反間)하는 계교를 행하여 이순신을 해하고 또 경상병사 김응서의 진에 이르러,

왜군이 장차 청정의 뒤를 따라 나오나니 조선이 이번은 기회를 잃지 말고 군사를 준비하였다가 치라.”

한대 도원수 권율이 그 말을 믿을 뿐 아니라 이순신이 이미 지류(遲留)하고 나지 아니하다가 죄를 당하였는지라. 다만 원균의 진병함을 재촉하니 균이 순신을 함해(陷害)하고 그 대신 통제사 되었으니 형세 비록 어려우나 마지못하여 군사를 거느려 앞으로 나아가니 적이 언덕위에 영채를 세웠다가 아국 전선이 이름을 보고 서로 전하여 소식을 통하더라. 원균이 전선을 재촉하여 절영도(絶影島)에 이르렀더니 풍랑이 대작하며 날이 이미 저물었고 전면을 바라보니 왜선 수백 척이 해중에 출몰하고 즐겨 나오지 아니하니 균이 제군을 총독하여 싸우고자 하되 주중사람이 한산도로부터 종일토록 배를 저어 왔는지라, 피곤하고 또 기갈(飢渴)이 심하여 능히 배를 운동치 못하고 적이 즐겨 교봉(交鋒)치 아니하더니 밤들기에 이르러 전선이 표박하여 지형을 알지 못하는지라. 원균이 겨우 남은 배를 거두워 가더니 덕섬[加德島]에 다다라 중군이 다 기갈을 견디지 못하여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먹더니 적병이 그 섬중을 내달아 크게 엄살하니 원군이 장사 백여 인을 잃고 거제(巨濟) 칠천도[漆川梁]로 물러오니 도원수 권율이 원균을 고성에서 불러 책하여 왈,

네 일찍 이르기를 이순신이 싸움을 잘못하고 도적을 두려한다 하더니 네 이제 나지 않음은 어쩜이뇨.”

하고 인하여 결장오도(決杖五渡)하니 원균이 진중에 돌아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술에 취하여 장중에 누웠으니 제장이 능히 서로 보지 못하는지라, 일군이 분부하여 각각 흩어지고자 하더니, 차야에 적선이 크게 이르러 군사를 사면에 싸고 일진을 대살하니 균의 군사 대란하여 네 녘으로 흩어지는지라, 원균이 대경하여 소선을 타고 도망하여 해변 언덕에 올라 대구로 달아나더니 몸이 비둔(肥鈍)하여 능히 닫지 못하는지라, 길가의 소나무 허리를 안고 감히 일어나지 못하더니 종자 다 헤어지고 혹 이르되,

도적의 해를 만났다.’

하고 혹은,

멀리 도망한다.’

하니 그 진가(眞假)를 아지 못할러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대진이 패함을 보고 힘써 싸우다가 적세 급한지라, 능히 벗어나지 못할 줄 알고 인하여 물에 빠져 죽으니 삼도 수차 도적에게 함몰한 바 된지라, 적세 더욱 치성(熾盛)하더라.

전시에 경상수사 배설(裵偰)이 여러 번 원균의 패할 형세를 간하되 균이 즐겨 듣지 아니하더니 이 날 또 이르되,

칠천도는 물이 얕아 선천선천 왕래하기 편치 못하니 진을 다른 데로 옮김이 가하다.”

하되 원균이 마침내 듣지 아니하는지라, 배설이 애달아 가만히 본부 전선을 모으고 다만 변이 있음을 기다리더니 과연 적병이 이름을 보고 달아났는 고로 그 군사 홀로 보전하니라. 배설이 이미 난을 벗어나매 즉시 양초(糧草)를 불지르고 도중에 있는 백성을 멀리 피난케 하니라. 한산도 이미 패하매 적이 승승장구(乘勝長驅)하여 남해 순천을 함몰하고 인하여 군을 몰아 남원을 싸니 양호(兩湖)가 진동하더라. 대개 적이 아국에 들어옴으로부터 오직 우리 수군을 피치 못하였더니 평수길이 평행장을 책하여,

반드시 주사(舟師)를 취하라.”

하는지라. 행장이 이로 인하여 이순신으로 하여금 죄를 얻게 하고 또 원균을 유인하여 행중의 허실을 탐지한 후 드디어 엄습하여 파하니 그 계교 여차하되 아국은 아지 못하고 그 계교에 빠져 이에 미치니 어찌 가석지 아니하리요.

이때 이순신이 권율을 좇아 초계에 있더니 권율이 원균의 패함을 듣고 급히 이순신을 진주에 보내어 산병(散兵)을 초집(招集)하라 하였더니 팔 월 초삼 일에 조정이 비로소 한산도(閑山島) 패함을 듣고 사람마다 놀라 아무리 할 줄 모르더라. 상이 제신을 불러 의논하신대 군신이 감히 대답지 못하더니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주하되,

이는 진실로 원균의 죄라. 가히 다시 이순신으로 하여금 삼도 수군을 총독케 하소서.”

상이 그 말을 좇아 순신을 기복(起復)하여 통제사를 삼으니 흩어진 장사 이 소식을 듣고 점점 모이는지라. 순신이 즉시 군관 십여 인과 군사 수십 명을 거느려 진주에서 급히 달려 옥과(玉果)에 이르니 도내 사민이 길이 메여 순신의 오는 양을 바라보고 건장한 군민은 그 처자에게 이르되,

우리 사또 이르니 너희들이 죽기를 면하리라, 우리는 먼저 가나니 너희 등은 차차 오라.”

하더라.

순신이 행하여 순천에 들어가니 백성이 따르는 자 부지기수라. 병기를 수습하여 보성에 이르니 군사 이미 수백여 인이라. 드디어 해평도에 이르니 전선이 겨우 십여 척이 있는지라, 즉시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 전선을 수습하게 하고, 또 제장을 불러 분부하여 빨리 선척을 만들어 군용을 돕게 하고 드디어 언약하여 왈,

우리 등이 왕명을 받자왔으니 마땅히 죽기를 그음하여 나라를 갚으리라.”

하니 모든 장졸들이 감도치 않을 이 없더라.

재설, 이순신이 전선을 거느려 어란포(於蘭浦)에 이르니 적선 십여 척이 나와 아군을 엄습코저 하거늘 순신이 금고를 울리고 기를 두르며 전선을 재촉하여 짓쳐 나아가니 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고 각각 배를 돌려 달아나니라. 순신이 적군을 물리치고 제장을 모으고 충루(忠淚)를 흘려 왈,

순신이 국은을 망극히 입었는지라. 성은(聖恩) 갚기를 사모하나 미치지 못하는지라, 즉금 제장의 힘을 입어 다행이 도적을 물리쳤으나 원균의 해이한 후를 이었는지라. 도적이 반드시 또 이를지니 만일 해이하면 방어키 어려우리라. 각 채에 지휘하여 싸울 기계를 준비하였다가 불의지변을 방비하라.”

제장이 또한 눈물을 흘리고 청령하여 선척과 화포를 정제하고 기다리더니 과연 그날 밤에 적선이 이르니 후망군(堠望軍)이 급히 보하니 마군(馬軍)이 이미 준비하였더라.

재설, 이순신이 드디어 전선을 거느려 어란포에 이르니 적선 십여 척이 나아와 아군을 엄습하고자 하거늘 순신이 금고를 크게 울리고 기를 두르며 전선을 재촉하여 나아가니 도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순신이 뒤를 따라 짓쳐 크게 엄살하고 드디어 진도 벽파진(碧波津)에 진치고 경상우병사 배설로 더불어 도적 파할 모책을 의논할새 배설이 이르되,

대주사 힘이 외롭고 일이 급하였으니 마땅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 영남으로 나아가 도원수의 진중에 의지하여 싸움을 도움만 같지 못하다.”

하거늘 순신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는지라. 배설이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려 하거늘 순신이 사로잡아 인하여 버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더니 홀연 적선 백여 척이 군사를 몰아 나아가니 왜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순신이 즉시 쟁을 울려 군을 거두어 군중에 전령하여 가로되,

오늘밤 도적이 반드시 우리 진을 엄습할 것이니 제장은 준비하였다가 변을 기다리라.”

하더니 차일 적이 과연 이경(二更)에 진 앞에 이르러 포성이 대발하며 아군을 놀래거늘 아군이 이미 준비하였는지라, 또한 방포하여 서로 응하니 적이 아군을 경동치 못할 줄 알고 물러가니 대개 야경(夜警)하기로써 한산도에 의지함을 얻은 연고라. 이 해 조정이 주사로써 힘이 외로워 도적을 막지 못하리라 하여 순신으로 하여금 뭍에 내려 싸우라 하니 순신이 즉시 주문(奏聞)하여 가로되,

임진년으로부터 이제까지 육 년 간 도적이 감히 횡행치 못함은 아국 수군이 험요(險要)한 곳을 지킨 연고라. 신이 이제 전선 수십여 척이 있으니 만일 주사를 거느려 죽기로써 싸운즉 가히 공을 이루려니와 만일 주사를 폐한즉 왜적이 양호로 좇아 바로 한수(漢水)에 이르리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신이 죽기 전에는 왜적이 감히 우리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리이다.”

하더라.


각설, 정유(丁酉) 구 월 십육 일에 전선 수백 척이 바다를 덮어 나아 오거늘 순신이 제장으로 더불어 전선 십여 척을 거느려 맞아 싸우려 할새 거제현령 안위(安衛) 가만히 도망코자 하거늘 순신이 선두(船頭)에 서서 크게 불러 왈,

안위 어찌 국법에 죽고자 하느냐.”

안위 황망히 이르되,

어찌 감히 힘을 다하지 아니하리요.”

하며 분력하여 적진 중에 달려들어 싸우더니 적선 사오백 척이 안위를 사면으로 둘러싸고 거의 함몰케 되었더니 순신이 사 척 전선을 거느려 구원한대 적선 수백 척이 순신을 에워싸고 어지러이 짓치니 포성이 천지진동하고 함성이 뒤눕는 곳에 순신이 누()에 높이 올라 몸소 채를 잡아 북을 울리며 시석(矢石)을 무릅써 싸움을 돋우니 사졸이 분려(奮勵)하여 죽기를 다투어 이르되,

우리 사또 나라에 진충하사 이같이 하시니 우리가 어찌 사생을 돌아보리요.”

하고 일심육력(一心戮力)하여 십여 합을 싸우니 하나가 열을 당하고 백이 천을 당하는지라. 능히 이소역대(以小易大)하여 사시(巳時)부터 신시(申時)까지 싸워 피차 승부를 결치 못하더니 초경은 하여 적이 잠깐 퇴하거늘 순신이 승세하여 일진을 짓쳐 적선 사오 척을 함몰하고 연하여 따르니 적이 크게 패하여 달아나니 이로부터 순신을 대함이 더욱 중하더라. 이날 순신이 진을 옮기고 첩서(捷書)를 보내니 경이 크게 기뻐 포상하니 상이 기뻐 작()을 더하시려 하니 제신이 주왈,

다시 성공한 후 작을 더하심이 가하리이다.”

상이 좇으사 다만 제장을 위로하시니라. 순신의 계자(季子)의 이름은 면()이니 용력 있고 기사(騎射)를 잘하는지라, 순신이 가장 사랑하더니 정유 구 월에 이르러 면이 모()를 좇아 집에 있더니 적이 불의에 이름을 듣고 가인으로 더불어 내달아 도적 수십 인을 쳐 죽이고 뒤를 따르러니 도적의 복병을 만나 어지러이 싸우다가 마침내 도적의 손에 죽은 바 되니라. 순신이 이 기별을 듣고 비통함을 마지아니하더니 이로 인하여 정신이 날로 감하는지라, 스스로 기운을 수련하여 억제하더라. 순신이 일일은 서안(書案)을 의지하여 잠깐 조으더니 홀연 죽은 면이 앞에 이르러,

소자 죽인 도적을 부친이 어찌 죽이지 아니하시나이까.”

순신이 답왈,

네 살았을 제 용력과 담기 있더니 이제 비록 죽었으나 어찌 원수를 갚지 못하느뇨.”

면이 울며 대왈,

소자 이미 적수에 죽었으니 비록 혼백이나 감히 하수치 못하나이다.”

순신이 다시 묻고자 하다가 홀연 놀라 깨달으니 남가일몽이라. 제장을 불러 몽사를 이르고 비회(悲懷)를 금치 못하더니 또 몸이 혼곤하여 서안을 의지하니 비몽사몽간에 면이 또 앞에 나와 고하되,

부친이 어찌 소자의 원수를 갚지 않으시고 그 도적을 진중에 용납하시나이까.”

하고 크게 통곡하거늘 순신이 놀라 깨어 마음에 가장 괴이히 여겨 좌우에 문왈,

진중에 행여 사로잡아 온 군사 있는가.”

좌우 답왈,

오늘 아침 적군 일 명을 잡아 선중에 가두었나이다.”

