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헌의 '관아의 노비(시노비)'
寺奴婢(시노비) ; 관아의 노비
權攇(권헌, 1713~1770)
신영산 옮김
我過嶺南道 아과영남도 내가 영남으로 길을 떠나 지날 적에
喧譁括奴婢 훤화괄노비 시끄럽게 노비들을 엮듯이 묶었더라.
丁男遭驅脅 정남조구협 사내들은 윽박지르며 매질하며 몰아가고,
婦女被繫累 부녀피계루 아낙들은 결박하여 포박을 당했구나.
白日慘長衢 백일참장구 밝은 대낮 널따란 사거리가 참혹하니
痛哭天色視 통곡천색시 묶인 이들 통곡하며 하늘을 올려 보도다.
存者累隣族 존자루인족 산 이는 이웃에다 친척에다 연루시키고
死者枯骨髓 사자고골수 죽은 이는 골수까지 마르게 하였기에
賤籍日已廣 천적일이광 노비 문서 나날이 더욱더 늘어가고
民生日已苦 민생일이고 백성의 삶 나날이 더욱더 괴로워졌네.
昔行百家邑 석행백가읍 지난번 지날 때는 일백 호나 있었는데,
重來惟荊杞 중래유형기 이번에는 오로지 가시덤불 우북하네.
借問里中老 차문리중로 마을 안 늙은이를 불러 세워 물어보았지.
壯丁更何去 장정갱하거 “장정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갔나이까?”
各司日推刷 각사일추쇄 “각 관아에서 날마다 추쇄를 급히 하니
奔逸駭雉兔 분일해치토 뿔뿔이 달아나길 꿩과 토끼 같았다오.
乃父之他縣 내부지타현 그렇게 아비는 다른 고을로 도망가고
乃兄死鞭箠 내형사편추 그렇게 형은 채찍에 맞아 죽어
誅求到雞狗 주구도계구 가렴주구 닭이나 개에까지 미치기에
所存惟寡女 소존유과녀 남아 있는 사람이란 오직 과부뿐이라오.
况乃饑饉作 황내기근작 더군다나 흉년 들어 먹을 것이 없었으니
蕩析無寸土 탕석무촌토 한 치 땅도 탕진하니 남아 있지 않았다오.
遠謫不敢言 원적불감언 먼 곳으로 떠나려도 감히 말을 못하였고
納役良無已 납역양무이 부역을 바치는 것 그만둘 수 없었기에
方春行采葛 방춘행채갈 바야흐로 봄이 되니 칡을 캐러 간다 하며
仳離山谷裏 비리산곡리 산골짜기 속으로 영영 떠나버렸지요.
連年積逋欠 연년적포흠 해마다 관아의 포흠이 쌓이자
督令納官布 독령납관포 포를 들이라고 독촉이 성화같으니
此身且須臾 차신차수유 이 몸은 장차 어찌 될 것이며
椎剝便何所 추박편하소 치고 깎아 빼앗아가니 어느 곳이 편하리오.
隣里或擧兒 인리혹거아 이웃의 사람들은 더러 아이 안고 가서
往往草中棄 왕왕초중기 이따금 풀 속에다 버리기도 한다던데,
兒啼白露寒 아제백로한 찬 이슬에 추워 떨며 울기라도 한다면
酸痛飼狐狸 산통사호리 비통하게 여우와 이리에게 먹히리라.”
豺狼抱狠性 시랑포한성 여우와 이리는 본성이 사납지만
猶自愛其類 유자애기류 오히려 스스로 자기 종족 아끼는데,
王政有逼迫 왕정유핍박 나라에선 정치하며 사람을 핍박하니
隱忍斷天理 은인단천리 천륜을 끊으면서 참으라고 하는가.
箕王憂竊盜 기왕우절도 기자가 도적질을 근심하여 법 만든 건
作禍從此始 작화종차시 큰 재앙이 도적질로부터 비롯했기 때문이네.
良役雖云苦 양역수운고 양인들은 부역이 아무리 괴로워도
猶得死其里 유득사기리 오히려 제 마을에서 죽을 수 있는데
嗟哉公私賤 차재공사천 슬프도다, 천한 공노비 사노비도
得非我赤子 득비아적자 우리의 자식 같은 백성이 아니런가.
* 추쇄 : 부역이나 병역을 기피한 사람이나 도망친 노비 등을 찾아내어 본고장이나 본디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던 일.
* 가렴주구 : 세금을 혹독하게 거두고,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
* 포흠 : 관아의 물건을 관리나 아전들이 사사로이 써 버린 것.
* 기자가 만든 법 : 고조선의 8조 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