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의 한문소설 '장생전' 전문, 원문과 주해
허균(許筠)의 장생전(蔣生傳)
주해 신영산
蔣生不知何許人. 己丑年間, 往來都下, 以乞食爲事. 問其名則吾亦不知.
問其祖父居住則曰 : “父爲密陽座首 生我三歲而母沒.
父惑婢妾之譖, 黜我莊奴家. 十五奴爲娶民女, 數歲婦死.
因流至湖南西數十州, 今抵洛矣.”
장생불지하허인 기축년간 왕래도하 이걸식위사 문기명칙오역불지
문기조부거주칙왈 부위밀양좌수 생아삼세이모몰
부혹비첩지참 출아장노가 십오노위취민녀 수세부사
인류지호남서수십주 금저락의
장생(蔣生)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기축년(己丑年) 사이에 서울에 드나들며 비렁뱅이 노릇을 하였다. 누가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역시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곳을 묻자, 답하기를,
“부친이 밀양(密陽) 좌수(座首)로 계실 때에, 모친은 나를 낳은 지 겨우 삼 년 만에 세상을 떠났소이다. 부친은 비첩(婢妾)의 고자질에 혹하여 나를 전장(田莊)을 맡긴 종의 집으로 쫓아냈지요.
그 뒤에 나이 열다섯에 상민(常民) 여자에게 장가들었는데, 몇 해 만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더이다. 그래서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여러 고을을 떠돌아다니다가, 이제 막 서울로 온 것이지요.”
其貌甚都秀, 眉目如畵. 善談笑捷給, 尤工謳, 發聲凄絶動人.
常被紫錦裌衣, 寒暑不易.
凡倡店姬廊, 靡不歷入慣交. 遇酒輒自引滿, 發唱極其懽而去.
或於酒半, 效盲卜醉巫懶儒棄婦乞者老仍所爲, 種種逼眞.
기모심도수 미목여화 선담소첩급 우공구 발성처절동인
상피자금겹의 한서불역
범창점희랑 미불력입관교 우주첩자인만 발창극기환이거
혹어주반 효맹복취무라유기부걸자로잉소위 종종핍진)
장생의 얼굴은 매우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눈매가 그림 같았다. 이야기와 웃기를 잘했으며, 더욱 노래를 잘 불렀는데, 노랫소리가 애처로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다.
늘 자주색 비단으로 지은 겹옷을 입었는데, 아무리 춥고 더워도 바꿔입지 않았다.
어떤 술집이나 기생방이나, 드나들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익숙하게 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또 술을 보면 곧장 제 스스로 가득히 부어 들고, 노래를 불러 기쁨이 극도에 달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 술이 반쯤 취할 때이면, 눈먼 점쟁이, 술 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인, 비렁뱅이, 노파 따위를 흉내 냈는데, 하는 짓마다 거의 똑같았다.
又以面孔學十八羅漢, 無不酷似.
又蹙口作, 笳簫箏琶鴻鵠鶖鶩鴉鶴等音, 難辨眞贗
夜作鷄鳴狗吠, 則隣犬鷄皆鳴吠焉.
우이면공학십팔라한 무불혹사
우축구작 가소쟁파홍곡추목아학등음 난변진안
야작계명구폐 칙린견계개명폐언
또한 가면으로 십팔 나한(十八羅漢)을 열심히 본받으면, 흡사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또 입을 움직이며 호각, 퉁소, 피리, 비파, 기러기, 고니, 두루미, 따오기, 까지, 학 등의 소리를 내었는데, 진짜인지 거짓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밤중에 닭 울음, 개 짖는 소리를 흉내를 내면, 이웃집 개와 닭이 모두 따라서 울기도 했다.
朝則出乞於野市. 一日所獲幾三四斗, 炊食數升, 則散他丐者.
故出則群乞兒尾之. 明日又如是, 人莫測其所爲
조칙출걸어야시 일일소획기삼사두 취식수승 칙산타개자
고출칙군걸아미지 명일우여시 인막측기소위
아침이면 나가서 들이나 저잣거리에서 동냥을 구하였다. 하루에 얻은 것이 거의 서너 말이 되었지만, 두어 되만 밥으로 지어 먹고, 나머지는 다른 비렁뱅이들에게 나누어 주곤 하였다.