순신이 즉시 잡아 당전에 올려 수말(首末)을 묻되 과연 면을 죽인 놈이어늘 드디어 사지를 찢어 죽여 면의 원수를 갚으니라. 처음 당장 양원호 등이 남원을 지키더니 한산이 패한 후 도적이 수륙으로 크게 나아오니 성중이 흉흉하여 도산(逃散)하는 자 많으되 오직 양원호가 삼천 병을 거느리고 성중에 있어 전라병사 이옥과 광양현감 이춘원과 방어사 김성노로 더불어 굳이 지키더니 적이 크게 이르러 성을 싸고 급히 치는지라, 양원호 등이 견수불출(堅守不出)하더니 성중에 양식이 점점 진하고 구병이 이르지 아니하는지라, 군심이 흉흉하여 능히 정히 못하더니 이 날 밤 성 외에 함성이 대진하매 일시에 성중을 향하여 조총을 발하니 철환이 비오는듯하는지라, 성첩(城堞) 지킨 군사 감히 거두지 못하더니 이윽고 적이 성 밑에 섶을 쌓아 성과 같이 하고 조총을 일시에 발하니 성중이 대란하는지라, 장병이 북문으로 좇아 달아나더니 적이 장병을 둘러싸고 어지러이 짓치니 장병이 난을 벗어난 자 많지 못하더라. 양원호 의갑을 버리고 겨우 도망하여 여러 겹 싼 데를 벗어나니 혹 이르되 양원호를 짐짓 놓아 보내다 하더라. 남원이 이미 함몰하매 전주 이북이 분궤하는지라. 이때 적이 승승장구하여 나아오니 각 읍 수령들이 각각 명을 도망하고 오직 의병장 곽자위가 창령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올라 굳게 지키더니 적이 산하에 이르러 보니 산세 가장 험준한지라, 감히 치지 못하고 물러가거늘 자위가 군사를 모아 산에서 내려와 적의 뒤를 엄습하여 일진을 시살하니 도적이 대패하여 달아나니라. 또 황석산(黃石山)을 칠새 이때 안음현감 곽준(郭䞭)과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먼저 달아나니 민심히 흉흉하여 능히 성을 지키지 못하더라. 적이 드디어 성을 함몰하니 곽준이 그 아들 이상과 이 후로 한가지 힘써 싸우더니 마침내 난군(亂軍)중에서 죽으니 준의 딸이 그 지아비 유문호로 더불어 준을 찾아 성중에 피난하였더니 준이 이미 죽고 또 그 지아비 적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음을 듣고 스스로 탄식하여 이르되,

이제 아비와 지아비를 잃었으니 내 홀로 살아 무엇 하리요.”

하고 인하여 목매어 죽으니라. 함양군수 조종도 일찍 난을 피하여 산중에 숨었다가 일일은 한가지로 피난 온 사람들이 이르되,

내 이미 국은을 입었는지라. 어찌 국은을 저버리고 한갓 초야에 묻혀 이름 없이 죽으리요.”

하고 드디어 처자를 거느려 성을 지키더니 성이 함몰하기에 당하여 곽준의 부자와 한가지로 죽으니라.

재설, 통제사 이순신이 전선 이십여 척을 거느려 진도 벽파진(碧波津) 아래 결진하였더니 적장 마흑시 전선 이백여 척을 거느려 아군을 향하여 나오거늘 순신이 배마다 화촉을 싣고 순풍을 좇아 나아가며 어지러이 짓치니 적이 능히 대적지 못하여 달아나거늘 순신이 따라가며 짓쳐 적장 심안둔을 버혀 수급을 돛에 달아 호령하니 군성이 대진하는지라, 순신이 드디어 나아가 금도에 결진하니 군사 이미 팔천여 명이요 난민 모인 자 수만여 명이라, 군용(軍容) 장함이 한산도에서 십 배나 더하더라.



3

 

 

이순신(李舜臣)의 최후


무술(戊戌) 칠 월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경성에 이르러 한가지로 도적을 치려 할새 인의 천성이 사나와 여러 사람의 뜻에 맞지 아니하는지라. 가장 두려워하는 자 많더니 상이 강두에 행하사 전송하실 새 진린의 수하군사 수평을 양매하되 조금도 기탄치 아니하고 찰방 이상규를 무수 난타하여 유혈이 낭자한지라, 상이 크게 근심하사 즉시 정지하사 순신으로 하여금 진인을 후대하여 촉노(觸怒)함이 없게 하라 하시다.

재설, 이순신이 당장 진인의 이름을 듣고 미리 주육(酒肉)을 장만하여 기다리더니 진인이 이미 도중에 이르매 순신이 맞아 보는 예를 필하매 일변 잔치를 배설하여 진인을 관대하고 일변으로 천병을 호궤하니 천병이 서로 이르되,

과연 양장이라.”

하고 진인이 또한 기뻐하더라. 양진이 합세하여 군중사를 의논하더니 홀연 보하되,

적선 백여 척이 나아 온다.”

하거늘 순신이 진인으로 더불어 각각 전선을 거느려 녹도에 이르니 적이 아군을 바라보고 짐짓 뒤로 물러가며 아군을 유인하거늘 순신이 따르지 아니하고 녹도 만호 만송 여동으로 하여금 십여 척 전선을 거느려 절이도에 돌아와 매복할새 진인이 또한 수십 척 전선을 머물러 싸움을 돕게 하다. 차일 진인이 순신으로 더불어 함께 술을 먹더니 진인의 휘하 천총(千總)이 품하여 왈,

아침에 도적을 만나 조선 주사는 적 수백여 급을 버히되 천병은 풍세 불리하여 적병을 하나도 참하지 못하였다.”

한대 진인이 대로하여,

무사로 하여금 밀어내어 참하라.”

하고 잡았던 술잔을 땅에 던지거늘 순신이 그 뜻을 알고 즉시 이르되,

노야(老爺) 이미 천조대장이 되어 이곳에 임하시니 우리 승첩(勝捷)은 곧 노야의 승첩이라, 노야의 복으로 임전하신 지 오래지 아니하여 첩서를 황조에 보하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하니 진인이 이에 대희하여 순신의 손을 잡고 이르되,

내 일찍 공의 이름을 우레같이 들었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로다.”

하고 다시 술을 나와 종일토록 즐기더라. 이로부터 진인이 순신의 진중에 있어 그 호령이 엄명함을 보고 마음에 깊이 항복할 뿐 아니라 거느릴 전선이 비록 많으나 도적 막기 편치 못한지라, 매양 전을 임하여 아국관선을 타고 순신의 지휘를 좇아 반드시 노야(老爺)’라 일컫고 이르되,

공은 동방사람이 아니라 만일 중원에 들어가 쓰이면 마땅히 천하대장이 되리라.”

하더라, 진인이 주상께 주문하여 이르되,

통제사 이순신이 경천위지(經天緯地)할 재주 있삽고 보천요일(普天曜日)할 공이 있다.”

하니 대개 심복하는 말일러라. 천병이 비록 순신의 위엄(威嚴)을 꺼리나 자못 노략하기를 일삼더라. 군민이 가장 괴로이 여기더니 하루는 순신이 영을 내려 도중 인가를 대소 없이 헐며 방()을 붙이되,

모일부터 모일까지 못 섬중으로 백성을 옮기리라.’

영을 내리고 자기 의금(衣衾)도 배에서 내리니 진인의 막하가 방을 가지고 가 고하거늘, 진인이 급히 가정을 보내어 연유를 물으니 순신이 답하되,

아국 백성이 천병을 인하여 노략(擄掠)을 일삼으니 양민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지라, 내 이제 대장이 되어 군민으로 하여금 능히 편안치 못하게 하고 무슨 면목으로 이곳에 머물리요, 이러므로 다른 곳에 옮아 가고자 하노라.”

가정이 돌아가 그 연유를 자세히 고하니 진인이 대경하여 전도에 이르러 순신의 손을 잡고 만류하며 또 사람을 선중에 보내어 그 의금을 도로 수운(輸運)하여 드리고 간청하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순신이 이르되,

노야 만일 내 말을 좇으시면 어찌 즐겨 서로 떠나리요.”

진인이 가로되,

내 어찌 공의 말을 아니 좇으리요.”

순신이 이르되,

천병이 아국으로서 제후국(諸侯國)이라 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는지라, 노야 만일 나로 하여금 임의로 금지케 하면 다시 다른 염려 없을까 하나이다.”

진인 왈,

이 일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요.”

하고 즉시 허락하니 그 후부터 천병이 죄 범하는 자 있으면 반드시 그 죄를 다스리니 천병이 두려워하기를 진인에게 지나는지라, 이로 인하여 군민이 평안하더라.

이때 적병이 삼도에 통행하여 다니며 여사(旅舍)를 불지르고 아국인을 잡으면 혹 죽이며 코도 베어 위엄을 보이고 그들의 전공으로 삼으며 점점 나아가 충청도 직산(稷山)에 이르니 경성이 진동하는지라, 양경리와 마제독이 제장으로 하여금 아국 군사로 더불어 한가지로 협력하며 각처 액구(隘口)를 지키니 적이 경기지경에 이르러 아국이 이미 준비함을 보고 즉시 군사를 돌이켜 돌아갈새 청정이 다시 울산(蔚山)에 둔하고 평의지는 사천(泗川)에 둔하였으니 수미 서로 연락하여 팔백 리에 벌였더라.

처음 적이 경성을 향하여 올 때 조신이 다투어 피난할 묘책을 의논할새, 지사 신집이 이르되,

어가(御駕) 영변(寧邊)으로 행하심이 마땅하리라, 내 일찍 평양병사 하였을 제 영변 일을 자세히 아나니 성첩(城堞)이 굳고 해자(垓字) 가장 깊으니 가히 지키엄직하거니와 다만 양식이 없으니 만일 미리 준비함이 없으면 장차 큰 근심이 되리라.‘

한대 듣는 자 이르대,

신불합장(辛不合醬)이라.”

하고 일시 기담(奇譚)을 삼아 웃기를 마지 아니하더라.

도원수 권율이 경상도에서 도망하여 도성에 이르니 상이 인견하사 적정을 물으시니 율이 대왈,

적병의 형세 태산 같으니 그 봉예를 대적키 어려운지라.”

당초에 상이 근심하시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적병이 물러가고 권율이 다시 경상도로 내려가니 대간(臺諫)이 계사하되,

율이 본디 지모(智謀) 없고 또한 겁이 많사오니 도원수의 소임을 당치 못하리이다.”

하나 상이 불윤하시니라.

이때 양경리 마제독이 보군(步軍) 수만을 거느려 아군으로 선봉을 삼고 경상도로 내려가 울산에 웅거한 도적을 칠새, 이때 적장 청정이 울산 동해변의 험한 곳을 가려 성을 쌓고 굳게 지키거늘 양경리 등이 나아가 성을 치니 적이 군사를 내어 싸우다가 능히 대적지 못하여 물러 성으로 달아들거늘 장병이 승세하여 나아가 성을 싸고 급히 치니 적이 성상에서 총을 어지러이 발하고 또 돌을 날려 성하에 내려치니 장병과 아군이 맞아 죽는 자 많은지라, 양경리 등이 취승치 못하고 정히 근심하더니 이 날 밤에 김응서(金應瑞) 수백 군을 거느려 성 외에 매복하였다가 급수(汲水)하는 도적 백여 인을 잡았으되 다 주린 빛이 있는지라.

제장이 이르되,

성중에 양식이 이미 진하였나니 오래지 않아서 적이 반드시 달아나리라.”

한대 경리 군사를 재촉하여 성을 치더니 이때 천기(天氣) 심히 차고 궂은 비 연일 오는지라, 군졸이 수족을 떨고 능히 싸우지 못할 뿐 아니라 적선 백여 척이 나아 와 청정을 구하려 하는지라, 양경리 적세를 보고 즉시 군사를 거두어 경성에 돌아와 다시 진병하기를 의논하더라.

무술 칠 월에 이르러 중조병부주사 정응대 경리 양호를 무함(誣陷)하여 파직하고 인하여 잡아 돌아가니 상이 경리의 공로를 생각하시고 즉시 좌의정 이원익을 천조에 보내어 양호의 애매함을 주하시니라. 구월에 이르러 중조대장 형개 다시 군마를 조발하여 도적을 칠 새 마귀(麻貴)로 울산을 지키고 동일원으로 사천을 지키고 수군도독 진인을 재촉하여 도적을 치라 하다. 진인이 순신으로 더불어 주사를 거느려 좌수영(左水營) 앞에 이르러 결진하였더니 제적이 장차 돌아가려 함을 듣고 즉시 전선을 재촉하여 순천 왜교에 이르니 이는 적장 평행장의 앞진이라. 순신이 남해현감 김이행 등으로 하여금 전선 십여 척을 거느려 적진을 충돌하여 왜선 사오 척을 파하고 크게 싸우더니 조수(潮水) 물러남을 인하여 돌아왔더니 이 날 천조 육군도독 유정(劉綎)이 마병 일만 오천을 거느려 왜교 북녘에 이르러 행장(行長)을 치려 하더니 적장 평의지 정병 수백을 거느려 남해로부터 평행장의 진에 이르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정히 평행장으로 더불어 유정을 언약하여 수륙으로 적진을 협공하더니 사도첨사 황세득이 적병의 철환을 맞아 죽었는지라. 세득이 본디 순신의 처족이라, 제장이 들어와 조문하니 순신 왈,

세득이 왕사에 죽었으니 가장 영행한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하더라,

십일 월에 이르러 변성남이라 하는 자 적진으로부터 도망하여 이르되,

일본 관백 평수길이 이미 죽었는지라, 제직이 관백을 다투어 급히 돌아가려 한다.”

하더라.

일일은 진인이 순신에게 일러 가로되,

내 밤에 천문을 보니 동방의 장성(將星)이 떨어지고자 하는지라, 이는 반드시 공에게 응함이니 공이 어찌 삼국적 제갈무후(諸葛武候)의 법술을 본받지 아니하느뇨.”

순신이 답하여 이르되,

나의 충성이 무후에게 미치지 못하고 덕이 또한 무후에게 미치지 못하고 재주 또한 부족하니 내 비록 무후의 법술을 쓴들 하늘이 어찌 응함이 있으리요.”

하더라. 이때 평행장 등이 급히 돌아가고자 하나 아국 주사 막혀 능히 뜻을 이루지 못하여 드디어 회뢰(賄賂)를 많이 진 도독께 끼치고 강화함을 주하니 진인이 순신을 권하여 적으로 더불어 화친을 통하고 군을 파하라 한대 순신 왈,

내 이미 조선 대장이 되었으니 가히 화친을 구하지 못할 것이요, 하물며 도적을 돌려보내지 못하리라.”

한대 도독이 부끄러워 다시 말을 못하고 왜사에게 이르되,

너희를 위하여 통제사를 권하되 통제사 즐겨 듣지 아니하니 장차 어찌하리요.”

왜사 돌아가 평행장에게 고한대 행장이 다시 조총과 보화를 순신에게 보내고 강화하기를 간청하니 순신이 대질 왈,

임진(壬辰) 이후에 도적을 무수히 죽이고 얻은 병기와 치중(輜重)이 뫼같이 쌓였으니 이것은 무엇에 쓰리요. 마땅히 네 머리를 베어 군중에 호령할 것이로되 아직 용서하나니 빨리 돌아가 행장다려 일러 다만 목을 씻고 죽기를 기다리게 하라.”

왜사 크게 두려 머리를 싸고 쥐숨듯 달아나니라.

진 도독이 이미 왜적의 뇌물을 많이 받았는지라, 기어이 길을 헤쳐 놓아 보내고자 하여 순신에게 이르되,

내 잠깐 행장을 버리고 남해 웅거한 도적을 치고자 하니 공의 뜻이 어떠하뇨.”

순신이 대왈,

남해에 있는 도적은 본디 조선 백성이요, 진실로 도적이 아니라, 어찌 치려 하느뇨.”

진 도독이 이르되,

비록 조선사람이라 하나 이미 도적을 좇았으니 이 또한 도적이라 이제 나아가 치면 조금도 수고를 허비치 않고 많이 버히리라.‘

한대 순신 왈,

천조 황상이 특별이 모든 장군을 명하사 도적을 치고자 하심은 진실로 소방(小邦) 사람을 구코자 하심이어늘 장군이 도로혀 주육(誅戮)을 더하려 하시니 이는 저어하건대 황상의 본뜻이 아닌가 하나이다.”

도독이 노왈,

황상이 주신 인검(印劍)이 내게 있으니 뉘 감히 내 영을 항거하리요.”

순신 왈,

이 몸이 비록 한 번 죽으나 어찌 차마 왜적을 버리고 도로혀 내 불쌍한 군민을 해하리요.”

하고 힘써 다투니 도독이 감히 뜻을 세우지 못하더라.

이 달 십칠 일 초혼(初昏)에 이르러 평행장이 불을 들어 남해 적으로 더불어 서로 응하니 대개 평행장이 곤양 사천에 웅거하나 도적을 청함이니라. 이 도적은 본디 일본국 산주군이니 용맹이 무적한 고로 하여금 선봉을 삼아 조선군사를 해치고 달아나려 함이라, 순신이 제군을 신칙하여 싸울 기계를 준비하더니 십팔 일에 이르러는 왜군의 전선 오백 척이 남해 곤양 사천으로 말미암아 아국 군병을 향하여 나아 오거늘 순신이 도독으로 더불어 노량(露梁)에 이르러 도적을 만나 크게 싸워 적선 백여 척을 파하고 쟁쳐 군을 거두어 잠깐 쉬더니 이 날 밤 삼경에 이르러 순신이 배 위에서 하늘을 우러러 사배하고 암축(暗祝) ,

도적을 진멸하오면 순신이 비록 죽사와도 한이 없으리니 명천이 감동하사 수륙에 미만(彌滿)한 왜적을 진멸하게 하소서.”

하고 정히 빌 즈음에 홀연 큰 별이 빛이 황홀하여 해중에 떨어지는지라, 순신이 놀라 탄식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보는 자 아니 놀랄 이 없더라. 십구 일에 이르러 순신이 다시 진인으로 더불어 남해지계에 이르러 왜장 청정의 전선을 만나 크게 싸우더니 홀연 급한 철환이 날아와 순신의 가슴을 맞아 바로 등을 꿰뚫고 나가는지라, 좌우 붙들어 장중에 들어가니 순신이 이르되,

싸움이 바야흐로 급한지라, 나의 죽음을 누설치 말라.”

하고 말을 마치며 천명(天命)이 진하니 순신의 조카 완()이 본디 담략(膽略)이 있는지라. 순신의 아들 회()에게 이르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망극하기를 어이 참으리요마는 만일 상사(喪事)를 발설하면 일군이 경동하리니 만일 도적이 허한 때를 타 엄습하면 시신(屍身)을 또한 보전하여 돌아가지 못하리라.”

하고 드디어 순신의 영으로 싸움을 독촉하더니, 진 도독의 전선이 적병에게 싸인 바 되어 거의 함몰케 되었거늘 이완이 중군을 지휘하여 나아가 적선을 짓치니 도적이 일시에 달아나는지라, 도독이 배를 재촉하여 나아 오며 크게 불러 왈,

통제사는 어디 있느뇨.”

이완이 뱃머리에서 크게 통곡 왈,

숙부의 명이 이미 진하였는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도독이 대경하여 배 위에서 거꾸러지며 통곡 왈,

통제사 이미 죽은 후에 날을 구하도다.”

하고 인하여 가슴을 두드려 통곡하기를 마지아니하고 일군이 또한 통곡하니 곡성이 해중에 진동하는지라, 천조 장군이 또한 아니 슬퍼하는 자 없더라.

이때 평행장 등이 액구를 벗어나 일본으로 돌아가고 곤양 사천 거제 웅천 부산 순천 등지에 둔취하였던 도적이 또한 일시에 돌아가니라. 순신의 아들 이회 등이 고금도(古今島)로부터 영구(靈柩)를 받들어 아산(牙山)으로 돌아갈새 일로 인민이 곡성이 진동하고 도독의 제장이 각각 치제하며 또한 만장(輓章)을 지어 순신의 공을 찬양하더라. 진 도독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올 때에 아산에 들어가 치제코저 하더니 마침 형국문(형개)이 경사에 사람을 보내어 도독의 양병하기를 재촉하는지라, 다만 수백 냥을 보내어 부의(賻儀)를 삼으니 이회 비록 초상에 있으나 가히 아니 사례 못할지라, 급히 달려가더니 아산 대로에 이르러 도독을 만나 즉시 말에서 내려 절하여 뵈니 도독이 이회의 손을 잡고 양구히 통곡하다가 인하여 문왈,

제 이제 무슨 벼슬을 하였느냐.”

회 답왈,

소자 이제 초상에 있는지라, 어찌 관작(官爵)을 배하리요.”

도독이 이르되,

중국은 비록 초상에 있으나 오히려 상전을 폐치 아니하거늘 너희 나라는 논공(論功)하는 법이 가장 늦은지라, 내 마땅히 너희 국왕께 고하고 빨리 봉작(封爵)을 받게 하리라.”

하더라. 상이 순신의 죽음을 들으시고 가장 슬퍼하사 즉시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시고 승직(陞職)하사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우의정 부 영의정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을 추증하시고 시호(諡號)를 충무공(忠武公)이라 하시니라.

순신이 가정(嘉靖) 원년 을사에 탄생하여 만력(萬曆) 원년 무술에 졸하니 연이 오십사 세라. 순신의 제장이 충무공을 위하여 묘당(廟堂) 세우기를 청하니 조정이 좇아 경상좌수영 북녘에 묘당을 세우고 이름을 충무사(忠武祠)라 하더라. 호남 군민이 다투어 재물을 내어 돌비[石碑] 하나를 만들고 방백에게 새겨 세우기를 청하니 방백이 진안현감 신인도를 보내어 돌비에 크게 쓰되,

조선국 영의정 덕풍부원군 충무공 이장군 파로비(破擄裨)”

라 하여 동령영에 세우니 이는 좌수영을 왕래하는 길이더라. 그 후에 이운룡(李雲龍)이 통제사를 배하매 민심을 좇아 묘당을 거제 당에 세우니 대소선척이 발행할 제 고사(告祀)치 않을 이 없더라. 영남 해변에 있는 백성들이 또한 재물을 내어 충무공의 묘당을 노량에 세우고 출입에 반드시 제사를 행하니 대개 노량이 한산도에서 가까운 연고일러라.

차설, 충무공이 처음으로 탄생하매 복자(卜者) 이르되,

이 아이 행년 오십에 남방에서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장에 이르리라.”

하더라. 공이 어렸을 때에 동리 소아들로 더불어 유희할 제 매양 돌을 쌓아 진법을 만드니 보는 자 가장 기특히 여기더라. 자라매 여력이 과인하고 기사(奇事)를 잘하는지라, 동류 중에 미칠 이 없더니 병자춘(丙子春)에 무과에 뽑히어 선영에 배알(拜謁)할새 묘전에 세웠던 석인(石人)이 땅에 거꾸러졌는지라, 공이 하인 수십 인으로 하여금 다시 세우라 한대 중인이 능히 그 돌을 이기지 못하거늘 공이 중인을 꾸짖어 물리치고 두 손을 잡아 일으키니 보는 자 놀라지 않을 이 없더라. 공의 천성이 사람 찾기를 좋아 아니하는 고로 비록 낙중(落中)에서 생장하였으나 사람이 알 리 없으되 홀로 서애(西厓) 유성룡이 어려서부터 친한 고로 매양 대장의 재주라 일컫더라.

병인년 겨울 비로소 훈련원(訓練院)에 근사(勤仕)하더니 이때 율곡선생(栗谷先生)이 이조판서로 있어 공의 이름을 듣고 서애 유성룡을 인하여 한번 보기를 청한대 공이 사양 왈,

율곡이 날로 더불어 동성이요 또한 장자니 가히 봄즉하나 정관(政官)으로 있을 때는 가치 아니하다.”

하고 마침내 나아가지 아니하니라.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또한 공의 이름을 듣고 매파(媒婆)를 넣어 첩 딸로써 공의 첩을 주고자 하거늘 공이 즐겨 아니하며 왈,

내 처음으로 사로(仕路)에 났는지라, 어찌 자취를 권문(權門)에 의탁하리요.”

하고 마침내 듣지 아니하니라.

이 해 겨울에 충청병사(忠淸兵使)의 군관(軍官)이 되어 청주로 내려가매 병사를 지성으로 섬길 뿐 아니라 상시 거처에 다만 의금(衣衾)뿐이요 근친(覲親)하러 돌아올 때는 남은 양식을 하인에게 맡겨 분명히 하니 병사 듣고 가장 사랑하며 극진히 공경하더니 일일은 병사 밤들기를 인하여 취흥(醉興)을 겨워 공의 손을 잡고 이끌어 한 군관의 방을 찾아가고자 하니 그 군관은 평일에 사랑하고 가장 친한지라, 공이 가로되,

대장이 혼야(昏夜)에 스스로 막하를 찾음이 가치 아니하다.”

하여 거짓 취한 체하고 병사의 손을 받들며 이르되,

사또 장차 어느 곳으로 가려 하시느뇨.”

병사 바야흐로 깨달아 땅에 앉으며 왈,

내 진실로 취하였다.”

하더라.

경진년 구 월에 공이 훈련원(訓練院) 말관으로 발개[鉢浦]만호를 제수하여 부임하였더니 이때 감사 손식이 장한 이름을 듣고 공을 해코자 하더니 순력(巡歷)을 당하여 능주에 이르러 공을 불러 진법을 강론하고 진을 그리라 한대 공이 즉시 붓을 잡아 그리더니 손식이 양구히 보다가 이르되,

필법이 어찌 이렇듯 정묘하뇨.”

하고 인하여 선세(先世)를 물은즉 본디 세문의 양반이라, 감사 스스로 차탄 왈,

내 처음에 서로 아지 못함을 한하노라.”

하고 이로부터 관중히 대접하더라.

차설, 좌수사 형백[成鎛]이 사람은 본진에 보내어 객사 앞에 있는 오동나무를 취하여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거늘 공이 허치 않으며 왈,

이는 공해(公廨)에 있는 나무요 하물며 심은 지가 오래거늘 어찌 일조에 버히리오.”

수사 비록 대로하나 마침내 그 나무를 가져가지 못하니라. 그 후에 이용이 수사 되었더니 또한 차언을 듣고 공을 해코자 하여 불의에 다섯 진변 장수와 군사를 점고하니 네 진변 장에는 궐한 것이 많고 발개는 다만 삼 인이 궐하였으되 수사 오직 공의 이름만 주문하여 죄를 청하고자 하거늘 공이 이 일을 알고 네 진변 장 궐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여 수영에 이르러 모든 비장을 보고 그 일을 자세히 이르니 모든 비장이 수사에게 고하여,

발개라 하는 곳이 적을 뿐 아니라 순신이 이미 네 진의 궐한 것을 알았으니 이제 만일 장문하여 후에 반드시 뉘우침이 있을까 하나이다.”

하니 수사가 그렇게 여겨 그 일을 정하지 못하였더니, 그 후에 전지(傳旨)를 당하여 장차 하등을 쓰고자 하거늘 충청병사 조헌(趙憲)이 붓을 잡고 즐겨 쓰지 않으며 왈,

내 들으니 순신이 변비(邊鄙)를 다스림이 일도에 으뜸이라 하는지라, 가히 폄()치 못하리라.”