이에 많은 비렁뱅이 아이들이 장생의 뒤를 따랐다. 그다음 날도 역시 그렇게 하였는데, 남들은 장생이 하는 일을 헤아리릴 수 없었다.
嘗寓樂工李漢家. 有一叉鬟學胡琴, 朝夕與之熟.
一日失綴珠紫花鳳尾, 莫知所在.
蓋朝自街上來, 有俊年少調笑倚, 因而不見, 啼哭不止.
生曰 : “唉, 小兒何敢乃. 願娘無泣. 夕當袖來.”
翩然而去.
상우악공리한가 유일차환학호금 조석여지숙
일일실철주자화봉미 막지소재
개조자가상래, 유준년소조소외의 인이불견 제곡불지
생왈 애 소아하감내이 원낭무읍 석당수래
편연이거
장생은 일찍이 악공(樂工) 이한(李漢)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다. 차환(叉鬟) 하나가 그 호금(胡琴)을 배우느라고, 아침저녁으로 만나게 되어서 친숙해졌다.
하루는 차환이 자줏빛 봉미(鳳尾)을 잃어버리고, 잃은 장소를 모른다고 했다. 아침에 길에서 오다가 잘생긴 청년을 웃으며 농을 건 뒤 몸을 스쳤는데, 이내 봉미가 사라졌고 하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장생이 이르기를,
“우습도다. 어린 것이 감히 이런 짓을 하도다. 얘야, 울지 마라. 저녁나절에는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노라.”
하고는, 나는 듯이 가버렸다.
及夕, 招叉鬟出. 迤從西街傍景福西墻, 至神虎門角.
以大帶綰鬟之腰, 纏於左臂, 奮迅一踊, 飛入數重門.
時曛黑莫辨逕路, 倏抵慶會樓.
급석 초차환출 이종서가방경복서장 지신호문각
이대대관환지요 전어좌비 분신일용 비입수중문
시훈흑막변경로 숙저경회루
저녁이 되자 차환을 불러 따르게 했다. 서편 네거리 옆 경복궁 담을 돌아서서, 신호문(神虎門) 모퉁이에 이르렀다. 큰 띠로 차환의 허리를 맨 뒤, 왼팔에다 걸고는, 몸을 한번 솟구쳐, 나는 듯이 몇 겹이나 되는 문안으로 뛰어들었다.
때마침 해는 저물어서 길을 분간할 수 없었지만, 별안간 경회루 위에 닿았다.
有二年少秉燭相迓, 相視大噱. 因自梁上鑑嵌中, 出金珠羅絹甚多.
鬟所失鳳尾亦在焉, 年少自還之.
生曰 : “二弟愼行止, 毋使世人瞰吾蹤也.”
상유이년소병촉상아 상시대갹 인자량상감감중 출금주라견심다
환소실봉미역재언 연소자환지
생왈 이제신행지 무사세인감오종야
이때 소년 둘이 촛불을 잡고 나와 맞이하며, 서로 쳐다보며 크게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들보 위 컴컴한 구멍 속에서 금, 구슬, 비단 따위를 수없이 많이 끄집어냈다. 계집종이 잃어버렸던 봉미도 그 속에 있었는데, 소년은 이를 돌려주었다.
장생이 이르기를,
“두 아우는 행동을 삼가서,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
遂引還飛出北城, 送還其家.
未明詣李家謝之, 則醉臥齁齁. 人亦不知夜出也.
수인환비출북성 송환기가
미명예리가사지 칙취와후후 인역불지야출야
그 뒤에 다시 이끌고 날아와, 북쪽 성에 이르러 차환을 집으로 보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차환은 이한의 집을 찾아 감사의 뜻을 표하려 하였지만, 장생은 오히려 취하여 자는 척했는데 코 고는 소리가 컸다. 사람들 또한 장생이 밤에 문을 나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壬辰四月初吉. 賖酒數斗大醉, 攔街以舞, 唱歌不綴.