하고 인하여 상등에 두었더니, 임오년 춘삼월에 이르러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이 본조에 이르러 군기를 수정치 않음으로써 계문하여 파직하매 사람이 이르되,

공의 군기를 수정함이 다른 사람과 다르되 마침내 변을 입으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전일 훈련원에 있을 때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촉노(觸怒)한 연고라.”

하더라.

계미년 가을에 이르러 이용이 남병사를 배하매 공을 계청하여 군관을 삼으니 이는 전일을 뉘우쳐 깊이 사귀고자 함이러라. 공으로 더불어 친밀함이 다른 사람과 지나는지라, 대소 군무를 반드시 의논하더니 하루는 병사 장차 발행하여 북으로 갈새 공이 변방 군관에 있어 행군하기를 서문으로부터 나가게 하는지라, 병사가 대로 왈,

내 본디 서문으로 나지 말고자 하거늘 어찌 구태여 이 길로 행하려 하느뇨.”

하거늘 공이 이르되,

서는 금방이라, 사시로 의논하면 금의 속함이 가을이요 가을은 숙살(肅殺)하기를 주장하는 고로 이로 인하여 서문으로 나고자 함이니이다.”

병사 이 말을 돋고 도로혀 크게 기뻐하더라.

이 해 겨울에 건원군관(乾原軍官)이 되었더니 이때 적호 오랑캐 자주 변방을 침노하는지라, 조정이 크게 근심하나니 공이 부임한 후 계교를 베풀어 오랑캐를 유인하여 크게 파하니 북평사 김우서(金禹瑞)가 홀로 순신의 성공함을 꺼려 주장께 품하지 않고 천자(擅恣)히 대사를 행하리라 하여 공의 죄를 다투어 계문하니 조정이 바야흐로 순신의 큰 공을 더하고자 하다가 주장의 계문을 인하여 비록 정치 못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이름이 자자한데 세상에 행하기를 얻지 못하니 지식 있는 자 가장 아까워하더라. 이 해 겨울에 그 부친 덕전군의 상사를 만나 분산하였더니 이때 조정이 바야흐로 공을 중히 쓰고자 하여 겨우 소상(小祥)을 지낸 후에 결복(闋服)하는 기한을 자주 묻더라. 병술년 정월에 비로소 삼년상을 마치매 즉시 사복주부(司僕主簿)를 제수하였더니 행공(行公)한 지 겨우 십륙 일에 조산만호(造山萬戶)를 제수하시니 이는 다른 연고 아니라, 이때 오랑캐 자주 변방을 침노하는 고로 조산이 호지(胡地)에 가깝다 하여 공으로 만호를 삼았더니 정해년 가을에 이르러 녹둔도(鹿屯島) 둔전 소임을 겸하니 그곳이 본진에서 극히 요원할 뿐 아니라 지킨 군사 또한 적은지라, 여러 번 보장하여 청병하기를 청하되 병사 이일이 즐겨 듣지 아니하더니 오래지 않아 적병이 크게 이르러 섬을 싸거늘 공이 중군을 호령하여 일시에 쏘며 공이 스스로 활을 잡아 도적의 괴수 십여 인을 쏘아 죽이니 적이 대경하여 군사를 거두어 달아나거늘 공이 이운용 등으로 더불어 뒤를 따라 일진을 엄살하니 적이 사산분주(四散奔走)하거늘 아국 피로인(被虜人) 육십여 명을 앗아 들이온대 병사 이일이 심중에 꺼려 공을 죽여 제 죄를 면코자 하여 공을 잡아 영문(營門)에 이르러 패군함으로써 복초(伏招)하라 한대 공이 소리를 가다듬어 이르되,

내 일찍 군사 적음으로써 여러 번 영문에 고하던 서목(書目)이 이에 있는지라, 조정이 만일 알면 그 죄 내게 있지 아니할 것이요, 하물며 내 힘써 싸워 도적을 물리치고 피로인 육십여 명을 살려 돌아왔거늘 어찌 패군함을 내게 돌려보내어 죄를 의논하리요.”

하고 조금도 낯빛을 변치 아니하는지라, 이일이 묵연양구(黙然良久)에 공을 잡아 가두고 패군한 형상을 갖추어 계문하니 상이 가로되,

이순신은 패군할 무리 아니라.”

하시고 하여금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워 죄를 속하게 하시다. 이 해 겨울에 오랑캐를 파하고 사명(赦命)을 얻으니라. 무자년 유월에 비로소 집에 돌아왔더니 이때 조정이 무변중 불차탁용(不次擢用)할 사람을 가릴새 공의 이름을 둘째 빼었으되 미처 서용(敍用)치 못한 고로 능히 벼슬을 얻지 못하니라. 기축년 이 월에 이르러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이 공으로써 군관을 삼고 인하여 탄왈,

공의 재주로써 이렇듯 침체하였으니 어찌 가석치 않으리요.”

하고 드디어 공을 주청하여 본도 조방장을 삼았더니 이 해 겨울에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경성에 올라왔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정읍현감(井邑縣監)을 제수하시매 공이 즉시 부임하였더니 이때 구대중이 본도 도사 되어 글월로써 안부를 묻거늘 공이 다만 평안함으로써 회답하였더니 그 후에 대중이 역모(逆謀)에 관련하여 제집 서적을 수탐할새 공의 서간(書簡)이 수탐중 드러난지라, 공이 마침 채사원으로 경성에 올라오다가 길에서 금오랑(金吾郞)을 만나니 이는 공의 평일 소친자(所親者). 공에게 이르되,

이번 수험(搜驗)중에 공의 필적이 있는지라 내 이제 공을 위하여 서적을 빼고자 하노라. 공의 뜻이 어떠하뇨.”

공이 이르되,

전일 대중이 글월을 부쳐 회답할 따름이라, 하물며 이미 수탐중에 있나니 어찌 감히 빼리요.”

금오랑이 인하여 돌아가더니 오래지 아니하여 공을 돋워 당상(堂上)을 하이시고 인하여 만포첨사(萬浦僉使)를 하이시니 의논하는 자 이르되,

상이 공의 문필을 보시고 벼슬을 돋우다.”

하더라. 공의 형이 일찍 구몰(俱沒)하고 그 자녀 다 대부인께서 양육하는지라, 공이 정읍에 부임할 제 그 형의 자녀 다 대부인을 좇아갔는지라, 혹 이르되,

남들로 득죄함이 있을까 하노라.”

하니 공이 이르되,

차라리 남들로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차마 의지 없는 유치(幼穉)를 버리리요.‘

하더라. 공이 정읍으로부터 만포에 도임코자 하더니 신묘년 이 월에 진도군수(珍島郡守)를 제수하였다가 미처 부임치 못하여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를 명하시니 공이 드디어 정읍으로부터 부임하니라. 공이 처음 수사를 배할 때 공의 벗이 한 꿈을 얻으니 나무가 하늘에 가득하고 여러 가지 사면으로 피었는데 그 위에 인민이 천만이나 부지하였더니 그 나무가 홀연 뿌리가 빠져 장차 기울게 되었는지라, 문득 한 사람이 급히 달려들어 구하거늘 그 사람은 이른바 공이라. 훗사람이 송나라 정승 문천상(文天祥)이 하늘 받든 꿈에 비할러라. 대개 하늘이 먼저 변을 지어 보이나니 백홍(白虹)이 관일(貫日)하고 태백(太白)이 현천(現天)함은 해마다 있으니 사람이 상사로 알거니와 그 남은 재변은 증험할 것이 많은지라. 임진년에 괴이한 재변이 많으니 능히 다 기록지 못하거니와 신묘년에 한강물이 연하여 삼 일을 핏빛이 되고 성안에 검은 기운이 크게 일어나 바로 하늘에 깨쳐지더니 수일 후에야 바야흐로 걷으며 평양 대동강 물이 서편은 맑으며 동편은 흐리고 또 무수한 범이 평양성 중에 들어와 인민을 해하니 범은 본디 뫼에 있는 짐승이라. 어찌 성지 중에 들어와 사람을 해하리요. 이는 도둑이 장차 성중에 들어올 징조라 하늘이 먼저 재변을 사람에게 간절히 하시되 사람이 능히 살피지 못하더라.

관공(關公)이 도성에 현성(顯聖)하신 후에 또 전라도 남원에서 현성하사 왜적을 많이 죽이시는지라, 왜적이 이때 능히 저당하리요. 아국 병란이 평정 후에 묘당을 세우고 위패(位牌)를 만들어 천추에 미멸케 하고자 하되 화상을 일찍 보지 못하였는지라, 중원에 들어가 구할새 원래 관공이 중원에 현성하심이 많은 고로 가가호호이 혹 관공의 화상도 위하여 혹 위패를 만들어 제사하는지라, 드디어 그 위패 하나를 구하여 아국에 내어 와 동남에 관왕묘(關王廟)를 세우고 위패를 당년 생시같이 모셔 봉안할새, 명천자(明天子) 왕작 추증을 더하사 현성 무안왕이라 하시니 동남 관왕묘 천지로 더불어 한 가지로 하실지라,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요. 남원에 또한 관왕묘를 세우고 연년 사시로 제사하며 기도하는 자 많은지라, 만일 기도를 지성으로 행하면 효험(效驗)이 명백하다 하더라.


 

논개(論介)의 순사(殉死)

 

각설, 왜적이 처음에 진주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상한 자 많은지라, 두 번 나올 제 부디 진주를 무찔러 적의 원수를 갚고자 하여 힘써 싸워 성을 함몰하고 사람을 만나는 족족 죽이고 개와 닭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더니 그 읍 중에 기생 논개(論介)라 하는 이 있어 그 얼굴이 아름다움을 보고 차마 죽이지 못하여 왜장이 데리고 촉석루(矗石樓)에 올라 서로 희롱하며 가까이하고자 하거늘 논개 생각하되,

내 몸이 비록 천한 기생인들 어찌 타국의 무지한 도적들에게 몸을 더럽히리오.’

하고 심중에 한 계교를 생각하고 적장(敵將)을 죽이고자 하여 속여 이르되,

내 천성이 괴이하여 주의한 뜻이 있나니 장군이 내 말을 들으면 비록 사지(死地)라도 따르려니와 그렇지 아니한즉 장군이 만일 천첩의 몸을 만단으로 찢어도 결단코 듣지 아니하리라.”

적장이 가로되,

무슨 일이뇨.”

논개 이에 강수를 가리켜 왈,

저 강 속에 들어가 바위 끝에 올라 한가지로 춤을 춘 후 바야흐로 장군을 좇으리라.”

적장 왈,

무엇이 어려우리오.”

하고 논개로 더불어 바위위에서 대무(大舞)하더니 적장의 흥이 바야흐로 무르녹을 때에 논개 문득 왜장의 허리를 안고 물속에 뛰어드니 강수 표묘(縹渺)하여 잠깐 사이에 두 사람의 간 바를 아지 못하는지라. 적장이 이미 없으므로 적병이 성을 버리고 돌아가니 이로 인하여 진주(晉州)를 다시 회복하니라. 논개 비록 천한 여자나 그 강개(慷慨)한 마음과 이 같은 지혜 있으니 고인에게 비하매 족히 부끄럽지 아니할지라,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요. 후인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의암(義岩)이라 하는지라, 사적이 기이한 고로 만단의 논개 행적을 기록하노라.

차설, 평행장 등이 일본으로 돌아가니 왜란이 이미 평정한지라, 어가(御駕)가 의주 취승당을 떠나 경성에 환궁하실새 지나는바 열읍이 팔년병화(八年兵禍)를 지내며 도로(徒勞)의 인연이 그치고 물색이 극히 소조(蕭條)하여 잔멸(殘滅)치 않을 곳이 없더라.

이때 평안도 용강(龍岡)사람 김응서(金應瑞)와 전라도 진주사람 강홍립(姜弘立))이 용맹이 과인하더니 왜란을 당하여 비록 조정에 입신치 못하나 전장에 나아가 기특한 공을 세웠더니 상이 환공하신 후 양인의 공로를 들으시고 패초하사 양인의 근본을 물으시고 은근히 위유(慰諭)하시니 양인이 복지 사은하온대 상이 대연을 배설하여 문무중관을 모아 즐기실새 공신을 탁용하시고 전망자손(戰亡子孫)을 위로하시고 김응서 강홍립을 각별 추천하사 봉작을 더하시니 양인이 고두주왈(叩頭奏曰),

천은이 망극하온지라, 국은을 갚을 길 없사오니 원컨대 수만 병을 주시면 왜국을 탕멸하와 임진년 원수를 설분(雪憤)하옵고 후환(後患)을 그쳐지이다.”

상이 옳게 여기사 김응서로 도원수를 삼고 강홍립으로 부원수를 정하시고 팔도에 행관(行關)하여 군병을 취합하여 일본을 치라 하시다.

 

 

만고충신 김덕령(金德齡)


조신 윤옥이 주왈,

강원도 이천 땅에 김덕령(金德齡)이란 사람이 용맹이 절륜(絶倫)하되 난시를 당하여 국가를 받들지 아니하옵고 청정의 진에 들어가 무슨 약속을 하온 지 삼 일 만에 퇴군하여 공주로 갔다 하오니 나국엄문(拿鞠嚴問)하여 실상을 알아지이다.”

상이 들으시고 대로하사 김덕령을 나래(拿來)하시니 금부도사(禁府都事) 엄명을 받자와 급히 내려가 덕령을 잡아올새 철원 땅에 이르러 덕령이 도사를 불러 이르되,

잠깐 머물러 벗을 보고자 하노라.”

도사가 대질 왈,

나명(拿命)이 지중하니 어찌 일각인들 지체하리요.”

재촉하니 덕령이 분연 왈,

아무리 나라 죄인인들 어찌 사정이 없으리요.”

도사 덕령의 용맹을 들었는지라, 감히 거스리지 못하여 묵연하더니, 이윽고 한 사람이 헌 관을 쓰고 나아와 덕령의 손을 잡고 이르되,

내 너에게 무엇이라 하더뇨, 네 모친 말씀을 듣지 말고 난시를 도으라 하였더니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런 대화(大禍)를 만나니 누구를 원망하리요, 다만 가석한 바는 네 재주로서 속절없이 죄인이 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이 또한 천명이니 어찌하리요, 이제 천명이 지중하니 감히 거역지 못할지라. 빨리 나아가고 역명(逆命)을 취하지 말라.”

하고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을 뿌리며 이별하니라. 도성에 이르러 봉명(奉命)하온대 상이 국문하실새 가라사대,

네 재주를 품고 난시를 당하여 국가를 돕지 아니하고 청정의 진에 들어가 무슨 약속을 하였느냐.”

덕령이 주왈,

소신이 만일 의심이 있사오면 어찌 부상(父喪)을 입삽고 적진에 들어가오며 청정을 물림은 나라를 돕사온 일이오니 어찌 도적과 약속을 하리요, 신의 반심(叛心) 없음을 밝히옵소서.”

하고 말을 마치며 몸을 솟아 열 길이나 올랐다가 도로 내려오는지라, 아니 놀랄 이 없더라. 덕령이 가로되,

원컨대 신을 빨리 죽여 국법을 정히 하소서.”

상이 무사를 명하여 엄형을 가하되 마침내 죽는 일이 없는지라, 덕령 왈,

신을 역신(逆臣)이라 마옵고 만고충신 김덕령(萬古忠臣 金德齡)’이라 써붙이시면 죽으리이다.”

상이 하릴없이 그대로 하시니 덕령이 그제야 난데없는 비수(匕首)를 빼어 제 무릎을 거스리고 비늘을 때고 이르되,

이곳을 치면 죽으리이다.”

하거늘 그곳을 치니 과연 즉시 죽더라.

 


김응서(金應瑞)강홍립(姜弘立)의 정왜(征倭)


각설, 김응서와 강홍립이 군사를 연습하더니 상이 양장을 불러 가라사대,

뉘 감히 선봉이 되리오.”

응서 주왈,

소신이 당하리이다.”

하고 서로 선봉을 다투거늘 상왈,

각각 제비를 잡으라.”

하신대 강홍립이 선봉을 잡은지라, 응서는 후군장(後軍將)이 되어 대병을 거느리고 성상께 하직할새 상왈,

일본이 강성하니 삼가 경적(輕敵)치 말고 일찍 항복받은 첩서(捷書)를 주하라.”

응서 주왈,

신이 죽기로써 일본을 멸하여 근심을 덜리이다.”

하고 인하여 행군하니라.

이때는 경자(庚子) 삼 월이라. 동래부사 이현룡(李見龍)이 선척을 준비하여 수만중을 대후(待候)하였더니 행군한 십 일 만에 동래(東萊)에 득달하니 부사 대군을 맞아 결진하고 양장(兩將)을 위로하며 대연을 배설하여 즐기더니 십여 일 후 순풍을 만나 승선(乘船)하여 행군하더니 삼 일 만에 응서의 진 뒤에서 크게 웨여 왈,

장군은 아직 행군치 말고 잠깐 내 말을 들으라.”

하거늘 응서 문왈,

네 귀신이냐.”

답왈,

나는 조선 땅에 있는 어둑강이란 귀신이러니 장군이 행군한 삼 일만에 천문을 보니 이제 삼 일만 머물러 가면 대공을 이루려니와 만일 그렇지 않으면 대환을 만나 회환치 못하리이다.”

응서 이 말을 듣고 기를 둘러 군을 머무르고 홍립을 청하여 들은 바를 전하니 홍립이 듣지 아니하고 행군하거늘 응서 탄식하고 재삼 간청하니 홍립이 여성(厲聲) ,

그대 어찌 법이 엄중함을 모르느냐, 나는 상장(上將)이요 그대는 아장(亞將)이라 어찌 단언을 하느냐, 만일 다시 이르면 군법을 행하리라.”

응서 왈,

후환을 만나도 나를 원망치 말라.”

하고 행군하더니 그 귀신이 또 응서의 앞에 와 웨여 왈,

장군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가거니와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리라.”

하거늘 응서 심중에 의심하더니 선봉이 벌써 우무령이란 뫼 밑에 다다른지라, 군사 고하되,

앞길이 협착하고 발이 빠져 능히 행치 못하나이다.”

하거늘 홍립 왈,

길이 비록 험준하나 어찌 행치 못하리요.”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나아가더니 문득 음풍이 일어나며 일성 포향에 좌우로 복병이 내달아 짓치니 함성이 천지 진동하는지라, 양장이 불의지변을 만나 수미를 돌아보지 못하여 아무리 할 줄 몰라 겨우 정신을 차려 복병을 헤치고 내달으니 천지 명랑하고 풍세 잔잔하더라.

응서 앙천 탄왈,

장군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대환을 만났으니 뉘우친들 어찌 미치리요. 수만 병을 다 죽였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리요.”

하고 한탄하더니 문득 후면에 함성이 진동하며 추병(追兵)이 급하거늘 양장이 대로하여 정신을 가다듬어 칼을 춤추며 좌우로 짓쳐 들어가니 검광(劍光)이 상설(霜雪) 같고 빠름이 풍우 같은지라, 좌충우돌하기를 무인지경같이 하니 이르는 곳에 장졸의 머리 추풍낙엽 같은지라, 이때 왜왕이 삼봉산에 올라 승패를 보다가 쟁을 쳐 군을 거두고 이르되,

조선 장수의 검술을 보니 신기함이 무쌍한지라, 저런 영웅이 조선에 있거든 청정 소섭이 비록 팔십만 기병을 거느렸으나 어찌 패망치 아니하리요. 만일 저 장수를 제어치 못하면 일본이 장차 망하리로다.”

하더니 날이 이미 황혼이 되매 응서와 홍립이 앙천 통곡 왈,

이제 수만 병을 다 죽였으니 우리 둘이 있은들 어찌하리요.”

응서 책왈,

당초 내 말을 듣지 않아 오늘 대환을 만나니 누구를 원망하리요.”

홍립이 위로 왈,

장군은 안심하라. 우리 둘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을지언정 대장부 어찌 죽기를 두려하리요.”

하고 분기철천(忿氣徹天)하여 밤을 새우더라.

이때 왜왕이 수다 장졸을 죽이고 군신을 모아 정히 상의하더니 좌연이란 신하가 주왈,

신의 소견은 적진에 전서를 보내되 양진에 각각 두 장수씩 나서 서로 검무(劍舞)하여 승부를 결하자 하소서.”

왜왕이 그 말을 좇아 즉시 전서를 써 보내니라. 홍립이 전서를 보고 낙담 왈,

이제는 항복함만 같지 못하도다.”

응서 분연 대질 왈,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적장에게 굴슬(屈膝)하여 살기를 취하리요.”

하고 즉시 회보하여 명일 결진함을 언약하니라. 이때 왜왕이 높은 뫼에 올라 좌정하여 여팔도 여팔낙 양장을 불러 왈,

과인이 경의 재주를 아나니 힘을 다하여 임진년 원수를 갚으라.”

곽선이 주왈,

대왕은 진중하소서. 여팔도 여팔낙의 재주는 옛날 상신(相臣) 조운(趙雲)이라도 더하지 못하리이다.”

하고 삼십리허에 진세를 이루매 양장이 대호 왈,

적장은 쾌히 나와 승부를 결하라.”

하고 검무(劍舞)할새 검광이 검은 구름 위의 번개 같은지라, 홍립이 응서를 말려 왈,

적장의 검술을 보니 가히 대적지 못할지라, 장군은 어쩌코자 하느뇨.”

응서 대책 왈,

저 같은 담략(膽略)을 가지고 어찌 대장이 되리요. 한번 싸워 사생을 결할지라, 어찌 왜적을 돌려보내리오.”

하고 즉시 전복(戰服)을 벗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칼을 버리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대적코자 하거늘 홍립이 더욱 말리니 응서 왈,

적장의 검무를 보니 족히 두렵지 않은지라. 장군은 과히 겁하지 말라.”

하고 크게 웨여 왈,

적장은 멀리 서지 말고 가까이 나아 오라.”

왜왕이 살펴보니 응서 몸에 갑주를 벗고 다만 학창의만 입고 손에 촌철(寸鐵)도 없이 진전에 나섰으니 왕이 대소 왈,

적장이 스스로 용맹을 믿고 아국을 능멸하거니와 벌써 해심(垓心)중에 들었으니 승천입지(昇天入地)하면 가히 면하려니와 불연즉 능히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더라. 왜장 여팔도 여팔낙이 칼을 춤추어 앞으로 나오거늘 응서 모른체 하고 눈을 감고 섰으니 적장의 칼이 거의 몸에 범하거늘 응서 그제야 소리를 우레같이 지르고 몸을 공중에 솟아올라 두 발로 양장을 치니 두 장수 칼을 버리고 입으로 피를 토하고 거꾸러져 죽거늘, 응서 눈을 부릅뜨고 대질 왈,

적진 중에 나의 적수 있거든 쾌히 나오라.”

왜장이 대경실색하여 왕께 주왈,

여팔도 여팔낙의 검술은 적수 없을까 하였더니 적장의 발에 채여 죽었으니 그 용맹을 당할 자 없는지라, 싸우면 반드시 패하리니 적장을 청하여 좋은 말로 달램만 같지 못할까 하나이다.”

왜왕이 양장의 죽음을 보고 또한 낙담하여 정히 경겁하더니 이 말을 듣고 옳이 여겨 즉시 사람을 보내어 화친(和親)함을 청하니라.

응서 적장 둘을 죽이고 본진에 돌아와 홍립다려 왈,

오늘날 내 재주를 보니 어떠하뇨.”

홍립 왈,

만일 장군의 재주 곧 아니면 어찌 적장을 죽이리오.”

하고 본국으로 돌아감을 상의하더니 문득 보하되 왜왕의 글월이 왔다하거늘 떼어 보니 하였으되,

그대 비록 아국의 적장이나 조선에는 충신이라, 우리 장수를 죽였으나 나라를 위한 일이라 어찌 족히 허물할 바리오. 조금도 의심치 말고 금일 연석(宴席)에 참예하여 좋은 뜻을 저버리지 말라. 그대 비록 항적의 용맹이 있으나 깊이 중지(重地)에 들어와 형세 외롭고 아국이 비록 약하나 오히려 강병맹장(强兵猛將)이 있는지라, 한번 병마를 움직이면 성명을 마치리니 뉘우치지 말라.’

하였더라.

홍립 등이 남파(覽罷)에 가로되,

이제 왜왕이 우리를 청하였으니 장차 어찌하리요.”

응서 왈,

우리를 청함은 머물고자 함이라, 어찌 제 계교에 빠지리요.”

홍립 왈,

비록 그러하나 길이 막혀 능히 들어가지 못하는지라, 사의(事意) 지차(至此)하니 아직 들어가 동정을 살핀 후 다시 선처함이 어찌 가치 아니리요.”

응서 침음양구(沈吟良久)에 또한 사세(事勢) 난득한지라, 마지못하여 왜사(倭使)를 따라 들어가니 왜왕이 용상(龍床)에 좌정하고 양장을 청하여 상좌에 좌석을 주고 이르되,

임진년 병란은 피차 한가지라, 누를 한하리요, 장군 등이 왕명을 받아 타국에 들어와 수다 군병을 죽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고국에 돌아가리요. 옛날 초한(楚漢)이 쟁봉할 때 한신(韓信)이 기초귀한(起楚歸漢)하여 사백 년 기업을 이뤘으되 지금 칭찬하나니 장군은 옛 일을 효칙(效則)하여 길이 부귀를 안향(安享)하라. 아국이 협착하여 조선을 통합코자 하더니 장군 등이 귀순하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응서와 홍립이 서로 돌아보고 묵묵부답이라. 왜왕이 재삼 관위(寬慰)한대 응서는 종불용(終不容)이라. 왜왕이 이에 삼 일 대연을 배설하여 풍류(風流) 주색(酒色)으로 그 마음을 즐겁게 하되 마침내 희색이 없는지라, 왜왕이 군하(群下)를 모으고 의논 왈,

강홍립은 비록 용장이나 신의 없는 사람이요 김응서는 용맹뿐 아니라 유신한 사람이니 이제 양인을 각각 매서(妹婿)를 삼음이 어떠하뇨.”

제신이 주왈,

하교 마땅하오나 두 사람을 불러 진진(津津)의 좋은 뜻은 일러 만일 순종치 아니하거든 죽임이 옳을까 하나이다.”

왜왕이 청필에 대희하며 즉시 태서라 하는 신하를 보내어 양인을 권유하라 하니, 태서는 본디 조선사람으로서 잡혀 왔다가 인하여 높은 벼슬을 얻어 왜인이 되었더니 왕명을 듣고 물러 관역에 나와 응서와 홍립을 보고 왜왕의 뜻을 전하고 왈,

만일 호의를 거역하면 돌아가기 어렵도다.”

홍립 왈,

저의 청하는 뜻을 아니 듣기 어려운가 하노라.”

응서 왈,

어찌 범으로써 개게 허하리요.”