遲明, 殆夜倒於水標橋上, 人見之, 死已久矣.
屍爛爲蟲悉生翼飛去. 一夕皆盡, 唯衣襪在.
임진사월초길. 사주수두대취 난란가이무 창가불철
지명 태야도어수표교상 인견지 사이구의
시란위충실생익비거 일석개진 유의말재
임진년(任辰年) 사월 초하룻날이었다. 장생은 술 몇 말을 마신 뒤에 크게 취하여서, 길을 가로막은 채 춤을 추며,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다. 밤이 되자 수표교(水標橋) 위에 거꾸러졌는데, 다음날 사람들이 보니, 이미 죽은 지 오래였다.
시신은 썩어서 벌레가 되어 낱낱이 날개가 돋쳐 어디론지 날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 없어져 버렸고, 다만 옷과 버선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武人洪世熹者居于蓮花, 最與之昵. 四月從李鎰防倭, 行至鳥嶺, 見生.
見生芒屩曳杖 握手甚喜 曰 : “吾實非死也. 向海東覓一國土去矣.”
因曰 : “君今年不合死. 有兵禍, 向高林勿入水. 丁酉年, 愼毋南來, 或有公幹, 勿登山城.”
言訖, 如飛而行, 須臾失所在.
무인홍세희자거우련화방 최여지닐 사월종리일방왜 행지조령 견생
견생망교예장 악수심희 왈 오실비사야 향해동멱일국토거의
인왈 군금년불합사 유병화 향고림물입수 정유년 신무남래 혹유공간 물등산성
언흘 여비이행 수유실소재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는 연화방(蓮花坊)에 살았는데, 장생과 가장 친밀한 사이였다. 그해 사월에 장수 이일(李鎰)을 따라 왜적을 막으러, 조령(鳥嶺)에 이르렀다가, 장생을 만났다.
장생은 짚신에다 지팡이를 끌고 있었다. 손을 잡고 몹시 기뻐하자, 장생이 이르기를,
“나는 실은 죽은 게 아닐세. 바다 동쪽을 향하여, 나라 하나를 찾으러 가는 길이라네.”
계속하여 이르기를,
“그대는 올해에는 죽지 않을 것이로다. 병화(兵禍)가 일어나면, 높은 숲으로 들어가고, 물가로는 가지 말게나. 그리고 정유년(丁酉年)에는 결코 남쪽으로 오는 것을 삼가고, 혹 공무가 생겨서 오더라도 산성엔 오르지 말게.”
말을 끝내자 곧 나는 듯이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 후로는 장생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洪果於琴臺之戰, 憶此言, 奔上山得免.
丁酉七月, 以禁軍在直, 致有旨於梧里相, 都忘其戒
回至星州, 爲賊所迫. 聞黃石城有備, 疾馳入, 城陷倂命.
홍과어금대지전 억차언 분상산득면
정유칠월 이금군재직 치유지어오리상 도망기계
회지성주 위적소박 문황석성유비 질치입 성함병명
그 후 홍세희는 탄금대(彈琴臺) 싸움에서 이 말을 기억하고는, 산 위로 내달려 올라가 죽기를 면하였다.
정유년 칠월에 그는 마침 금군(禁軍)으로 입직(入直)하였다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정승 오리(梧里)에게 교지(敎旨)를 전달하러 갔다가, 일찍이 경계하였던 말을 모두 잊어 버렸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성주(星州)에 이르러서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황석성(黃石城)의 경비가 튼튼하다는 말을 듣고는 급히 그 성으로 들어갔는데, 성이 함락되어, 결국 함께 죽고 말았다.
余少曰狎游俠耶. 與之諧謔甚親, 悉覩其技.
噫, 其神矣. 卽古所謂劍仙者流耶.
여소왈압유협야 여지해학심친 실도기기
희 기신의 즉고소위검선자류야
내가 일찍이 젊었을 때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사귄 적이 있었다. 더불어 농담을 나눌 정도로 가까웠기에 장생의 잡기는 빠짐없이 다 구경할 수 있었다.
아아.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이를 두고 옛사람들이 말하는 검선(劒仙)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