태서 왈,

왕의 소견을 불청하면 목숨을 보전치 못하리니 모름지기 왕의 말을 듣고 그 형세를 보아 후일 회환하면 소원을 다 이룰 것이니 나도 한가지로 고국에 돌아가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응서가 태서의 말을 듣고 이에 허락하거늘 태서 돌아가니라.

양인이 부득이 조참(朝參)에 들어가니 왕이 좌를 주고 위로 왈,

경 등이 타국에 들어가 패군하였으니 어찌 마음이 평안하리요. 이제 일배주(一杯酒)로써 수회(愁懷)를 위로하나니 사양치 말라.”

하고 인하여 향온(香醞)을 나와 술이 반감에 왕이 친히 잔을 잡고 왈,

관인이 경 등에게 붙일 말이 있으니 즐겨 청납(聽納)하랴.”

응서 왈,

무슨 말씁이나이까.”

왕 왈,

과인에게 일매(一妹)있으니 방년(芳年)이 이십이라. 색덕(色德)이 겸비하여 유한정정(幽閑靜貞)하니 강 장군께 허하고, 또 공주(公主) 있으니 요조현철(窈窕賢哲)하여 숙녀지풍(淑女之風)이 있으니 김 장군께 허하야 백 년을 즐기게 하나니 경 등의 뜻이 어떠하뇨.”

홍립이 배사 왈,

대왕이 패군지장(敗軍之將)을 이렇듯 과애하사 천금옥주(千金玉酒)로써 허하시니 어찌 후의를 감히 사양하리요.”

응서가 홍립의 낙종(諾從)함을 보고 또한 면치 못할지라, 마지못하여 허한대 왕이 양장의 순종함을 보고 대희하여 즉시 길월(吉月) 양신(良辰)을 택하여 성례(成禮)하니 위의 장려하고 물색이 번화하더라. 대연을 배설하여 연일 환락하고 강 장군으로 매서군을 삼고 김 장군으로 서식군(婿息君)을 삼으니 양인이 왜국 부귀를 누리더라.

이러구러 세월이 여류하여 삼 년이 되었더니 일일은 왜왕이 대연을 배설하고 매서군과 서식군을 데리고 한가지로 즐기더니 날이 황혼이 되매 파연곡(罷宴曲)을 주하니 양인이 물러갈새, 응서가 홍립의 침소에 이르러 홍립에게 왈,

장군은 고국(故國)에 돌아갈 뜻이 없느냐.”

홍립이 변색 왈,

어찌 돌아갈 마음이 없으리오마는 길이 막혔으니 어찌 득달하며 수년을 이곳에 머물러 부귀를 누리니 어찌 일조에 배반하리요.”

응서 왈,

어찌 임금의 대은을 저버리고 타국을 섬겨 부귀를 취하리요.”

홍립 왈,

비록 조선에 돌아가나 어찌 이에서 더 영귀하리요.”

응서 대책 왈,

그대 일시 부귀를 흠모하여 고국을 생각지 아니하니 어찌 부끄럽지 아니하리요. 내 맹세코 왜왕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우리 둘이 전후를 당하면 어찌 돌아가지 못하리오. 국은이 망극하고 부모처자를 생각하니 천지 망극한지라,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대장부 불충불효(不忠不孝)를 무릅쓰고 어찌 세상에 서리요.”

홍립이 응서의 말을 듣고 마음에 부끄러워 거짓 허락하고 인하여 들어가 가만히 대왕께 수말을 고하니 왕이 차언을 듣고 대경하여 즉시 문무(文武)를 모아 이 일을 의논하되 제신이 주왈,

전일 양인이 귀순할 때 매서군은 혼연 응낙하되 서식군은 매양 돌아갈 뜻이 있더니 이제 과연 반심(叛心)을 먹도소이다.”

왜왕이 대로 왈,

제 과인의 후은(厚恩)을 저버리고 도로혀 해코자 하니 어찌 통탄치 아니하리오.”

하고 등촉을 밝히고 양인을 불러 왈,

과인이 너희 목숨을 잔잉히 여겨 죽이지 아니하고 도로혀 봉작을 높이고 금지옥엽(金枝玉葉)을 삼아 부귀 극하거늘 무슨 원한이 있어 감히 흉계를 의논하였느뇨. 옛사람의 충성을 본받아 고국에 돌아가려 하면 보내려든 어찌 은혜를 저버리고 나를 해코자 하니 가히 요대(饒貸)치 못하리라.”

하고 무사를 명하여 빨리 내어 버히라 하거늘 응서 일이 패루한 줄 알고 죽기를 면치 못할지라. 이에 고성대매(高聲大罵) ,

네 천시를 아지 못하고 한갓 강포만 믿어 날을 죽이려 하거니와 네 들으라. 내 충성을 다하여 수만 군중을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 네 머리를 버혀 우리 임금께 드리고 임진년 원수를 씻을까 하였더니 홍립의 간계(奸計)에 빠져 대사를 그르치니 어찌 분치 아니하리요. 하늘이 돕지 않으사 나를 이곳에서 죽게 하시니 죽어도 섧지 아니하거니와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 강홍립에 대한 분기 두우(斗牛)를 꿰치노라.”

홍립이 마침 왜왕 곁에 섰는지라, 응서 칼을 날려 급히 치니 홍립이 크게 한 소리 지르고 거꾸러져 죽거늘 응서 이미 홍립을 죽이매 일분 쾌활하여 하늘께 축수하고 칼을 들어 제 허리를 버혀 던지는지라, 때에 응서 타던 말이 마구(馬廐)에서 뛰어나와 응서의 머리를 찾아 물고 벽해(碧海)를 건너오니라.

각설, 조선국왕이 응서와 홍립을 만리 타국에 보내시고 전진의 승패와 소식을 몰라 주야 염려하시더니 응서의 말이 벽해를 건너 주야로 행하여 평안도 용강 땅에 득달하였는지라, 이때 응서의 부인이 낭군을 만리 타국에 보내고 여러 세월이 되되 소식이 묘연한지라,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당하여 꽃을 대하매 수운(愁雲)이 원산 아미(蛾眉)에 맺히고 추국단풍시(秋菊丹楓時) 명절을 대하여 느낌을 마지아니하더니 일일은 밤이 깊도록 전전(輾轉)하여 능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촛불을 밝히고 괴로이 시름하더니 홀연 몸이 떨리고 경천이 아득한지라, 잔등을 돋우고 탄식 왈,

명천은 지원(至願)을 살피사 낭군을 승전입공(勝戰立功)하여 무사히 고국에 돌아오게 하소서.”

하고 슬픈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눈물을 흘리더니 문득 공중에서 발소리 들리거늘 심신이 자연 경황하여 급히 창호(窓戶)를 열치고 뜰에 내려와 살펴보니 난데없는 말이 뛰어들어오되 사람의 머리를 입에 물었는지라, 일변 놀라며 자세히 살펴보니 이는 낭군의 머리라, 머리를 안고 땅에 구르며 통곡하니 자주 혼절하는지라, 경색이 참불인견(慘不忍見)이러라. 말을 붙들고 이르되,

너는 짐승이로되 임자의 머리를 찾아오되 낭군은 타향의 원혼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느뇨.”

하고 혈루(血淚) 종횡하더라.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응서의 머리를 목합(木盒)에 넣어 가지고 길을 떠나 한양으로 향하여 삼 일 만에 득달하여 궐하에 나아가 원정(原情)을 바치니 내시(內侍) 들어가 상께 아뢴대 상이 보시고 대경하사 가라사대,

삼 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으매 회포 만단이러니 이런 불측한 변이 있을 줄 어찌 알리요.”

하시고 즉일에 예부에 전지하사 제문(祭文) 지어 치제하시고 벼슬을 돋우어 추증하시고 머리를 목함(木函)에 넣어 길지(吉地)에 안장하게 할 새, 각 읍이 호상(護喪)하라 하시고 백미 일백 석을 주어 응서와 전망사졸(戰亡士卒)을 위하여 크게 수록하여 영혼을 제도(濟度)하라 하시다.

일일은 상이 옥상(玉床)을 의지하여 잠깐 조으시더니 문득 김응서 갑주를 갖추고 들어오거늘 상이 크게 반기사 정히 묻고자 하시더니 응서 복지 주왈,

소장이 명을 받자와 왜국에 들어갔삽더니 강홍립의 간계에 빠져 수만 군병을 중로에서 다 함몰하옵고 돌아오려 하옵다가 분기를 참지 못하와 홍립을 데리고 일본에 들어가 동정을 살핀 후에 왜왕의 수급을 버혀 가지고 왜국을 탕멸하와 임진년 원수를 갚으려 하였삽더니 왜왕이 의로써 대접하오매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옵고 이미 삼 년이 되었삽기로 전하의 기다리심을 생각하와 일일은 홍립과 의논하고 왜왕의 머리를 버히려 하옵더니 역신(逆臣) 홍립이 왕께 가만히 누설하여 사기 패루하온지라, 신이 죽기를 임하여 분을 이기지 못하여 홍립을 먼저 죽이옵고 신이 또한 자수하여 이 몸이 되었사오니 신의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이로소이다. 신이 황천에 돌아가 원혼이 되었사오나 성은이 망극하온지라, 신이 삼 년 후 다시 돌아와 전하를 섬기리이다.”

하고 문득 간데없는지라, 상이 놀라 깨달으시니 문득 침변일몽(枕邊一夢)이라. 상이 차탄하심을 마지아니하시고 이튿날 문무중관을 모아 몽사를 이르시고 다시 제문 지어 응서의 혼령을 위로하시고 슬퍼하시니 조신이 또한 추연(愀然)하더라.

각설, 왜왕이 응서를 죽이고 다시 조신을 모아 의논 왈,

이제 조선 맹장 둘이 죽었으니 족히 두려움이 없는지라, 다시 조선을 쳐 임진년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병마를 조련하고 선척(船隻)을 새로 준비하더라.

 


사명당(四溟堂)의 보복(報復)


이때 아국 평안도 영변 향산사(香山寺)에 한 도승(道僧)이 있으니 서산대사(西山大師)라 칭하더라. 아시(兒時)로부터 불경(佛經)을 통달하여 어진 도덕이 원근에 가득하였더니 하루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불경을 외우다가 밖에서 괴이한 소리 나거늘 이상히 여겨 나와 보니 아무것도 없거늘 우러러 하늘을 살펴보니 익성(翼星)이란 별이 방위를 떠나 서방을 향하여 시살하고 모든 별이 서녘을 응하였거늘 대사 홀로 탄식 왈,

익성은 왜왕의 주성(主星)이요, 하물며 임진년 원수로 말미암아 조선을 다시 침범하려 함이로다.”

하고 법당(法堂)에 들어가 제자 사명당(四溟堂)을 불러 가로되,

세상에 나와 불경을 승상하며 산당에 거처하여 일신이 평안함은 성상의 덕택이라. 아까 밖에 나가 천문(天文)을 보니 왜왕의 주성이 방위를 떠나 서녘을 시살하니 이는 조선을 침범함이라, 우리 비록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산문(山門)에 의탁하였으나 솔토지민(率土之民)이 막비왕신(莫非王臣)이요 보천지하(普天之下)에 막비왕토(莫非王土), 이런 난시를 당하여 기미를 알고 어찌 임금을 돕지 아니하리요.”

사명당이 대왈,

스승님이 이르시지 아니하오나 제자도 잠깐 기미를 아옵거니와 스승님이 지휘하시면 곧 영대로 하리이다.”

대사 사명당의 법술(法術)을 아는지라. 이르되,

내 나이 늙어 산문(山門)을 나지 않은 지 여러 십 년이라, 나라에 나가 이 말씀을 아뢰고 일본에 들어가 왜란을 평정할 것이로되 행보(行步)를 임의치 못하니 어찌 선처하리요.”

사명당이 대사의 슬퍼함을 보고,

사부(師傅)는 슬퍼 말으소서. 원컨대 지휘를 들어지이다.”

대사 크게 기뻐하며 이에 행리(行李)를 수습하여 스승 제자가 길을 떠나 경성에 올라와 궐하에 이르러 정원(情願)의 소유를 고하니 승지(承旨) 이 말을 듣고 즉시 탑전(榻前)에 주달하온대 상이 들으시고 근시(近侍)를 명하여 부르시니 대사 들어가 계하(階下)에 복지 사배하거늘, 상이 눈을 들어 보시니 그 중이 양미(兩眉) 호백하고 의표(儀表) 탈속(脫俗)하고 거지(擧止) 헌앙(軒昻)하여 범승(凡僧)이 아니더라.

상이 문왈,

네 어느 절에 살며 무슨 말을 아뢰고자 하느냐.”

그 중이 합장 배례 왈,

빈승(貧僧)은 평안도 영변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중이옵더니 십 세 전에 삭발위승(削髮爲僧)하여 불경을 숭상하옵더니 국운이 불행하와 임진년 왜란을 만나오니 어찌 망극지 아니하리요. 천행으로 왜란이 진정하옵고 전하 환궁하옵시니 신민의 만행이오나 의외에 김홍 양장(金弘 兩將)이 일본에 들어가와 사졸을 다 전망(全亡)하오니 어찌 분연 강개치 아니하리까. 소승이 속인과 다르와 국난(國難)을 받들지 못하오니 만사무석이로소이다.”

상이 들으시고 새로이 차탄하시매,

네 비록 중생이나 국가를 근심하니 가히 기특하도다.”

하시고 난세를 의논하신대 그 중이 복지배례 왈,

소승이 주야 불경을 송독(誦讀)하옵더니 홀연 마음이 강개하옵고 또한 몽매간(夢寐間)에 부처님이 이르시되 일본이 장차 기병하여 조선을 침범한다 하옵거늘 놀라 깨달아 밖에 나와 천문을 보오니 익성이 분야(分野)를 떠났사오니 반드시 조선을 침략코자 하옴이라. 아무리 중이온들 어찌 통회(痛悔)치 아니리이까.”

대사가 한 봉 서간(書簡)을 주거늘 받아 보니 하였으되,

그대 세존(世尊)의 제자로 국가를 근심하고 백성의 평안함을 원하는 고로 정성을 감동하여 상제께 주달하고 삼해용왕(三海龍王)을 보내나니 충성을 다하여 국가 대환을 없게 하라. 또한 일본국왕도 익성으로서 상제께 득죄하여 왜왕이 되었으니 과도히 보채지 말라. 왜국을 항복받으면 장차 태평하리라. 부디 대공을 세워 이름이 사해에 진동케 하라.’

사명당이 용궁 서간을 가지고 즉시 단을 무으고 단상에 올라 사해를 향하여 무수히 합장 배례하고 인하여 대사께 하직한대, 대사 왈,

부디 조심하려니와 왜왕이 필연 취맥코저 하여 다섯 가지로 청하리니 그 중 어려운 일이 있거든 향산(香山)을 향하여 사배하면 자연 도움이 있으리라.”

사명당이 스승의 교령(敎令)을 듣고 길을 떠날새 만조백관이 십리허(十里許)에 나와 전송하더라. 각 읍에 선문(先文) 놓고 발행할새 이때 동래부사 송정이 노문(路文)을 보고 웃으며 왈,

조정에 사람이 무수하거늘 어찌 구태여 중을 보내리오. 이는 더욱 패망할 징조라.”

하더니 하인이 보하되,

사명당 행차 온다 하오니 어찌 접대하리이까.”

송정이 분부 왈,

상례(常例)로 대접하라. 제 비록 부처라 한들 어찌 곧이 들으리요.”

하고 심상히 여기거늘, 하리 분부를 듣고 나와 부사의 말을 이르고 왈,

지방관의 도리에 봉명사신(奉命使臣)을 불관히 여기거니와 반드시 환을 면치 못하리로다.”

하더니 자연 삼 일 만에 이르렀는지라. 대접하는 도리와 수응하는 일이 가장 만홀(漫忽)하거늘 사명당이 대로하여 객사(客舍)에 좌기(坐起)하고 무사를 명하여 송정을 잡아 계하에 꿇게 하고 이르되,

네 벼슬이 비록 옥당(玉堂)이나 지방관이오 내 비록 중이나 일국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오 봉명사신(奉命使臣)이어늘 네 한갓 벼슬만 믿고 국명을 심상히 여겨 방자함이 태심하니 내어 버혀 국법을 엄히 하라.”

하고 즉시 나라에 장문(狀聞)하여 선참후계(先斬後啓)하고 인하여 길을 떠날새 순풍을 만나 행선(行船)하니라.

각설, 왜왕이 원수를 갚고자 하여 매일 군마를 연습하며 조선 칠 모책을 의논하더니 문득 보하되,

패문이 왔다.’

하거늘 즉시 떼어 보니,

생불사신(生佛使臣)이 간다.’

하였거늘 왜왕이 남파(覽罷)에 대로 왈,

우습고 기괴하도다. 어찌 조선 조그만 나라에 생불이 있으리오. 이는 반드시 우리를 업신여겨 의혹케 함이라.”

하고 이에 제신(諸臣)을 모아 의논 왈,

조선이 부처를 보내노라 함은 저의 계교 궁진(窮盡)하여 우리를 의혹케 함이로다.”

제신이 주왈,

이제 생불이 온다 하오니 글을 지어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세우고 그 뒤에 자리를 치고 문을 닫았다가 오거든 말을 몰아 병풍 안에 들거든 닫는 말을 갈아 태워 급히 지나게 하면 자연 취맥하기 쉬우리이다.”

왜왕이 옳이 여겨 그대로 하니라. 이때 사명당이 길을 재촉하여 조정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황혼이라. 문득 방포 소리 나며 말을 갈아 태우고 등촉이 명랑하며 말을 급히 몰아 가더니 이윽고 조정에 들어가는지라. 왜왕이 문왈,

그대 부처라 하니 오다가 길 좌우의 병풍서(屛風書)를 보니이까.”

사명당이 대왈,

어찌 그만한 것을 모르리이까.”

왜왕 왈,

그대 능히 그 병풍서를 외울쏘냐.”

사명당이 그 말을 듣고 일체 생각는 바 없이 음성을 밝게 하여 읊는지라. 일만 오천 간 병풍서를 낱낱이 외우되 한 글을 불독하는지라.

왜왕이 발연 변색 왈,

그대 어찌 한 간 글을 이르지 아니하느뇨.”

사명당 왈,

그는 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르리오.”

왜왕이 꾸짖어 왈,

한가지로 세웠거늘 어찌 보지 못하리오.”

하고 사람을 보내어 적간(摘奸)하니 과연 바람에 덮여 못 봄이 적실하더라. 돌아와 이대로 고하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실색하더라.

사명당이 관역에 돌아오니 왜왕이 제신을 모아 의논 왈,

이제 사명당의 거동을 보니 듣는 말과 같어 법력(法力)이 심상치 아니한지라 장차 어찌하리요.”

제신이 주왈,

그리 마옵고 이 앞에 승당이란 못이 있으니 깊기 삼십 길이나 되는지라, 사명당으로 하여금 방석을 주어 물 위에 띄우고 그 못에 놀게하소서. 만일 부처가 명백하오면 물에 가라앉지 아니하리이다.”

왜왕이 그 말을 옳이 여겨 그대로 한 후 사명당을 청하여 좌정 후 왕이 가로되,

이 앞에 승당이란 못이 있으되 경개 절승하여 한번 구경함직하니 저 방석을 타고 물 위에서 완경(玩景)함이 어떠하뇨.”

사명당이 사양치 아니하고 조선을 향하여 사배하고 그 방석을 못에 띄우고 그 위에 올라앉는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긴 막대로 방석을 밀치되 가라앉지 아니하고 바람을 좇아 임의로 떠서 다니거늘, 사명당을 청하여 위로하며 별당(別堂)에 들이고 문무를 모아 의논 왈,

오늘밤 사명당 침방에 화철을 깔고 큰 풀무를 놓은 후 사명당을 청하여 들게 하고 사면에서 풀무를 일시에 불면 가히 부처 법력을 알리라.”

하더라.

이 날 사명당이 기와 한 장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 쉬려 하더니 왜놈이 문을 봉하고 사면으로 풀무를 부니 그 방에 든 자 어디로 가리오. 사명당이 화열(火熱)이 급함을 보고 조선을 향하고 사배한 후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외우니 문득 지하에서 화기 스스로 스러지고 냉기(冷氣) 올라 방중에 서리 가득하였더라.

이튿날 왜왕의 사자가 명을 받아 문안하니 사명당이 문을 열치고 크게 꾸짖어 왈,

네 돌아가 네 국왕에게 자세히 전하라. 내 조선서 들으니 일본이 심히 덥다 하더니 이에 와 보니 더운 곳이 아니라, 방이 빙하여 잠을 편히 못 잤으니 쉬 더운 곳으로 하처(下處)를 옮기라.”

사자 이 말을 듣고 혼불부체(魂不附體)하여 돌아가 왕을 보고 수말을 자세히 고하니 왜왕이 청파에 놀라 마지아니하고 군신을 모아 의논 왈,

이제 조선 사신이 생불일시 적실하니 어찌하리요.”

예부상서 한자경이 주왈,

전하 신의 말을 듣지 아니하옵다가 이리되었사오니 후회한들 어찌 미치리요. 조선 사자 깊은 못에 들어도 빠지지 아니하고 화철방을 빙고(氷庫)같이 지내오니 이는 범인이 아니라, 반드시 큰 화를 면치 못할까 하나이다.”

왜왕이 대경 왈,

그러면 장차 어찌하리요.”

하더니 문득 삼도태수 주왈,

왕사는 이르옵거니와 다시 취맥할 일이 있나이다.”

하고 오색 방석을 만들어 놓고 취맥할새 즉시 대연을 배설하고 사명당을 청하니 사명당이 들어와 보니 오색 방석을 놓았거늘 사명당이 비단 방석에는 신을 벗지 아니하고 백목(白木) 방석에 신을 벗고 들어가 앉으니 왜왕이 문왈,

비단방석에 아니 앉고 백목 방석에 앉느뇨.”

사명당이 주왈,

비단방석은 잡충(雜蟲)의 소출이오 백목은 꽃이라 더럽지 아니하나이다.”

왜왕이 묵연부답(黙然不答)일러라. 종일토록 연락(宴樂)하고 황혼이 되매 파연하니 사명당이 하처로 돌아오니라.

백관이 주왈,

오늘 연석에 조선 사신을 보니 주식(酒食)을 좋아하오니 부처는 아니라 무슨 법술을 배워 사람을 미혹케 하오니 만일 이 사람을 살려 돌려보내면 반드시 후환이 되리이다.”

왜왕 왈,

그러면 어찌하여야 죽이리요. 경 등(卿等)의 소견을 듣고자 하노라.”

채만홍이 주왈,

신의 소견은 철마(鐵馬)를 만들어 불같이 달구고 사명당을 태우면 비록 부처라도 능히 살지 못하리이다.‘

왜왕이 그 말을 옳이 여겨 즉시 풀무를 놓고 철마를 지어 만든 후 백탄을 뫼같이 쌓고 철마는 그 위에 놓아 불같이 달군 후에 사명당을 청하여 가로되,

그래 저 말을 능히 타면 부처 법력을 가히 알리라.”

사명당이 심중에 망극하여 납관을 쓰고 조선 향산(香山)을 향하여 사배하더니 문득 서녘에서 오색 구름이 일어나며 천지가 희미하거늘 사명당이 마지못하여 정히 철마를 타려 하더니 홀연 벽력 소리 진동하며 천지 뒤눕는 듯하고 태풍이 진작하여 모래 날리고 돌이 달음질하고 뫼 밖으로 담아 붓듯이 와 사람이 지척을 분변치 못하는지라, 경각(頃刻) 사이에 성중에 물이 창일(漲溢)하여 바다가 되고 성 외의 백성들이 물에 빠져 죽는 자 수를 아지 못하되 사명당 있는 곳은 비 한방울이 아니 젖는지라. 왜왕이 경황 실색하여 이르되,

어찌하여 천위(天威)를 안정하리요.”

예부상서 한자경이 주왈,

처음에 신의 말씀을 들었사오면 어찌 오늘날 환이 있으리이까. 방금 사세를 생각하옵건대 조선에 항복하여 백성을 평안히 함만 같지 못하나이다.”

왜왕이 자경의 말을 뜨고 마지못하여 항서(降書)를 써 보내니 사명당이 높이 좌하고 삼해 용왕을 호령하더니 문득 보하되,

네 나라 항복받기는 내 장악(掌握)에 있거니와 왜왕의 머리를 베어 상에 받쳐 들이라.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일본을 멸하여 생령(生靈)을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리라. 네 돌아가 왜왕에게 자세히 이르라.”

사자 돌아가 수말을 고하니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머리를 숙이고 능히 할말을 못하거늘 관백이 주왈,

전하는 모름지기 옥체를 진중하소서.”

왕이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남은 백성이 살기를 도모하여 사면 팔방으로 헤어져 우는 소리 유월 염천에 큰 비오고 방초 중의 왕머구리 소리 같은지라. 왕이 차경을 보니 만신이 떨려 능히 진정치 못하거늘 관백이 다시 가지고 들어가 사명당께 드리니 사명당이 항서를 보고 대책 왈,

네 왕이 항복할진대 일찍이 항서를 드릴 것이어늘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 하느냐.”

하고 용왕을 불러 이르되,

그대는 얼굴을 드러내어 일본 사람을 보게 하라.”

용왕이 반공 중에서 이 말을 듣고 사람의 머리를 버혀 들고 소리를 벽력같이 지르고 운무 중에 몸을 드러내니 사명당이 관백에게 왈,

네 빨리 돌아가 왜왕에게 일러 용의 거동을 보게 하라.”

관백이 돌아가 그대로 고하니 왜왕이 창황중 눈을 들어 하늘을 치밀어 보니 중천에 삼룡(三龍)이 구름을 피우고 사람의 머리를 베어 들었으니 형세 산악 같고 인갑(鱗甲)이 조요(照耀)하여 일광에 바애고 소리 벽력 같아 천지 진동하는지라. 이진걸이 주왈,

본국 보화(寶貨)를 다 봉하고 항표(降表)를 올려 간걸(懇乞)하소서.”

왕이 즉시 이진걸을 명하여 항표를 올린대 사명당이 대로 왈,

네 나라 임금의 머리를 버혀 들이라 한대 마침내 거역하니 일본을 무찔러 혈천(血川)을 만들리라.”

하고 인하여 육환장(六環杖)을 들어 공중을 향하여 축수하더니 문득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진동하여 산악이 무너지는 듯 천지 훈흑(曛黑)한지라. 왜왕이 이때를 당하여 삼혼(三魂)이 흩어지며 칠백(七魄)이 달아나니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가로되,

목금에 물이 편만하여 궐중(闕中)을 잠겼으니 미구에 만성인민(滿城人民)이 다 어육(魚肉)이 될지라. 이를 장차 어찌하리요.”

백관이 주왈,

만민이 다 물에 빠져 죽고 남은 백성이 마자 함몰케 되었사오니 원컨대 전하는 급히 처치하소서.”

왜왕이 서안(書案)을 치고 방성대곡 왈,

방금 사세여차(事勢如此)하니 경 등은 염려치 말라. 내 어찌 안민을 구치 아니하리요.”

하고 칼을 들어 자문(自刎)코자 하거늘 신하 호걸산이 급히 들어와 읍주 왈,

전하는 아직 옥체를 보증하소서.”

하고 칼을 쥐고 문무백관이 한가지로 사명당 앞에 나아가 복지 왈,

호국왕이 무도하여 부처님을 모르고 사죄(死罪)를 지었사오니 복걸 부처님은 덕택을 드리워 소국왕의 죄를 사()하시고 억만창생을 살리소서.”

하고 일시에 머리를 조아려 통곡하며 일제히 손을 고쳐 축수하거늘 사명당이 대로하여 꾸짖어 가로되,

빨리 왜왕의 머리를 버혀 들어 생령의 도탄을 면하라.”

백관이 고두 사죄 왈,

소신 등이 원컨대 왕명을 대신하여 각각 머리를 베어지이다.”

하거늘 사명당이 그제야 노를 잠깐 그치고 이르되,

너의 정성을 감동하여 아직 용서하나니 빨리 왜왕을 결박하여 대하에 꿇리라. 불연즉 왜왕의 머리를 버혀 가지고 일본을 탕멸하리라.”

중관이 차언을 듣고 왜왕에게 돌아가 그 수말을 고하니 노산홍이 주왈,

사세 위급하오니 전하는 부처의 말대로 하시면 생령을 보전하려니와 만일 지완하면 대화(大禍) 당도하리이다.”

왕이 노산홍의 손을 잡고 통곡 왈,

과인이 일찍 경의 말을 들었던들 어찌 오늘날 환을 만나리요.”

하고 하릴없이 흰옷을 입고 스스로 결박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려 항표(降表)를 가지고 사명당 앞에 나아가 복지청죄(伏地請罪)한대 사명당이 고성대매(高聲大罵) ,

왜왕은 들으라. 너희 나라가 근본 진시황(秦始皇)의 신하로 동남동녀 오백 인을 배에 싣고 방장(方丈) 봉래(蓬萊) 영주(瀛州) 삼신산(三神山)에 들어가 불사약(不死藥)을 얻으러 가노라 하고 천자를 속이고 이곳에 도망하여 거짓 신선이라 칭하고 여러 대를 평안히 지내매 또한 조선 덕택이요, 너도 또한 천상익성(天上翼星)으로 반도회(蟠桃會)에 참예하여 월궁항아(月宮姮娥)를 희롱한 죄로 상제께 득죄하고 인간에 적거(謫居)하여 대왕이 되었거늘 임진년에 외람한 의사를 내어 조선을 침노하여 생령을 많이 살해하매 상천(上天)이 진노하사 극벌(極罰)을 내려 너희 장졸을 다 멸하였거늘 네 아무리 속객(俗客)이 되었은들 아득히 아지 못하고 조선을 침범코자 뜻을 다시 내매 상제 노하사 사해 용왕을 주시고 너희 죄상을 물으라 하시매 내 특별히 문죄하나니 어찌 감히 거역하느냐, 빨리 머리를 베어 들어라.”

왜왕이 돈수 청죄 왈,

소왕이 밝지 못하여 천위(天威)를 범하였사오니 덕택을 드리워 죄를 용서하소서.”

사명당 왈,

네 이제는 순종할쏘냐.”

왜왕이 사죄 왈,

수화중(水火中)이라도 어찌 사양하리이까.”

사명당 왈,

네 그러면 예단(禮緞)을랑 말고 인피(人皮) 삼백 장씩 매년 진공(進貢)하라.”

왜왕이 이 말을 듣고 주저하여 진시 답지 못하거늘 백관이 주왈,

전하는 근심 말으시고 윤종하소서.”

왕이 마지못하여,

그대로 하리이다.”

하거늘 사명당이 또 이르되,

그러면 문서를 써 올리라.”

왜왕이 이에 문서를 써 올리거늘,

사명당 왈,

차후는 생심도 외람한 뜻을 두지 말라.”

왕이 돈수 청명하거늘 이에 용왕을 불러 왈,

이제 왜왕이 항복하매 죄를 사하였으니 용왕은 풍운뇌우(風雲雷雨)를 거두라.”

하니 즉시 천지 명랑하고 일색이 조요하니 일본 군신 백성이 저마다 놀라고 칭찬하며 과연 생불이라 하더라.

이러구러 삼 삭(三朔)이 되매 사명당이 환국하려 할새 왜왕이 만류 왈,

십 년만 유하시면 영세 태평할까 하나이다.”

사명당이 왈,

대왕의 후의(厚意)는 감사하거니와 빈승이 왕명을 받자와 귀국에 온 지 이미 삼 삭이라, 어찌 오래 지완하리요.”

하고 즉시 떠날새 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려 백리허에 나와 전송하거늘 사명당 왈,

대왕은 정사(政事)를 닦아 백성을 사랑하시고 백세 무강하소서.”

하고 이별하니라.

이때 조선 왕상이 사명당을 일본에 보내시고 소식을 고대하시더니 문득 사명당의 장문이 왔거늘 보시니 동래부사 버힌 장문이라 상이 대희하사 서산대사(西山大師)를 청하여 가라사대,

사명당이 동래부사 송경을 선참후계(先斬後啓)하였으니 가히 대사를 이룰지라, 어찌 근심하리오.”

대사 주왈

복원 선상은 물우(勿憂)하소서. 사명당이 이미 일본을 항복받고 회정(回程)하였나이다.”

상이 가라사대,

대사 비록 법력이 신통하나 만 리 일을 어찌 알리오.”

대사 왈,

금월 이십 일에 내조(來朝)하리이다. 만일 그릇 아룀이 있삽거든 소승이 기군(欺君)한 죄를 당하리이다.”

하더니 과연 수일이 못하여 동래부사 윤옥의 장문이 왔거늘 보시니 하였으되, 사명당을 처음에 취맥하던 일과 왜왕을 항복받던 사연을 일일이 계달하였거늘 상이 대희하여 가라사대,

이는 천고에 없는 일이로다.”

하시고 문무중관을 모아 장문을 뵈시고 못내 칭찬하신대 제신이 주왈,

이는 국가 흥복(興福)이오며 이 같은 법력을 가지고 전일 대환을 당하옵기는 도시 천수인가 하나이다.”

상이 가라사대,

그렇다.”

하시고 즉일에 서산대사를 인견하사 왈,

대사의 말과 같아 사명당이 일본을 항복받은 장문이 왔으니 보라.”

하시고,

조선이 태평함은 대사의 공이라.”

하시고 위로하시더라.

이때 사명당이 동래부에서 삼 일을 유하고 배도겸행(倍道兼行)하여 오 일 만에 득달하여 경성에 이르니 서산대사의 이른바 이십 일에 내도하리란 말이 맞았더라. 만성 인민이 길에 메여 구경하며 환성(歡聲)이 여류하더라. 사명당이 궐내에 다다르니 상이 들으시고 빨리 인견하시고 위로 왈,

경이 과인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들어가 일본을 항복받고 위엄을 빛내니 어찌 상쾌치 아니하리요.”

하시고 못내 칭찬하시니 사명당이 황공복지(惶恐伏地) 주왈,

어찌 소승의 공이리이까. 이는 국가 흥복이옵고 전하 성덕이로소이다.”

상이 왜왕의 항복받은 설화를 물으신대 사명당이 다섯 가지 취맥하던 일과 인피 삼백 장씩 일 년 육 삭으로 진공하게 문서받은 일이며 왕과 제신이 백 리 밖에 전송하던 일을 세세히 아뢴대 상이 들으시고 대희하사 왈,

범백 일이 빛니고 상쾌하나 인피 바치게 함은 실로 중난(重難)하도다.”

사명당이 주왈,

그는 전하 덕택으로 처분에 있삽거니와 소신이 일본 지형을 보오니 산천이 험악하옵고 인물이 간악하와 유화치 못하오매 불구에 다시 반심(叛心)을 두올지라, 그런 고로 인피를 진공하여 차후는 외람한 뜻을 먹지 못하게 함이로소이다.”

상이 가라사대,

내두(來頭)에 예단을 보면 알려니와 진실로 기특한 일이로다.”

하시고 백관을 보아 가라사대,

사명당의 대공을 어찌 갚으리오.”

하신대 제신이 주왈,

이는 고금에 없는 일이오니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주옵소서.”

상이 즉시 봉작을 높이려 하시니 사명당이 주왈,

소신이 어려서 삭발위승하와 불경을 숭상하옵다가 국난을 당하와 만리 타국에 나아가매 대환을 더옵고 태평하옵거니와 불전에 처신하여 어찌 다른 뜻이 있으리이까. 산당초암(山堂草庵)에 불상을 위하와 가고자 하오며 몸에 벼슬을 띠고 산문의 종적이 불안하오니 불경을 원하옵고 부운(浮雲) 같은 환로(宦路)는 원치 아니하나이다.”

상이 그 뜻이 굳음을 보시고 차탄하심을 마지아니하시고 전송하시니 사명당이 기뻐 하직하고 궐문을 나 대사를 뫼시고 한가지로 향산에 이르니 모든 중이 나와 대후(待候)하더라. 불전에 나아가 배례하고 불경만 주야 송독하니 높은 도덕과 명망이 일국에 진동하더라.

각설, 이때는 정유 십일 월이라, 왜왕이 사명당을 보내고 백관을 모아 의논 왈,

어찌 십 척(十尺)되는 인피 삼백 장을 얻어 보내리요.”

제신이 다 묵연하여 말이 없더니 예부상서 한자경이 출반주(出班奏) ,

이제 인피 삼백 장을 폐하오면 다시 환을 면치 못하리니 신의 소견은 키 크고 장력 있는 백성 삼백을 모아 서로 싸워 승부를 결하여 죽이라 하소서.”

왕이 옳이 여겨 장력 있는 백성 삼백을 뽑아 서로 싸워 죽이게 하니 백성이 통곡하며 서로 죽여 즉시 인피 삼백 장을 얻어 조공(朝貢)을 봉할새 왜왕이 앙천 통곡 왈,

이제 인피 삼백 장을 연연 조공하면 백성이 어찌 견디리오. 제신은 과인의 머리를 베어 무죄한 백성의 살생하는 환을 면케 하라.”

제신이 읍주 왈,

전하는 진중하소서. 금번 사신이 조선에 다녀오면 조선왕도 필연 처단이 있으리이다. 벽도화 노산홍의 모략(謀略)이 과인하오니 이 사람을 보내소서.”

왕이 즉시 노산홍을 불러 탄왈,

경은 조선에 들어가 구변(口辯)을 잘하여 차후 인피 삼백 장 조공을 면케 하라.”

노산홍이 주왈,

조선왕도 백성이 있는지라, 인피를 바치오면 어찌 놀라지 아니리이까. 소신이 비록 재주 없사오나 힘을 다하여 도모하리이다.”

하고 왜왕을 하직고 나와 벽해(碧海)를 건너와 주문하고 동래로부터 발행하여 한양에 이르러 조회함을 아뢰니라.

각설, 상이 사명당을 보내시고 압록강에 칠보부처를 위하여 안주성 밖에 칠보암(七寶庵)을 짓고 칠불탱(七佛幀)을 앉히고 천금을 들여 수축(修築)하고 향산사 중을 잡역물침(雜役勿侵)하라 하시니라.

이때 일본 사신 주문이 왔거늘 상이 사관으로 맞으라 하시다. 왜사가 들어와 진공(進貢)할새 인피를 바치니 상이 대경하사 왜사를 인견하신대 노산홍이 들어와 복지하온대 상이 가라사대,

인피 삼백 장을 조공하니 네 나라 백성이 얼마나 반성하였느냐?”

노산홍이 눈물을 흘리며 묵묵하고 백배사례만 하거늘 상이 전교 왈,

왜왕이 죄상이 불측하매 네 나라 백성을 다 없애고자 하였더니 이제 귀순하니 다시 외람된 뜻을 두지 말라. 인피 삼백 장을 체감하나니 왜놈 삼백씩 동래관에 번()을 세우고 놋쇠 일천 근과 정철(正鐵)을 연년 조공하라.”

하시니 왜사가 하교를 듣잡고 황공 사죄 왈,

대왕이 성신 문무하사 덕택을 드리우시니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하고 사은 숙배 후 퇴조(退朝)하여 십 일을 머물러 행리를 점검하여 본국으로 돌아가 왜왕을 보고 조선왕의 말씀을 고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문무백관을 모아 조선왕의 은혜를 감격하여 산호만세(山呼萬歲)하며 일본 백성이 부처국이라 하고 만만세를 부르니 도로 태평이 되었더라.

그 후에 왜왕이 동래 땅에 관()을 짓고 군사 삼백 명을 보내어 수자리 살리며 무쇠와 정철을 연년 조공하더라.

이때 조선 백성이 팔년병화 중 사생근고(死生勤苦)하더니 성덕이 연천하여 왕화(王化) 사해에 덮였으니 백성이 만세를 부르고 격양가(擊壤歌)를 읊으니 요천일월(堯天日月)이요 순지건곤(舜之乾坤)이라. 미재(美哉), 동방산하지고여 의관문물(衣冠文物)이 태평만만세 지금탕이로다.

지금 평안도 묘향산에 수충사란 묘당(廟堂)을 지어 사시로 향화(香火)를 받드니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전후 행적이 있으니 후인은 알지어다.

세재 무자 오월일 초동 필서(歲在 戊子 五月日 初冬 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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